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2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절 후 넷째 주)
가장 좋은 길 – 사랑에로 흐르고 펼쳐지는
렘1:4-10; 고전13:1-13; 눅4:21-30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공적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 읽은 누가복음 본문이 이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글이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4:18,19)
예수님은 성경을 읽으신 후, 그것을 풀어 설명해주셨습니다. 그 때 하신 말씀이 21절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선언과 함께 이 구절에 대해 무언가 더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할 뿐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첫 반응은 감탄과 놀라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사람들은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면서 예수님을 의심합니다. 예수는 그저 요셉의 아들일 뿐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보잘 것 없는 처지, 출신성분을 근거로 구원과 해방을 이루어 주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일축하려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속마음을 예수님은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 하고 말하려고 한다.”(4:23)
이어서 주님은 엘리야를 통해 극심한 가뭄 중에 사렙다 마을의 과부를 살린 일과 엘리사를 통해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나병이 고침을 받은 두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입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출신성분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 승복하여 마음을 열었던 두 사람은 비참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이 이방인들의 이야기는 나사렛 사람들의 완고함을 더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자유와 해방의 길을 열어 보여주시는 주님을 거부하고 있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들의 닫힌 마음과 고집스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았습니다. 그러자, 치부를 들킨 것처럼 그들은 모두 화가 잔뜩 났습니다. 사렙다 마을의 과부와 나아만 장군이 마음을 열어 승복한 과정은 간과하고, 속마음을 들킨 것에 격분했습니다. 어찌나 화가 났던지,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를 산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열등감이 폭발하면서, 화를 폭력적으로 분출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화가 일어날 때 보이는 흔한 반응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노예처럼 붙들려 있고, 억눌려서 살고 있는 부분을 적나라하게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어릴 때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시선으로, 커서는 자신의 생각으로, 족쇄를 만들어 스스로를 옭아맵니다. 족쇄에 얽매여 무겁게, 부자연스럽게, 억지로 살아갑니다. 생기, 활력, 자유로움, 가벼움을 잃은 채, 화가 치밀어오를 때마다 꾸역꾸역 삼키고, 슬픔이 몰려오면 억누르면서, 애써 괜찮은 척, 남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도록 자신을 포장합니다.
그러다가 노예와 같은 자기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이 때 우리는 속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자신을 비난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는데 쏟아냅니다. 화를 건강하게 만나고 표현하는 방법을 경험하고 연습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화를 억누르는 쪽으로 가기 쉽습니다. 노예처럼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일어나는 화를 자기를 지키고 일으켜 세우는 에너지로 변형시키는 법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예전에 하던 방식으로, 늘 있던 자리로, 무기력하게 되돌아갑니다.
이마저도 마음이 닫혀 있으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설사 현실을 본다 하더라도 자기를 옭아맨 족쇄를 스스로 풀 수 없습니다. 자유와 해방은 오직 주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이 진리에 순복하고, 순명하는 것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 눈을 뜨고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과 삶을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익숙한 이전의 방식대로, 하던 대로, 보고 싶은 대로,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를 바라보겠다고 고집스럽게 버팁니다.
우리의 닫힌 마음과 고집을 있는 그대로 보는 순간이 오려면 밖으로 뻗어있는 우리의 시선을 내면으로 거두어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대로, 화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마구 퍼붓지 않고, 잠시 멈추어 자기의 의식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살아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흘러가고 펼쳐집니다. 판단하지 않으면서 이 역동적인 흐름을 따라가면,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보게 되고, 부분 부분이 아닌 전체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옮겨갑니다.
살아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흐르고 펼쳐집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표면적인 현상에 머물던 시선을 거두어들여, 본질과 의미를 담고 있는 심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흐름의 리듬을 따르는 것이고, 자유로운 현존이 되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 화, 슬픔,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면, 이 감정들에 저항하지 않고, 그것들을 온전히 알 때까지 그 흐름을 판단 없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일은 맨몸으로 어둠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자유와 해방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부분적인 것에서 전체를 바라보게 되고, 피상적인 것에서 깊이로 들어가는 일은 흘러가고 펼쳐지는 흐름을 고요히 바라보는데서 일어납니다. 온전히 알 때까지 판단하지 않고 이 흐름을 따라가면, 그 끝에 자유와 해방이 있고, 이 모든 것의 바탕이 사랑임을 보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살아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흐르고 펼쳐집니다. 그리고 이 흐름의 바탕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존재의 가장 깊은데서 사랑이 끝없이 흘러나와, 모든 것을 흐르고 펼쳐지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모든 것의 바탕인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2장에서 성령의 다양한 은사에 대해 먼저 설명을 한 뒤에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겠다면서 이어지는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13:1,2)
바울은 사랑이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매우 인격적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있는 사랑을 하나님으로 바꿔서 읽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13:4,5,7)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인 우리의 바탕도 사랑입니다. 살아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흘러가고 펼쳐지게 만드는 바탕은 사랑입니다.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던 우리가 존재의 바탕에 연결되는 것, 우리 앞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알 수 없을지라도 마음을 열고 바탕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모든 것의 바탕이 사랑임을 점차 알게 되면서 우리가 생각하기에 좋고 나쁜 것들 앞에서 초연해지는 것, 어린 아이와 같던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과 같이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는 것.
이 모든 것은 사랑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자라납니다. 이것을 먼저 경험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는 예수께서 우리를 이 은총의 자리에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족쇄를 똑바로 보라고, 거기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지라고, 우리 존재의 바탕이 사랑인 것을 똑똑히 보라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며 당신과 눈 맞춤 하자고, 주님께서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긍정하는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주님과 눈 맞추며 마주보도록, 주님께서 아시는 것처럼 우리도 온전히 주님을 알도록, 주님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사랑이 되어 흘러가십니다. 이 거대한 흐름은 우리가 아름답게 펼쳐지도록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가장 좋은 것을 하루하루, 모든 순간,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다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바탕은 당신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흐름 안에서 우리가 흐르고 펼쳐지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