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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金承學(1881~1964)】 "1920년 광복군사령부 군정국장 겸 군기국장"
1881년 7월 12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비현면(枇峴面) 마산동(馬山洞) 동상곡(東上谷) 신보라(新保羅) 절골에서 아버지 덕린(德麟)과 어머니 강릉 최씨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배천(白川)이며, 자는 우경(愚卿), 호는 희산(希山)이고, 이명은 김탁(金鐸)이다. 1896년 김내정(金迺貞)과 혼례를 치러 3남 1녀를 두었다.
조부 때에 가산을 소진하여 유년기에 소작농 생활로 연명하였다. 1890년 10월 고향 마을에 있는 조산재(造山齋)에 들어가 1897년까지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9년 화서학파 조병준(趙秉準)이 가르치는 의주군 월화면 진음동 소재 증곡재(曾谷齋)에 입학하였다. 1900년 (음)3월 15일 증곡재에서 운암 박문일 제사 후 조병준과 노유(老儒) 장원섭(張元燮)이 시국을 통탄하며 거의(擧義)를 독려하는 강의를 듣고 서간도 망명과 항일운동을 결심하였다. 같은 해 10월 초 서간도를 시찰하고 이듬해 3월 귀국하였다. 1904년 8월 상경하여 한성고등사범학교(漢城高等師範學校)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히다가 1905년 9월 자퇴하고 귀향하였다.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서울 종로에서 배일 연설을 하다가 평리원(平理院) 구치감에 3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같은 해 8월 신민회에 가입하여 비현면 면감(面監)으로 활동하였고, 9월 의주 극명사범학교(克明師範學校) 교감으로 근무하였다. 1909년 1월 말 융희황제(순종) 서순(西巡) 당시 신의주와 의주에서 일장기 게양반대운동을 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이틀 동안 악형을 받았다. 같은 해 명의학교(明義學校) 교사로 취임하였으나, 10월 26일 안중근 의거 직후 일제 경찰이 의거와 연관성을 의심하고 계속 위협하는 바람에 망명을 결심하였다.
1910년 10월 만주 랴오닝성(遼寧省) 판산현(盤山縣)으로 망명한 뒤 1912년에 김탁(金鐸)으로 이름을 바꾸고 펑톈성(奉天省) 관립 강무당(講武堂) 속성과에서 6개월 간 군사교육을 받고서 의병단에 가담해 활동하였다.
1919년 전후 중국·러시아로 망명한 평안도 출신 박문일·유인석 등 문인들은 각기 자치기관 겸 항일단체인 의병단(義兵團)·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3·1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3월 15일을 기하여 독립전쟁과 자치를 목적으로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浦) 시거우(西溝) 다화셰(大花斜)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하였다. 대한독립단 「통칙」 3조의 기관 설치 전략에 따라 1919년 8월경 백의범·백기준·신우현 등과 함께 국내 지단 설치를 위해 1차로 국내로 특파되었다. 이때 직함은 대한독립단 겸 대한민국 임시정부 평북독판부 특파원이었다. 1차 특파원들과 함께 임시정부 연통제 30처, 대한독립단 지단 59처 등 모두 89개 기관을 설치하였는데, 이 중 평북에서 평남, 황해도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52개 조직을 설치하였다. 1920년 3월 대한독립단 총재부 박장호·전덕원이 ‘기원파(紀元派)’ 독립단을 조직하면서 총단부를 ‘민국파(民國派)’로 지칭하면서 총재부와 총단부가 양분되었다. 이에 ‘민국파’ 독립단은 콴뎬현(寬甸縣)에서 조병준을 총재로, 신우현을 단장으로 하여 분립하였다. 이때 민국파 독립단에서 재무부장을 맡았다.
1920년 4월 3일 남만주 통일기관 명칭 승인 및 무기 구입 차 상하이(上海)로 출발하여 8월 10일에서야 임시정부 군무부 직할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로 인가를 받고 군정국장(軍政局長) 겸 군기국장(軍機局長, 또는 軍需局長)에 임명되었다. 통일기관의 이름으로 광복군사령부와 함께 광복군참리부(光復軍參理部) 명칭을 받았는데, 광복군참리부는 내무부 직할로 서간도 한인동포 통치 사무 일체를 관할 지도하는 기구였다. 상하이에서 무기 240정과 탄환 수만 발을 구입하고, 구사일생으로 9월 26일경 콴뎬현으로 귀환하여 사령부 주둔처인 수혈립자(水穴砬子)에서 사령부 소속 군인들에게 무기 수여식을 거행하였다. 광복군사령부 군인들은 이 무기로 국내에 진격하여 일본 군경과 교전해 95명 사살 등 큰 전과를 세웠다.
1921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사장으로 경영을 맡았고, 박은식을 주필로 삼아 1924년까지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고 독립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1921년 10월 말 러시아 극동민족대회 참석차 상하이를 떠나 이르쿠츠크로 가는 여정에 이른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소식을 듣고, 이르쿠츠크에 가서 독립군의 비참한 집단수용 실상을 목격하였다.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독립신문사 대표 자격으로 참석해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1922년 8월 27일 상하이에 대종교 서이도본사(西二道本司)가 설치되고, 9월 3일 박은식이 전리(典理)에 임명되었다. 같은 날 대종교에 입교하여 영계(靈戒)와 참교(參敎) 교질(敎秩)을 받았다. 1923년 3월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선전부장에 선출되어 양국 간 친선을 도모하였다. 같은 해 1월 15일 대종교의 주요 경전인 『종경(倧經)』을 펴내고, 9월 20일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의 저술인 『신단민사(神檀民史)』를 편수 겸 발행자로서 출간하였다. 이후 북간도 동흥학교 등 여러 민족학교에서 『신단민사』를 역사교과서로 채택하였다.
1924년 4월 임시의정원 평안북도 대표의원, 5월 26일 학무부 차장, 5월 31일 학무부 총장 대리로 선임되어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10월 4일자 『독립신문』에 채찬(백광운) 암살을 질타하는 대한통의부 성토문을 게재하였다. 이에 11월 통의부를 비롯한 8개 단체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반발하자, 임시정부의 직책을 사임하고 내몽골 바오터우현(包頭縣)에 이주한 스승 조병준을 찾아가서 임시정부 직할 단체인 의민부(義民府)의 총무부장을 맡았다.
대한통의부의 분열로 1924년 5월에 결성된 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參議府) 제3대 참의장 윤세용의 뒤를 이어 1927년 10월 제4대 참의장(參議長)에 임명되어 참의부 재건과 남만 독립군 단체의 통합에 주력하였다. 참의부 중앙부서 개편과 함께 본부를 환런현(桓仁縣) 얼펑뎬쯔(二棚甸子)로 옮기고 교민 자치를 우선시하는 자치기관으로 발전시켰다. 1928년 초 멍쟝현(蒙江縣)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 양성에 노력하는 한편, 기관지 『정로(正路)』를 발행하여 선전 활동에도 힘썼다.
1928년 7월 정의부의 3부 통일회의 개최 제의로 9월 지린성(吉林省) 신안둔(新安屯)에서 3부 통일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참의부를 대표하여 김소하·김강(박창식)과 같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지연되어 11월에 개최되었으나 끝내 성과 없이 해산하고 말았다. 3부 통일운동이 결렬되자 신민부와 참의부는 다시 대표자 연합회를 열고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12월 하순 김좌진(金左鎭)이 이끄는 신민부 군정위원회 측과 정의부의 김동삼·지청천 계열을 규합하여 혁신의회(革新議會, 일명 군민의회)를 결성하고, 민사위원장(民事委員)에 선임되었다. 1929년 2월 5일 혁신의회 회의를 마치고 귀대하다가 군무위원 박창식과 함께 환런현 와니전자(蛙泥甸子)에서 펑톈총영사관 퉁화(通化)분관 일제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 뒤 3월 3일 신의주경찰서에서 심문을 받고 3월 16일부터 신의주 구치감 제18호실 독방에서 14개월 미결수로 있다가, 평양 암정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5년 만인 1934년 3월 22일 출감하였다.
1937년 5월 다시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해 임시정부 재중국 북경비밀기관장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11월 4일 비밀 활동 사실이 탄로나 경찰의 추격을 피해 한커우(漢口) 등지로 피신하였다가 광복을 맞았다.
1945년 8·15 광복 직후 환국하여 신의주에서 동지 10여 명과 독립운동사편찬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사 편찬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 9월 하순 서울에서 오광선·전성호·김석황 등과 한국혁명군을 조직하였고,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의 지시로 이를 광복군 국내 제1지대로 개칭하고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11월 국내 제1지대를 사퇴하였으나 김구 주석의 부탁으로 개성에서 광복군 국내 제2지대를 설립하고 청년 수백 명을 훈련하던 중 1946년 미 군정청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다.
1946년 『독립신문』을 속간하였으나 1949년 7월 6일 공보국의 명령으로 폐간 당하였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하다가 1947년 6월 26일부터 1주일 간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다. 임시정부 환국 후 1947년 4월 국무위원에 임명되어 정치부장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949년 6월에는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친일파 명단인 『친일파 군상(親日派群像)』을 작성하였다. 1949년 1월 3일 대종교 총본사의 행정책임자인 전리(典理)를 맡아 1개월간 시무하였다. 1953년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1956년 2월 5일 사단법인 애국동지원호회(대표 문일민) 주관으로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1965년 유고집 『한국독립사』로 증보·발간되었다.
저술로는 『친일파 군상』(1948),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1956), 『망명객행적록(亡命客行蹟錄)』(1958), 『배달족이상국건설방략(倍達族理想國建設方畧)』이 있다. 1964년 12월 17일 서울 성동구 옥수동 자택에서 타계하였고, 유언에 따라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부근에 묻혔다. 2012년 5월 3일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4묘역(495)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881년 7월 12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비현면(枇峴面) 마산동(馬山洞) 동상곡(東上谷) 신보라(新保羅) 절골에서 아버지 덕린(德麟)과 어머니 강릉 최씨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배천(白川)이며, 자는 우경(愚卿), 호는 희산(希山)이고, 이명은 김탁(金鐸)이다. 1896년 김내정(金迺貞)과 혼례를 치러 3남 1녀를 두었다.
조부 때에 가산을 소진하여 유년기에 소작농 생활로 연명하였다. 1890년 10월 고향 마을에 있는 조산재(造山齋)에 들어가 1897년까지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9년 화서학파 조병준(趙秉準)이 가르치는 의주군 월화면 진음동 소재 증곡재(曾谷齋)에 입학하였다. 1900년 (음)3월 15일 증곡재에서 운암 박문일 제사 후 조병준과 노유(老儒) 장원섭(張元燮)이 시국을 통탄하며 거의(擧義)를 독려하는 강의를 듣고 서간도 망명과 항일운동을 결심하였다. 같은 해 10월 초 서간도를 시찰하고 이듬해 3월 귀국하였다. 1904년 8월 상경하여 한성고등사범학교(漢城高等師範學校)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히다가 1905년 9월 자퇴하고 귀향하였다.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서울 종로에서 배일 연설을 하다가 평리원(平理院) 구치감에 3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같은 해 8월 신민회에 가입하여 비현면 면감(面監)으로 활동하였고, 9월 의주 극명사범학교(克明師範學校) 교감으로 근무하였다. 1909년 1월 말 융희황제(순종) 서순(西巡) 당시 신의주와 의주에서 일장기 게양반대운동을 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이틀 동안 악형을 받았다. 같은 해 명의학교(明義學校) 교사로 취임하였으나, 10월 26일 안중근 의거 직후 일제 경찰이 의거와 연관성을 의심하고 계속 위협하는 바람에 망명을 결심하였다.
1910년 10월 만주 랴오닝성(遼寧省) 판산현(盤山縣)으로 망명한 뒤 1912년에 김탁(金鐸)으로 이름을 바꾸고 펑톈성(奉天省) 관립 강무당(講武堂) 속성과에서 6개월 간 군사교육을 받고서 의병단에 가담해 활동하였다.
1919년 전후 중국·러시아로 망명한 평안도 출신 박문일·유인석 등 문인들은 각기 자치기관 겸 항일단체인 의병단(義兵團)·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3·1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3월 15일을 기하여 독립전쟁과 자치를 목적으로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浦) 시거우(西溝) 다화셰(大花斜)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하였다. 대한독립단 「통칙」 3조의 기관 설치 전략에 따라 1919년 8월경 백의범·백기준·신우현 등과 함께 국내 지단 설치를 위해 1차로 국내로 특파되었다. 이때 직함은 대한독립단 겸 대한민국 임시정부 평북독판부 특파원이었다. 1차 특파원들과 함께 임시정부 연통제 30처, 대한독립단 지단 59처 등 모두 89개 기관을 설치하였는데, 이 중 평북에서 평남, 황해도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52개 조직을 설치하였다. 1920년 3월 대한독립단 총재부 박장호·전덕원이 ‘기원파(紀元派)’ 독립단을 조직하면서 총단부를 ‘민국파(民國派)’로 지칭하면서 총재부와 총단부가 양분되었다. 이에 ‘민국파’ 독립단은 콴뎬현(寬甸縣)에서 조병준을 총재로, 신우현을 단장으로 하여 분립하였다. 이때 민국파 독립단에서 재무부장을 맡았다.
1920년 4월 3일 남만주 통일기관 명칭 승인 및 무기 구입 차 상하이(上海)로 출발하여 8월 10일에서야 임시정부 군무부 직할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로 인가를 받고 군정국장(軍政局長) 겸 군기국장(軍機局長, 또는 軍需局長)에 임명되었다. 통일기관의 이름으로 광복군사령부와 함께 광복군참리부(光復軍參理部) 명칭을 받았는데, 광복군참리부는 내무부 직할로 서간도 한인동포 통치 사무 일체를 관할 지도하는 기구였다. 상하이에서 무기 240정과 탄환 수만 발을 구입하고, 구사일생으로 9월 26일경 콴뎬현으로 귀환하여 사령부 주둔처인 수혈립자(水穴砬子)에서 사령부 소속 군인들에게 무기 수여식을 거행하였다. 광복군사령부 군인들은 이 무기로 국내에 진격하여 일본 군경과 교전해 95명 사살 등 큰 전과를 세웠다.
1921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사장으로 경영을 맡았고, 박은식을 주필로 삼아 1924년까지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고 독립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1921년 10월 말 러시아 극동민족대회 참석차 상하이를 떠나 이르쿠츠크로 가는 여정에 이른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소식을 듣고, 이르쿠츠크에 가서 독립군의 비참한 집단수용 실상을 목격하였다.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독립신문사 대표 자격으로 참석해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1922년 8월 27일 상하이에 대종교 서이도본사(西二道本司)가 설치되고, 9월 3일 박은식이 전리(典理)에 임명되었다. 같은 날 대종교에 입교하여 영계(靈戒)와 참교(參敎) 교질(敎秩)을 받았다. 1923년 3월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선전부장에 선출되어 양국 간 친선을 도모하였다. 같은 해 1월 15일 대종교의 주요 경전인 『종경(倧經)』을 펴내고, 9월 20일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의 저술인 『신단민사(神檀民史)』를 편수 겸 발행자로서 출간하였다. 이후 북간도 동흥학교 등 여러 민족학교에서 『신단민사』를 역사교과서로 채택하였다.
1924년 4월 임시의정원 평안북도 대표의원, 5월 26일 학무부 차장, 5월 31일 학무부 총장 대리로 선임되어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10월 4일자 『독립신문』에 채찬(백광운) 암살을 질타하는 대한통의부 성토문을 게재하였다. 이에 11월 통의부를 비롯한 8개 단체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반발하자, 임시정부의 직책을 사임하고 내몽골 바오터우현(包頭縣)에 이주한 스승 조병준을 찾아가서 임시정부 직할 단체인 의민부(義民府)의 총무부장을 맡았다.
대한통의부의 분열로 1924년 5월에 결성된 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參議府) 제3대 참의장 윤세용의 뒤를 이어 1927년 10월 제4대 참의장(參議長)에 임명되어 참의부 재건과 남만 독립군 단체의 통합에 주력하였다. 참의부 중앙부서 개편과 함께 본부를 환런현(桓仁縣) 얼펑뎬쯔(二棚甸子)로 옮기고 교민 자치를 우선시하는 자치기관으로 발전시켰다. 1928년 초 멍쟝현(蒙江縣)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 양성에 노력하는 한편, 기관지 『정로(正路)』를 발행하여 선전 활동에도 힘썼다.
1928년 7월 정의부의 3부 통일회의 개최 제의로 9월 지린성(吉林省) 신안둔(新安屯)에서 3부 통일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참의부를 대표하여 김소하·김강(박창식)과 같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지연되어 11월에 개최되었으나 끝내 성과 없이 해산하고 말았다. 3부 통일운동이 결렬되자 신민부와 참의부는 다시 대표자 연합회를 열고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12월 하순 김좌진(金左鎭)이 이끄는 신민부 군정위원회 측과 정의부의 김동삼·지청천 계열을 규합하여 혁신의회(革新議會, 일명 군민의회)를 결성하고, 민사위원장(民事委員)에 선임되었다. 1929년 2월 5일 혁신의회 회의를 마치고 귀대하다가 군무위원 박창식과 함께 환런현 와니전자(蛙泥甸子)에서 펑톈총영사관 퉁화(通化)분관 일제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 뒤 3월 3일 신의주경찰서에서 심문을 받고 3월 16일부터 신의주 구치감 제18호실 독방에서 14개월 미결수로 있다가, 평양 암정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5년 만인 1934년 3월 22일 출감하였다.
1937년 5월 다시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해 임시정부 재중국 북경비밀기관장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11월 4일 비밀 활동 사실이 탄로나 경찰의 추격을 피해 한커우(漢口) 등지로 피신하였다가 광복을 맞았다.
1945년 8·15 광복 직후 환국하여 신의주에서 동지 10여 명과 독립운동사편찬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사 편찬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 9월 하순 서울에서 오광선·전성호·김석황 등과 한국혁명군을 조직하였고,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의 지시로 이를 광복군 국내 제1지대로 개칭하고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11월 국내 제1지대를 사퇴하였으나 김구 주석의 부탁으로 개성에서 광복군 국내 제2지대를 설립하고 청년 수백 명을 훈련하던 중 1946년 미 군정청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다.
1946년 『독립신문』을 속간하였으나 1949년 7월 6일 공보국의 명령으로 폐간 당하였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하다가 1947년 6월 26일부터 1주일 간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다. 임시정부 환국 후 1947년 4월 국무위원에 임명되어 정치부장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949년 6월에는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친일파 명단인 『친일파 군상(親日派群像)』을 작성하였다. 1949년 1월 3일 대종교 총본사의 행정책임자인 전리(典理)를 맡아 1개월간 시무하였다. 1953년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1956년 2월 5일 사단법인 애국동지원호회(대표 문일민) 주관으로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1965년 유고집 『한국독립사』로 증보·발간되었다.
저술로는 『친일파 군상』(1948),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1956), 『망명객행적록(亡命客行蹟錄)』(1958), 『배달족이상국건설방략(倍達族理想國建設方畧)』이 있다. 1964년 12월 17일 서울 성동구 옥수동 자택에서 타계하였고, 유언에 따라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부근에 묻혔다. 2012년 5월 3일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4묘역(495)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