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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호두까기
-역풍을 뚫고 대양을 가로지르다
장보고는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무령군소장으로 활약하다 귀국,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淸海:莞島)에 진(鎭)을 설치하고 휘하 수병을 훈련시켜 서남해안의 해적을 완전히 소탕한 인물이었다.
그 후 그는 신라와 당, 일본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을 통하여 동북아의 해상무역을 독점하였다.
장보고 선단의 활동을 전하는 중요한 기록이 있다. 당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일본에 돌아와 천태종을
전파한 일본 승려 엔닌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엔닌은 중국을 오갈 때 신라선(장보고의 선단)을 이용했다고 한다.
엔닌은 신라선이 파도를 헤치는 능력이 우수하여 일본에서도 신라선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과 당을 오가기 위해서는 대양을 가로질러여 한다.
따라서 신라의 무역선은 강이나 하천, 연안을 항해하는데 적합한 평저선이 아니고
대양 항해가 가능한 첨저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은 왜란 때 우리 수군의 전선이 이미 입증했듯 얕은 바다에서 기동력있게
선회할 수가 있어 학익진과 같은 진법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장보고 선단처럼 대양을 가로지르기 위해서는 높은 파도를 이겨낼 수 있도록
배의 중심 부분에 지지대를 놓은 V자형의 첨저선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엔닌의 기록에도 신라선은 파도가 동쪽에서 치면 서쪽으로 기울고 서쪽에서 치면 동쪽으로
기울었다고 되어있는데 이는 신라선이 첨저선이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그 구조가 수밀격벽(배 내부에 좁은 간격으로 격벽이 있음)으로 되어 있어서 배가 파손되어도
파손된 칸만 밀폐시킨 후 바로 항해가 가능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비상항해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림 : 수밀격벽구조로 비상항해가 가능한 원리
그러면 배의 규모는 어떠했을까?
목포해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신안선을 보면 3층건물 높이의 규모이다.
엔닌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이 견당사를 보낼 때 신라선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150명의 인원과
조공품, 무역품 등을 실었다고 하니 신라선은 적어도 신안선 크기의 150톤 이상의 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동양에서 발견된 최대 규모의 무역선은 천주만 출토선인데, 길이가 35m이고, 200톤의 적재가
가능하므로 배의 무게까지 합치면 300톤에 달한다.
따라서 신라선도 신안선과 천주만 출토선 사이의 규모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선이 아닌 무역선, 게다가 대양을 건너는 배라면 노를 사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신라의 무역선은 사각돛이 2개 이상 달린, 노를 사용하지 않는 범선이었을 것이다.
범선은 바람으로 운항한다.
장보고 선단의 대양 항해에는 불가사의한 점이 있었다.
바람이 순풍이 아니라 역풍일 때 어떻게 항해를 했을까? 우리나라를 둘러싼 서남해안에는
하절기 6개월동안은 남동풍이, 동절기 6개월동안은 북서풍이 분다.
이른바 계절풍이라는 것인데, 엔닌에 따르면 신라선을 타고 21일만에 중국을 갔다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장보고의 선단이 역풍을 뚫고 운항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현대 요트는 삼각돛을 45˚까지 기울여 맞바람을 이용한 역풍 항해가 가능하다고 한다.
다만 배가 역풍에 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요트 아래에 1m 크기의 킬(keel)이라는 것을 달고
그것을 이용해 부력을 일으켜 앞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엔닌의 기록에 따르면 좌초된 신라선 하부에 누아(피수판)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킬과 같은 용도로 쓰인 것으로, 장보고 선단은 돛을 비틀어 측면풍을 이용 지그재그로
항해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림 : 누아를 장착한 배의 모습
장보고 선단의 대양 항해에는 또 하나의 미스테리가 있다.
원양 항해는 방향과의 싸움이다.
연안을 항해할 때는 연안의 지형과 섬 등을 이용하여 항해한다. 이를 지문항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망망대해를 가로 지를 때에는 지문항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때 사용하는 것이 천문항법이다.
천문항법은 낮에는 해, 밤에는 달과 별을 보고 항해한다.
북극성과 북두칠성은 천문항법에 있어서 가장 많이 쓰이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둥치고 비가 내리는 악천후 속에서는 이 천문항법도 무용지물이 된다. 즉, 천문항법만
가지고 대양을 가로지르는 것은 모헙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면 장보고 선단은 어떻게 방향을 찾았을까? 배가 원거리를 항해할 때는 출발점에서 1˚만
틀려도 목적지에 가서는 큰 오차가 난다. 심한 경우 배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만다.
현대의 전문가들은 나침반 없이는 대양에서의 항해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장보고 선단은 악천후에서도 항해를 했다고 한다.
장보고 선단이 나침반을 이용했는지는 현재 알 수 없다.
흔히 나침반은 11세기 중국에서 발명되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평양의 고조선 유적에서 방위관측기 같은 것이 출토되었고, 장보고
시대보다 200여 년 앞선 문무왕 때 자철광을 캐서 자석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로써 장보고 선단이 나침반과 같은 것을 이용해 항해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많다.
청동기 시대 고인돌이나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던가, 고구려 장수왕 때 서해를
통해 중국으로 말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던가 하는 것들이다.
또한 중국측 기록에 '신라 선원이 없으면 배가 출항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봐서 대양을 건너는
신라인들만의 항해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 고조선 유적에서 출토된 방위관측기
※ 범선이 역풍을 이용하여 전진하는 과학적 원리에 대해서는
부산광역시 요트협회 홈페이지의 http://www.busanyacht.co.kr/library/library03.html
에 그림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나와있습니다.
※ 이 글은 KBS 역사스페셜(2005.11.18) "장보고선단 대양 항해 어떻게 가능했나?"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원문:http://blog.naver.com/triummrat/100019720725
나침반(羅針盤)의 원래 명칭은 '新羅針盤'
삼 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배의 사용이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은 유물로도 알 수 있다.
선조들이 다른 문명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물에 뜰 수 있는 나무토막, 조롱박, 갈대나
가죽주머니 등을 이용하여 강이나 바다 속으로 들어가 어로 작업을 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후 수상생활에 따른 경험이 축적되자, 통나무의 가운데를 파낸 통나무배가 이용
되었다가 나무널판이나 통나무 등을 조립한 조립선(뗏목 등)들로 발전한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짐을 싣고 빨리 달릴 수 있으며 안전한 배가 등장한다.
처음에는 사람이 직접 노를 저었고 좀 더 발전하여 돛을 이용하는 배가 등장하며 점차
조선 기술이 발전하여 현대와 같은 대형 선박으로 이어진다.
지탑리 유적과 마산리 유적을 비롯한 강가에 있는 유적들에서 그물추가 발견되었고
서포항에서는 그물추, 작살, 낚시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서포항 4기층에서는 고래뼈로 만든 노의 술부분은 등쪽이 좁고 끝 쪽이 넓은데(길이
31센티미터, 두께 1.5센티미터, 끝 쪽의 넓이가 13센티미터), 고래뼈로 노를 만들었다는
것은 나무보다 고래뼈가 견고하다는 것을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바다에 살고 있는 커다란 고래뼈가 발견된다는 것은 고래를 잡을 수 있는 배가 있었
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울산군 언양면 대곡리 반구대에 있는 바위그림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벽화에는 물고기, 고래, 호랑이 등 짐승은 물론 사람들이 타고 고래를 잡는 배도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이 선박을 이용했다는 기록은 기원전 2세기에 고조선의 준왕이 수천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뱃길로 마한에 갔다는 기사에서 보인다.
이것은 고조선과 마한에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항구가 있었고 수천 명의 군사를 태울 수
있는 배들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배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전투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당시에도
이미 육군과 수군이 편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33∼234년, 오나라 손권이 동천왕을 선우로 책봉하면서 고구려와 연합하여 위나라의
조조를 견제하고 공손연을 공격하자고 보낸 사신 사굉과 진구가 압록강 하구에 있는
안평구라는 항구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607년에 고구려군이 바닷길을 이용
하여 백제의 송산성과 석두성(아산만 남쪽 당진군 한진리로 추정)을 공격했다는 기록은
고구려 수군이 해안을 따라 수천리를 항해할 수 있는 선박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한편 백제는 지리적 여건에 따라 중국과 일본의 왕래는 주로 바다를 통했으므로 조선과
항해기술이 발달했다.
일본과의 왕래로 조선기술도 전달되어 『일본서기』에는 271년 백제사람의 후손이 일본
에서 선장으로 일했고 백제의 선박에 의해 기술자와 학자들의 왕래가 빈번하게 있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은 규모가 크고 든든한 배를 ‘백제배’라고 불렀다.
신라에서도 289년에 왜적이 침공한다는 통보를 받고 선박과 병기를 수리했으며 467년
봄에 관원을 시켜 전함을 수리했고 583년에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했다는 것을 볼 때
조선기술이 매우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먼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선박도 중요하지만 항해기술 즉 배가 육지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때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이 나침반이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나침반(羅針盤)의 사용에 있어 세계 최고의 기록을 갖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9년(669년) 정월조에 당나라 승려 법안이 신라에서 자석을
얻어간 사실이 쓰여 있고 5월에는 급찬 지진산 등을 통해 자석 두 상자를 당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이 자랑하는 3대 발명품(나침반, 종이, 화약) 중에 하나가 나침반인데 중국의 나침반은
송나라 때 발명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런 자료를 보더라도 세계 최초로 나침반을 발명한
나라는 신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빨리 나침반을 만들었다는 것은 나침반의 원래 이름이 신라침반
(新羅針盤)인데 ‘신’자가 빠진 나침반으로 읽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나침반에 대한 기록은 통일신라가 등장한 이듬해이지만 통일신라 전에 나침반이 사용되었
음이 틀림없으며 어느 나라보다 나침반을 사용했다면 당시 항해술도 매우 앞섰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략) 이종호(공학박사)
[출처] 나침반(羅針盤)의 원래 명칭은 '新羅針盤' |작성자 동소하
신라배는 V자형에 가까운 첨저형 추정.. 작지만 날렵해서 파도에 강함..
해상왕 장보고를 만든 신라배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해상왕 장보고 기념 사압회 주도로 이원식(한국해양대 명예교수)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김용한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할실장 등이 연구해
복원한 배는 첨저형 (V자)애 가까운배다..
"장보고는 해류를 이용한 천재"...고 선박 연구가인 마광남씨는 '거친파도를 이겨내려면
바닥이 평평하기보다는 뾰족한 형태여야한다'고 설명했다.....
먼 바다를 다니려면 현대의 원양어선처럼 뽀족한 형태일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울산 과학대학 이창억(해양조선학과)교수는 '장보고의 무역항로는 북항로뿐만 아니라
서해 남부 항로도 다녔다.' 며 이런곳을 다니기 위해서는 밑바닥이 평평한배로는 불가능
하다고 설명 했다.....
기록에는 신라배는 동남풍과 서남풍을 이용해 남쪽으로 항해하는 '역풍항해'까지 했다고
되있다....
역풍항해를 하려면 지그재그방식으로 이동을 해야하고 능숙한 돛조절이 능력이
필요하다.....
항해 각도는 목표지점을향해 50도에서 60도 정도로 움직여 줘야 한다는 얘기다....
장보고는 이들 항해술로 해류와 바람이 다른 한반도 남해와 서해, 남중국해등을
자유자재로 다녔다..
전문가들은 신라배는 한쪽이 파손되도 가라앉지 않도록 칸막이를 여러개한것으로 보고있다...
엔닌의 기록에 선체의 밑바닥이 모두 부서지고 찢어진 가운데 밀물이 밀려왔지만 계속 항해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떄문이다..
출처 : 주덕재(전주최씨 문성공후손 모임)
http://ask.nate.com/qna/view.html?n=9767539
가야의 유물에도 격벽구조 선박 예가 있다.
가야의 고분군에서 발굴한 질그릇인데. 양쪽 선측을 연결하는 가로 부재 3개와 선수로 부터
선미까지 관통한 세로 부재 1개로 되어 선채를 총 8개의 격실로 나누고 있다.
이리하여 선체의 종강력,횡강력을 보강하고 일시침몰을 방지하는 것이다.
>>> http://blog.daum.net/hearo9mars/7072085
항해술의 천재, 장보고 바다를 누비다 https://www.changpogo.or.kr/main.asp?CMenu=4&CPage=c_news1009_02.htm&Cgubun=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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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님의 글중에서...원문: http://blog.daum.net/odu1893/425
원(元) 나라의 탈탈(脫脫)이 기록한 <송사(宋史)>에서 고려의 신주(神舟)에 대한 기록은 다분히
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명확히 볼 수 있다.
“송 신종(神宗) 원풍원년(元豐元年, 1078년)에 처음으로 안도(安燾)와 좌간의대부(左諌議大夫) 진목(陳睦)을 고려에 보내 임시로 기거하게 하고 사람을 불러 초빙하여 명주(明州, 지금의 절강성 영파 인근)에 두 척의 큰 배(艦)를 만들도록 하였다. 하나는 ‘능허안제치원(凌虚安濟致遠神舟)’이며 다른 하나는 ‘영비순제(靈飛順濟神舟)’라 하였는데 모두 신주(神舟)라 명명하였다. 정해(定海)로부터 큰 바다를 거쳐 동쪽으로 고려에 도착하니 나라 사람들이 환호하며 마중을 나왔다.”
원(元) 나라 때 기록인 <송사(宋史)>에서 말하는 신주(神舟) 한 쌍은 그 이전
송나라의 서긍(徐兢)의 기록인 <고려도경) 권34 ‘해도’ 편에서 두 척이 건조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신이 듣건대 신종황제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유사(有司)에게 조서를 내려 거대한 함정 두 척을 건조시킨 적이 있었는데 하나는 ‘능허치원안제신주’이고 또 하나는 ‘영비순제신주’로서 그 규모가 심히 웅장하였다.”
송나라가 그렇게 자랑스러운 신주(神舟)를 만들었으면서도 왜 <송사(宋史)>의 고려전에만 기록하고 그들의 <송사(宋史)> 본기에는 기록하지 않았을까? 신주(神舟)가 고려인의 기술과 고려인들의 신의 힘을 가진 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신주(神舟)의 내력을 청나라 때 기록에서도 다시 고려인이 만들었음을 명기하고 있음을 재확인하고 있다. <격치경원(格致鏡原)>을 편찬한 청나라 때 진원룡(陳元龍)은 그 책 권28 주거류(舟車類) 편에서 <패편(稗編)>이라는 책을 인용하여 송(宋)나라 신종(神宗)이 "안도(安燾)와 진목(陳睦)의 두 학사에게 명하여 고려로 하여금 명주에서 만곡선(萬斛船) 두 척을 건조하게 하라고 조서를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송나라 신주(神舟)는 고려의 배이며 중국의 우주선 이름 썬저우(神舟)는 이러한 신라 고려인들의 기술과 그 정신적인 종교 신의 이름인 것이다.
관련글: 신주(神舟)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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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만들어진 송나라 신주神舟는 서양의 갤리선을 연상시키는 첨저선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술은 고려인들의 것 이었고.
적어도 고려시대 까지는 먼바다를 가로지르는 첨저선 형태의 배가 많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아직 확실한 못을 밖는 유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사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럼 그 많던 첨저선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 일까요.
그건 고려시대 까지만 해도 많았던 수레와 수레용 대로와 같은 결말을 맞은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조시대에 다 없애버린 것이죠.
선박의 경우는 불애 태우기만 해도 되니까 대로를 없애버리는 것에 비하면 쉬웠을 겁니다.
명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와는 외교와 교역을 단절하는 쇄국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 말이죠.....
이조시대 시행되었다던 삼국사기의 첨삭과 무수한 역사서들의 수거령. 그리고 역사를 같이 증언해줄
고려가 교역한 나라들과의 단절.
반도사관은 이렇게 진행되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