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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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님이시여,
당신은 저의 모든 것입니다.
저는 영원히 살아,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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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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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만물의 왕이신 주님,
사람들에게 평화와 안녕을 가져다주어야 하는 위정자들에게
사심 없는 마음으로 당신이 주신 권한을 행하게 하시고,
당신의 지혜로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하시어
진리에 봉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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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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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루카 21, 34 – 3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35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 야곱의 우물 묵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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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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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누구도 사람들 앞에서 주눅 들어 살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부터, 안치환의 노래가사처럼 “당당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학교가면 선생님께 주눅 들고, 대학가니 부잣집 아이들에게 주눅 들고, 성당 와서는 신부님께 주눅 들고, 신학교 갔더니 선배들에게 주눅 들고, 사제가 되니 주교님 앞에서 주눅 들었고, 논문 쓰는 지금은 담당 교수 신부님께 주눅 들어 살고 있습니다.
사실 뒤돌아보면 그들이 주눅들만큼 나에게 한 것도 없는데 마치 그래야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고,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기도하는 길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당신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기도하라고 하시는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고해성사 때 죄를 한 사제에게 고백하기 위해 밖에 줄서서 기다리며 그렇게 떨리는 것은 체험하고는, ‘사람 앞에서도 이렇게 두려운데, 하느님 앞에 선다면 얼마나 더 두려울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사제직을 만들어 당신 자신이 아닌 한 똑같은 죄인에게 죄를 고백하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은총입니다. 지금도 한 사제에게 서기가 부끄럽고 두려워서 고해성사를 꺼리는 사람이 많은데, 만약 예수님이 직접 앉아 있다면 고해를 보겠다고 힘을 내어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 때문에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충혈 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 앞에서 죄송하고 부끄러워 어떻게 머리를 들고 입을 뗄 수 있겠습니까?
살아계실 때 함께 지내던 사도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얼마나 겁에 떨었는지 성경은 잘 표현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매 번,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라고 그들을 안심시키십니다. 베드로는 고기가 많이 잡히는 첫 기적을 체험하고 납작 엎드리며 주님께 자신을 떠나가시라고 청합니다. 마귀를 돼지에게 들어가게 하여 돼지들이 물에 다 빠져 죽었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하며 그렇게 자신들을 떠나달라고 청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부턴가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당당히 설 수 있는 힘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는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였지만, 죄를 짓고 나서는 그 분의 목소리마저 듣는 것이 겁이 나서 자신을 숨겼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께 잘못을 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 잘못을 씻고 잃었던 성령님을 다시 회복하는 길은 기도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두려워지기 시작하면 자연적으로 사람들도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양심의 가책도 너무 아프기에 사람들에게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게을러지고 사람 만나는 것을 꺼리게 됩니다. 자기 방에 갇히게 되고 자기 자신에게 갇히게 됩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자주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자신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공손하게 대하려고 하지만, 후배들에게는 매우 권위적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면 빨리 고해성사를 보고 기도시간을 늘려야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이 가까워지면 더 이상 그분 앞에 설 힘이 없기에 죽기 싫어 발버둥을 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지금도 죽는 것이 싫어 온갖 건강식품을 챙기고 있을 것입니다.
각자의 마지막 날이 눈앞에 있습니다. 1999년 4월 20일, 콜로라도 덴버의 한 고등학교에서 두 학생의 총기 난사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두 학생은 학생들의 머리에 총구를 갖다 대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가?”
대부분의 학생들을 살기 위해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캐시 버낼이라는 한 학생은, “나는 지금도 하느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어. 너희도 하느님의 길을 따라야만해.”라고 하였고, 총을 들고 있던 학생은 “그럼, 네가 믿는 하느님의 곁으로 가라”하며 총을 쏘았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서 캐시 버낼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후 이 사건은 미국 전역의 학생들에게 엄청난 파문을 일으켜 10대들 사이에서 신앙 붐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캐시 버낼의 죽음이 신앙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이현구, ‘비교급에서 최상급으로’, ‘참 소중한 당신’ 2010년 12월호 19-20쪽에서 재 참조)
만약 우리 자녀들이라면 어떻게 하도록 가르치겠습니까? 총구 앞에서 당당하도록 가르치겠습니까, 아니면 두려움을 갖고 살도록 가르치겠습니까? 하느님의 생명의 책에는 당신을 증언한 이들의 이름만이 적혀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힘을 기릅시다. 하느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데, 누구 앞에서 주눅들 수 있겠습니까?
[전 삼용 신부님의 사이 미니홈피 (http://www.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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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독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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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없이 용서해 주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느님께만 유보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즉, 죄를 고백함으로써 바쳐지는 영예와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죄의 고백을 해야 하고 그분에게서 죄 사함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느님만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기 때문에 그분에게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분이 약한 이와, 지존하신 분이 겸손한 이와 혼인하셨을때, 노예였던 이를 여왕으로 만드시고 그분의 발 밑에 있던 이를 자기 늑방의 위치로 올리셨습니다. 그녀는 그분의 늑방에서 나와 그분과 혼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드님은 본성상 하나이시므로 아버지의 모든 것이 아드님의 것이고 아드님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인 것처럼, 신랑도 신부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신부를 당신 자신과 아버지와 하나가 되게 하심으로 신부의 모든 것을 공유하셨습니다. 아드님은 신부를 위해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와 제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소서."
그러므로 신랑은 아버지와 하나가 되시는 것이고 신부와 하나가 되시는 것입니다. 신랑은 신부의 본래의 것과 조화되지 않는 것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제거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녀의 죄를 걸머지시어 그 죄를 십자가 위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또 본성상 신부에게 속하는 것을 취하여 옷 입으셨고 당신이 본성상 하느님으로서 지니고 계신 것을 신부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부의 것은 신랑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아드님은 마귀의 것을 없애 버리시고 사람의 것을 취하시며 하느님의 것을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죄가 조금도 없고 그 입에 간계가 조금도 없으신 분이 "내 힘이 다하오니, 주여, 가엾이 보아주소서." 하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부의 나약성을 취하신 신랑은 그의 슬픔도 취하시고 모든 것이 신랑과 신부의 것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죄를 고백함으로써 바쳐지는 영예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한도 신랑과 신부의 것이 됩니다. 따라서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 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없이 죄를 용서해 줄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없이 용서해 주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교회는 회개하는 사람, 즉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손을 대주신 사람 외에는 아무도 용서해 줄 수 없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멸시하는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고 싶어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심오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준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머리를 몸에서 갈라놓아서는 안됩니다. 그렇게되면 그리스도는 완전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없이 완전치 못하시고 교회는 그리스도 없이 완전치 못합니다. 온전한 그리스도, 완전한 그리스도는 머리와 몸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온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다." 고 복음 사가는 말합니다. 이분만이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스텔라 수도원의 복자 이사악 아빠스의 강론에서
[오요한 신부님의 '가톨릭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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