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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예수님은 부활이시오(이겨레)
설교: 나균용 목사님
본문: 요한복음 11:25-26
(설교 요약)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또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며, 부활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부활을 믿지 않는 무리들이 있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음에도 제사장 역할을 하며 유대교의 큰 종파를 이루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대적했던 자들이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심판을 믿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진 이 시대에 많은 교회가 쇠퇴하며 신앙의 열정이 식어가고 있다. 예전처럼 부흥회나 새벽 기도에 참여하는 열심이 줄어들고, 특히 코로나 이후 많은 이들이 교회 출석 대신 온라인 방송을 통해 예배를 드리며 만족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히 교리적으로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활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가 부활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깊이 새기며 진정한 부활의 신앙을 지녀야 한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말로만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으로 증명하셨다. 성경에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신 세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또한 자신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예언하셨으며, 그 예언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셨지만, 당시 제자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신 후에야 그들이 진정으로 깨달았다. 오늘날에도 성령의 도우심 없이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성령이 임하시면 부활 신앙을 확신하게 된다.
부활 신앙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체험되어야 할 신앙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믿을 뿐 아니라, 부활의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증인이 될 수 있다. 성령의 충만함이 있어야 이러한 체험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감사와 확신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어려움 속에서도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일한다. 이러한 신앙을 지닌 자만이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메시지를 확신 있게 전할 수 있다.
오늘날, 자살률이 증가하는 이유는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영적으로는 공허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부유한 나라일수록 자살률이 높은 것은 허무함과 상처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부활 신앙이 더욱 필요하다. 형식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삶의 풍파와 시련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더 힘차게 전진한다. 인생의 어려움은 우리를 더 크게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려움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가까이 나아가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찾고 계시며, 모든 성도들이 이 부활 신앙을 소유하기를 원하신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서 예수님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부활은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뉜다. 우리는 생명의 부활을 선택해야 한다. 심판의 부활이 분명히 존재하며, 믿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심판과 지옥의 실재는 이 세상에서도 악한 자들의 불안과 두려움으로 증명된다.
이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참된 평안과 담대함을 누릴 수 있다. 첫째 부활은 영광스럽고 복된 것이며, 이때 부활한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천년 왕국에서 다스리는 왕들이 될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부터 거룩하게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성령이 없이는 생명력이 없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다.
마지막 때에 우리는 형식적인 신앙을 버리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듣되, 그들의 거짓되고 형식적인 행실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도 그들의 말이 아닌 진정한 삶의 본을 따라야 한다.
이 부활 신앙을 통해 세상의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더욱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며, 다른 이들에게 생명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42. 나는 부활이요
설교: 나균용 목사님
(설교 요약)
예수님께서 마귀에 대해 경고하시며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을 미혹하며,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리려는 악한 영이다. 마귀는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 끌어가려고 끊임없이 유혹하고 공격하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마귀의 권세는 이미 패배한 것이다.
부활의 첫 번째 승리는 바로 마귀에 대한 승리이다. 이 세상은 영적 전쟁터와 같아서, 마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마귀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죄와 사망을 무력화시키셨다. 예수님이 승리하신 덕분에, 우리는 마귀의 유혹과 공격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피하리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을 가진 우리는 마귀의 속임수와 유혹을 분별하며,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부활의 두 번째 승리는 사망에 대한 승리이다. 사망은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죽음은 더 이상 우리의 끝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서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외치며,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신 승리를 선언한다. 비록 우리의 육신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지만,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영원히 살아간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소망을 갖는다.
부활의 세 번째 승리는 죄에 대한 승리이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영적인 사망을 가져오는 원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심으로 죄의 권세를 완전히 꺾으셨다. 이제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으며,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 로마서 6장 14절은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귀, 사망, 그리고 죄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 부활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며,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유혹과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담대히 나아간다.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부활의 능력 안에서 매일 새롭게 살아가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귀의 특징과 우리가 그것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마귀는 세 가지 주요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첫째로 욕심쟁이이다. 마귀는 만족을 모른다. 마귀는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한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세상의 재물보다 하늘의 보물을 더 소중히 여기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과 자원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 두 번째로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이다. 마귀는 미워하고 질투하며,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악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런 악한 마음을 이기고, 하나님의 거룩한 진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마귀의 악한 계획에 속지 않고,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세 번째로 마귀는 거짓말쟁이이다. 마귀는 진리가 없고, 거짓의 아비이다. 그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이며, 처음부터 거짓으로 사람을 유혹했다. 이를 극복하려면 진리를 가져야 한다. 진리는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두고, 그 말씀을 깊이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성경을 멀리하고, 믿음이 외적으로만 드러나지만 내면에는 진리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진리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굳건히 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마귀의 유혹과 거짓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진리로 살아가야 한다. 욕심, 미움, 거짓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예수님의 부활 신앙을 따라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들은 작은 실패에 절망하고, 그로 인해 삶의 희망을 잃고 자살하거나 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풍요로운 나라에서는 특히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지식과 성공을 얻고도 인생의 허무를 느껴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망을 이겨내려면 이런 허무를 넘어서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로부터의 승리를 의미한다. 아담의 죄로 인해 사망이 왔고, 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의 부활 뿐이다. 부활의 생명을 받은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의 첫 열매로 말씀한다. 그리고 예수님께 속한 자들이 부활에 참여한다고 한다. 예수님은 첫 번째 부활을 경험하셨고, 그 이후에는 두 번째, 세 번째 열매들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인류의 부활이 이루어진다.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들로, 천년 왕국에서 왕 노릇을 하며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게 된다. 둘째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 후, 천년 왕국이 끝난 후에 이루어진다. 그 때 마귀가 잠시 세상을 미혹하고, 결국 예수님이 마귀의 세력을 멸하며 악인들을 불못에 던지신다. 이 후, 모든 인류가 부활하여 의인과 악인이 갈라지고, 의인들은 영생을, 악인들은 영벌에 들어간다. 우리가 첫째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며, 복음을 전하고, 마지막 때에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43. 예수님은 말씀이시다
설교: 나균용 목사님
본문: [요1:1-3]
(설교 요약)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즉 '로고스'로 선포된다. 성경에서 '말씀'을 '로고스'라고 번역하는데, 이 로고스는 여러 의미를 가진다. 구약에서 성경을 번역할 때, '태초의 말씀'을 '태초의 도'라고 번역한 것처럼, '도'는 인생과 우주의 길을 의미한다. 고대 중국 철학에서는 이 '도'에 대해 연구하며, 인간과 우주의 이치를 깨닫고자 했다. 특히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했다.
로고스의 의미를 세 가지로 보면 먼저 우주와 자연의 이치로 만물의 질서와 반복적인 자연 현상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이치와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또, 인생의 이치로 인간의 삶 역시 일정한 이치와 규칙을 따르며, 그것이 바로 '길'로 표현된다. 마지막으로 하늘의 이치로 노자와 같은 철학자들은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자 했다. 석가모니나 공자, 노자 등은 인생의 고통과 이치를 깨닫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진정한 '도'를 깨닫지는 못했다. 이들은 인간과 우주의 이치를 이해하려 했으나, 결국 예수님이 진정한 로고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 세상의 진리를 완전히 보여주셨다.
고대 사람들은 별을 보고 날씨나 운세를 예측하려 했고, 그 이치를 이해하려 했다. 이런 관점은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하고,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는 진리를 반영힌다. 이는 우주의 질서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현대 중국의 지도자들은 이런 신앙과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공산주의 사상에 의해 무신론적 태도를 취한다. 예전의 왕들은 하늘의 재앙을 막기 위해 기도했으나, 오늘날 중국 지도자들은 그러한 신앙을 무시한다. 공자 역시 그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로고스'로 설명하면서, 예수님이 우주의 근본 이치이자 하나님의 말씀임을 선포한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몸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존재임을 강조한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는 예수님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라고 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이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즉 '로고스'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과 동일하다.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인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는 이유이며,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교회와 신앙이 타락하고 있다는 우려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하며, 실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실천하는 데 소홀히 하고 있다. 이러한 타락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교회의 쇠퇴와 신앙의 약화는 국가와 사회의 도덕적, 경제적 문제를 야기하며, 이는 범죄와 사회적 문제로 이어진다.
과거 기독교 국가로 자랑했던 서구 국가들이 이제 예수님을 버리고 세속적인 길을 걷고 있다. 그 결과,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범죄가 증가하고, 도덕적 타락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과 유럽, 그리고 다른 국가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기독교적 가치가 사라지면서 사회가 어두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한국은 무기 개발과 군사 훈련을 강화하며, 세계 시장에서 군사 및 원전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이사야 60장에 예언된 "세계의 재물이 다 여기로 몰려온다"는 말씀의 성취를 눈으로 보고 있다. 대한민국은 그동안 자주적인 국가 방어와 경제 성장을 이루며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한민국과 같은 국가의 발전,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 한국을 선호하는 현상은 이 로고스의 작용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해놓은 법칙과 이치가 이 모든 변화와 발전을 이끌고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로고스는 단순히 우주의 법칙을 넘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인간은 짐승처럼 본능대로 사는 존재가 아니며, 사람은 도덕과 예의, 그리고 길을 배우고 살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는 것,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은 인류 역사 속에서 중요한 가치로 전해져 왔다.
오늘날의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도덕적인 삶인가를 배우는 것이다. 이는 삼강오륜, 화랑도의 세속 오계와 같은 전통적인 교육 방식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로고스는 우리가 바르게 살아가야 하는 길을 제시하며, 그 길을 따르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임을 강조하고 있다.
타락이란, 바로 인생의 길을 배우지 않고, 본능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의 길을 배우는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로고스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로고스는 단순한 우주의 원리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도덕적 이치와 방향을 제시한다. 이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길이다.
44. 아브라함의 자손
설교: 나균용 목사님
본문: 창15:5
(설교 요약)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본토와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시며, 그에게 큰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복을 나누는 사람이 되도록 하시겠다는 엄청난 약속을 하신다. 이는 단순히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축복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 즉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큰 축복이 된다.
창세기 13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 자손이 티끌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자손의 수를 상상할 수 없는 정도로 많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창세기 15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바깥으로 끌고 나가셔서 하늘의 별을 보게 하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매우 많을 것임을 나타내며,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약속에서 중요한 점은 "자손"이라는 단어가 단수로 사용되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네 자손"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라는 것을 강조한다. 바울은 이 "자손"이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다는 약속은 물리적, 생리적인 자손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자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을 포함한 약속이라는 것이다.
영어 성경에서 "자손"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는 "descendants"나 "offspring"과 같은 복수형 단어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자손"을 단수형으로 이해하고,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한국어 성경에서는 이 점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바울의 해석에 따르면 "자손"은 단수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물리적 후손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구속의 역사를 예고하는 것이다. 이 약속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을 영적인 후손들에게도 적용되며,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축복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다.
따라서 약속의 자손, 성령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이 중요하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실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약속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따르는 마음과 의지가 필요하다.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려는 노력 없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다.
둘째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께 인도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성화된 삶을 살며,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힘쓰는 것이 성령의 자녀로서의 삶이다. 진정한 성령의 충만함은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며,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셋째, 예수님께서 “저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니라”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면,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성령으로 인도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단순히 교회에 다니거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삶에서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겐 심판이 임하지만,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들에게는 복이 임한다. 이 복은 단지 물질적 축복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온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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