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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ESUSONE 원문보기 글쓴이: 제이원
시편 39:1~13 아담은 아벨이다 2021. 2. 17
1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2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3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7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8 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9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10 주의 징벌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11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12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13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표제어가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 형식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여두둔은 다윗 왕 때 찬양 인도를 맡은 사람입니다. 역대상 16:41~42절과 25:1~6절을 보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이 악기로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합니다. 신령한 노래란 히브리어로 예언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선견자라고도 합니다(대상25:5). 그러므로 이들의 노래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냅니다. 역대상 25장에서 다윗이 찬양대를 조직하는데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이 왕의 지휘 아래 찬양대를 이끌어갑니다. 찬양대는 288명인데 24반으로 나누어 각 반에 12명씩 배당하여 찬양하게 합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내가 말하기를’이라고 시작합니다. 이것은 독백(獨白)과 같습니다. 그 내용은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 하지 않겠다고 한 겁니다. 그 이유는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 내 입에 재갈을 먹이는 겁니다. 악인이 하는 말에 동조하지 않는 겁니다. 악인이 악한 말을 하는 것을 바로 잡아주기 위한 선한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하면 오히려 공격하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랬더니 내 근심이 더 심하여지며 내 속이 뜨거워져 결국 주님께 아룁니다.
여기서 악인은 누구이겠습니까? 여호와의 징계를 받지 않는 자들입니다. 지금 다윗은 여호와의 징계로 인하여 영육 간에 심각한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 합니다. 표준 새 번역입니다. “숨 한 번 돌릴 수 있도록,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내게서 눈길 한 번만 돌려주십시오.” 나에게서 눈길을 돌려달라는 말은 진노의 눈길을 돌려주셔서 죽기 전에 잠시라도 쉼을 얻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욥기 7:11~16절입니다. “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12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13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욥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13절도 욥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아룁니다.
본문 4~5절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당한 심각한 고난을 견딜 힘이 없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영원하신 주님 앞에서 인생이란 한 뼘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 허사뿐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보면 ‘사람’이 ‘아담’이며 ‘허사’가 ‘헤벨’ 곧 ‘아벨’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아담’이 ‘모든 아벨’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든든히 서 있다고 하여도 모두 허사라는 겁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아담은 아벨이다’입니다. 히브리어로 ‘콜-아담’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모든 사람’으로 번역하였고, ‘콜-헤벨’을 ‘모두 허사’로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만드실 때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생기(生氣)는 ‘루아흐’가 아니라 ‘하이 네페쉬’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기운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갈망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살아야 할 인생이 하나님처럼 되어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 살라는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이후로 인생은 흙을 경작하여 흙에서 나온 것을 먹고 사는 수고를 해야 하며 그 수고를 다 한 후에 흙으로 돌아가야 할 허무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생명의 약속을 주십니다.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여인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을 이루시는 일에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이 동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아벨은 허무한 죽음을 죽습니다. 그래서 아벨의 이름이 오늘 본문의 허사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가인은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들고 문명을 건설하며 삽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으로 첫 번째 언급되는 사람이 아벨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성경에서 허무한 것, 헛된 것, 무익한 사람, 기운, 안개로 사용됩니다. 지금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은 자로 고난을 겪고 있는데 악인들은 허무하게 보이는 다윗을 조롱합니다. 그런 악인들 앞에서 선한 것을 말하려고 해도 통하지 않으니 입을 닫고 있는데 속에서 불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아뢰기를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든든히 서 있다고 하여도 모두 허사뿐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든든히 서 있다고 하는 것이 모두 허사임을 아는 것이 믿음의 눈을 뜬 겁니다. 모든 아담이 모든 아벨임을 아는 것이 믿음의 길인데 우리는 자신을 든든히 세우려고 합니다.
본문 5~6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5 주께서 나에게 한 뼘 길이밖에 안 되는 날을 주셨으니, 내 일생이 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진실로 모든 것은 헛되고, 살아 있는 사람일지라도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으니, (셀라) 6 걸어 다닌다고는 하지만, 그 한평생이 실로 한오라기 그림자일 뿐, 재산을 늘리는 일조차도 다 허사이니, 장차 그것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소란한 일들은 재물을 쌓기 위한 소란함입니다. 재물을 쌓으려고 바쁘게 다니지만 그런 모습이 마치 그림자가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자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입니다.
시편 90:9~12절입니다. “3 주께서 사람을 1)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알게 하여 달라는 간구나 모세의 이 시편이 같은 뜻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연약하고 허사뿐임을 안다면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시편 90:1~2절입니다.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든든히 섰다고 하는 인생이 참으로 허사임을 아는 자들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되는 주님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반드시 세상에 대한 허무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아벨의 이름이 허무라는 뜻입니다. 아벨이 얼마나 허무하게 죽습니까? 성벽을 만들고 무기를 만들고 문화를 발달시키는 사람이 가인입니다. 이런 가인의 시각으로 보면 아벨은 허무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출발이란 인생의 든든함이 실로 허사임을 아는 자리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12:13~21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유산 문제를 해결하여 달라고 예수님께 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그런 일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시면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한 부자가 밭의 소출이 많아서 창고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더 큰 창고를 만들어 가득 쌓아놓고서는 자기 영혼에 말하기를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든든히 세우려고 노력하며 성취하였다고 하는 그 순간도 허사입니다. 다윗도 언제 자신이 든든히 세워졌다고 생각하였을까요? 사울 왕이 죽고 유다만이 아니라 다른 지파까지 다스릴 때 다윗은 든든하였을 겁니다. 사방의 적들도 많이 물리치고 왕이 직접 전쟁에 나가지 않고 장군들이 나가서 싸워도 이기는 그런 든든한 때에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을 합니다(삼하11장). 자신의 든든함을 숫자로 확인하려고 인구조사 하다가 무려 7만 명이 염병으로 죽습니다(삼하24장, 대상21장). 다윗이 든든히 섰다고 생각하는 그 든든함이 얼마나 허사인지 하나님의 징계를 통하여 처절하게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약함과 허무함을 알게 되는 일이 주님께 소망을 두는 출발이 됩니다.
본문 7절입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우리의 인생이 어떠함을 지금까지의 말씀을 제대로 마음에 받아들여졌다면 당연히 나오는 질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세상의 사람들이 오늘도 소란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헛된 일에 바쁩니다. 가옥에 가옥을 더하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홀로 살아남으려고 하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사5:8). 그런데도 그 헛된 것들을 바탕으로 나는 든든하게 섰다고 하는 그 든든함이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비가 오고 홍수가 들이차면 다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런 것이 헛됨을 알게 하셔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인생의 주초를 놓게 하십니다.
본문 8~10절입니다. 나의 소망이 주께 있다고 하고 나서 무엇을 기도합니까? 나를 모든 죄에서 건져달라고 합니다. 죄란 주님을 믿지 않고 다른 것을 믿는 것이 죄가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두 가지 악을 책망합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며 다른 하나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웅덩이는 물을 가두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입니다(렘2:13). 그러므로 모든 죄에서 건져달라고 하는 간구는 어리석은 자들에게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믿음의 사람들이 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입을 열지 않음은 이것을 주께서 행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시 주의 징벌을 옮겨달라고 합니다. 자기가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 그 영화를 좀 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시고 징계를 하시는 자는 누구입니까? 징계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입니다. 그 징계란 인생의 영화가 쓸모없음을 알게 하시는 징계입니다. 앞에서 본 대로 세상에서 든든히 섰다고 할 그때도 허사임을 알게 하시는 징계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든든히 섰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의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 영화를 좀 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셔서 인생이 모두 헛될 뿐임을 알게 하심이 징계입니다. 좀이 먹는 옷은 무명천으로 만든 옷입니다. 이런 옷에 좀이 먹어버리면 옷의 형태는 있는데 만지는 순간 재처럼 부수어집니다. 인생의 영화를 무너져 좀 먹게 하는 징계를 통하여 영원을 바라보게 합니다. 여기서도 인생이 ‘아담’이며 헛됨이 ‘아벨’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 징계를 받습니다.
히브리서 12:5~8절입니다.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ㄱ)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이유는 헛된 것을 의지하지 말고 영원한 주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본문 12~13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12 주님, 내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내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내 눈물을 보시고, 잠잠히 계시지 말아 주십시오. 나 또한 조상처럼 떠돌면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13 숨 한 번 돌릴 수 있도록,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내게서 눈길 한 번만 돌려주십시오.” 고난 중에 자신들이 조상들처럼 나그네임을 알게 됩니다. 이 땅에 든든히 거하려고 하는 것이 우상숭배의 길이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주시고 징계하십니다. 이 땅에 든든히 서려고 하지 말고 영원한 나라에 소망을 두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징계가 죽을 만큼 힘들기에 죽기 전에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주셔서 눈길 한번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누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었습니까? 등 따습고 배부른 종교지도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와 결탁한 정치 세력들이 예수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자들에 의하여 죄인이라고 정죄당하고 핍박받는 자들이 주님을 부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든든히 섰다고 하는 것들이 허사임을 알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은 오늘도 자기 백성들에게 인생의 영광이 헛됨을 알게 하십니다. 그것이 신실하게 징계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런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영광이 무너질 때 원망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1:23~25절입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ㄴ)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 사도가 이사야 40:6~7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인생이 풀과 같습니다. 이런 인생이 든든하다고 세운 영광이 풀의 꽃과 같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그 영원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이 복음 위에 세워지는 자가 복된 죽음을 죽는 겁니다. 월요일 문상에서도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헛된 것을 든든히 여기지 말고 만세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의 인생이 세워지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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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ESUSONE 원문보기 글쓴이: 제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