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
(빌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합니다. 자본주의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광고입니다. 우리는 광고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광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광고를 보는 것인지 프로그램을 보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광고가 이어집니다. 광고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새 것, 남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것, 더 크고 화려하고, 비싼 것을 광고합니다. 이 제품을 소유하는 것이 사회에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성공한 사람,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광고하는 제품의 기능을 설명하기보다는 소유욕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갖지 못하면 유행에 뒤처지고, 패배자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도록 만듭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좋은 물건만 소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 자본, 인기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분이 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더 높은 권력을 차지해야 하고, 더 많은 인기를 누려야 성공한 사람이 된다고 말합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더 큰 교회, 더 많은 신도, 더 많은 일을 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 성공한 교회라고 하고, 교회 안에서도 권력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이 대접 받으며 믿음 좋은 척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이 환영받지 못하는 교회가 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천박한 인식을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작은 교회, 약한 교회가 당당한 것도 아닙니다. 큰 교회를 부러워하며, 어떻게든 큰 교회가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한국 교회는 큰 교회와 큰 교회가 되고 싶어 하는 교회만 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교회의 목표가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중세시대에 교회는 최고의 권력과 막대한 재산과 교회법이라는 최고의 권위를 가졌습니다. 한마디로 절대권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었습니까? 절대권력은 부패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교회는 타락하였고,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교회의 역사를 지금 한국 교회가 따라가려고 합니다.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핑계 삼아 크고, 화려하고, 막강한 힘을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핑계는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신다면 ‘강도의 소굴’이라고 호통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말을 하면 작은 교회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잘하는 큰 교회를 비난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괜히 시비 건다고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공동선’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으라는 뜻이겠지요. 예수님의 마음은 7절에서 ‘자기를 비우셨다’고 합니다. 비운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마음을 비웠다’고 하는데, 그때 비운다는 것은 욕심을 비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움은 가진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더 갖고 싶은 욕심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 특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포기하신 것은 하나님과 본체가 같으시나 그 권리를 포기하셨다는 것입니다. 곧 신적 권위를 포기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은 것은 아픔, 슬픔, 고통, 걱정 등 인간의 감정을 모두 느낀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었어도 왕이나 권력을 가지거나, 부자로 산다면 조금 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사셨다고 했습니다. 포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사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신적 권위를 포기하고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고 해서 ‘신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육신을 입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 이것 말고는 사람 중에서 가장 낮은 자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종으로 산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고통, 아픔, 슬픔, 절망은 상상할 수도 없겠지요.
지금 세계 곳곳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삶이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어린 아이들이 노동을 하고, 먹을 것을 구해야 하며, 전쟁으로 아이들과 여성들, 노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장애와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 차별로 고통 받는 이들, 난민으로 세계를 떠도는 이들, 우리는 이들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느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죽음이 항상 그들 곁을 맴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고통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한 분이시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자연까지도 다스리시는 능력 많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는 능력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포기, 완전히 비움을 실천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비움은 죽음에서도 드러납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실 수 있으면 이 한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 하지만 아버지께 청할 수 있는 특권마저 포기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비움’을 완성하십니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중에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비움보다는 더 많은 것을 채우는 것이 신앙의 정도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님을 닮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더 많은 것을 채우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목적이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오래 다닐수록, 혹은 열심히 신앙 생활한다는 사람일수록 비움보다는 채움에 익숙합니다. 그들이 채운 것은 욕심이고, 교만입니다. 주님을 닮지 않습니다.
솔직히 ‘나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 안에도 교만과 욕심이 있습니다. 권위를 자랑하기도 하고, 인정 받지 못할 때 화를 내기도 합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편하게, 또한 누리며 살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주님을 닮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강단에서는 ‘나를 닮으라’고 하지 않고 ‘주님을 닮으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비움을 실천할 때, 주님의 종, 주님의 제자라는 이름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비움의 삶을 사신다고 해서 아무 일도 못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도 남김없이 이루셨습니다. 포기하고 비우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지만,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기 때문에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할 때, 사람의 생각과 방법과 목표를 먼저 계획하게 됩니다. 어쩌면 사람의 계획은 욕심이거나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해냈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움은 순종의 삶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방법을 따른 것입니다. 교회나 그리스도인의 계획은 ‘내가 생각할 때 좋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고 순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그리스도인이나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정죄합니다.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뜻인 줄 착각하거나, 자기가 하나님을 안다고 교만해진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 하나님께 복종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십니다. 곧 9절,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높여주십니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비움을 통해 사람들은 구원을 얻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일은 주님의 계획과 주님의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본받으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주님의 마음을 본받지 않고, 자기 생각, 자기 계획이 주님의 뜻인 것처럼 억지를 부립니다. 주님을 닮았는지, 닮지 않았는지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됩니다. 특히 믿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보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그는 주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칭찬하거나 혹은 비난한다면 그는 사람의 생각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바람이나 욕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또 열심히 살면서 많은 것을 모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포기하라, 비우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비움은 자기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쾌락이나, 인정받음이나, 교만을 위해 쌓아두거나 낭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재물과 권력이 신앙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 지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가진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며 살아갑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낙심하기도 하고,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은 살아남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매 순간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기쁘게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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