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기행문 몇자 쓴다는 것이 의외로 길어지고
추석 밑에 이런 저런 일이 바빠 차분히 글 쓸 시간이 없어
마무리 짓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한내 찾아간 이야기 한편 올리고 며칠 있다가-추석 지나
다음 편 내 고향-청기(靑杞) 가서 벌초하며 조상분들 산소 사진
필자의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또 그 웃등에 계시는 문월당 과
문월당 윗대 분 사진 몇 장 올리며 이번 글을 끝 내겠습니다.
낙남(落南) 길을 따라 (5) 삼구정(三龜亭)과 울팃재
이제 용계를 떠나 영양(英陽)으로 간다.
영양읍 동쪽 ‘한내’ (大川) 인근이 9세 분이 (휘(諱) 필(삼수변에 畢) 필자의 15대조)
진보에서 옮겨 오신 곳이다. (移于英陽縣東)
(안동 임하에서 진보로 옮긴 과정은 잘 모른다.)
한내 들 입구에 (12세(세) 용계공(龍溪公) 휘(諱) 흡(삼수변에 翕)(1576-1641)
께서 세운 정자가 있으니 삼구정(三龜亭) 이다. (필자의 12대 방조(傍祖)
삼구정(三龜亭)
병자호란 (丙子胡亂) 후에 세웠으니 약 370 여 년 되었는데
관리는 그런대로 하고 있는 듯 하다.
같이 간 아들아이가 건축과 나왔답시고 아는 척 하기를
익공(翼工)도 집어 넣어 제대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익공(翼工)이란 기둥에 바로 지붕을 연결하면 너무 낮고 답답하니
기둥과 도리 사이를 띄워서 지붕을 높이는 구조물이다.
너무 높이면 껑뚱할 뿐 아니라 비가 들이 차니 치밀하게 계산해야 한다.
대궐(大闕)이야 이런 익공이 두 개 세 개씩 겹치지만 여긴 민가니
한 개 짜리 초익공(初翼工) 이다.
사진 추녀 밑에 익공이 보인다.
뒷 마당에 묘하게 생긴 바위가 있다.
삼구정 이란 이름은 사명대(思明臺)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세 바위가 줄을 지어 정자를 등에 업은 것 같고
형상이 거북이 엎드린 것 같아서 지었다고 하는 데
거북이 바위는 어디에 파 묻혔는 지 지금은 찾을 길 없다.
이하 삼구정에 얽힌 이야기와 용계공이 유언으로 남긴 명정에
‘처사(처사) 로 쓰도록 하라” 에 관하여는 필자의 먼저 글 게시판
제 28번 “ 세거지 (3) 한내‘ 편을 참조하라.
문월당 (問月堂)
삼구정(三龜亭) 인근에 용계공의 어른 되는 문월당 을 위한 정자가 있다.
문월당 (問月堂)(12世 휘(諱)극성(克成) 공)은 용계, 우재, 취수당 3파의
공동조상 이며, 취은당파 조상의 형님 되는 분이다.
그러나 건물만 놓고 볼 때 삼구정 보다 격이 약간 떨어지는 것은
익공(翼工)이 없는 것으로 알 수 있고, 지붕과 앞 마당에 잡풀이 우거졌다.
이렇게 말 하기는 쉽지만 시골에 사람은 자꾸 들어 들고
문중에 이렇다 하게 모아 둔 기금이 없으니 날이 갈수록 더 문제가 되겠다.
제일 좋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 받는 것으로 대종회 총무 창건 씨 및
여러 분이 애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건립연대가 그리 오래지 않아
쉽지 만은 않겠다.
대종회(大宗會) 총무 창건 씨
대종회(大宗會) 총무 창건 씨는 용계공파 인데, 마침 함오(咸吳) 주소록
작성일로 영양파 여러분을 만나러 왔다가, 내가 고향 갑네 하고 떠 벌린 글
-제 63번 글을 보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 오른 쪽이 창건 씨고 , 왼쪽 모자 쓴 이가 필자)
도둑맞은 목판(木版)
창건 씨에게 들은 이야기다.
요즈음 시골에 남은 사람이라곤 허리 꼬부라지고 눈도 침침한
노인들 뿐인지라 문화재 도둑이 극성을 부려 심지어 문짝도
떼어 가는 데 삼구정에 보관하던 조상들 문집을 찍던 목판(木版)을
20 여 년 전 도둑맞았다고 한다.
(사진 : 용계문집표지)
이런 책을 찍던 목판을 도둑맞았다고 한다.
최근 창건 씨가 인터넷 검색하다가 이 목판(木版)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추적해 보니 당시 도둑이 어느 개인박물관에 팔았으나,
개인이 박물관 계속하기가 힘에 붙치니 그 소장품 전체를 중악박물관에
기증하는 과정에서 우리 목판(木版)도 묻어간 모양이다.
‘흐음… 어쨌던 중앙박물관에 가 있으면 잘 된 것 아닙니까 ? “
‘그거야 잘 되었지만 기증자 이름은 우리 종중이 되어야 하는 데,
엉뚱한 이름이니 후손으로서 마음이 불안한 것 아닙니까 ?”
더 들어보니 중앙박물관 측이야 유족 측과 협의하라고 팔 밀이 하고,
기증자는 인격이 괜찮은 분으로 우리가 도로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이름 원래 우리 것이니 바로 하자는 정도는 흔쾌히 수락했을 것이나
진작 돌아 가셨고, 남은 유족은 돌아간 어른이 한 일 손 못 댄다
하고 버티는 모양이다.
사안의 성격상 쉽게 풀릴 일이 아닌 것 같다.
대종회 총무로서 다른 종인들이 미처 아지 못하는 이런 저런 일
챙기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이제 해가 저무니 창건씨와 작별하고 잠을 자러 가야 하는 데,
백암으로 가서 온천을 하고 다음 날 다시 넘어 와 고향 산소
벌초를 하기로 계획한 바 있다.
창수령
영양에서 백암을 가려면 어찌해도 낙동정맥( 洛東正脈) 을 넘어 바닷가로
가야 한다. 한내 에서는 창수령을 넘어 영해로 가는 918번 도로가 있다.
창수령은 -옛날 울티재 한자로 읍령(泣嶺) 또는 행곡령(行哭嶺)으로
그 내력도 역시 필자의 지난 글 제 28번 “ 세거지 (3) 한내‘ 편에
올려 놓은바 있으니 참고하기 바라면 다만 숙종 때 영양사람이
조정에 올린 상소문 구절 일부 만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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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양은 영해와의 거리가 1백 여 리(里)이고,
먼 곳은 또 8,90리를 더 가는데, 세 번이나 준령(峻嶺)을 넘고,
백 번이나 험한 여울을 건너며 범과 표범의 두려움과
도적의 경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이를 괴로와하여
산은 ‘읍령(泣嶺)’이라고 일컫고,
고개는 ‘행곡(行哭)’이라고 부르니, 까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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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글에서 이문열 어느 소설에 울티재가 배경으로 나온다고
잠깐 언급한 바 이제 원전을 찾았으니 조금 더 부연한다.
이문열 ‘그해 겨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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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겨울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해 겨울 나는 경상북도 어느 산촌의 술집에 '방우'로 있었다.
'방우'는 원래 시골사람에게 흔한 고유명사지만 당시에서는
허드레일꾼 즉 불목하니의 뜻을 지닌 보통명사로 쓰이고 있었다.
.. 그 지방 특유의 가파른 산이며 날카로운 봉우리 빈약한 들과
도로연변의 촌락들 나이든 백양목 가로수와 타르 칠한 목재 전주들..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의 산과 들을 언덕을 달렸다. 이곳은 장풍
오후 내내 달렸지만 겨우 Y 면에서 삼십 리 창수령의 아랫마을이다…’
(필자의 주: 경북 북부에서는 바위를 ‘방우’ 또는 ‘방구’ 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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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에는 짐승에게 물리거나 도적 만나거나 또는 얼어 죽던
창수령-울티재 이지만 오늘 날은 포장이 다 되어 자동차로 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고.. 밑에 나올 구주령에 비하면 수월하다.
헌화가(獻花歌)
창수령을 넘어 영해로 가서 동해안을 따라 북으로 가는 길은
원산,함흥까지 뻗어 있으니 그 옛날 진흥왕이 마운령과 황초령에
순수비를 세우러 가던 길이요, 통일신라 때 강릉태수로 부임해 가는
남편을 따라 수로부인(水路夫人)이 가던 길이다.
연합뉴스 9-25 일자에 의하면 어느 교수가 이런 주장을 한 모양이다.
헌화가는 암소를 끄는 노인이 수로부인(水路夫人)의 미모에 반해
지어바친 서정가요가 아니라, 남근석 아래에서 아들낳기,
혹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에서 부른 노래라는 것이다.
즉 헌화가' 에 나오는 '자포암호'(紫布岩乎) 를 양주동의 해석처럼
‘딛배바회’ 가 아니라 , 나중에 '자지'로 구개음화가 이뤄지는
'자디'(紫的)로 풀어 자포암은 바로 ‘자지바회’ 라는 것이다.
글쎄… 남근석도 좋지만 ㅈ 자 만 나오면 다 끌어다 붙여서야….
이하 회 먹고 온천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백암 유황온천으로 미끌미끌해진 필자(필자)와 가족은
다음 날 일요일 (9-24) 아침 벌초하러 영양으로 다시 오면서
낙동정맥( 洛東正脈)을 되넘은 바, 이번에는 백암 뒤에서
영양 수비면으로 연결되는 구주령을 넘었다.
구주령 (九珠嶺)
앞서 창수령-울티재가 험하다 했으나 구주령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 옛날 이 길로 올 일이 없어 그렇지 있었다면 읍령/행곡령이란
이름은 구주령에 걸맞는다. 험하다는 곳도 꽤 다녀 보았으나 이런 길은
다시 없는 것 같다.
길이 우선 좁고 (미시령이나 한계령은 넓기나 하지)
굽은 길 회전반경 (radius ? ) 가 실재로야 그럴 리 없겠지만
운전하는 감으로는 거의 90 도 느껴지는 S 자 커브 가 연속해서
있는 데 비탈은 매우 급하다.
오가는 차량도 드물어 그야말로 스릴 만점에 운전하는 재미가 나는 코스다.
그러나 악천후-눈은 물론 비도 심하게 오거나 새벽녘 동해바다에서
안개가 피어 오를 때는 삼가하는 것이 좋다.
영마루에서 오던 길과 동해 바다쪽을 보았다.
영마루에서 영양 수비로 가는 길은 우리나라 금강송 자생지로
거의 마지막 남은 곳이 아닌가 하니 죽죽 곧은 소나무를 볼 수 있다.
경제림도 좋지만 우리나라 산에는 소나무가 있어야 제격이 아닌가 한다.
구주령을 넘어 왔으니 이제 고향으로 벌초하러 가야 한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