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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효사 원문보기 글쓴이: 원효
원허스님 (1889~ 1966)
“공부하는 스님 제대로 외호해야”▶사진설명: 생전의 원허스님.
남북이 분단되기 이전에 수좌들은 여름에는 묘향산이나 금강산, 겨울에는 팔공산이나 지리산으로 모여 들었다. 안거철을 맞아 방부 드릴 시기가 되면 걸망 하나 메고 산과 들을 벗 삼아 만행을 즐기며 선방을 찾았다.
더운 여름철에는 시원한 북쪽에서, 추운 겨울철에는 따뜻한 남쪽에서 좌북 하나 깔고 생사를 찾았던 자유인이 수좌들이었다. 수좌들의 숫자가 불과 500명이 채 되지 않았던 일제 강점기, 스님들이 머물 도량이 마땅치 않았다. 대부분 절을 결혼한 대처승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때문에 수좌들이 마음 놓고 정진할 도량은 손꼽을 정도로 적었다.
이때 금강산 표훈사 주지 소임을 보고 있던 원허(圓虛, 1889~ 1962)스님은 “공부하려는 스님들을 제대로 외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분명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표훈사는 유점사, 장안사, 신계사와 더불어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로, 남북을 오가는 스님과 불자들이 반드시 참배하는 도량이었다. 근현대 한국고승으로 추앙받는 많은 스님들이 주석했던 금강산 마하연이 산내암자였던 까닭에 원허스님을 비롯하 표훈사 대중들은 수좌들의 뒷바라지에 많은 신경을 썼다. 때문에 표훈사는 1년 내내 ‘손님맞이’를 하는 일이 녹녹치 않았다고 한다. 넉넉지 않은 절 살림에 빠듯하게 생활해야 했지만 원허스님은 대중을 맞이하는데 소홀함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 표훈사 주지소임
빠듯한 살림…대중맞이 힘써
마하연에서 한철 정진을 잘 마치고 나면 수좌들은 다시 삼의일발을 걸망에 넣고 큰절 표훈사로 원허스님을 찾아왔다.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스님, 염려 덕분에 공부 잘했습니다.” “아이고, 그동안 공부하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원허스님은 일제 강점기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정진하는 수좌들이 고맙기만 했다. 남쪽으로 떠나는 스님들에게 원허스님은 여비를 손에 쥐어 주었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몇날 몇일을 험한길 마다 않고 가야했던 수좌들에게는 큰힘이 되었다. 이때의 인연은 뒷날 남북이 나누어진 후 단신으로 남쪽으로 내려 온 원허스님이 외롭지 않게 정진하는 원인이 되었다.
원허스님은 1889년 10월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방축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스님은 1909년 금강산 표훈사에서 전관허(全貫虛)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때 나이 20살. 스님은 1951년 남쪽으로 피난올 때까지 40여년 동안 표훈사에서 일관되게 정진했다. 은사스님인 관허스님의 행장이 구체적으로 전해오는 바는 없지만, 1936년 40대 중반의 원허스님에게 주지소임을 넘긴 것을 보면 상좌 가운데 신뢰를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허스님은 3년간의 행자생활을 마치고, 1912년 2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하며 수행자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주로 참선 공부에 매진했던 스님은 교학(敎學) 공부를 위해 함경남도 석왕사 불교전문강원에서 경학을 연찬했다. 졸업한 해는 1935년 10월이고, 이듬해 금강산 표훈사 주지로 취임했다.
“삼보정재를 부처님 모시듯 대하라”▶사진설명: 통합종단 제1회 중앙종회에 참석했던 스님들의 친필 서명. 전강, 금담, 남훈, 원허, 운문, 환봉, 정영, 관응, 지월, 행원스님(왼쪽부터).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불교계에서는 시권(施勸) 있는 두 스님으로 원허(圓虛, 1889~1962)스님과 대륜(大輪, 1882~1980)스님을 꼽았다. 시권은 불자들을 불사에 동참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나타내는 절집 용어이다. 원허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금강산 표훈사에는 경성에서 재력 있는 많은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경성역을 출발한 기차를 타고 금강산까지 와서 불공을 올리고, 시주금을 내놓는 권세가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원허스님에게 시권이 있었던 까닭은 은사 관허(貫虛)스님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관허스님은 조선이 망한 후 궁궐 밖으로 물러나 있던 상궁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데 소홀함이 없었다. 비록 나라는 망했지만, 상궁들은 신심이 돈독했던 불자들이었다. 한때 출가하여 원허스님을 시봉했던 최준섭 부총재(한국불교법사총연합회)는 1954년 정화불사를 전후해 은사스님을 모시고 만났던 서울 가회동의 상궁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원허스님은 정화불사 당시 효봉 전강, 동산, 청담스님 등과 함께 비구측 5인 대표였다. “은사스님께서 정화불사에 앞장섰다는 말씀을 들은 ‘상궁보살’들이 교단 일에 많은 관심과 지원을 보였습니다.” 전쟁 직후의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원허스님에게 극진한 예우를 했다고 한다.
그때 70~80의 나이 든 상궁들은 원허스님에게 깍듯하게 3배의 예를 올리며 “우리는 큰스님 가르침을 잘 모시겠다”면서 노스님인 관허스님과의 인연을 말하기도 했다. 그들에 따르면 관허스님은 조선 왕조가 문을 닫기 이전에도 궁궐에서 법문을 통해 기울어져 가는 사직(社稷)을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상궁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시주권유 출중…표훈사에 보시답지
꼭 필요한 곳에는 아낌없이 베풀어
이런 저런 인연으로 스님이 머물고 있던 표훈사에는 경성에서 많은 사람들이 왔다. 이렇게 모인 정재(淨財)들을 원허스님은 절대 헤프게 쓰지 않았다. 수좌들이 오면 수좌들에게, 어려운 마을사람이 오면 아낌없이 베풀었다.
뒷날 남쪽으로 내려온 후 인환(印幻)스님과 최준섭 부총재 등 상좌들에게 “재물을 탐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던 것도 재물을 대했던 스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옛날부터 스님들이 재물을 많이 탐해서 죽은 뒤에는 능구렁이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삼보정재를 부처님 대하듯 소중하게 생각하고, 재물이 꼭 필요한 대중들에게는 머뭇거림 없이 베풀도록 하라.”
원허스님이 머물렀던 표훈사는 스님들이 공부하기 아주 좋은 도량이다. 한국전쟁의 난리 통에도 금강산 절 가운데 유일하게 모진 폭격을 피하고,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육당 최남선이 “옛 스님 네들은 법안(法眼)뿐 아니라 산수안(山水眼)도 갸륵하심을 알겠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만큼 경치가 뛰어난 사찰이다. 1909년 원허스님이 출가할 당시 만해 스님이 강사소임을 보고 있었다. 원허스님 보다 열 살 위인 만해스님은 행자였던 원허스님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매사에 빙그레…관음보살의 화신”▶사진설명: 조선 후기 화가 최북이 그린 금강산 표훈사 전경.
원허(圓虛, 1889~1962)스님은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묵묵부답. 미소로 일관했다. 화를 낼만한 일이 생겨도 말을 아꼈다. 상좌들을 지도할 때는 ‘따끔한 경책’을 하기도 했지만, 드문 일 이었다. 때문에 주변에서는 “원허 스님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화신(化身)”이라는 이야기가 자주 들렸다.
금강산 표훈사 주지 소임을 보고 있을 무렵 스님은 여러명의 상좌를 두고 정진에 전념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북쪽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수행에 매진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설상가상 한국전쟁까지 터져 더 이상 표훈사에 머물수 없었다. 출가도량인 표훈사에 더 머물러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던 스님은 결국 남쪽으로 가기로 마음을 잡았다. 방법을 고심하던 스님은 당신을 은사처럼 따르던 법홍(法弘, 1914~2003)스님과 함께 걸망을 꾸렸다. 원허스님은 만감이 교차했다. “이보게, 법홍 수좌 오늘 큰절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구만. 큰절이 병화(兵禍)를 겪지 말아야 하는데….” 상심(傷心)한 스님의 얼굴을 처음보는 법홍스님도 마음이 저려왔다. 법홍스님은 “주지스님, 남쪽에서 지내시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오시면 됩니다.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요”라고 위로했다.
한국전쟁때 피난, 선암사에 방부
비좁은 선방…운집한 대중 격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휴전선이 가로막아, 두 스님은 표훈사로 돌아오지 못했다. 다행히 표훈사는 한국전쟁 당시 화마(火魔)는 피했다. 인환(印幻, 동국대 명예교수)스님의 말이다. “남쪽으로 내려올 때 은사스님은 상좌스님의 안내로 금강산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북에서 출가한 상좌들은 한명도 내려오지 않았다고 해요. 그후로는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남으로 남으로 무작정 걸으셨답니다.”
원허스님을 모시고 남으로 온 법홍스님의 고생 또한 적지 않았다. 당시 우리나이로 60세를 넘긴 원허스님을 시봉하면서 험한 길을 헤쳐왔기 때문이다. 이때의 인연으로 원허스님은 법홍스님을 상좌처럼 여겼고, 법홍스님 또한 원허스님을 은사로 모셨다. 인환스님은 “법홍스님은 우리 스님의 참회상좌(懺悔上佐)나 마찬가지”라면서 “우리스님을 정말 깍듯하게 모셨다”고 회고했다.
표훈사를 떠난 스님은 부산으로 왔다. 범어사에 방부를 들였다는 소식을 들은 수좌들이 앞다투어 찾아들었다. 일제 강점기때 표훈사 마하연 선방에서 공부할 때부터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는 난리를 피해 온 스님들이 많았다. 범어사 대중방이 비좁아, 선암사에도 방부를 들여야 했다. 이때 선암사에는 서옹스님, 지월스님, 무불스님, 홍경스님, 석암스님, 월산스님, 성철스님, 향곡스님, 운문스님, 대륜스님 등이 있었다. 어려움도 많았다. 선암사 대중방은 10명만 앉아도 비좁았다.
그런데 운집한 대중은 40여명. 반듯이 눕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비스듬히 ‘칼잠’을 자야했다. 이 모습을 본 원허스님은 “오히려 공부하기에 좋습니다”라며 수좌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누워 자지 않고 수행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저절로’하게 되었으니 공부하는 스님들에게 이 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는 의미이다. 스님의 말뜻을 알아챈 대중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박장대소했다고 한다. 전쟁의 상처를 잠시 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북에 남은 상좌들 어찌됐는지…” ▶사진설명: 원허스님이 주석했던 부산 선암사 전경.
1952년 출가재일. 부산 선암사 대웅전에 스님과 불자들이 운집했다. 1년간 스님이 되는 ‘교육’을 받았던 행자들이 계를 받는 날. 법명을 받고, 은사도 ‘확정’해야 하는 날이다. 채씨 성을 지닌 남행자도 발우와 장삼을 갖추고 법상(法床)앞에 다른 도반들과 함께 섰다. 계사인 석암스님이 물었다. “너는 스승이 누구냐” “…” “너는 법명이 무엇이냐” “…” 스승이 없으니, 법명이 있을 리 없었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몸을 의탁했던 채 행자는 한 재가불자의 소개로 선암사로 출가했다. 벌써 1년 전 일이다. 고된 행자생활을 했지만, 은사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함께 정진했던 행자는 채 행자까지 포함해 모두 5명. 고(故) 김지견 박사도 함께 선암사에서 행자로 있었다. 석암스님 앞에 선 채 행자의 귀에는 출가하는 날 “니 뭐할라꼬 중놀이 할라카노”라는 향곡스님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뒷날 채 행자는 “비록 전쟁통이었지만, 부산 선암사에 주석하고 계셨던 많은 큰스님들 덕분에 공부를 잘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피난 시절 상좌없이 수행정진
1952년 인환스님 상좌로 들여
은사를 정하지 못한 행자의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석암스님은 그 자리에서 법명을 지어 주었다. “너는 오늘부터 인환(印幻)이다. 도장인, 꼭두각시 환이다.”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석암스님의 깊은 뜻이 있는 듯 하여 마음을 다시 잡았다고 한다. 뒷날 석암스님은 인환스님의 법명이 지닌 뜻을 이렇게 설명했다. “중노릇 잘 할려면 이 세상이 참으로 무상한 줄 확실하게 느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발심이고 중노릇 잘하는 것이다. 무상한 줄을 의심없이 바로 알게 될 때 변함없이 중노릇을 잘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원허(圓虛, 1889 ~1962)스님은 부산 선암사, 합천 해인사, 선산 도리사에 머물며 수행정진했다. 이때 스님의 세수는 60대 초반. 동국대 교수를 역임한 인환스님을 상좌로 맞아들인 것도 1952년 무렵의 일이다.
인환스님은 비록 계는 받았지만 공양간에서 채공(菜供) 소임을 보고 있었다. 수계 받은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수좌들이 참선하고 있던 큰방에서 전갈이 왔다. “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들어오너라” 부리나케 달려갔다. 방안에는 석암스님과 한 노스님이 앉아있었다. 뒤에 알고 보니 동안거 결제를 범어사에서 입승을 보고난 원허스님이 선암사를 들린 것이다.
“노장님, 상좌가 있습니까.” “이북 표훈사에 있을 때는 여럿이 있었는데, 전쟁이 나서 38선을 넘어와 어찌 됐는지 모르지요. 남은 상좌들은 아마 빨갱이가 됐을 겁니다.” “스님, 그러면 시봉 하나 들이시죠.” 무릎 꿇고 앉아 두 스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인환스님은 너무 긴장하여 진땀이 등을 타고 흘러 내렸다.
원허스님은 석암스님의 말이 끝나자, 지체없이 답했다. “석암스님이 권하시면, 하시라는 대로 하지요.” 석암스님은 인환스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어른께 3배를 올려라. 이 어른이 네 은사스님이시다.” 그렇게 인환스님은 원허스님의 상좌가 됐다.
음식 가리는 상좌에 “좀스러운 짓”
1960년대 초반 어느 여름, 서울 종로의 허름한 냉면집. 느린 걸음의 노스님과 걸망을 멘 젊은 스님이 들어섰다. 흔치 않은 풍경이다. 공양시간이 되어 갈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들어온 냉면집이었다. 식탁을 마주하고 앉은 스님들은 적조암 주지 원허(圓虛, 1889~1966)스님과 적조암 총무 인환(印幻)스님이었다.
해인사 강원을 마치고 서울 온 지 얼마 안됐던 인환스님은 시내 한복판에 있는 식당에서의 점심공양이 낯설었다. 냉수 두 잔을 들고 다가온 종업원에게 원허스님은 머뭇거리지 않고 주문을 했다. “시원한 냉면 두 그릇 주시오.” 얼마 후 냉면이 나왔다. 냉면 위로 찐 계란 반쪽, 고추양념, 파 몇 조각이 들어 있었다.
강원을 이수하고 계율 공부까지 마친 인환스님은 은사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그릇 안에 있는 양념들을 덜어냈다. 오신채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젓가락으로 양념을 덜어내는 상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원허스님이 한마디 던졌다. “야, 좀스러운 짓 그만해라.” 인환스님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음식을 일부러 찾아 먹는 탐심(貪心)을 내는 것이 계율을 어기는 것이라는 가르침 때문이었다. 마을에 내려와 먹는 냉면에 들어있는 양념을 구태여 덜어 내려는 생각은 ‘넓은 마음가짐’이 아니라는 교훈이 들어있는 일화이다. 그렇다고 원허스님이 계율을 마음대로 어기는 막행막식까지 용인했던 것은 아니다.
효봉.춘성스님 등과 막역
정화불사 시절 고락 함께
원허스님은 금강산 표훈사 주지로 있을 무렵의 인연으로 많은 스님과 교류를 가졌다. 대표적인 스님이 효봉스님, 석암스님, 춘성스님이었다.
효봉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 주석한 인연이 있어 원허스님과는 허물없이 지냈다. 최준섭 부총재(한국불교법사총연합회)는 “정화불사 당시 선학원에 머물 때 효봉스님과 원허스님은 두 분이 한 방에서 주무실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고 회고한다. 두 어른이 한 방을 쓴 것은 방이 부족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만큼 각별한 사이였다는 증거이다. 선학원에는 청담스님, 보성스님, 원명스님, 도견스님, 일초스님 등 수좌들이 정화불사를 위해 머물고 있었다. 일초스님은 지금의 고은 시인.
원허스님은 만해 한용운스님 상좌인 춘성스님을 많이 아꼈고, 춘성스님 또한 원허스님을 존경하는 사이였다. 만해스님이 표훈사 강사로 있을 때 출가한 원허스님을 깍듯하게 모셨던 것이다. 의정부 망월사 주지였던 춘성스님은 서울에 일이 있으면, 적조암을 찾아 원허스님과 선담(禪談)을 나누었다.
정화불사 선봉에 섰던 춘성스님은 시내에 볼 일이 있으면 신사복을 입고 나왔다고 한다. 넥타이에 중절모자, 그리고 구두를 신은 모습에 웬만한 사람들은 알아보기 힘들었다고. 수좌들로부터 ‘눈 밝은 스님’으로 존경받던 춘성스님의 옷차림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정화불사 직후 승풍진작을 위해 제도적인 강제장치를 만들기에 몰두하는 교단의 모습을 지켜본 춘성스님이 “속 공부는 않고 겉모양만 따지면 안되는 데…”라는 경책이 담겨있던 복장이었다.
춘성스님을 맞이한 원허스님은 차를 사이에 두고 선문답을 자주 나누었다. 수좌들의 존경을 받던 춘성스님이 자주 찾던 스님이 원허스님이라는 사실은 그만큼 스님의 높은 수행경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환스님의 기억. “두 어른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선의 경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수행자에게 공부 때가 따로 있나?”
원허스님이 원불처럼 모셨던 불상. 지금은 인환스님이 모시고 있다.
걸망 하나면 족했다. 더도 덜도 없었다. 무소유를 수행의 중요한 근간으로 삼는 출가자에게 걸망을 넘치는 물건은 짐이고 죄(罪)였다. 물론 시대가 많이 바뀌어 불가피하게 소유해야 하는 물품이 늘기는 했지만, 그래도 수행자의 위의(威儀)는 무소유에 뿌리를 둔 것만은 틀림없다.
원허(圓虛, 1889~1966)스님의 삶이 그러했다. 반평생을 주석했던 금강산 표훈사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사연도 있었지만 스님의 ‘살림’은 걸망 하나면 부족함이 없었다. 그마저 ‘홀쭉한 걸망’이었다. 삼의일발(三衣一鉢). 약간의 옷가지와 발우 하나에는 평생 소박하게 살아온 스님의 삶이 걸망에 담겨 있었다.
입적 후 남은 유품은 ‘낡은 걸망’
요양 중에도 쉬지않고 수행정진
상좌인 인환(印幻, 동국대 명예교수)의 기억이다. “은사스님을 모시고 살면서 물건에 관심을 두시는 모습을 본적이 없습니다. 스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특별한 것은 고사하고, 쓸만한 물건조차 없었습니다.” 1966년 12월 20일 원허스님 입적 당시 지니고 있던 물건은 전무(全無)했다. 스님 유품은 떨어진 부분을 헝겊으로 대어 꿰맨 승복과 평소 원불(願佛)로 모셨던 불상 하나가 전부였다. 그리고 책상 겸 수납장으로 사용했던 조그만 나무상자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선산 도리사에서 원허스님의 상좌가 되었다 뒷날 마을로 내려온 최준섭 부총재(한국불교법사총연합회)는 검소하게 수행했던 은사의 기억이 생생하다. 1955년 8월 강원도 낙산사 주지로 부임한 원허스님은 상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은 손수 해결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수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물 사정도 좋지 않아 낙산사도 마을에서 물을 길어다 먹을 때였다. 상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몰래 마을로 내려가 물을 길어왔다. “절집에서 대중이 함께 사용하는 물이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같이 울력해야 한다”는 게 원허스님의 뜻이었다. 뿐만 아니라 스님은 당신 옷가지도 손수 빨래해서 입었다. “스님, 빨랫감이 있으면 저희에게 주십시오.” “아니다. 내가 입은 것은 내가 빨아 입어야지. 너희들은 공부에 전념해라.”
상황이 이렇다보니 낙산사 대중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자연히 사찰울력에 앞서 나서야 했고, 그 같은 전통은 한국전쟁 당시 전소(全燒)된 도량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최준섭 부총재는 “은사스님은 일거수일투족이 빈틈없는 철두철미 하신 분이셨습니다. 비록 상좌에게라도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했던 분이었습니다.”
스님은 가행정진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한번은 청담(靑潭, 1902~1971) 스님이 낙산사를 찾았을 때였다. 월정사에 주석하고 있던 탄허(呑虛,1913~1983)스님을 만난 청담스님은 원허스님을 만나기 위해 낙산사로 왔다.
두 어른이 대화를 나누던 중 원허스님이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60대 중반의 노구에 평소 건강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탓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노스님 잘 모시게!”
청담(靑潭, 1902~1971)스님과 대화를 나누다 쓰러진 원허(圓虛, 1889~1966)스님을 되살리기 위해 상좌들과 청담스님은 30분 넘게 응급처치에 땀을 쏟았다. 지금처럼 구급차가 있던 것도 아니고, 가까운 양양읍에도 병원 하나 없던 시절. 대중들의 지극한 정성 덕분에 겨우 원기를 회복하고 일어난 원허스님은 청담스님 권유로 설악산 오색 약수터에 가서 1주일간 요양을 했다.
최준섭 부총재(한국불교법사총연합회)의 기억이다. “편찮으신데도 불구하고 아침이면 은사스님은 일어나셔서 혼자 앉아 화두를 참구하셨습니다.” 몸부터 살피셔야 한다는 상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허스님은 “수행자가 되어 공부하는데 ‘때’가 따로 있겠냐”며 가부좌를 풀지 않았다고 한다.
출가수행자의 본분사를 잊지 않았던 스님은 상좌들을 당신 밑에 오래 머물지 않게 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 열심히 정진하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상좌가 “스님 공부하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원허스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머뭇거림 없이 “공부한다고, 그래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와라”가 전부였다.
강원도 지역 도량을 정화하는 ‘총책임’을 맡은 스님은 월정사, 건봉사, 신흥사, 낙산사 등을 정화했다. 이때 스님을 시봉했던 최준섭 부총재는 “스님은 청정승단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원력을 분명하게 갖고 계셨던 어른”이라면서 “궂은 일 마다하지 않고, 스님 먼저 모범을 보이셨다”고 회고한다.
낙산사 주지 시절 인연 각별
지역 군인.경찰 태도 달라져
1955년 8월 낙산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원허스님은 ‘절 살림’을 보면서도 대중공의에 기초한 가풍(家風)을 유지했다. 울력에 손수 모범을 보였음은 물론이며, 대중을 지도하는데 공사(公私)를 분명히 했다. 때문에 스님의 그늘에 머물 때는 원칙과 규율을 어기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렇다고 죽비를 들고, 매를 들고,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당신 먼저 모든 일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니 대중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은 어떤 인연 때문인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낙산사 주지로 있을 무렵 이승만 대통령이 세 차례나 낙산사를 방문했을 정도. 수복지구 안에 있던 낙산사는 길포장도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서울서 오기에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산사를 이승만 대통령이 세 차례나 왔다는 것은 ‘특별한 사이’임을 증명한다.
대통령이 시골 절에 왔으니, 비상이 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찰 밖에는 경찰이 경비를 서고, 경내에는 특무대 요원들이 삼엄하게 경호를 서고 있을 때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원허스님을 비롯해 지역의 주요 인사들이 자리를 같이했다.
이 대통령은 지역치안을 책임지고 있던 ‘36관구 군사정보 부대 부대장’인 김동석 대령에게 당부했다. “김대령, 이 노스님 잘 모셔.” 그 뒤부터 툭하면 스님들에게 도민증을 보자고 했던 경찰과 군인들의 태도가 싹 바뀌었다고 한다.
“중한테 무슨 짐이 필요하다고…”
정화불사 원만한 처리 칭송
주지소임 끝에 걸망 하나뿐◀사진설명: 1967년 1월 조계사에서 거행된 원허스님 영결식.
정화불사에 앞장서다 보니 인심을 잃을 만도 했고 서운한 생각을 지닌 사람도 생길만 했다. 그러나 원허(圓虛, 1889~1966)스님을 싫어하거나 시기하는 대중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1955년 낙산사 주지로 있을 때도 절에서 물러난 대처 승려와 가족 등 10여명이 사하촌에 머물 수 있도록 한 것도 스님 뜻이었다. 낙산사 소유의 전답(田畓)에서 농사지으며 생활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원허스님은 상좌들에게 “굳이 그들을 내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비구 5인 대책위원으로 정화불사의 정당성을 강조했던 스님이 일을 풀어 가는데 있어서는 과격한 방법은 마다했다. 청정승단의 전통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한쪽을 완전하게 내쫓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때문에 비구 대처 양쪽이 합의하여 종단을 출범시키는 과정에서 스님이 거중 역할을 맡은 것이다. 1962년 4월 불교재건비상종회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배경에는 스님의 이 같은 ‘온화한 성품’을 대중들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뒷이야기 하나.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던 원허스님이 의장직을 계속 사양하자, 효봉스님이 원허스님을 찾았다. “스님, 나를 봐서라도 한번 해주시지요.” 금강산에서 함께 정진했던 인연도 있고, 두 어른이 정화불사를 비롯해 여러 면에서 뜻을 같이 했기 때문에 효봉스님의 청을 사양하기 어려웠다. 청담스님도 원허스님이 뜻을 밝히면 “스님, 그렇게 하셔야죠. 따르겠습니다.”라며 깍듯하게 모셨다고 한다. 탄허스님, 청우스님, 동산스님, 동산스님, 석우스님 등도 원허스님과 막역한 사이로 종단의 기틀을 놓는데 합심했다.
또 하나의 일화. 스님 주위에는 군인, 경찰, 기업가 등 사회 저명인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수행력에 감화 받은 것은 물론이다. 송요찬 장군이 3군단장으로 있을 무렵의 일이다. 낙산사 입구의 길 양쪽으로 찝차가 줄지어 300대가 주차되는 일이 일어났다. 군단 예하의 지휘관들이 모두 낙산사로 집결한 것. 원허스님 방에서 차담(茶談)이 있었는데, 스님은 별 말씀을 하지 않았다. 그저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일이 본분”이라는 원칙적인 말씀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뒤에도 낙산사에는 지역의 주요 인사들이 스님을 찾아뵙고 여러 가지 일을 상의했다고 한다.
낙산사 주지 소임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올 무렵의 일이다. 상좌가 짐을 정리하려고 스님 요사채를 찾았다. “스님, 서울로 올려보낼 짐을 정리하려고 왔습니다.” “할 일 없으니 그만 돌아가 네 짐이나 챙겨라.” 소임 본지 몇 년이 지났는데 짐이 없다니 상좌는 고개를 갸우뚱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없는 말을 하지 않는 은사의 성정을 아는지라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며칠 뒤 서울로 올라갈 때 산문을 나서는 원허스님의 ‘짐 아닌 짐’을 보고 대중들은 놀랐다. 달랑 걸망 하나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나마 걸망은 절반쯤 비어 있었다. “있다가 떠나면 그만이지, 중에게 소지품이 무엇이 있겠는가”라는 것이 원허스님의 뜻이었다.
“사진은 찍어서 무엇 하려고?”▶사진설명: 1967년 1월 불교신문에 게재된 원허스님의 부고.
“우리 노장님께서는 따로 말씀을 기록한 문집도 법문을 담은 녹음테이프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쉬울 따름입니다.” 원허(圓虛, 1889~1966)스님 상좌인 인환(印幻, 동국대 명예교수)스님은 은사에 대한 기록물이 전무(全無)한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원망은 없다. 은사가 ‘입에 발린 말’이나 ‘현학적인 글’을 내세우기보다는 생활 속에서 실천행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무소유를 바탕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전형적인 수좌가 바로 원허스님이었다. 억지로 생활을 꾸미지도 않았다. 말없이 실천한 불언실행(不言實行)으로 한 생을 보낸 분이었다.
스님은 당신보다 어른은 물론이고 상좌나 후학들에게도 늘 겸손하게 대했다. 특히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뜻을 강조했다. 선산 도리사에 머물 때 한 상좌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의 일. 상대가 돌아간 후 스님은 상좌를 불렀다. “이보게, 자네 아까 이야기할 때 ‘내’라고 했지” 상좌는 은사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의아했다.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이러저러 하니… ”라면서 말한 사실이 떠올랐다. 은사의 질문에 답을 했다. “네, 스님 그렇게 말했습니다.”
원허스님은 나직한 목소리로 일렀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나’나 ‘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저’나 ‘제가’라고 해야 하는 게야.”
상내지 않고 말없이 실천행
변변한 영결식 사진도 없어
사실 스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적도 없지만, 남에게 서운한 생각이 들도록 한 적은 더욱 없다. 스님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살았으며, 또 수좌로서 반듯한 생활을 했기에 많은 대중들이 따랐던 것이다. 그 배경에는 나를 앞세우지 않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다.
스님은 변변한 사진도 남기지 않았다. 상좌들의 기억에도 사진을 찍은 기억이 없을 정도이다. 사진 찍는 것을 즐기지 않았던 이유가 가장 크다.
그리고 처소를 옮길 때마다 옷가지를 제외하고는 짐을 일체 챙기는 경우가 없었다. 낙산사에서 스님을 시봉했던 최준섭 부총재(한국불교법사총연합회)의 기억이다. “낙산사에 계실 때 이승만 대통령이 세 번 찾아왔던 것을 비롯해 많은 지인(知人)들이 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때마다 그분들의 청으로 기념촬영을 하기는 했지요. 그러나 스님께서는 그런 사진들을 일부러 모으지는 않으셨습니다.” 40여 년 전 이승만 대통령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제왕’이나 마찬가지였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범부들은 이해하기 힘든 행동. 한 나라의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몇 장 있던 사진은 원허스님의 ‘무관심’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때문에 스님의 유일한 사진은 서울 적조암에 머물 때 촬영한 것이 전부이다. 영결식때 사용한 사진도 이때 찍은 것이다.
적조암에서 총무소임을 보며 원허스님을 모셨던 인환스님은 당시 사진을 촬영한 사연을 들려주었다. “60년대 초반쯤일 겁니다. 당시 사진촬영을 좋아했던 한 스님이 적조암에 들려 며칠 묵은 적이 있습니다. 그 스님이 사진기를 갖고 있길래, 우리 노장님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노장께서는 ‘사진 찍어 무엇하려고’라며 극구 사양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맑고 깨끗하게 사시다 가신 어른”◀사진설명: 원허스님이 표훈사 주지 시절 발행한 잡지 〈금강산〉.
세월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평생 무소유를 근간으로 수행하면서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한 정진해 온 원허(圓虛, 1889 ~1966)스님도 나이가 들면서 육신이 점점 노쇠해졌다. 서울 성북구 정화동 적조암(寂照庵)에 머물던 어느 해 겨울, 요사채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정신을 잃었던 스님은 그 뒤로 몸이 많이 불편해졌다.
상좌로 적조암 총무 소임을 보며 은사를 시봉했던 인환(印幻, 동국대 명예교수)스님은 돈암동에 있는 외과 의사를 불러 원허스님 치료와 간병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원허스님은 거동하기 힘들 정도로 쇠약해졌으며 바깥출입도 어려웠다. 그래도 상좌와 신도들의 극진한 간병으로 원기를 조금씩 회복해가던 스님은 안타깝게도 1966년 12월29일 오전 5시 30분 육신(肉身)을 벗고 열반에 들었다. 이때 세수는 78세 법납은 60세였다.
원허스님의 임종을 지켜본 인환스님은 열반 당시 기억을 이렇게 말한다. “은사스님께서는 임종게뿐 아니라 아무런 말씀도 남기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평소 주무시는 것처럼 조용하게 가셨습니다.”
원허스님 영결식은 1967년 1월2일 조계사에서 ‘총무원장(總務院葬)’으로 거행됐다. 장례의 공식명칭은 ‘대한불교조계종 원로 원허당 대선사 총무원장(葬)’이었다. 장의위원회 위원장은 당시 총무원장인 경산스님이 맡아 범종단 차원에서 스님 영결식을 봉행했다. 장례비용도 종단에서 모두 부담했다. 평생 정화불사를 비롯해 여법한 수행자의 삶을 산 스님의 뜻을 종도들이 받든 것이다.
범종단 차원 영결식 봉행
“우리 노장님처럼 살고파”
스님의 법구(法軀)는 영결식을 마친 뒤 서울 홍제동 화장장으로 옮겨져 다비됐다. 검소하게 살다 마지막 가는 길조차 일반 대중들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화려한 연화대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평생 수좌로 여법하게 살았던 스님답게 평범한 화장장에서 한 생을 갈무리했다.
다비를 마친 스님의 유골은 여생(餘生)을 보낸 적조암 주위에 산골(散骨)되었다. 별도로 부도를 세우거나 비석을 세우지도 않았다. 생전에 부도나 비석에 대한 이야기를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인환스님은 “우리 노장님은 생전에 글을 남기신 것도, 녹음테이프도 없으셨다”면서 “맑고 깨끗하게 사시다 가신 어른”이라고 회고했다. “돌아가신 후에 유품을 정리하려고 보니 아무것도 없으셨어요. 평생 원불로 모신 불상과 약간의 옷가지 등이 전부였습니다. 우리 노장님처럼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돈과 물질이 우선되는 요즘 많은 가르침을 남겨주신 어른이십니다.”
당시 불교신문은 입적기사에서 “스님은 교계의 사부대중으로부터 관음(觀音)의 화신(化身)이라고 칭할 만큼 존경 받았던 자비의 상호이다”면서 “한평생 수도와 후학양성의 일생을 살다간 분”이라고 행장을 적고 있다. 또 “정화초기에는 10인 대책위원으로 활약했고 그 후 뜻한바있어 성북구 적조암에서 몇 명의 수좌들에게 법을 전하며 수도에 전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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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적조암의"인허당 대선사 "
관음(觀音)의 화신(化身)...나무아미타불...()()()...고맙습니다...
원허스님 일화를 잘았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