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의 코러스’
키 150신티미터 남짓한 엘튼 존이라는 가수는 수십 가지 사치스런 안경을 즐겨 쓰는 멋장이로 소문나 있다.
그의 모습을 대변하는 안경 덕분에 그의 작은 키는 어필할 필요가 없다. 이 가수가 넥타이에 와이사쓰 정장 차림을 했다면 그는 작은 키의 콤플렉스를 모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최신형 휘황찬란한 안경들이 그에게 그토록 어울리지 않았던들 그의 용모는 더욱 더 왜소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처럼 개성은 각자 자기 몸에 맞는 옷이나 장신구처럼 자연스럽게 조화된 상태를 말한다.
자신에게 맞지 않고 능력에 닿지 않으면서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나 성격을 해보이려고 애쓰는 건 넌센스다.
그대로 밋밋한 치마저고리보다 경우엔 따리선 허벅지를 드러낸 치마, 소매없는 저고리가 더 멋진 법이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 들이고, 외면할 것은 차갑게 외면할 뿐 만사에 허겁지겁 동요할 필요도 없다.
선천적인 요소도 중요하겠지만 개성은 오랫동안 몸과 마음에 익힌 자기만의 고집, 이즘일 수도 있으니까.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부터 바르톡을 연주할 수 없듯이 개성의 시작은 바이엘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체질은 배울 때부터 나타나게 마련이 아닌가.
그처럼 성격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도 어느 정도 자기나름의 기준은 서 있어야 한다.
개성의 개발은 어느 정도 서 있는 기준에서 온갖 종류의 사물, 취미 세계를 자가나름으로 판단하고 선택할 뿐 남의 이목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나 개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성격을 외부에 드러내거나 괴벽화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겉으로 평범한 체, 무심한 체 하지만 안으로 아집을 감싸고 두꺼운 껍질로 보호하면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이기심의 깊은 바닥에 집착하게 마련이다.
남과 내가 다르다는 강한 터부의식을 가지면서 용기있고 독특한 성격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따금 남들이 상상치 못할 경이의 행동을 해보이기도 한다
이른바 성격이 뚜렷하다는 것은 그냥 말없이 얌전하고 무난한 것만은 아니다.
의사 표시를 분명히 해야할 장소에 교양과 상식을 앞세운 침묵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평범일 뿐 전혀 개성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싫고 졿고를 가린다든가 남과 내가 무엇이 다른가를 알리기 위해 정연한 이론으 준비할 필요는 있다.
정연한 이론이란 반드시 언어로 표현되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그런 식의 침묵은 침묵의 언어이며 명확한 발언일 수도 있으니까
사람들에게 각자 양상은 틀리나 개성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고 그 개성으 전망은 능력이나 지서에 좌우된다.
玉도 갈아야 빛난다고 한 것처럼 울기 잘 하는 아이를 매로 다스려 보라. 울지 않게 된 것까지는 좋지만 그 억양은 어쩌면 소프라노 가수가 될 소지를 영영 잃게 하는 원인일 수도 있다.
날 때부터 우울하고 염세적인 사람은 없다. 우울의 천성일 경우도 있지만 거의는 외부 조건에 의해 그것은 밝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뒤바뀌어 버린다.
주어진 환경, 사회, 제 삼자의 의외의 영향력 때문에 개성은 발굴되고 눈부시게 빛날 수 있으며 반대로 빛을 발할 뻔 했던 성격이 무성격으로 되어버리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개성은 덮어 놓고 남을 것을 닮거나 모방하는 상태를 묵인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높은 담을 쌓고 그 속에 들어앉아 동전알만한 하늘을 지켜보고만 있지도 않다.
확실하게 자기의 모습을 이루고 나면 그 모습은 쉽사리 흐물지도 않으먀 역시 높은 울타리 밑에서 하늘만 올려다 보고만 있지도 않게 된다.
옆에서 강제로 피아노 레슨을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바르록을 또는 베토벤을 연주하기에 이를 것이다.
개성은 태어날 때부터 쓰고 나온 안경처럼 너무도 자연스러운 나머지 얼굴의 눈이나 코처럼 중요한 한 부분이 되어버릴 뿐이다.
*이세기는 1940년에 서울에서 출생한 소설가이다. 이화여대 국문과 출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두 시간 십분’이 당선
1978년 현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