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기도의 성모 (1539)
로렌초 로토
Lorenzo Lotto, Madonna of the Rosary, 1539
로렌초 로토(Lorenzo Lotto, 1480-1556)는 조반니 벨리니의 제자였지만
베네치아 미술계에서 거절당해 주로 지방에서 활동한 화가였다.
그는 트레비소와 마르케에서 활동하다가 1509년에 로마로 소환되어
그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나,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기대에 못 미쳐 절망하여 로마를 떠났다.
그는 1513년에 베르가모에서 초대받았고, 그곳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위대한 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감을 얻었으며,
1526년에 베네치아 미술계에 다시 도전하였으나 냉대만 받았다.
이후 그가 20여 년 동안 베네치아 교회에 그린 작품은 겨우 3편뿐이었다.
1549년에 그는 불안감에 싸여 베네치아를 떠나 마르케로 갔고,
로레토에 있는 산타 카사 수도원에서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1556년경에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로토가 1539년에 제작한 <로사리오의 성모>는
이탈리아 마르케주 칭골리(Cingoli)의 산 니콜로 성당을 위해 제작된 제단화이자,
로토의 마르케 시기를 대표하는 웅장하고 독창적인 묵주기도 제단화다.
묵주기도의 기원은 초대 교회에서 시작됐다.
묵주기도는 초대 교회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면서
순교자들이 형장에 끌려 나갈 때 썼던 장미 화관을 모아놓고
꽃송이마다 기도를 바친 데서 유래했다.
묵주기도를 일컫는 ‘로사리오’는 라틴어로 ‘장미 꽃다발’이라는 뜻이다.
이집트 사막의 은수자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시편을 50, 100편,
또는 150편씩 매일 외웠는데,
작은 돌멩이나 곡식 낱알을 둥글게 엮어 하나씩 굴리면서 기도 횟수를 헤아렸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시편 대신 주님의 기도를 그 수만큼 바쳤다.
열매나 구슬 150개를 노끈이나 가는 줄에 꿰어 사용한 관습이
묵주기도를 탄생시키는 데 큰 영향을 줬다.
묵주기도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 건 13세기께부터다.
당시 알비파라는 이단 세력이 교회를 위협하자,
성 도미니코(St. Dominic, 1170-1221)는 묵주기도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신자들은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쳤고, 이단 세력이 점차 축소됐다.
이 시기에 처음 ‘마리아의 환희에 대한 묵상’을 묵주기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날과 같은 묵주기도는 15세기에 등장했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알랑 드 라 로슈(Alain de La Roche, c.1428-1475) 수사가
1464년 예수와 마리아의 생애를 강생과 수난과 부활에 따른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등 세 가지로 나눴고,
15세기 말께에는 15단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
묵주기도에 ‘빛의 신비’가 추가된 것은 200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를 반포하면서다.
빛의 신비는 그리스도 공생활의 주요 신비를 묵상한다.
묵주기도 신심이 전 세계 모든 신자에게 전파된 것은
1830년 성모 마리아가 발현해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칠 것을 호소하면서다.
성모 마리아는 1830년 파리에서 발현했으며,
1858년 루르드에서 묵주를 가지고 나타나
성녀 베르나데트(St. Bernadette, 1844-1879)에게 직접 기도를 가르쳐줬다.
10월을 묵주기도성월로 선포한 사람은
레오 13세 교황(Leo XIII, 재위 1878-1903)이다.
10월을 묵주기도성월로 정한 것은 승리의 성모 축일이 10월 7일이어서다.
이날을 축일로 정한 일화가 있다.
1571년 그리스도교 군대가 이슬람 군대와 맞선 큰 전투가
코린토 인근 레판토 만에서 벌어졌다. 레판토 해전이라 불리는데,
이슬람 국가인 튀르키예 함대가 로마에 상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 비오 5세 교황이 조직한 그리스도교 연합군이 고전하자
교황은 교황청에 있는 성직자들을 불러 승리를 기원하는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리스도교 군대가 대승을 거뒀고,
교황은 묵주기도를 바친 이 날을 승리의 성모 축일로 제정했다.
현재는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을 바꾸어 지낸다.
레오 13세 교황은 1883년 세계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호소했다. 비오 10세 교황도
“묵주기도만큼 아름답고 은총을 많이 내리게 하는 기도도 없다.”라면서
“묵주기도를 매일 정성스럽게 바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1917년 파티마에서 6차례 발현한 성모 마리아는
묵주기도를 매일 15단씩 바치면 전쟁이 끝나고 죄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발현에서는 자신을 ‘묵주기도의 어머니’라고 선언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사도적 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묵주기도는 복음 전체의 요약이자 구원적인 강생에 집중하는 기도이며,
그리스도께 대한 끝없는 찬미”이며 “가장 순수한 기도”라고 했다.(46항)
1537년 이탈리아 마체라타 도시에 있는 친골리(Cingoli)의 산 니콜로 성당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는 성당 보수작업을 하면서 로토에게 제단화를 주문했다.
베네치아 출신의 다채로운 화풍의 화가 로토는
성모에게 묵주를 받는 성 도미니코(St. Dominic)의 모습을 그렸다.
15세기 이후 이탈리아 회화에서 성모자를 주제로 다른 작품에서는
성인들이 성모자를 둘러싸고 있는 회화적 표현이 많이 등장했다.
이를 ‘성스러운 대화’(Sacra Conversazione)’라고 불렀다.
로토의 작품 <로사리오의 성모>에서도
여러 성인이 중앙의 성모자를 중심으로 대칭으로 있다.
맨 오른쪽부터 도미니코 수도회의 첫 순교자인
베로나의 성 베드로(St. Peter Martyr)가 있는데,
그는 순교를 상징하는 머리에 꽂힌 칼과 붉은색 십자가를 지니고 있고,
도미니코 수도회 제3 회원으로 오상(五傷)을 받은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St. Catherine of Siena)는
동정을 상징하는 백합과 오상 받음을 상징하는 십자고상을 들고 있다.
주교 복장을 한 칭골리의 주보 성인인 성 에스페란치오(St. Esuperanzio)는
성모 보좌 우측 아래에 무릎을 꿇고 칭골리(Cingoli) 도시의 축소 모형을
아기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정중하고 경건한 행동을 하고 있다.
맨 왼쪽에는 탁발 수도회의 수호성인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화려한 옷을 입고 향유 병을 들고 있고,
그 옆에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가
책을 들고 오른손 검지로 나무 울타리에 매달린 묵주의 신비 메달을 가리키며
로사리오의 신비와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을 향한 길에 관해 설교하는 듯하다.
그리고 맨 앞에 검은색과 흰색의 도미니코 수도복을 입은 성 도미니코는
무릎을 꿇고 성모님이 내려주는 묵주를 받고 있다.
성 도미니코는 생동감 넘치는 동작으로 두 팔을 높이 펼쳐 들며
성모가 이단을 이기도록 해주는 묵주를 받으려 한다.
성모의 뒤에 짙은 나뭇잎으로 가득한 장미 덩굴에는 15개의 메달이 달려있다.
중세 시대의 생명의 나무를 연상케 하는 로사리오의 신비를 나타내는 장면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래에서 위로 표현되어 있다.
첫 번째 줄에는 환희의 신비 다섯 개의 메달이 있는데,
주님 탄생 예고,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봉헌,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으심이 그 주제이다.
두 번째 줄에는 고통의 신비 다섯 개의 메달이 있는데,
피땀 흘리심, 매 맞으심, 가시관 쓰심, 십자가 지심, 십자가 처형이 그 주제다.
세 번째 줄에는 영광의 신비 다섯 개의 메달이 있는데,
부활하심, 승천하심, 성령강림, 성모 승천, 성모 대관이 그 주제이다.
성모자 아래에는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Ecce, Agnus Dei)라고 적힌
띠가 감긴 십자가를 든 아기 요한 세례자는 손으로 아기 예수님을 가리키고,
두 명의 귀여운 날개 달린 천사는
바구니에 담긴 로사리오의 상징인 장미 꽃잎을 흩뿌리고 있다.
성모의 발밑 기단 하단에는 “L. LOTUS MDXXXIX”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로토 본인의 서명과 제작 연도(1539)가 명확하게 기재된 것이다.
베네치아 화파 특유의 풍부하고 차분한 색채감이 돋보이며,
중앙 성모자의 푸른 겉옷과 장미 격자의 짙은 녹색,
메달들의 화려한 톤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이 작품은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
마르케 지역의 묵주 신심 신앙 체계가 미술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제단화이다.
도미니코 수도회를 비롯한 탁발 수도자들의 영향으로
13세기 이후 로사리오 기도는 널리 퍼졌으며,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 전쟁, 기근 등 중세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성모 신심을 불러일으키며, 로사리오의 기도도 널리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