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이 강의는 '한국 개신교의 전래와 그 선교운동의 특징'과 '한국 천주교의 전래와 초기 개신교의 선교활동'으로 두 번에 걸쳐 강의된 내용을 편집자의 사정 으로 한 번에 엮어 실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김경재 목사님의 뜻과 상이한 부분이 발생 한다면, 다 본인의 책임이리라.
먼저 한국에 천주교의 전래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에배가 진행된 것은 1785년이다. 그러나, 1253년에 이미 교황청에 꼬레아라는 나 라가 보고되었었다. 프란시스 사비에르가 일본에 입국하여 선교한 것이 1549년이며, 마테오 리치가 명에 들어가 선교한 것이 1581년이니 한국은 그에 비해 상당히 후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과는 다른 점은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전개는(뒤에 개신교의 경 우도)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1610년 허균이 북경에서 천주교로 개종했 다는 기록이 있고, 병자호란 후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독일신부와 친교를 하기도 하였다. 이미 1758년에는 황해도와 강원도에 천주학이 자발적으로 성행하였다고 하며,1777년에 권철신, 정약용, 정약전, 이벽 등이 여중에서 천주교리를 연구하였고, 자체적 신도조직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최초로 영세를 받고, 1785년 한 양 김범우란 사람의 집에서 천주교 창설예배가 열렸다. 천주교의 한국전래의 기원을 바로 이 때로 잡는다고 한다. 그러나, 천주교가 조상제사를 금지(1715년)하자 조상의 위패를 태우 고 제사를 거부하는 신도가 생겨나게 되고 이것이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아 천주교인들의 박해가 시작된다.
1791년 신해교난, 1801 신유교난 등 수 많은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잃게 된 다. 중국의 주문모 신부(1801년)와 프랑스의 모방,샤스탕 신부(1839년) 등도 순교하였다. 특 히, 한양에서 5년간을 숨어지내며 복음을 전하다 국경으로까지 도망갔으나, 자신 때문에 고 문받고 죽는 신도들을 생각하여 다시 돌아와 자수한 주문모 신부는 특별히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과정중에서도 천주교는 꿋꿋이 성장하여 1831년에는 한국교구가 독립하게되었다. 한국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여 순교한 것은 1846년의 일이다. 이 와중에 1863년 고종이 즉위하여 대원군이 집권을 하고, 동학이 크게 일어나 최재우가 처 형(1864년)당하기도 하였다.
이 쯤되어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다가오기 시작하는데, 대동강에서 소각당한 미국의 제네럴 샤먼호(1866년)에 타고 있던 영국선교사 토마스 목사가 순교하는 일 이 벌어졌다.(그가 가지고 있던 성경이 그를 죽인 사람의 후손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스코틀랜드의 로스 목사가 만주에서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고(1876년), 그와 한인들에 의해 복음서가 차례로 번역되었다. 또한 그에게서 세례를 받은 상인 서상륜이 최초의 목사가 되 어 황해도 솔내에 최초로 교회당을 세우기도 하였다(1884년).
또한 같은 해에 알렌이 한국에 와 이듬해에 광혜원을 세우는 등 근대식 의료기관과 교육기관설립등으로 간접 선교를 시작 하였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의교, 교육, 기술 등 근대화와 선교가 병행되는 특 징을 가지게 된다. 그 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선교사로 입국하여 선교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한국에는 많은 기독교 신앙인들이 존재 하였고, 이미 세례를 받기원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한국기독교사 중 기억할 만한 것이 '네비우스 선교정책'이다. 중국선 교사였던 네비우스는 한국에서의 선교정책으로 '자치, 자립, 자전'의 원칙을 네세웠는데, 한 국에서의 선교는 한국인들의 손으로 해야 한다는 원칙인 셈이다.
이 정책의 성공으로 한국 에서의 기독교는 성장할 수 있었다. 교파선교지분할선교도 선교정책의 하나였는데, 한국의 각 지역을 한 교단씩 맡아 선교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엄격하지 않은 酒草 의 문제가 한국에서 철저하게 배격되는 연유도 이와 비슷한데, 당시의 한국인들이 주초에 지나치게 많이 매달리는 것을 보고 금주금연운동을 전개한 선교의 방침이 있었다)
그러나, 미 정부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선교사들은 정치에 일체 참여 하지 않으려고 하고, 교회는 일제의 수탈과 식민 상황에 수난받던 당시의 한국의 상황과 유리되는 면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상황속에서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길선주 목사에 의해 주도되었던 부흥사경회는 그 불길이 크게 일어나 3천명세례, 7만명의 구도자 발생이라는 놀 라운 역사를 발휘하였고, 새벽기도회 창안, 통성기도 등의 내면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뒤의 이용도 목사, 김익두 목사에게로 이어진다. 이런 내면운동의 부흥은 현세부정, 내세추구로 이어질 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한국의 민중들의 심성에 다가간 구원의 종교로서 개신교가 자리매김을 해 나간 것이 라 하겠다. 1919년 3,1운동에는 거교회적인 참여가 있었고, 수원 제암리교회와 같은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의 YMCA, YWCA도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전개된 사회운동 이었다.
짧게나마 정리하자면 천주교나 게신교가 모두 한국민의 자발적인 신앙으로 시작된 것은 매우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반면, 천주교는 미사와 교리 중심으 로 시작되었으나, 개신교는 성서를 중심으로 하였다는 특징을 지니게 된다. 또한, 천주교는 수많은 순교와 피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기독교는 근대화와 병행되는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런 신앙의 선배를 두고 있는 우리들에게 신앙은 너무나 편하고 아름답고 자유로운(?) 것이 되지는 않았는지 하는 의문과 함께, 성서도 채 번역이 되 기 전의 두터웠던 신앙을 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에 대한 태도를 한번 돌이켜 봐야 하지 않을까하는 의문도 개인적으로 들었다. 모두들 같이 한 번 쯤 생각해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