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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장 천룡대협(天龍大俠) 1 연분(緣分) 무적검수맹의 후원에는 일반인들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요지가 몇 군데 있었다. 비단 일반인뿐만 아니라 무적검수맹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특수한 신분이 아니면 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취의청(聚意廳)도 그런 곳 중의 하나였다. 이곳은 무적검수맹의 수뇌인물들이 밀담을 나누는 장소이기 때문에 웬만한 신분의 인물은 접근조차 할 수가 없었다. 취의청은 크기가 이십여 장쯤 되는 널따란 대청이었는데 평상시는 주위에 삼엄한 경비가 처져 있어 사람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취의청에 지금 조촐한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상석(上席)에는 의당 앉아 있어야 할 무적검수맹의 맹주인 낙영신검 궁소천대신 한 명의 늙은 노승이 앉아 있었다. 노승의 주름지고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은 지그시 감겨 있었다. 노승은 바로 소림사의 최고어른인 백결대선사였다. 궁소천은 백결대선사의 우측에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는 수석집법인 철선새제갈 소동루와 철검백건대의 대장인 절정검 사공척, 소상검객 서문금룡 등이 있었고, 왼편으로는 몇 명의 여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개중에는 궁소천의 딸인 궁아영과 사공척의 동생인 사공릉, 그리고 사공척의 사문어른인 조추향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몇 명의 승인(僧人)들이 앉아 있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마치 석상처럼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네 명의 젊은 승려들이었다. 네 명의 승려들은 한눈에도 신태비범한 모습들이었다. 하나같이 두 눈에 신광(神光)이 잘 갈무리되어 있고 태도도 단정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이들은 소림사의 일대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대금강(四大金剛)이었다. 소림 사대금강의 명성은 대단해서 당금 무림의 최절정고수들에 못지 않았다. 그들은 소림의 일대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재질이 뛰어난 백 명 중에 다시 선발된 인물들로 비단 재질이 탁월할 뿐 아니라 소림에서 정혈(精血)을 다 바쳐 키워서 일신의 공력들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고개를 숙인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황의인이 있었다. 우연인지는 모르나 사대금강은 그 사람을 호위하듯 양쪽에 두 명씩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입고 있는 황의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하나 그를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감히 함부로 하기 어려운 위엄을 느낄 것이다. 그는 단순히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는데도 태산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무림의 최고배분인 백결대선사와 무적검수맹의 맹주인 궁소천의 앞임에도 거리낌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누구도 그를 버릇없다고 꾸짖지 않았다. 감히 꾸짖을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감히 천룡대협(天龍大俠)을 꾸짖을 수가 있단 말인가? 꾸짖는 것은 고사하고 그를 바라보는 중인들의 눈에서는 한 줄기 흠모의 빛마저 보이고 있었다. 최소한 그는 사소한 예절이나 형식에 구애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해치우고 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조금도 남을 업신여기거나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 남에게 무엇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윽박지르거나 욕을 하는 짓 따위는 더욱더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태어난 이래 단 한번도 남을 속여 본 일이 없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누구나가 따르고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젊은 층의 고수들에게 있어 그는 신화적인 존재였다. 그는 소림의 속가제자(俗家弟子) 출신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그들은 자신들을 소림외가(少林外家)라고 부르며 그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려고 몰려들었다. 소림사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의 존재는 가히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그는 거의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의 지시라면 소림사 전체 제자가 활활 타는 불 속으로 뛰어들 거라는 말도 들릴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부려먹은 적이 없었다. 단 한번도 남을 모욕하거나 해를 입힌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협(大俠)이었다. 누구도 이것을 부인하지는 못했다. 그는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의 대협이었다. 지금 그 천룡대협이 술을 마시는데 감히 그에게 무어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잔에 술이 비자 궁소천은 스스로 술병을 들고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한잔 받으시오." 천룡대협은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그는 결코 한 손으로 남이 따르는 술잔을 받은 적이 없었다. 상대가 누구이든 마찬가지였다. 강호의 높으신 어른이라 해도 두 손으로 받았고, 이름 없는 무명소졸이라 해도 반드시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았다. 이것은 결코 허례나 허식이 아니었다. 단지 그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교육받았으며 자신 또한 모든 사람은 신분고하에 관계없이 평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때때로 그에게 술을 따르는 사람은 황공하고 송구스런 마음을 느껴야 했다. 물론 궁소천은 황공하거나 송구스런 마음을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거칠고 투박할 것 같은 천룡대협이 술잔을 받는 태도만큼은 몹시 정중한 것을 알고 새삼 이 사람의 위명이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았을 뿐이다. 술은 금존청이었다. 술이 술잔 가득 따라지자 천룡대협은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 태도는 또한 몹시 남성적이었다. 궁소천은 이 사람을 보고 있을수록 그의 사내다움과 호탕한 기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점차 그 기질에 조금씩 매혹되어 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자의 기질은 정말 특이하군.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 하나하나가 사람을 이토록 끌어당기다니.......' 술잔이 비어지자 다시 한 사람이 술을 따랐다. 그 술을 따르는 손은 티 한 점 없이 깨끗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눈을 씻고 보아도 그 손에서 어떤 흠을 찾을 수는 없었다. 궁소천은 이렇듯 완벽한 손을 가진 사람은 천하에 오직 한 사람뿐임을 알고 있었다. 과연 천룡대협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있는 사람은 여인이었다. 조추향. 그녀는 술을 따르며 천룡대협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천룡대협 또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언뜻 그녀의 나른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천룡대협의 얼굴에도 엷은 미소가 피어 올랐다. 하나 그뿐이었다. 천룡대협은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고 그녀는 다시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깬 사람은 상석에 앉아 있던 백결대선사였다. 그는 나직하게 몇 번인가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옆에 있던 궁아영이 재빠르게 수건을 내밀었다. 백결대선사는 수건을 받아 들고 입가를 닦은 후 주름진 노안(老眼)으로 그녀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아가씨." 아가씨란 말에 궁아영은 배시시 웃음을 띠었다. 백결대선사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아가씨란 말이 우스운 모양이군. 하지만 노납(老納) 정도 나이를 먹게 되면 호칭이란 것이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곤 한다오. 노납은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여시주(女施主)들에게 아가씨란 말을 쓰려고 노력하지." 궁아영은 즉시 웃음을 거두고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소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백결대선사의 검버섯 가득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용서는 무슨......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이어 그의 심연(深淵)처럼 깊은 시선은 궁소천에게로 향했다. "궁맹주(宮盟主)는 어떻게 생각하오?" 백결대선사는 자신이 무엇을 물어 보는지 정확하게 지칭하지 않았다. 하나 궁소천은 노련한 인물답게 그가 물어 보는 뜻을 알아차렸다. "이번 무림대회 말입니까?" 백결대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번에는 실력 있는 인물들이 많이 참가했는데 그들 중 누가 제일 유력할 것 같소?" 궁소천은 나직이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예선에 참가한 고수들의 실력이 백중해서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우내십대기문병기 중의 두 사람인 구룡편 응천성과 무형륜 위불군의 무공이 돋보이는군요." 백결대선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소천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구환도 철독행의 무공 또한 소문보다 훨씬 고명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솜씨를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궁소천의 시선이 슬쩍 천룡대협을 향했다. "우내십대기문병기 중의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인물들이 참가한다면 천룡대협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백결대선사의 입에서 조용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한 사람의 이름을 빼먹은 것 같군." 궁소천의 눈빛이 번쩍거리며 빛났다. "누굴 말씀하시는지......?" 백결대선사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귀맹(貴盟)에도 무서운 고수가 있지 않소?" 궁소천의 시선이 백결대선사가 바라보는 곳을 향했다. 절정검 사공척의 준수하면서도 냉정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사공척의 얼굴은 조금의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아서 누구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백결대선사의 진물이 떨어지는 눈은 사공척의 무표정한 얼굴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 몰랐다. "저 자의 기상은 노납 평생 세 번째 보는 대단한 것이오. 저런 기상과 기도라면 충분히 천룡과 좋은 승부를 할 수 있을 거요." 그가 말하는 천룡이란 물론 천룡대협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 궁소천은 전혀 다른 것이 궁금했다. "대선사께서 보신 먼저의 두 분은 어느 분들이십니까?" 백결대선사의 음성은 깊은 동굴 속에서 흘러 나오는 듯 나직하면서도 기이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첫째는 당년의 화군악이오. 그의 기도는 노납 평생 처음 보는 것이었지." 잠시 백결대선사는 과거를 회상하듯 허공을 응시했다. "다른 한 분은?" 백결대선사의 고목같이 메마른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바로 천룡이오." 그 음성은 비록 나직했으나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과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궁소천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백결대선사가 말한 인물들은 모두 불가일세(不可一世)의 기재들이었다. 화군악은 말할 것도 없고 천룡대협과 절정검 사공척은 모두 한 시대에 두번 다시 보기 힘든 절세의 인물들이었다. 그런 인물들이 격돌하게 된다면 그것은 무림사에 길이 남을 일대장관이 될 것이다. 하나 그때 이제까지 말없이 앉아 있던 천룡대협이 불쑥 입을 열었다. "또 한 사람이 빠졌소." 궁소천은 흠칫 놀랐다. "그게 누구요?" 천룡대협의 음성은 사내답고 묵직했다. 그리고 아주 짤막했다. "조자건." 그 이름이 나오자 몇몇 사람의 얼굴에 제각기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어떤 사람은 놀랐고 어떤 사람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흥미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궁소천의 얼굴은 흥미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한번 손을 움직이면 반드시 풍운이 인다는 조자건 말이오?" 천룡대협은 과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를 빼놓지 않고서는 무림대회의 우승은 더 거론할 가치도 없소." 궁소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자의 무공은 과연 몇 군데 남들이 놀랄 만한 특색이 있소. 하지만 우승까지는......." 우승까지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천룡대협은 딱 부러지게 말했다. "그 자를 물리친 사람이 이번 대회의 우승자가 될 거요."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의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었다. 첫째는 말 그대로 그를 꺾어야만 우승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만약 아무도 그를 꺾지 못한다면 그가 바로 우승자가 될 거라는 것이었다. 강호에 고수들이 구름처럼 많고 특히 이번 대회에 참가한 고수들의 면면을 보건대 이건 너무 지나친 장담 같았다. 그러나 궁소천은 이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말을 한 사람이 천룡대협이기 때문이었다. 천룡대협이 말한 이상 이것은 조금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는 아직까지 단 한번도 허튼 소리를 내뱉은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궁소천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그는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물었다. "당신은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소?" 천룡대협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궁소천은 그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의혹이 짙어졌다. 다행히 그가 다시 묻기 전에 천룡대협의 입이 열리며 짤막한 음성이 들려 왔다. "나는 그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네 사람 중의 하나요." 밤이 깊어 갔다. 주위에는 이따금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만이 들려 올 뿐 고요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침상 위에 벌렁 누워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왔다. 그는 몸을 반쯤 일으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눈을 빛내며 그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그런 자세로 서로를 지켜본 채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그녀였다. 그녀는 손으로 귀밑머리를 쓸어 올리며 소곤거렸다. "미안해요. 나는 오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그가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두툼한 입술로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약간 몸을 뒤척거렸으나 반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손으로 그의 강인한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타액을 교환한 채 꿈꾸는 듯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떼자 그녀는 몇 번 기침을 했다. 그 바람에 그녀의 고운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너무 숨이 차서 눈물이 핑 돌았던 것이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떠올랐다. "당신이 나를 요녀(妖女)라고 손가락질해도 상관없어요. 아무튼 나는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참을 수가 없었어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당신도 그랬나요?"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말해 줘요....... 말해 줘요....... 당신도 나처럼 그렇게 떨렸어요?" 그는 그녀의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랬소. 나도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당신과 떨어질 수 없는 인연(因緣)임을 느꼈소." 그녀는 기쁨에 찬 환성을 질렀다. "당신도 그랬군요. 당신도 나처럼 그걸 느꼈군요." 이어 그녀는 자신의 도톰한 입술로 먼저 그의 입술을 빨았다. 입술뿐만 아니라 수염이 가득 덮인 그의 뺨과 코를 입술로 빨고 핥았다. 그도 또한 적극적으로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미친 듯이 서로의 몸을 탐닉했다. 그녀는 그의 손이 자신의 몸을 더듬을 때마다 환희에 찬 신음을 토해 냈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몰랐어요....... 몰랐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을 줄은....... 왜 우리는 이제야 만난 거죠?"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를 찾아 쓸데없는 곳만 돌아다녔던 거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만났으니 아직 늦은 것은 아니오." 그는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들고 침상으로 향했다. 그녀는 마치 철부지 소녀처럼 들뜨고 흥분된 얼굴로 가만히 안겨 있었다. 하나 그의 손이 그녀의 옷을 찢을 듯이 벗겨 내고 그의 뜨거운 입술이 자신의 목덜미에 닿았을 때 그녀는 가만히 그를 밀어내고 속삭였다. "난...... 당신이 첫 남자(男子)가 아니에요." 그녀의 음성에는 두려운 빛이 담겨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런 건 개의치 않소. 단지 당신이 나를 원하고 내가 당신을 원하면 난 그것으로 만족하오." 그녀의 눈에 기쁨에 찬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속삭였다. "난 원해요....... 난 당신을 원해요." "그럼 됐소." 그는 자신의 옷을 벗으며 그녀의 매끄러운 알몸을 안았다. 그의 뜨겁게 흥분된 몸의 일부분이 그녀 속으로 들어오기 직전 그녀는 그의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그런데 난 아직 당신의 이름도 몰라요....... 당신의 이름은 뭐죠......?" 사내의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귓전에 퍼부어졌다. "번우량(飜宇亮)!" 동시에 사내의 몸은 힘차게 그녀 속으로 밀려들어갔다. 2 중독(中毒) 조자건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주위는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가끔씩 울어대던 풀벌레도 지쳤는지 울지 않았고 사방은 어두운 적막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조자건은 왠지 잠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창문 너머 하늘에는 일점 편월(片月)이 걸려 있었다. 그는 그 조각달을 쳐다보며 몇 번이나 뒤척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갑자기 그의 방문이 빠끔히 열렸다. 그와 함께 한 명의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여인이라기 보다는 소녀(少女)에 가까운 나이의 여자였다. 그녀를 보자 조자건은 눈을 크게 떴다. "너는 봉아(鳳兒)가 아니냐?" 소녀는 그를 보자 방긋 웃었다. 그 미소는 조자건에게는 아주 낯익고 친근한 것이었다. "그래요, 오빠. 저 봉아예요." 소녀는 진표의 막냇동생인 진봉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진봉은 조자건을 제일 많이 따랐었다. 일전에 조자건은 진표의 집에 갔다가 그녀를 만나지 못해 아쉬웠는데 오늘 그녀가 이곳에 불쑥 나타나니 반갑기 이전에 의아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네가 이곳엔 웬 일이냐?" 진봉은 예쁜 미소를 지었다. "큰오빠를 따라 왔어요." "진표를? 그도 이곳에 왔느냐?" 조자건이 반색을 하자 그녀는 귀여운 머리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요 앞에 와 계셔요. 조금 후면 이리로 올 거예요." 진표가 왔다는 말에 조자건은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진표는 조자건에게 있어 둘도 없는 친구였다. 진표의 강퍅한 얼굴을 떠올리자 조자건은 마음 한 구석이 훈훈해졌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 진봉을 바라보았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진봉은 무척 어른스러워진 것 같았다. 과거의 귀엽고 예쁜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천진난만하던 모습은 많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성숙한 여인의 냄새가 났다. 조자건은 그것이 조금 아쉬웠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소녀는 여인으로 소년은 사나이로 성장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그는 진봉만큼은 어렸을 때의 천진함이 살아 있는 소녀의 모습 그대로이기를 바랬다. 그것은 너무 그만의 욕심이었을까? 조자건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진봉은 눈썹을 내리깔며 얼굴을 사르르 붉혔다. 남자라면 가슴을 두근거릴 만한 요염한 모습이었으나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최소한 조자건이 보기엔 그랬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손뼉을 탁 쳤다. "어머 내 정신좀 봐....... 밖에 술상을 봐 놨는데......."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자 조자건은 문득 옛 시절이 생각이 났다. 진표와 조자건은 어렸을 적부터 술을 좋아했다. 두 사람은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항상 술을 마셨는데 그 술상은 주로 진결이 차렸다. 두 사람이 술을 마실 때마다 진봉은 꼭 따라와서 그들이 술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그리고 잔이 비었으면 잽싸게 달려와서 술을 따랐다. 언젠가 한번 그녀는 그 술을 몰래 맛보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마구 뱉어서 두 사람을 웃긴 적이 있었다. "오빠들은 참 이상해. 이렇게 쓴 걸 뭐가 좋다고 매일 먹는 거지?" 그때 그녀가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물어 보자 조자건은 그녀의 귀여운 머리통을 톡톡 치며 말했었다. "너도 크면 알게 된다. 그때는 먹지 말라고 해도 너는 기를 쓰고 이걸 먹으려고 할 것이다." 그녀는 토끼 같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 내가 그걸 먹어?" 조자건은 낄낄거렸다. "너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텐데 네 남편은 틀림없이 술을 좋아하는 술고래일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와 같이 술을 마셔 주지 않는다면 그는 밖에 나가 다른 여자들과 마실 텐데 그래도 네가 술을 먹지 않겠단 말이냐?" 그제서야 진봉은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을 깨닫고 입이 뾰로통해서 소리쳤다. "싫어......, 난 시집 안 갈래." 옆에 있던 진표가 일부러 퉁명스런 어조로 내뱉었다. "나도 네가 시집 안 가고 평생 내 곁에서 술상이나 봐주면 좋겠다. 하지만 가지 말라고 해도 때가 되면 네가 먼저 나서서 설칠 테니 두고 봐라." 그녀는 혀를 날름거리며 쪼르르 달려나갔다. "싫어......, 난 죽어도 시집 안 가!" 두 사람은 그녀의 뒷 모습을 보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 시절을 생각하자 조자건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마침 진봉이 술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술상 위에는 금방 요리한 듯한 소전(燒煎)과 잉어탕, 버섯무침, 그리고 죽엽청(竹葉淸)이 놓여 있었다. 모두 과거 그와 진표가 즐겨 먹던 술과 안주였다 . 진봉은 술병을 들고 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오빠. 제가 한잔 따라 드리겠어요." 조자건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술상 앞에 앉았다. 그녀는 잔이 넘치도록 가득 술을 따랐다. 조자건은 그것을 보고 껄껄 웃었다. "하하...... 너는 아직도 술을 따르는 게 서툴구나." 예전에도 그녀는 술을 따라 준다며 그들 무릎에 술을 쏟기 일쑤였다. 진봉은 얼굴을 붉히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조자건은 그 모습에서 성숙한 여인의 느낌을 받았다. '이 아이도 이제 다 컸구나.......' 그는 새삼 많은 세월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사 년이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 시간이면 무명의 청년을 강호의 절정고수로 만들 수도 있고 소녀를 여인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조자건은 잠시 회상에 잠겨 있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도 한잔 하지 않겠느냐?" 진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 술을 못해요." 조자건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하하...... 그랬다가 술고래인 남편을 얻으면 어쩌려고 하느냐?" 그는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술잔을 들이켰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단지 얼굴 한 구석에 어두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다. 그가 술잔을 내려놓자 그녀는 다시 술을 따랐다. 이번에는 넘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따랐다. 조자건은 잠시 몇 잔을 거푸 들이켰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큰오빠는 어딜 갔느냐?" 진봉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건을 살 게 있다고 금방 다녀온다고 했는데....... 제가 나가서 찾아보고 올게요." 그녀는 그가 말릴 사이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아니다. 그냥 둬라. 진표도 어린아이가 아닌 이상 잘 찾아오겠지." 조자건이 말렸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방문쪽으로 갔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그녀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그날 밤 오지 않았다. 조자건은 새벽 동이 환히 틀 때까지 그녀를 기다렸으나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진표 또한 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조자건은 자신이 중독(中毒)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뭐라고 했소? 공력(功力)을 일으킬 수 없다고 했소?" 사마결은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로 물었다. 조자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조자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이제 조금 후면 결선 일차전을 치러야 하는데 공력을 일으킬 수 없다니......." 조자건은 담담하게 어제의 일을 이야기했다. 사마결은 그 말을 듣자마자 벼락같이 일어나 술상 앞으로 다가갔다. 이어 그는 술병과 안주를 하나하나 신중한 동작으로 냄새 맡기 시작했다. 그는 곧 술병을 집어들고 조자건을 돌아보았다. "이곳에 독이 들어 있었소." 조자건은 이미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러리라고 생각했소. 무슨 독이오?" 사마결의 얼굴에는 낭패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게 참 공교롭게 되었소. 나는 원래 독(毒)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어서 웬만한 독쯤은 능히 해독(解毒)시킬 수가 있는데 이건......." "독성(毒性)이 강한 것이오?" 사마결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공력을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소." 이어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계속했다. "이것의 이름은 군자산(君子散)이라고 하오. 마치 군자처럼 사람에게 별다른 해를 입히지 않고 그 효과도 부드럽기 때문이오. 하지만 이 군자산을 마시면 열두 시진 동안은 공력을 일으킬 수가 없소. 이것은 엄밀히 독이라기 보다는 마취제에 가까워 아무리 용독(用毒)의 대가(大家)라도 해독시킬 수가 없는 것이오." 돌연 사마결은 성난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는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의 동생이라면서 왜 당신에게 이런 짓을 한 것이오?" 조자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눈빛만이 어둡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사마결은 무어라고 더 말하려다가 그의 안색이 무거운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그는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할 수 없소. 안타깝지만 기권을 합시다. 그러는 수밖에 없소." 이것이 무림대회가 아닌 여느 비무장 같았으면 아마 사마결은 팽립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비무 일을 하루 연기했을 것이다. 하나 이번 무림대회는 여느 대회와는 달랐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대회 진행을 늦추거나 조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마결은 이것은 너무나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조자건은 충분히 우승을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설사 우승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지금처럼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물러선다는 것이 너무나 억울했다. 그때 조자건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계속 대회에 참가할 거요." 사마결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여 멀거니 그를 쳐다보았다. 조자건의 표정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어 그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는 없었다. 하나 그의 음성만은 사마결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조금 후에 팽립과 싸울 것이오." 사마결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쳤소? 공력을 일으키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팽립과 싸운다는 거요? 팽립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인 것 같소?" 사마결은 조자건이 무어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계속 소리쳤다. "팽립은 하북 팽가에서 이번 대회를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시켜 온 인물이오. 그는 비단 하북 팽가의 제일고수일 뿐만 아니라 강북에서 제일 가는 도객(刀客)이란 말이오. 당신은 그의 일 도(一刀)도 받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 거요." 사마결도 자신이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는 사실 조자건과 그렇게 흉금을 터놓고 지내는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만난 지도 겨우 한두 달에 불과했고 아직 그의 정확한 사문내력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조자건을 좋아했다. 비록 사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는 조자건의 성격이나 태도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 일처럼 흥분하는 것이다. 조자건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 그는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생전 언어로써 다른 사람에게 우정을 표시해 보지 않았다. 그는 사마결을 돌아보며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되오. 나는 자살하려는 게 아니니까." 사마결은 귀가 솔깃하여 급히 물었다. "그럼 무슨 뾰쪽한 수라도 있단 말이오?" 조자건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공력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도 내 몸은 원래부터 튼튼하니 초식을 펼쳐 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거요. 그러니 내게도 아주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오." 사마결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럼 정말 그런 몸으로 팽립의 칼맛을 보겠다는 거요? " "나는 일전에도 무공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고수와 겨룬 적이 있소. 승부란 반드시 공력의 우월만으로 판가름나는 것은 아니오. 내게 체력이 있고 기운이 남아 있는 한 미리부터 겁을 먹고 상대를 피할 필요는 없소." 사마결은 무어라고 더 말하려고 했으나 조자건의 얼굴 표정을 한번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굳게 다물어진 입술과 각진 턱만 보아도 그의 고집을 절대로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다만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조자건의 고집이 제아무리 세고 체력이 튼튼하다고 해도 공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건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할 뿐이었다. 초식의 변화만으로 절정고수를 상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더군다나 열여덟 군데의 허점이 있는 상태로는 상대를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팽립의 오호단문도는 결코 그 허점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
첫댓글 ㅈㄷ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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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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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글구 잘 봅니다~~~~
잘읽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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