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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훈련 10] 예수님 마음 갖기(고전 2;14-16)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잊혀지지 않는 장면들이 종종 흔적으로 남게 됩니다.
인천 숭의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도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도들이 강대상까지 그득찼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약 5천명 정도 모인 것같았습니다.
내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이호문 목사님이 통성기도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강대상위에 앉은 사람들의 성경 찬송을
모조리 집어 한 쪽에 모으며 사람들을 좁히고 있었습니다.
이 때 밑에서 통성기도하던
윤보환 목사가 뛰어 올라 오더니 말했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윤 목사가 성경 찬송을 한
쪽에 쌓아 놓으며 공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강단에 앉아 있다가
수선스러워 눈을 뜨고 보니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밑에는 부목사들 16명이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예배 마치고 윤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보필해?”
윤 목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우리 목사님 성격을 알기에 기도할 때 기도하지 않아요.
담임 목사님 무엇을 하시나?
무엇을 보필하여 드려야 하나 살펴요.”
그는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장의 마음을 알아 주는 사원,
남편의 마음을 알아 주는 아내,
아내의 마음을 알아 주는 남편,
자식의 마음을 알아주는 부모,
부모의 마음을 알아주는 자녀,
선생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제자,
제자의 마음을 알아주는 선생님.
모두 아름다운 마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 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 마음을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4-16)
60년대 유행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내 마음을 나와 같이 알아줄 사람은... 그 사람뿐입니다.”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부모의 마음을 알아 주는 것이 효심이고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 주는 것이 영성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 주는 것일가요?
1. 예수님과 같은 감정을 가지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전혀 알아 주지 못 하여
예수님이 아파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이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엄청난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12 제자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잽싸게 요청하였습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막 10:37)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러 오셨습니다.
십자가 죽으시면서 고난 받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고난 받으러 오신 예수님을 오해하고
좌편에 우편에 앉혀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 마음을 전혀 모르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아프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 10:38)
나머지 10명 제자들이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1-44)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잘 알아 주어서
예수님 마음에 꼭 들은 여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마가복음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에 나사로 집에 가셨습니다.
마리아가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에게 부었습니다.
가롯 유다가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지
왜 낭비하느냐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막 14:6-9)
가롯유다는 가난한 자의 마음을 알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 주었습니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 주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즐거워하여 주는 것이 동감입니다.
목사들은 누구나 그럴 것입니다.
차에 넥타이가 여러 개 준비되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장례집에 갈 때 검은 넥타이를 매고 들어가
같이 슬픔을 나누며 울어 줍니다.
그리고 잔치집으로 향할 때가 있습니다.
차안에서 넥타이를 밝은 색을 갈아 맵니다.
그리고 같이 즐거워해 줍니다.
이것이 동감입니다.
예수님이 슬플 때 같이 슬퍼하여 주고
예수님이 기쁠 때 같이 기뻐하여 주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 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과 같은 감정을 가지는 것이 동감입니다.
정신과 의사 이시형 박사가 넷 향기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퇴원하는 환자가 계산서를 가지고
원장에게 와서 항의조로 말했습니다.
“원장님. 제가 링게르를 반 병밖에 안 맞았는데
왜 한 병 값이 계산됐습니까?”
원장님은 즉각적으로 말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동감을 표시하였습니다.
동감은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퇴원하는 분이 미소를 짓고 있을 때
간호실에 전화를 했습니다.
“이 환자분 퇴원하실 때 남은 링게르 병 포장해 드리세요.”
이는 환자의 감정과 동감이 아니었습니다.
퇴원하는 환자는 다시 찡그리기 시작합니다.
원장님은 잠시 속은 후련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동감의 감정이 아니라 이질감이기 때문입니다.
“아니지. 환자는 나의 상거래 대상이 아니지. 사랑해야지.”
그리고 가격을 낮추어 드렸습니다. 이것이 동감입니다.
그 병원에서 있었던 일 하나가 더 소개되었습니다.
응급실에 갈비뼈가 부러진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자는 웃다가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였습니다.
이상하여 물었습니다.
“왜 그러세요?”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사실은 남편이 오랫동안 출장을 갔다 와서
제가 얼마나 그리웠던지 나를 꼭 끼어 안았습니다.
얼마나 나를 꼬옥 포옹을 하였는 지
내 갈비뼈가 부러졌습니다.
남편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포옹을 했을까 생각하니
기뻐서 웃음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파서 울었습니다.”
아무리 갈비뼈가 부러져 아파도
아픈 감정에 동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감정에 동감하였습니다.
늘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 주는 것입니다.
다윗이 망명길에 올랐을 때였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따라 오지 않고 종 시바가 따라왔습니다.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과 건포도 일백송이와
여름 실과 일백과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삼하 16:1)
다윗이 이상하여 물었습니다.
“왜 므비보셋은 오지 않았느냐?”
시바가 모함을 하는 무시무시한 말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삼하 16;3)
다윗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시바에게 말했습니다.
“왕이 시바더러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삼하 16:4)
시바가 다윗왕에게 절하고 물러 갔습니다.
그 후 압살롬이 죽었습니다.
다윗이 궁중으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다윗이 궁중으로 돌아 와서 므비보셋을 만났습니다.
므비보셋이 말했습니다.
“저는 왕의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습니다”(삼하 19;24)
다윗왕은 므비보셋이
왜 자기와 함께 하지 아니하였는 지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뇨?”
(삼하 19;25)
므비보셋이 말했습니다.
“내 주 왕이여. 왕의 종 나는 절뚝발이이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나의 종이 나를 속이고 종 나를 내 주 왕께 참소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삼하 19;26-27)
다윗왕은 시바가 거짓말을 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삼하 19;29)
므비보셋이 말했습니다.
“내 주 왕께서 평안히 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저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 19;30)
므비보셋은 다윗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도망가 있는 동안의 생활을 같이 하였습니다.
1. 발을 맵지 않았습니다.
2. 수염을 깍지 않았습니다.
3. 옷을 빨지 않았습니다.
궁중은 이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지상 천국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상천국에서 므비보셋은
누가 무어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 데
지옥과 같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모시고 사는 왕이 지금 객지로 쫓겨 가서
지옥 생활을 하고 있는 데
자기는 편안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을 알아 주었습니다.
발을 맵지 않았다는 말은 큰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을 보니
“He had not washed his feet"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이 밖으로 나가 고생하는 동안
내내 발을 닦지 않았습니다.
수염을 깍지도 않았습니다.
옷을 빨지도 않았습니다. 궁에서 궁하게 살았습니다.
궁에서 궁궐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왕의 종이니까 왕이 고생할 때
같이 고생하겠다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다윗이 마음을 알아 주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 주는 사람은 그 사람과 같이 살게 됩니다.
6.25때였습니다.
강원도 어느 조그만 마을에서
청년 몇 명이 입대하여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있었습니다.
한 명만 남고 다 전사하였습니다.
살아남은 청년이 돌아오자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너는 죽지 않고 살아 올 줄 알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였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너의 어머니는 네가 입대한 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집에서 자지 않았다.
교회 찬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였다.
버선 밑이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등부위가 다 닳았단다.”
어머니는 아들의 마음을 알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양의 음성을 듣는 목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2. 예수님과 같은 영성을 가지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이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려면
예수님과 같은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동을 생각하고 계신 데
나는 서를 생각하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위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데
나는 밑을 보고 있으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온유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영성을 확실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그리고 예수님의 영성은 섬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우리 몸에서 가장 더러운 곳은 발입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문 앞에는 항아리가 놓여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길을 걸어 오다가 보면 발이 더러워집니다.
발을 닦고 집안으로 들어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안 좋은 곳도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일본에 유명한 정치가 가다이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정치범으로 감옥에 가 있었습니다.
그 때 가장 더러운 화장실 청소를 그에게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수많은 죄수중에 왜 하필이면 나에게 화장실 청소를 시키나요?”
그리고 약간 반발하였습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13장을 감방에서 읽다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다.
몸중에 가장 더러운 곳이다.
나같은 죄인이 화장실 청소를 못 할 것이 무엇이냐?
화장실 청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죄수들 발을 모두 닦아 주자.”
가다이카는 이렇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수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다니면서
감옥에서 만나는 죄수마다 발을 닦아 주었습니다.
감옥에서 가장 밑바닥 일만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런 정신으로 살던 그는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
국회위원에 출마하여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2대 국회의장이 되었습니다.
국회의장이 된 다음에도
그가 출석하는 고오치 교회에 나가서
언제나 현관에 서서 들어오는
교인들 신발을 받아 신장에 넣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치고 갈 때면 제일 먼저
신장 앞으로 가서 신발을 꺼내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한번은 거드럼을 피는
낯선 장교가 그 교회에 예배드리러 왔습니다.
처음 온 교인이었습니다.
장교는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신발장앞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 신발 어디 갔어?”
의장이 겸손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장교님의 신발은 높은 분의 신이라
뜩별히 다른 곳에 따로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 장교는 나중에
그가 국회의장인 것을 알고 크게 사과하였습니다.
진한 감동을 주는 사람, 다윗 케이프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나에게 충격을 준 책 <예수를 위한 바보>의 저자입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주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렸습니다.
“사람들의 발을 닦아 주어라.”
이 음성을 듣고 그는 사람들의
발을 닦아 주기로 작정하고 기도에 들어 갔습니다.
“하나님! 세수대야를 메고 걸으며 사람들 발을 닦아 주려면
세수대야를 주셔야지 내가 사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렇게 기도하였는 데 세수 대야가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확신하였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남쪽 케이프 타운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3,000 km를 걷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세수대야, 십자가 그리고 접의자를 등에 짊어졌습니다.
20kg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출발하였습니다.
출발한지 1분 만에 네 명을 만났습니다.
거드럭 거리는 깡패들이었습니다.
발을 닦아 줄 마음이 없는 데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가가서 발을 닦아 주어라.”
길거리에 접의자를 놓고
네 명을 한 명 한 명 발을 닦아 주면서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4명 발을 닦아 주고 났을 때 큰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들을 따라가지 않는다. 저 분을 따라 가고 싶다.”
그리고 따라왔습니다. 첫 날 모두 16명을 발을 닦아 주었습니다.
13명을 주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그 날 밤이었습니다. 주
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몇 명 발을 닦아 주었는 지 세어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여주는 대로만 맡기고 행하였으면 좋겠다.”
다윗 목사님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1년 4개월을 걸으면서 세수대야로 수 만명을
발을 닦아 주면서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몇 달 지났습니다.
아프리카 신문들이 그를 매일 보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년 4개월이 지나 마지막 목적지에 왔을 때에
아프리카 대통령이 나와 발을 내밀었습니다.
온 아프리카가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 아프리카 영웅이 되었습니다.
화제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가 그 때 쓴 일기가 이 책입니다.
나도 부산부터 서울까지, 아니면 광주부터 서울까지
한번 시도하여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었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온유이고 섬김입니다.
3.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야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예수님처럼 살면 예수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극하는 배우들이 모여서 연극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역할을 맡은 배우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예수님이 지셨던 그 무게의 십자가였습니다.
메고 가기 힘든 십자가였습니다. 이를 보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연극인 데 가벼운 십자가를 메고 무거운 것처럼 하세요.”
그 배우가 말했습니다.
“똑같아야 예수님 심정을 느낄 수 있어요.”
예수님처럼 살아야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선교사님 한 분은 선교지에서 맹장에 걸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어지는 아픔을 가지셨습니다.
그 고통을 직접 느껴 보고 싶어서
마취하지 않고 생살을 짤라 맹장 수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생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맛보았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산다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가요?
예수님처럼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루 생활을 기도로 시작하셔서 기도로 마치신 분이십니다.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금식기도부터 하신 이가 예수님이십니다.
기도하기 전에 어떤 일을 하시지 않으셨고
기도하고 머믓거리지도 않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얼마 전에 인천 서영석 권사님을 만나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건축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었습니다.
“너무 너무 힘이 들지요?”
“아니예요. 목사님! 저는 너무너무 잘 되고 있습니다.”
그는 시원스럽게 대답하였습니다.
의외의 대답에 놀라서 어쩐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서 권사는 대답하였습니다.
“목사님! 91년도 목사님께서 1,000번제를 드리라고 하여서
4년을 꼬박 1,000번 예물을 드리며 기도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시는 데
얼마나 건축부탁이 많은 지 미처 다 처리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비결이 무엇입니까?”
“기도와 신용입니다.”
기도의 삶을 본받는 것이
예수님처럼 살며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 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려고 애쓰는 것이 영성 훈련입니다.
- 갈보리교회 강문호 목사의 보혈의 강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