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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교회의 조선 전도
사와 마사히코(澤 正彦)
* 저자가 한국의 신학대학에서 4년간 강의했던 노트를 정리한 '일본그리스도교사'라는 책에 실린 여섯 번째 글입니다. 제목을 보고, '일본교회가 조선에 무슨 전도를?' 하고 의아해서 읽어보았더니, 다행히 관점이 바르고, 무교회에 관한 내용도 들어 있어 소개합니다. 이분은 동경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경신학대학원과 연세대연학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서울의 송암교회에서 협력목사로 일했다고 합니다.(카페지기)
일본 개신교회는 아시아선교회에 속하여, 외국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배운지 겨우 120년으로 역사가 짧다. 그러나 일본교회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외국 선교사로부터 분리되어 독자 교회를 형성하였다. 교회의 자립성을 측정하는 척도로 교회의 해외선교 측면을 보기도 하는데, 일본교회에 해외 선교가 있기는 했는지 살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없었다는 게 맞다.
일본 교회는 조선과 대만이 식민지였을 때, 그곳에 사는 일본인을 상대로 전도를 하기는 했으나, 순수하게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 전도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식민지 이외의 해외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던 적도 전혀 없었다 할 것이다. 현지인을 대상으로 현지어로 전도한 예는 구만주와 몽고에 전도하러 간 그룹이 있었고, 조선에서는 플리머스 형제단에 속한 노리마쯔(乘松雅休)와 한국이름 전영복으로 불렸던 織田次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현지인을 대상으로 현지어를 써가며 복음을 전도했다. 일본 그리스도교계에 획기적인 분들이지만, 일본 주류교회가 파견한 게 아니라, 단독으로 활동한 사람들이었다.
일본교회가 조선에 진출한 것도 식민지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어 가능했다. 대만, 만주, 조선에 관한 비교 연구가 더 이루어져야 하나 아직 이런 광범위한 연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여기서는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기초로 일본 교회의 조선 전도에 대해 초점을 맞춰 생각해 보고자 한다.
1930년대 후반의 기독교 연감에 따르면 조선의 많은 도시에 60여개 정도의 일본 교회와 전도소가 있었다. 부산, 마산, 대구, 광주, 군산, 전주, 대전, 경성, 평양, 해주, 사리원, 신의주 등의 도시에는 일본기독교회, 조합교회, 감리교회의 간판을 단 교회가 하나씩은 있었다. 성공회와 구세군도 일본인을 상대로 교회를 갖고 있었다.
일본교회의 조선 전도라 했지만, 실제로는 그곳에 사는 일본인 전도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일본 전도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고, 더구나 일본 교회는 내지, 외지라는 차별적인 말을 썼다. 조선을 일본의 외지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조선 전도이지만 실상은 일본인이 대상이었다. 그 표리부동한 속내가 일본 교회의 조선 전도에서 드러난다. 1910년의 한일합방 후, 조선에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일본교회는 조선 전도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결국 그때 뿐 소리로만 그쳤지 실제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서양 선교사의 전도를 대신하자는 '조선 전도론'은, 1910년의 한일합방, 1919년의 삼일독립운동, 1930년대의 신사참배 강요 문제 등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진지하게 내외지의 교회에서 대두되었다. 그러나 조합교회가 한일합방 이전부터 총독부의 원조를 받아 조선교회들을 흡수하여 교세를 확장해간 것을 제외하고는, 일본인에 의한 전도는 사실 없었다. 따라서 일본교회의 조선 전도는 한국의 국운이 기울어 일본에 강제로 흡수된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되어 러일전쟁 때 일시 중단되었으나,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일본 주류교회인 일기(日基), 조합, 감리교 등이 계속해서 조선에 목사를 파견했는데 특이한 건 조합교회였다.
조합교회에서 조선 전도에 애쓴 이는 와타세(渡瀨常吉)였다. 그는 1899년 서울에 경성학당을 설립하여 조선의 학생 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때의 경험이 전도에 큰 경험이 되었다. 와타세의 이런 업적을 총독부는 크게 평가하여 거액을 지원하였다. 와타세가 복음 전도에 힘쓴다고 했으나, 총독부의 과도한 환심을 사서 총독부의 동화정책에 협조하는 바람에, 나중에 조합교회 내부에서까지 비판의 목소리를 들었다. 또 그가 관계한 수십의 조선 교회도 삼일운동 후에 다 떨어져나갔다. 그의 조선 전도는 실패한 것이다.
조합교회의 전도는 한때 성공한 듯 보였다. 외국 선교부의 간섭을 거절하고 '조선 자유교회'라 칭하며 독립을 추구했다. 외국 선교부의 행정 간섭과 보수적 신학에 반대하던 자유교회가 전라도와 평안도 지방에 많았다. 1919년 통계에 의하면 다른 교파가 10여개의 교회를 가진 데 비해 조합교회는 59개나 되었다. 그런데 1921년에는 오로지 7개로 줄어든다. 삼일운동을 거치며 기독교인들의 민족감정이 일본조합교회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부터 손을 뗀 조선의 교회는 독자 노선을 걸었으며 장로교나 감리교로 통합되었다.
일본 교회의 한 가지 착각은 1930년대부터 패전까지의 내선일체에 의한 교회합동이었다. 서양 선교사가 모두 귀국하자 일본교회는 이제야말로 우리의 기회라 생각하였다. 일본과 조선의 교직자 일부가 연합하여 조선기독교 연합회를 조직하고, 양국의 화합을 다지며 자주 집회를 열기도 했다.
1943년 결국 조선 교회들은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과 일본기독교 감리교단으로 개명하고 둘로 정리되었고, 1945년에는 두 교단이 통합되어 마치 일본교회의 조선 전도가 완성된 듯 보였다. 그러나 패전이 왔고, 꿈은 사라졌으며 조직은 소멸되었다. 일본 교회는 다른 민족, 다른 문화라는 현실 인식이 없었다. 일본 총독부의 식민지 통치를 도와 황민화 정책에 협조하였으니, 민족의식이 강한 조선인들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조합교회의 총독부 결탁에 대해 일본의 다른 교파들은 비판적 자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1930년대 후반이 되면서 다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1944년에 나온 '일본기독교단에서 대동아 공영권에 있는 기독교에 보내는 서한'을 보면, 일본의 수치스러운 조선전도론, 대동아공연권 전도론의 표본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1967년 '제2차대전 중 일본기독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당연한 조치였다.
일본교회의 조선 전도 계획은 겉과 속, 이론과 실천,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조선 전도는 한국 근대사에 일어났던 많은 사건에 대해 한국인과 일본인 그리스도인의 견해차에서 기인한다. 일본 교회의 대표로서 일본기독교회의 주장을 요약하고자 한다.
한일합방 이후부터 일본교회는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과 역동성에 마음을 빼앗겼다. 특히 1907년의 이른바 대부흥에 대해서는 부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교회의 양적 발전을 좋게 평가하면서도 질적 발전에는 일본 교회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뿌리깊은 반일감정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일본 매스컴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배후에서 반일감정을 조작한다고 보도하였지만, 일본 교회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항일 태도는 한국인 스스로의 것이며, 망국의 비운을 안타까워하는 당연한 태도라 여겼다. 그러나 1909년 한국의 가톨릭 청년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자, 일본교회는 '폭도의 독수(毒手)'에 쓰러진 이토 님을 애도한다고 발표하며,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간 이토를 링컨에 비유하였다. 일본교회는 안중근이 가톨릭 신도라는 걸 무시하였다. 이를 당시 한국의 대한매일신보가 상세하게 보도하였는데, '의사 안중근'이라 부르며 그 뜻을 기렸던 것과 매우 대비되는 처사였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던 해, 일본 대다수의 국민은, 이 일이 일본과 한국 국민 모두에게 기쁜 일이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본교회 그리스도인들도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서 약속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과 같다면서, 이제 곧 일본은 한국의 친권자로서 한국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일본 그리스도인에게 뿌리깊이 흐르고 있는 무사도적 국가주의가 이런 주장을 하게 만들었을까? 일본교회의 대표적 인물인 우에무라(植村正久)는 '과연 일본의 한국통치가 한국의 진보와 자유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일본의 책임이 중대하니 자중하며 통치에 임해야 한다'고 권하였다. 또 한국 그리스도인 중에 망국의 비운을 한탄하며 독립을 주장하고 반일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는데, 이를 무사도적 정신으로 보거나 한국의 장래를 생각할 때 칭찬할 일이지 비판할 일이 아니라고 일본의 '복음신보'에 기고하였다.
이 '복음신보'는 일본 군부에 의해 발매금지되었다. 일본교회의 총독정치에 대해 1912년 105인 사건, 삼일운동 등이 일어날 때마다 준엄한 어조로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두 사건을 서양 언론들은 상세히 보도하였으나, 정작 일본 언론은 보도통제를 당하여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정부 입장을 전달하는 데 그쳤다.
특히 조합교회는 총독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철저히 총독부 입장을 대변하여, '불령선인들의 소요'라고 표현하며 조선인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와 반대로 복음신보는 한일합방 때의 낙관론을 버리고, 105인 사건 당시 등장한 고문 정치, 삼일운동 이후의 야만적인 무단정치, 이른바 일본 정신이라는 폭력에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
수원 제암리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신속 정확하게 보도했던 것도 복음신보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철저하게 총독정치 전반을 비판하게 되는데, 대표적 필자가 군산에서 시무하던 목사 스즈키(鈴木高志)였다. 서울에서 일하던 일본인 목사(秋月致)도 '생명의 존엄'이라는 글을 써서, 제암리교회 사건을 왜곡 보도한 일본 언론을 비판하고 인명존중을 호소하였다.
당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도 105인 사건과 삼일운동에 대해 총독정치를 비판하기도 했으나, 그들이 조선의 독립에까지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총독부의 완화정책만을 촉구하였고, 자주독립을 지원하지는 않았다. 조선의 자주독림을 확실히 주장했던 일본인은 사회주의자들 중 일부 뿐이었다. 복음신보도 조선인 차별을 없애고, 언론 자유를 보장하고, 헌병정치를 중단하고, 동화정책을 쓰지말라는 것이 비판의 논점이었다. 그들도 자주독립이라는 주제는 다루지 않았다.
앞에서 말한 스즈키 목사가 2회에 걸쳐 복음신보에서 주장한 것도 개혁, 즉 완화정책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정신의 교만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종교가로서의 사명을 재확인 하였다. 그 글은 지금 읽어도 매우 신선하다. 제암리 사건을 들어 복음신보가 희생자를 기리는 조사(弔詞)의 시 2편을 게재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1930년대 후반이 되자 조선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고난을 겪고 있었다. 그 결과 50 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조선의 이 고통을 일본 교회는 어떻게 보았을까? 신사참배 문제가 조선의 국민생활, 교회생활까지 침투하기 시작한 것은 남산에 대신사가 세워진 1925년 이후의 일이었다. 일본총독부는 교육령을 발하여 미션스쿨의 종교교육을 금지하고 일본의 수신도덕을 강요하였으며, 학교에 천황의 어진을 걸고 절하게 했고, 신사참배 실천을 종용하였다. 조선인에게 일본의 우상을 강요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복음신보에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총독부가 모든 교회에 전면적인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 신사참배가 종교행위라고 문제시 한 것이다.
조선 교회는 일본 교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알고 있었으며, 일본 교회 대표가 이 종교행위(우상 숭배)를 수락한 데 대해 비판적 시각을 보이고 있었다. 1938년 토미다(富田滿)가 평양교회에 가서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이지 종교행위가 아니라고 조선의 목사들을 설득하였다. 이때 주기철 목사가 용감하게 토미다에게 질문하는 장면이 복음신보에 실렸다. 당황하여 변명으로 답하였으면서도, 토미다는 조선의 형제들이 자신의 설득을 받아들여 신사참배를 하기로 했다고 기쁨을 전하였다. 조선교회의 신사참배 결의가 결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다.
일본교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이미 1930년에 끝났기 때문에 8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 조선교회의 신사참배에 대해서 일본교회는 물론, 조선에 있는 일본인 목사들도 전혀 이견이 없었다. 오히려 조선에서 시무하던 일본인 목사들이 신자들을 이끌고 가서 신사참배하였고, 적극 권면하였다. 당시의 현실이 신앙적으로 얼마나 잘못된 판단이었는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무교회 사람들과 한국의 관계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일본 무교회 창시자 우치무라 간조는 한일 합병에 슬픔을 표시한 유일의 그리스도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예언자적 통찰로 일본의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면서,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비전론(非戰論)을 적극 전개하였다.
우치무라 그룹 가운데서, 특히 조선의 상황을 걱정하며 격려한 이가 야나이하라 다다오이다. 야나이하라는 1924년부터 동경제국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학문적으로 비판하였다. 1937년에는 결국 "일본의 장례식을 해주시오."라고 한 말이 문제가 되어 교수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1940년, 부산과 대구를 거쳐 서울에 갔다. 서울 YMCA에서 1주일간 로마서 강연을 했다. 로마서 11장의 강의에서는, "이스라엘(일본)의 구원은 그 백성의 교만으로 사라져갔고, 이방인(조선)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먼저 나타났다."고 해석함으로써 조선 민족을 격려하였다. 그때의 로마서 강의는 야나이하라전집에 그대로 수록되었다.
그가 조선에 머무는 동안 끊임없이 경찰의 감시를 받았지만, 성서강의를 통해 일본을 향한 최후의 저항을 멈추지 않은 인물이었다. 조선의 청중은 이 강의를 매우 감명깊게 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야나이하라의 개인 잡지 '가신(嘉信)'이 한국인 사이에 매우 많이 읽히고 인기가 있었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후, 잠시 일본과 한국교회의 연결이 단절되었던 시기에도 무교회의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는 신앙의 교류가 소박한 형태로나마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한일그리스도교 교류역사에 있어 특기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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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떤 상황이 닥쳐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 만큼 확신이 있지 않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데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받아야만 한다 이 일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그나라를 준비하는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이다. 준비하는 자만이 그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바울서신을 보면 그는 모든 성도들을 위해 정말 눈물나게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도 우리 주변 사람들을 위해 서로 중보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