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최규리
가시벌레 사육기 외
욕조에 물을 채웠죠
와인 한 병에 설탕 한 봉지
달콤 쌉싸름한 안개가 피어오르면
더욱 풍성해진 눈썹
잠시 휴면상태로 돌입합니다
온몸에서 자라는 슬픔은
더욱 풍성한 알을 낳고
진공상태에도 살아남는
우주 최강 생물 곰벌레의 생존을
닮으려 합니다
가시는 공격하지 않아요
빨간 장미 꽃잎을 하나씩 띄웁니다
부유하는 기억을 조합하여
느리게 더듬이를 세우고
무척이나 방어하는 연습을 합니다
가시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기생하는 가시들은
잔혹한 서사를 좋아하지 않아요
근거 없는 말들을 제거하며
마디 마디에서 생명 점수를 높여
붉은 가시덤불로 휘감는
나의 찬란한 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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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밤
노루 떼가 요양원 밖으로
다급하게 뛰어나온다
길 위에는 어린나무들이
흰 나비를 맞이한다
빌딩의 붕괴가 유령처럼 가볍다
돌과 돌의 충돌
잔해들이 융단처럼 깔린 숲
회전문은 규칙적으로 돌아간다
폐허는 쉽지만
도무지 폐허를 만나기 어렵다
신호의 전환을 기다리며
허락된 벽을 찾는다
총알이 몇 군데 박힌 왼쪽 가슴
시간의 격차를 두고 달아나는 토끼들이
검게 탄 벽을 환대하는 동안
밤하늘에 새들의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나약한 깃털에 불이 붙었다
대지에는 불꽃이 떨어진다
늙고 힘없는 불꽃이 과육처럼 쪼개진다
수레바퀴는 삐그덕거리며
아무 일 없듯 다시 노동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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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리
2016년 《시와세계》로 등단했으며 시와세계 작품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질문은 나를 위반 한다』, 『인간 사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