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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실의 미스테리 : 황제헌원, 진시황, 주문왕, 요, 순, 우, 백이와 같은 동이족 혈통
노자 종중 세계도
* 노자는 원명이 이이(李耳)로 자(字)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으로, 그는 광대(光大)한 이(李)씨 성(姓)의 제 1인이다. 그는 춘추 전기의 동이족 국가 초(楚)국 고현(苦縣) 인이다.
초나라 사람 굴원은 그의 불후의 명작 초사에서 초나라와 자신이 동이족 전욱의 후예로 단군성조인 동황태일을 받들고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초나라가 있었던 양자강 중류의 호남성은 동이족의 안마당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사기․노자열전(史記․老子列傳)》에서 노자의 고향이 여향(厲鄕)이라고 말하는데 그 지역은 지금의 녹읍현(鹿邑縣) 동쪽이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는 “려는 음이 뢰이다(厲, 音賴)”라고 말한다. 헌데 열산씨는 염제 후예중의 주요한 한 분파다. 열산씨의 ‘열(烈)’에 관하여는 고대 문헌 전적 중에 열(列), 려(厲), 뢰(賴) 등으로 써져 있기도 하다.
문자학의 각도에서 고찰해보면, 이 글자의 옛 음은 모두 같다. 따라서 《노사(路史)》를 주석한 나평(羅萍)은 열산씨(列山氏), 열산씨(烈山氏), 려산씨(厲山氏), 뢰산씨(賴山氏)는 명칭은 비록 완전히 같지 않더라도 사실 가리키는 것은 동일하다고 여겼다.
《여씨춘추․고악》편에는 노동요 《육열》은 열산씨가 창시한 후로부터 상대(商代)까지 줄곧 전해져 수천 년 동안 영향을 미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하는 바로는 묘(苗), 요(瑤), 여(畲), 고산(高山), 려(黎), 이(彛), 합니(哈尼), 납기(拉基), 아창(阿昌), 보미(普米), 속속(僳僳), 노(怒), 붕룡(崩龍), 경파(景頗), 포랑(布郞) 등 신농씨의 성인 강족(羌族) 계열에서 나온 소수민족 중에는 아직까지 화전경작의 여섯 단계 경작방식을 계속해서 전승하고 있다.
하남(河南) 경내에도 뢰인(賴人)의 유적이 있다. 물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뢰인은 열산씨 후예 분파에 대한 또 다른 칭호일 뿐이다. 대략 하․상(夏商)시기 쯤에 뢰인의 한 분파가 지금의 하남 녹읍현(鹿邑縣) 동쪽의 뢰향(賴鄕)에 뢰국(賴國)을 건립하였다. 뢰인은 주나라 초기에 상성현(商城縣) 남쪽의 뢰향(賴鄕)까지 남천하여 주 무왕의 자작(子爵) 봉호를 받아 뢰자국(賴子國)이 되었다.
《사기․노자열전(史記․老子列傳)》에서 노자의 고향이 여향(厲鄕)이라고 말하는데 그 지역은 지금의 녹읍현(鹿邑縣) 동쪽이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는 “려는 음이 뢰이다(厲, 音賴)”라고 말한다. 당(唐)나라 사람 단성식(段成式)의 《유양잡조(酉陽雜俎)》에 의거하여 보면, 노자의 고향 녹읍에도 신농씨, 열산씨와 관계가 밀접한 ‘구정(九井)’이 있다. 이로 보면 노자는 그 뿌리 혈통으로 보아 동이족(東夷族) 신농씨의 혈통권을 벗어날 수 없다.
노자의 성씨 李씨란 성은 전국 이전에는 없었다. 그러니까 노자는 동방(木)의 아들(子)임을 밝히기 위해 李씨란 성을 사용한 것이며 <신교총화>란 도가문서에 의하면 본래 韓씨였다 하며 (춘추)전국시대의 동이족 국가 韓나라와 관련 있을 것으로 보이며 韓은 桓에서 나온 것으로 보면 그 줄기를 대국적으로 알 수 있다.
서량지의 책과 사마천의 「사기」 그리고 「환단고기」와 「규원사화」, 「단기고사」 등을 중국에 있는 그 외의 다양한 보조 사료들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식민사학과 모화사대사관의 온상으로 전락한 강단사학자들이 두 무릎 조아리는 「사기」가 오히려 조작되었으며 정작 「환단고기」가 진실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오늘날의 중국으로 터를 잡아가게 되는 터닝포인트가 바로 우리국의 14대 자오지(치우) 천왕과 황제와의 판천 전투이다.
단재 신채호는 「죽서기년(竹書紀年)」이 마치 사서삼경, 일본서기, 사기와 같이 위서라 했다. 그러나 동이겨레의 조상에 관한 한, 사마천의 「사기」보다는 덜 위서인 이 책이 개필 될 적에 중국 사가들의 역사관점이 드러나 있어 중요한 쟁점에 대해 우리의 사서와 일치하는 부분은 소화해서 보면 된다.
편년체로 엮어진 「죽서기년(竹書紀年)」는 하, 은, 주로부터 춘추전국시대의 진(晋), 전국시대 위(魏)나라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서진(西晋)시대(AD 265-316) 무제 태강 원년(AD 280) 전후시기에 하남성 급(汲) 현에 있는 위(魏) 양왕(襄王:BC 334-319)의 묘에서 발굴된 고문서로 그나마 후대의 사가에 의해 수정, 보완, 첨삭되었다.
수(隋)나라 때까지도 13권이 전해지고 있었는데, 점차 흩어져 남송시대에 와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하며, 현재 양(梁)의 심약(沈約)의 주(註)가 있는 「주서기년(註書紀年)」 2권은 원(元)·명(明) 때에 위작 된 것이다. 1917년 왕국유(王國維)는 고서 안에 인용된 본래의 기년(紀年)을 집성(集成), 교정하여 「고본죽서기년輯校」를 저술하고 다시 「今本죽서기년」과 「古本죽서기년」의 차이점을 밝힌 일이 있다.
이 「古本죽서기년」은 발굴지명으로 「급총기년(汲塚紀年)」이라고도 부른다. 엄밀히 말하면 필자는 본서에서 이 「古本죽서기년」을 풀어놓은 통주(通州) 뇌학기(雷學淇)의 <죽서기년의증(竹書紀年義證)>을 자료로 삼았음을 참고로 밝힌다.
먼저 「환단고기」<삼성기 하편>을 간략히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10세 갈고(葛古) 환웅 때에 염농(炎農)의 나라와 땅의 경계를 획정했다. 14 세 자오지(치우) 환웅은 신령한 용맹이 뛰어나 동두철액(철 투구)으로 짙은 안개를 일으켰으며, 구치(九治)라는 채광기를 만들어 채광해 철을 주조해 병장기를 만들어 내니 온 천하가 두려워했다.
치우천왕은 염농이 쇠퇴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웅대한 뜻을 세워 서쪽에서 천병(天兵)을 여러 번 일으키고 또 삭도(索度)로부터 진군하여 회대(淮垈:양자강 유역의 동이 9족 및 묘요, 월, 초 등 우리겨레 거주 지역) 사이를 차지했다. 헌원후(軒侯:황제)가 일어나자 곧장 탁록의 벌판으로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후에 오(吳) 장군을 서쪽으로 보내어 고신(高辛)을 쳐서 공을 세우게 했다.
이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탁( )의 북쪽에는 대요(뇨)(大撓), 동쪽에는 *창힐(倉 ), 서쪽에는 헌원이 있어 서로 군사를 내어 승리를 오로지 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처음에 헌원은 치우 천왕보다 조금 뒤에 일어났다. 그래서 싸울 때마다 불리하여 대요에게 의지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창힐에게도 의지하고자 했으나 허사였는데 이는 두 나라 모두가 치우 천왕을 따르는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창힐) 지나 족은 지나족화 한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다고 했으나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서는 주곡(主穀:농림부 장관)을 맡은 고시례(高矢禮)가 표범이 달려드는 바람에 돌을 던진 것이 바위에 맞아 불꽃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불을 만들었듯이 사관(史官)으로 서계(書契)를 만들던 신지혁덕(神誌赫德)이 암사슴을 사냥하다가 그 발자국을 보고 녹도문을 만들었음을 밝히고 있다. 창힐은 여기에서 밝혔듯이 치우천왕에게 부도의 글을 받은 적은 있다. 그러나 창힐은 고신과 더불어 치우천왕의 후예로 대극성(大棘城:昌黎)에서 태어나 산동 회북(淮北)으로 옮겼다.
대요는 일찍이 치우천왕으로부터 간지(干支)의 이치를 배웠고 창힐은 치우천왕으로부터 부도(符圖)의 글을 받았으니 당시의 제후들이 모두 신하로서 천왕을 섬긴 것은 이 때문이었다. 사마천이 「사기」에 이르기를 '제후들이 모두 헌원에게 복종하였으나 다만 치우만은 가장 사나워서 그를 토벌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럼 잠시 황제는 사람인가 신인가라는 제하에 황제의 미스테리를 밝히고 있는 중국역사의 미스테리에 등장하는 기사를 잠시 보기로 한다. 이 기사내용은 당연히 왜곡, 과장되고 신성시되는 기사로 가득하지만 중국정부가 받아들이고 있는 사관이라 생각하는 차원에서 일단 보면 된다.
섬서성 중간부분에 해당되는 곳으로 서안(西安)과 연안(延安) 중간 북부고원에 보면 황릉현(黃陵縣)이 있다. 이 곳에 1500년 이상 되는 울울창창한 측백나무들이 가득찬 교산(橋山)이란 곳이 있는데 이 교산 중턱에 황제 사당이 조성되어있고 황제 사당 앞에는 한무제가 옷을 벗어 걸어놓았다는 잣나무가 어마어마하게 자라 이를 기념하는 표지를 앞에 두르고 있다. 또, 교산 정상에는 바로 황제헌원의 능묘가 조성되어있는데, 능묘 앞에는 한무제가 올라갔다 내려왔다는 누각이 조성되어 층계로 올라갔다 내려오게 조성되어있다.
한무제가 올랐다는 누대와 황릉 및 갑옷을 걸어놓았다는 사당 앞 나무 및 표지판 확대.
황제는 사람인가 신인가. 지금까지도 학술계에 정론은 없다. 중국의 저명한 신화연구가 원가(袁珂)는 황제가 신화전설가운데의 인물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뇌전(雷電)에서 기(起)하였으므로 최초의 신직(神職)은 뇌신(雷神)이 된다. 후에 뇌신으로 우뚝 일어나 중앙 천제가 되었다. 전해오길 그는 얼굴길이가 4장(張)으로 동시에 사방을 돌아볼 수 있어 어느 지방에 무슨 일이 있는지 그의 눈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황제는 기타 4 천제와 싸워 승리한 후 자신의 신국을 건설했다. 황제신화 전설의 주요부분에 관해 황제와 염제, 황제와 치우의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황제와 염제의 판천(阪泉) 전쟁 중에 황제는 "수웅(帥熊), 랑(狼),표(豹), 추( ),호(虎)를 앞세우고 조(雕:독수리), 할( :靑鳥로 죽을때까지 물러서지 않아 무인의 상징깃털로 쓰임), 송골매(鷹), 소리개(鳶)를 기치로 삼았으니 이로써 전쟁규모를 쉽게 헤아릴 수 있다.
황제와 치우의 탁록전은 특히 참혹하고 치열해서 "혈류에 절구공이가 떠내려갔다(血流漂杵)"고 전한다. 이 전쟁 중에는 쌍방이 모두 신공마법(神功魔法)을 베풀었다. 처음에 치우(蚩尤)가 법술을 베풀어 즉각 큰 연무가 미만해 인마와 사람 그림자를 구분할 수 없었다.
황제는 다시 풍후(風后)에게 명을 내려 지남거(指南車)를 만들게 하여 방향을 식별케 하고 치우를 쳐 이겼다.(이게 거짓말이란 걸 이젠 알 것이다) 그러자 치우는 풍백, 우사를 청해와서 풍우를 크게 일으켜 폭풍우로 황제의 인마를 뒤죽박죽으로 만들 정도로 교란시켰다.
황제는 또 발(魃:한발귀신)이라는 천녀(天女)를 청해와서 폭우를 멈추게 하고 대군을 지휘하여 벼락, 천둥, 섬전(閃電)의 기세로 치우 부하의 진형(陣形)의 중앙을 어지럽히고 승기를 잡아 치우를 죽여 그 머리를 탁록에 매장했으니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市) 동남의 탁록현으로 이곳에 치우분(蚩尤墳) 한 기가 있다. 중국의 사가들은 황제부락과 염제부락이 합병한 이후 통칭 화하족(華夏族)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말은 화하족의 출발이 염제부락의 마지막 왕 유망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유망은 동이족 강(姜)씨 시조 염제 신농의 마지막 왕으로 흔히 부족국가 시대인 고로 추장 유망으로도 기록되어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는 동족인 치우 천왕의 배달 환웅국에도 전쟁을 벌인 바 있으나 치우 천왕에게 격퇴 당하자 이번에는 황제에게 대들다 멸망해 치우 천왕과 황제가 72회의 판천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앞서 우선 말이 나온 김에 중국인들이 흔히 화샤라 발음하는 화하족(華夏族)에 대해 중국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잠시 짚고 넘어가자. 앞서 필자는 지나 한(漢) 족이 동이족으로부터 서이족으로 민족 개량을 한 다음 다시 수많은 혼혈 잡종과정(하이브리드화)을 통해 서하족으로 건너뛰고 다시 화하족으로 변했다가 진한시절에 비로소 지금의 한(漢) 족이 되었노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이야기를 말하다 보면 혈통 얘기가 나오고 왕실의 뿌리가 나오고 하여 이야기가 약간 길겠지만 현재 말하고 있는 부분은 황제와 치우의 전쟁 스토리를 말하고 있던 중이니까 약간 혼돈스러울 정도로 복잡하게 전개되어도 스토리중심을 까먹지 말고 나중에 다시 기억해주면 고맙겠다.
노자는 원명이 이이(李耳)로 자(字)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으로, 그는 광대(光大)한 이(李)씨 성(姓)의 제 1인이다. 그는 춘추 전기의 동이족 국가 초(楚)국 고현(苦縣) 인이다.
우선 당(唐) 황실의 미스테리부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나라 하면 하이브리드화된 지나족이 한족(漢族)의 정체성을 가진 이후 지나 역사상 가장 번성한 왕실이다. 진나라 시황제의 혈통 여(呂)씨와 왕실의 뿌리 성씨 영( )이 동이족이라는 건 앞서 밝힌 바 있지만 당 황실이 동이족이라 하면 얼른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인지의 「고려사」를 보면 왕건의 혈통이 바로 당나라 숙종의 혈통으로 나오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동이족의 대륙사관적 시각이 아닌 반도사관의 시각으로 보면 전혀 감 잡지 못할 기사임을 알아야 한다.
당나라는 본래 중원본위의 국가에 속했으며 당나라의 황실 성(姓) 씨인 이(李) 씨는 동이족인 노자(老子)의 성(姓)씨에서 온 것이다. 지나의 사가들도 당 황실의 이(李) 씨 성이 이적(夷狄)의 혈통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唐初的皇室及其父祖之輩都有夷狄血統) 따라서 당나라 초기의 정책, 사회풍속 등을 다시 한번 돌아보면 새로운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노자(老子)의 원명은 이이(李耳)로, 자(字)는 백양(伯陽)이며, 시호(諡)는 담(聃)이니, 광대(光大)한 이(李) 씨 성의 제(第) 1인이다. 그는 춘추(春秋) 전기(前期)의 동이(東夷)족 초국(楚國:핵심 키워드는 동이족 국가로 학인이라면 회이국 후예임을 반드시 알아야 대륙사의 신비가 풀리기 시작한다.마왕퇴의 정체성도 이를 알아야 풀린다) 고현인(苦縣人)이다.
*고요상(皐陶像).전설중에 동이족 수령 고요는 요순(堯舜)시기에 형법을 관장하는 관직인 대리(大理)직에 임명되어 마침내 관명(官名)족으로 "이(理)" 성(姓)이 되었다. 고자(古字)중에 이(理)와 이(李)는 상통했다.(傳說中東夷族首領 皐陶 曾任堯舜大理之職(管掌刑法的官 遂以官命族爲理氏 古字中理與李相通)
*노자백서(老子帛書), 곧 <도덕경(道德經)>이니 호남성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에서 출토. 마왕퇴는 지나인에게 동이족 남월국의 소위 오랑캐국으로 회자되는 곳이니 동이족 노자의 도덕경 출토는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당황실 이(李) 씨 성의 뿌리를 찾아서-동이족 고요(皐陶)
이(李) 씨 성은 현재 한족(漢族)의 7.9%를 차지하는 대성(大姓)으로 가히 백가(百家)성(姓)의 머리를 차지한다. 이(李) 씨 성은 본래 동이(東夷)족의 한 갈래인 "조이(鳥夷) 부락"의 "고요(皐陶:화락하게 즐길 요)"가 "혈연의 시조"가 되는데, 요순(堯舜)시기에 형법을 관장하는 "이관(理官)"에 임명된 것으로 인해 이"(理)"가 성(姓)이 되었다.
상조(商朝)의 이관(理官)이었던 이정(理征)의 아들 이정(利貞)이 성(姓)을 얻어 시조가 되었으니, 노자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혁혁하게 이름이 드러났다. 이(李) 씨 당(唐) 왕조에 300년 간 국성(國姓)으로 위엄을 떨쳤으며, 12개 정권을 세웠으며, 칭제한 자가 58인이 되었다.
이(李) 씨 성의 이(李)는 처음에는 장미과에 속하는 오얏나무 식물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李) 씨 성의 직접적인 기원은 상조(商朝) 의 관명(官名)인 "대리(大理)"에서 비롯한 것이다. 갑골문에는 이(李)라는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李) 씨 성의 기원은 원시인류의 순박한 생활습관과 더불어 밀접한 관계가 있다.
최초의 "이(李)"는 <설문(說文)>에서 "이(李)"는 열매다" 오얏나무는 장미과에 속하며...씨는 구형으로 여름에 성숙해 홍색광택을 띠고 맛은 시고 달며, 식용으로 쓰이며, 일명 "가경자(嘉慶子)"라 한다" 하였다.
< 통지(通志)·씨족략(氏族略)·관직으로 씨를 삼다(以官爲氏)>에 "이(李)씨는, 고요(皐陶)가 요(堯)의 대리(大理)가 되었는데, 이로 인해 이 관직에 부름받은 족을 이(理) 씨로 삼았다. 상조(商朝) 반년에 이정(理征)이 이(李)씨로 바꾸었다.
중국 성씨 발전사 가운데, 이(李) 씨 성은 주(周) 이후의 제 사적에 보인다. 「국어(國語)·정어(鄭語)」가운데의 축융(祝融)의 후에 8성(姓), 「진어(晋語) 4」가운데의 황제(黃帝)의 후에 12성(姓), 「좌전(左傳)」에 기재된 서주(西周)의 20성(姓) 모두에 이(李)씨 성은 보이지 않는다.
「성해(姓解)」에도 설명하기를, "주(周) 이전에 이(李)씨는 보이지 않는다.「사기(史記)」에 말하기를, "주(周)로부터 노담(老聃)이 있으니, 이(李)씨 성(姓)이다." 이후로 이(李)씨 성(姓)은 점점 증가한다. 이(李) 씨 성의 기원에는 다음의 5종이 있다.
첫째, 전설 가운데 동이족 수령인 고요(皐陶)는 일찍이 요순(堯舜)의 대리직(大理職:형법을 관장하는 관리)에 임명되니, 그 식솔 제족들이 이(理) 씨가 되었는데 고자(古字)중에 "이(理)"와 "이(李)" 자는 서로 상통해서 쓰는 글자였다.
둘째, 노자(老子)는 조상들이 이관(理官)이 되어, 이(理) 혹 이(李)로써 씨(氏)를 삼았다. 또 노자(老子)가 이(李)씨 여자의 소생이라는 설이 있다.
전설에 이(李)씨 모친이 81년 동안 뱃 속에 태아를 품고 있으면서, 오얏나무(李樹) 아래를 노닐다가 좌측 장부(腸腑)를 가르고 노자를 낳더니, "태어나면서 오얏나무(李樹)를 손으로 가리켜, 이로 인해 성으로 삼았다" 손으로 가리킨 나무를 성(姓)으로 삼아 불러왔다는 것은 망설(妄說)이다.
셋째, 춘추시대 조(趙)나라 장령(將領) 무안군(武安君)의 후대에 이좌거(李左車)가 있는데, 그 후예가 이(李)씨가 되었다.
네 번째, 북위(北魏)는 이(李)씨로 바꾼 것을 꾸짖었다.
다섯 번째, 당대(唐代) 서(徐), 병( ), 안(安), 두(杜), 호(胡), 홍(弘), 곽(郭), 마(麻), 선우(鮮于), 장(張), 아포(阿布), 아질(阿跌), 사리(舍利), 주사(朱邪), 동라(董羅) 등 의 씨(氏)가 건국에 공(功)이 있다는 이유로 인해 이(李) 씨 성(姓)을 하사 받았다.
이상에서 이(李)씨 성(姓)의 5가지 설명 가운데, 앞의 3종류는 「신당서(新唐書)·종실세계표(宗室世系表)」중에 하나의 근원으로 합해지니, 고요(皐陶), 노자(老子), 이좌거(李左車) 동일 세계(世系)중의 인물이 된다.
이에 대해 일찍이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있으니, 「승암집(升庵集)」 권 50 <이씨성은 하나가 아니다(李姓非一)>는 자못 첨예하게 말하여, "농서( 西)의 이(李)와 당실(唐室)의 이(李)는 동족이 아니다"고 말하고, 「신당서(新唐書)·종실세계표(宗室世系表)」는 왜곡 아첨된 설이라 하여 "부회왕찬(附會枉撰), 미시지설(媚時之說)"이라 했다.
진인각(陳寅恪)도 일찍이 당 고조 이연(李淵)의 조상 선조에 대해 고증을 진행해, 이연(李淵)의 조상 선조는 조군(趙郡) 이(李)씨의 후예로 여기고, 농서( 西) 이(李) 씨의 후예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로 인해 그 족(族)은 조주(趙州) 소경현(昭慶縣)(지금의 하북 융평현(隆平縣)에 장사지내졌다.
그러나 조군 이씨와 농서 이 씨는 그 근원이 하나임이 이미 밝혀진 상태다. 이상으로부터 가히 알 수 있듯이, 「신당서(新唐書)·종실세계표(宗室世系表)」가운데 기록된 세계(世系)에 대해, 세인은 논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성씨학의 저작은, 고요(皐陶)가 이(李) 성(姓)의 조상이 된다는 것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대당(大唐)의 종실(宗室)에 이르면 이(李)씨는 한(漢) 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이적(夷狄)에 속한다. 이미 화하사관이 드러난 유가사관의 필법으로 이적을 금수시한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이적을 폄하해 설명하기를 "당(唐)은 이적(夷狄)에 원류(原流)를 두고 있어서, 생각건대 규문(閨門)이 예를 잃어버리는 일이 다르지 않다"라 했다.
당(唐) 초기의 왕실 세습 이전에는 문벌을 우선시하는 습속이 있어 분분히 소리 높여 자신이 세가(世家) 대족의 후예라 칭하곤 했는데 당 황실가인 이 씨 가문 역시 이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당조에 수정(修訂)된 「씨족지(氏族志)」를 보면 왕실에 불리한 씨족은 모조리 배척해 없앤 동시에 자기 혈통에 유리한 것은 가지와 잎을 보태어 이(李) 씨가 서량(西凉) 무소왕(武昭王) 이고(李暠)의 정통후예라 성칭(聲稱)한다.
왕실의 역사가 이같이 동이족의 혈통을 숨기고 가지를 보태는 형국인데 일반 서민의 혈통과 역사가 분식됨은 보통이었다. 「비급신서(秘 新書)」는 「성찬(姓纂)」 및 「신당서(新唐書)·종실세계표(宗室世系表)」를 인용해 기재하기를, "이(李)씨는 제(帝) 전욱고양( 頊高陽)의 후예다. 전욱( 頊)은 대업(大業)을 낳고 대업은 여화(女華)를 낳고 여화는 고요(咎繇성 고 또는 허물구, 역사 또는 부역 요⇒ 皐陶)를 낳았다" 그럼 고요는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넘어가자.
중국 족보사료에 의하면 고요(咎繇:皐陶)는 동이부족 수령이 되어, 활동 중심지가 지금의 산동성 곡부(曲阜) 시(市)인 언(偃:奄)이었다고 말한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세기(世紀)>를 인용해 고요(皐陶)에 대해 설명하기를, "곡부(曲阜)에서 태어났다.
곡부(曲阜)는 언(偃) 땅인데, 고로 제순(帝舜)이 이로 인해 사성(賜姓)을 내렸으니 왈 "언(偃)"이다" 이는 「좌전(左典)」가운데 설명한 바 있는, "천자가 태어났으므로 사성을 내렸다(天子因生而賜姓)"이다. 고요(皐陶)는 요(堯)가 염황이(炎黃夷:염제, 황제) 연맹 수령이 되었을 때에 이관(理官)으로 임명되었으니, 곧 사법(司法)을 관장한 장관(長官)이다.
「사기오제본기(史記五帝本紀)」에는 그가 5종류의 형벌인 묵(墨:온몸에 먹을 그려넣는 형벌), 의( :코베는 형벌), 비( :발뒷굼치를 베는 형벌로, 잘린 사람을 "올자"라 부르는데 "올자"는 장자에 많이 보인다), 궁(宮:불알을 떼는 형벌), 대벽(大 :사형)을 제정해 책임을 맡아, 죄의 경중에 따라 형량을 다스리고, 또 5형을 쓰지 않는 죄인은 분류를 매기어 내보냄으로써 천하의 인심을 얻었다고 한다.
전설에, 고요(皐陶)는 선악의 진위(眞僞)를 가리는 일종의 특이한 외뿔 짐승 해태( :論衡에 선악을 아는 외뿔짐승의 羊이라 하였다)를 길렀는데, 이 짐승의 판단으로 시비선악을 잘 내려 순이 정권을 이양 받은 후에도 대리(大理) 직에 있어 천하의 죄악을 잘 평정하여 사람들은 편안히 살면서 즐겁게 직업에 종사했다 한다.
*신화전설에 이(李) 씨 성(姓)의 시조인 고요(皐陶)는 바로 이 선악을 정확하게 아는 신령한 짐승 덕으로 옥리(獄理)를 잘 판단했다고 한다. 그는 이 독각기수(獨角奇獸)에 힘입어 형옥(刑獄)을 잘 다스려 명예를 얻었다.-이 독각기수는 해태로 해태는 바로 무신인 치우의 귀면복사신앙에 기인한 것임을 알면 고요와 귀면복사의 대표 해태, 혹은 해치와의 결합은 더욱 동이족 고유의 민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할 수 있겠다. 헌법재판소에도 고요의 해태인 독각기수 상이 세워져 있다.
임직에 있는 동안 고요는 수 차례에 걸쳐 현명한 계책을 내놓았으며,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 반드시 삼가 그 몸을 닦도록 하여, 특별히 "지인(知人)"과 "안민(安民)"을 강조했다고 한다. 순(舜)은 고요(皐陶)를 최고의 현신(賢臣)으로 여겨 누구를 후계로 삼아야 할지 물으려 했다.
그러나 순(舜)은 미처 그럴 새도 없이 창오에서 우(禹)의 세력에게 쿠데타를 당하고 죽었지만 대륙의 사서는 순(舜)이 심지어 고요(皐陶)에게 선양하려 했지만 고요(皐陶)가 먼저 병들어 죽었다고 말한다. 아무튼 대륙사를 떠들어 보면 좁쌀만 한 반도식민사관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동이족이었던 고요는 대단한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고요(皐陶)의 아들이 바로 상고 대륙사에서는 고요(皐陶)보다 더 유명한 백익(伯益)으로 그는 우(禹)를 타도하고 제위(帝位)까지 올랐다가 다시 우(禹)의 아들 계(啓)에게 타도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고요(皐陶)가 죽은 후, "그는 육(六)에 장사지내졌다" 「사기(史記)」는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해 설명하기를, "안휘 수주(壽州) 안풍현(安豊縣:合肥바로 위) 남쪽 130리에 옛 육성(六城) 동쪽에, 우(禹)는 그의 어린 자식을 육(六)에 봉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이를 기념해서인지 수주에 우왕묘(禹王廟)가 세워져 있다) 이후로 육(六)은 다시금 일개 "언(偃)" 성(姓)의 소국(小國)이 된다.
그러나 초(楚)국 목왕(穆王)이 이를 멸해 버렸으니, 계보가 없다. 고요(皐陶)에게는 장자 백익(伯益)이 있었는데, <제왕세기>에 설명하기를, "백예(伯 (益))는, 순(舜)왕을 위해 가축을 많이 길렀으므로, 가득 차 넘칠 "영( )" 씨 성(姓)을 사성 (賜姓) 받았다" 이로써 가히 알 수 있듯이, 백익(伯益)은 잘 훈련된 조수(鳥獸)로 인해 순(舜)으로부터 "영( )" 성(姓)을 사성(賜姓) 받았으며, "영( )" 성(姓)은 부락의 수령이 되었다.
고요(皐陶)의 둘째는 이름이 중견(仲甄)으로, 중언(仲偃)으로도 불렸는데, 거듭 언(偃)이 성(姓)이 되었다. 이후, 언(偃) 성(姓)은 고요(皐陶)를 조상으로 받들고 성(姓)으로 씨(氏)를 삼았다.
고요(皐陶)의 후예는 역우(歷虞), 하(夏), 상(商) 26세 기간에 이관(理官)이 된다. 고인(古人)이 관명(官名)으로 씨(氏)를 삼은 것에 따라, 고요(皐陶) 및 그 자손은 이(理) 씨가 되었다. 관(官)으로써 씨(氏)를 삼은 이(理)씨는 문제의 이정(理征)이라는 사람 때 이르러, 상(商)의 맨 마지막 왕인 폭군 주(紂) 왕의 이관(理官)으로 임명되어, 상(商) 주(紂)가 혼용혼용무도(昏庸無道)하여 여색에 빠지자, 여러 차례 나아가 간언하고, 법을 지켜 아첨하지 않았으나 이미 혼음(昏淫)해진 주(紂) 왕은 이를 용납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죽을 화(禍)를 만났다.
이정(理征)의 처자 설화(契和)씨는 어린아이 이정(利貞)을 데리고 도망 길에 올라, 지금의 하남(河南) 경내인 이후(伊侯)의 터로 달아났다. 굶주림을 참지 못하다가 나무 한 그루 위에 열린 과실을 보고, 곧 따먹으니 모자(母子)는 겨우 살 수 있었다.
그 후, 이정(利貞)은 주(紂) 왕이 추격해 잡힐 것을 두려워해 감히 이(理) 상(姓)을 칭하지 못하고, 목숨을 구한 은공으로 "목자(木子)", 이(李)씨로 개칭했다. 이것이 후일 "지수위성(指樹爲姓)"의 설이되었다. 이 설을 생각해 보면, 이(李) 성(姓)의 시원은 상말(商末) 주초(周初)에 해당된다.
이상으로부터 가히 알 수 있듯이, 이(李)씨 성(姓)은 고요(皐陶)가 혈연의 시조가 되니, 그는 언(偃) 성(姓)의 후예로, 일찍이 관(官)으로 씨(氏)를 삼아 이(理) 성(姓)을 칭했다. 청(淸)의 유학자 진가모(秦嘉謨)가 편집한 「세본(世本)」에 의거해 상고해 보면, 고리(古理), 리(里), 이(李) 3자(三字)는 함께 통한다. 「사기·오제본기(史記·五帝本紀)」에 고요(皐陶)가 대리(大理)가 되었다 기재하고,
「관자법법(管子法法)」에 기재하기를, 고요(皐陶)가 이(李<理>)가 되었다 하고, 「사기·위세가(史記·魏世家)」에는 "이극(李克)"이라 기재되어 있고,「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이극(里克)" 등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리하여, 이(李) 씨 성(姓)은 이관(理官)이었던 고요(皐陶)가 혈연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이 만들어진 것이니, 실제로 망령된 말이 아니다.
고요(皐陶)는 이(李) 씨 성(姓)의 혈연 시조가 되어 정직 과감하고 매우 창조적이었다고 전한다. 그의 공덕은 아주 깊어서 이(李) 성(姓) 자손의 본보기이자 동시에 교만이 된다. "지수위성(指樹爲姓)"의 설법에 따라, 강직하여 굽히지 않는 이정(理征)의 아들 이정(利貞)은 마땅히 이(李) 성(姓)이 성(姓)을 취득한 시조이다.
한편, 도교(道敎) 시조 노자는 이름이 이이(李耳)로 "정사(正史)"에는 이(李)씨 성(姓)의 제 1인으로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이성족(李姓族)의 계보는, 이(李) 당왕조(唐王朝)의 상세한 고증으로 인해서 가까스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혈맥은 번창해 넘친 나머지 가지치고 나간 지엽이 아주 많아졌다. 현재 「신당서(新唐書)·종실세가표(宗室世家表)」에 기재된 바에 의하면, 이정(理征)의 이(理)를 이(李) 성(姓)으로 고친 후의 종계(宗系)를 다음과 같이 찬술(撰述)하고 있다.
이정(理征)은 설화(契和)씨의 여식을 아내로 맞아 창조(昌祖)를 낳았는데, 창조는 진(陳)의 대부(大夫)가 되어, 고현(苦縣)에 보금자리를 꾸몄다. 진(陳)은 서주(西周)의 진국(陳國)으로 옛터는 지금의 하남성 개봉(開封) 이동(印), 안휘(安徽) 박현( 縣) 이동(印)으로 춘추 말년에 동이족 초국(楚國)에게 멸망되었으며, 고현(苦縣)은 지금의 하남성 녹읍(鹿邑) 현(縣) 동쪽 10리에 있는 마을이다.
창조(昌祖)는 동덕( 德)을 낳고, 동덕의 증손 석종(碩宗)은 주(周) 강왕(康王)으로부터 고현(苦縣)에 있는 채읍(采邑)을 하사받았다. 5세손 건(乾:字는 元果)때에 이르러 주(周)대의 상어사대부(上御史大夫)를 맡았다. 그는 익수(益壽)씨의 여식 영부( 敷)를 아내로 맞아, 아래로 이이(李耳:字는 伯陽,老聃(노자)으로 칭한다)를 낳으니, 그는 주(周) 평왕(平王) 때에 태사(太史)로 임명된다.
「사기·노자한비열전(史記·老子韓非列傳)」에 설명하기를,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 역향(歷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라"했으니, 이 고현(苦縣)이 바로 초(楚)나라가 멸한 바 있는 바로 그 진(陳) 나라의 고현(苦縣)이다.
또 설명하기를, "성(姓)은 이(李) 씨로, 이름은 이(耳), 자(字)는 백양(伯陽), 죽은 뒤 임금이 내린 시호는 담(聃)으로, 주(周)의 수장지사(守藏之史:도서관장)를 지냈다" 이 기록은 정사(正史) 가운데 처음으로 이(李) 씨의 한 개인을 명확히 가리킨 것이다.
이후 「광운육지(廣韻六止)」는 「사기」의 설을 따온 「풍속통(風俗通)」을 인용해 "이(李) 씨가 이 백양(李伯陽:노자)의 후손"이라 여긴다. 이이는 고대의 성인으로 만사만물에 정통 박식하여 공자가 일찍이 그에게 가 예를 물으니, 유익함을 얻되 얕지않으니, 설명하기를, 내가 노자를 보니, 풍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의 형상이라 하였다. 노자의 학설은 후세에 전해져 「도덕경(道德經)」 상, 하 편 5천 자를 남겼다.
이이(노자)의 후대 이종(李宗:자는 尊祖)은, 본래 진(晋)국 사람인데, 전국시대 위국(魏國) 성읍(城邑) 단간(段干)에 봉해져 읍(邑)을 성(姓)으로 삼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간목(干木) 대부 또는 단간목(段干木)이라 불렀다. 위문후(魏文侯)가 매번 그 문앞을 지나갈 때면 반드시 수레에 내려서 걸어갔다.
그는 일찍이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로부터 배움을 구해 숨어서 벼슬하지 않았다. 위문후(魏文侯)가 그의 재능을 높이 사 그를 찾아보고 관작을 주려 했으나 단간목은 위문후를 피해 담장을 넘어 도망가 만날 수 없었다. 위문후는 더욱 존경하여 단간목의 집에 거마를 몰고가 집 앞에 내려 존경의 뜻을 표했다.
엎드린 측근들이 이해를 못하자 위문후는 단간목이 비록 누추한 곳에 살고 있지만 그 현덕한 명성이 천리밖에 가득하므로 내 어찌 그를 존경치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이후, 단간(段干)씨는 후대에 널리 각지에 유포되었으며 동이(東夷) 국가 산동성 제(齊)나라에도 단간붕(段干朋), 단간륜(段干綸)이 있으며, 같은 동이(東夷) 국가인 한(韓)나라에도 단간월인(段干越人)이 있고, <전완세가(田完世家)> 에 단간명(段干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