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3장에는 하나님의 나라 비유가 총 7개가 있습니다. 일명 “2, 2, 2, 1”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한 짝입니다. 누룩과 겨자씨 비유가 한 짝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와 진주를 구하는 장사의 비유가 한 짝입니다. 그리고 그물의 비유가 하나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뒤에 나오는 그물의 비유가 짝을 이룹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슷한 가르침을 내용으로 삼고 있는 짝입니다. 그런데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농업사회에서 얻은 비유입니다. 하지만 오늘 보는 그물의 비유는 어업에서 얻는 비유입니다. 갈릴리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가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청중들이 아마 가장 많이 종사한 직업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농업이고, 다른 하나는 어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그의 청중들이 가장 쉽게 즉각적으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삶의 현장에서 얻어낸 비유들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칩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그물의 비유와의 또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세상에 의인들과 악인들이 섞여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물 비유에서는 교회 안에(그물 안에) 의인들과 악인들이 인자의 재림까지 섞여 지내는 것을 가르칩니다.
38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 비유를 설명할 때 밭은 세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 위에 하나님 나라의 씨를 뿌리는 비유인데, 그것은 온 세상에 구원의 통치를 이루려 하심입니다. 이 밭은 씨 뿌리는 자에게 속합니다. 24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리는 사람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38절을 보면 “천국의 아들들을 뿌린다”입니다. 씨는 천국의 아들들입니다. 이때 아들들이란 말은 셈족 언어의 숙어입니다. “~~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을 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들을 자꾸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하나님의 활동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활동이 있습니까? 악한 자가 활동을 합니다. 악한 자의 아들들은 악한 자의 아들들(~~에 속한 자)를 심어 놓습니다. 여기 악한 자는 사단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하나님께 속한 것이어서 당연히 하나님의 활동 무대로서 그분이 자기의 자녀들 또는 자기의 백성들을 일으키는 곳인데, 불행히도 이 세상에 사단이 또 작용하면서 자기 말을 듣는 사람들, 사단을 청종하는 자들을 자꾸 많이 일으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인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과 사단에 속한 자들인 사단의 나라의 백성이 공존하는, 마치 밀밭에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현상과 같습니다. 그 상태가 이제 한동안 계속됩니다.
26절을 보면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라고 말씀합니다. 한글 번역대로 보면 “싹이 나고 결실할 때”는 싹이 나고 결실한 것 같고, “가라지도 보이거늘”은 가라지가 하나둘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원어를 보면 안 보이던 것이 하루아침에(어느 순간에) 점령하듯이 확 보인 사실을 의미합니다. 전체인 것처럼 보입니다.
가라지는 악한 자에 속하는 사람들인데,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가라지입니다. “가라지”라는 말은 헬라어로 “지자니아”입니다. 가라지가 헬라어로는 의미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라틴어로는 “롤리움 테므렌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독보리였습니다. 번식력이 뛰어납니다. 곰팡이를 가지고 있어서 독성도 있었습니다.
39절에 악한 자 곧 사단이 심는 씨들입니다. 사단의 통치를 받는 자들. 사단의 말에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41절을 보면 이들은 스스로 악을 행하는 자요, 불법을 한 자들입니다.
42절을 보면 그들의 종말은 풀무불에 던져넣어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합니다. 악에 속한 자들에게는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풀무불”이라든지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는 것은 그림입니다. 그것을 문자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림 언어입니다.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엄청난 고난에 빠짐을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왔으나 아직도 이 세상에 죄악과 고난이 병행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 죄악과 고난을 단순히 제거해 버리지 않나 하는 의문에 대한 답입니다.
주님과 종들 사이에 두 가지 대화가 나옵니다. 첫 번째 질문은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습니까?”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원수가 그렇게 하였다”입니다. 악의 근원은 사탄이고, 하나님이 아님을 말씀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우리가 이것을 뽑기를 원하나이까?”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뽑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대안을 제시합니다(29~30절).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계획이 있고, 대안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라지가 창궐하는 가운데 알곡을 보호(보전, 보존)하시고,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악이 더 성행하기에 더 두드러지고 보이기에 먼저 뽑힙니다. 반면에 선은 우리 현실에서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잘 안 나타나고 잘 안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보호, 보존하시고, 반드시 심판하여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명심할 것은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둘째,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고,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자이기에 대안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를 가라지로부터 보호, 보존해 주시고, 마지막 날에 반드시 심판하여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