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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논단 100회 기념 대토론회] 한국불교, 무엇을 깨닫고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불교평론이 경희대비폭력연구소와 공동주관하는 열린논단이 100회를 맞았다. 2009년 서울 강남구 신사동 불교평론 세미나실에서 시작한 논단은 매년 10회씩 10년 동안 계속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열린논단 100회를 맞아 열린 대토론회(4월 18일)를 지상중계한다.
한국불교, 무엇을 깨닫고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사회(홍사성 본지 주간): 불교평론은 10년 전 돌아가신 무산 스님의 배려로 이곳 신사동에 편집실과 세미나실을 마련하고 이사를 왔다. 그때 우리는 창간 10년을 맞아 두 가지 사업을 시작했다. 하나는 가을에 하는 학술세미나이고 하나는 매달 한 차례씩 하는 열린논단 운영이다. 학술세미나는 올가을이 열 번째이고 열린논단은 이번이 100회째다.
이번 논단은 100회를 기념해 ‘한국불교, 무엇을 깨닫고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참가자 모두가 발언하는 대토론회 방식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평소 생각하는 문제를 자유롭게 말씀해주시기 바란다. 먼저 박병기 편집위원장으로부터 100회를 맞는 소회를 들어보자.
박병기(불교평론 편집위원장) : 열린논단은 2009년 2월에 시작했다. 1회 김성철 동국대 교수 발제를 시작으로 100회에 이르렀다. 열린논단은 100회 동안 크게 세 묶음의 주제들을 다루어왔다. 첫 번째는 한국사회가 지닌 문제를 불교적 관점에서 조명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주제이다. 두 번째는 불교교리를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에서 어떻게 확장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연기나 포교 현실에 대한 분석, 불교교리를 재해석하고 확장하는 내용을 다뤘다. 세 번째는 불교를 중심에 두면서 외연을 확대해, 이웃종교의 문제나 사회전반의 문제와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경희대 비폭력연구소 등의 공동주관자로 참여해주었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들이 있어 풍성하게 진행됐다. 100회를 지속해온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본다. 앞으로 내용이 더욱 심화하여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되도록 여러분의 관심과 협조를 바란다.
사회 : 지금부터 토론을 시작하겠다. 손을 들고 지명이 되면 발언하시면 된다. 순서와 관계없이 주제와 관련된 평소 생각을 말씀해달라.
김왕근(‘붓다로살자’ 편집장) : 나는 부처님 깨달음은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성철 스님의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이란 무아의 존재이니까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마라, 만약 집착을 놓지 않으면 다툼이나 언쟁 같은 불건전한 사태가 발생한다.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하나. 나는 우리 자신을 바로 보자고 말하고 싶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자 공동체적 존재이다. 현대인들은 자기의 소속집단을 정하고 거기에 집착한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산업화의 역군이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민주투사라고 여긴다. 서로 다른 집단에 소속돼 있다는 생각에 집착해 우리 사회에 다툼, 언쟁, 불화가 생긴다. 이를 막기 위해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바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한국인이다. 나는 한국인이 유교사상을 깊이 내면화한 철학가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이 유교철학자라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언어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이(理)’라는 말을 많이 쓴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는 ‘이’에 맞게 생각하라는 말이다. ‘무리하지 마라’는 ‘이’가 없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고, “궁리해 봐” 하면 사물의 ‘이’를 깊이 연구하라는 말이다. “그럴 리가 있냐”고 하면 모든 현상은 ‘이’가 있어 일어난다는 사상을 바탕에 깔고 한 말이다.
한국인은 대내외적으로 숱한 다툼, 원한을 갖고 있다. 이것들은 많은 부분 ‘내가 옳다’라는 유교 정신이 원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저는 유교로 굳어진 한국인에게 불교가 해독제가 됐으면 한다. 그러려면 두 가지 실천이 필요하다. 우선 우리말 속에 불교의 가르침이 배어야 한다. 유교의 언어 ‘이’가 한국인의 언어가 되고, 영혼이 되는 것처럼, 불교용어도 그렇게 돼야 한다. 중도, 무아, 연기법, 공 같은 용어들은 일상에 침투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불교인들이 뼈저리게 반성할 지점이다. 불교는 현대 한국인을 이루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현대 한국인은 유교만이 아니라 수많은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대 한국인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현대문명 전반에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다. 불교가 선방(禪房)에만 있지 말고, 현대학문, 현대문명을 자기 영역으로 삼아 문명을 이끌어야 한다. 현대물리학, 생물학, 형이상학 등 현대학문 대부분이 불교와 맥락을 같이한다. 그만큼 불교는 위대한 철학 체계이다. 불교는 1천 년 전만 해도 차지했던 문명의 원류였던 자리를 다시 차지하고 불국토를 만들려는 실천을 해야 한다.
허우성(경희대 명예교수) : 얼마 전 《불교평론》에 실린 글에서 나는 이런 얘기를 했다. 조중동(조선 · 중앙 · 동아일보) 읽는 사람이 〈한겨레〉나 〈경향신문〉도 읽고 〈한겨레〉 〈경향신문〉을 읽는 사람들은 조중동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시간을 5대5는 아니더라도, 10대1 정도라도 할애하길 바랐다. 사실 조중동을 읽는 사람들은 나름의 감정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한겨레〉 〈경향신문〉 독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념적 간극이 대단히 크다. 열린논단에서 2월 〈한겨레〉 조현 기자를 초청했고, 3월에는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를 초청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김한수 기자는 좋지만, 〈조선일보〉가 문제라고 했다. 나는 열린논단에 나오는 사람들도 이념적 간극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 사이에 화쟁이 가능할까. 나는 우리나라가 진보와 보수 사이에 좀 더 이해와 애정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공동체가 튼튼했으면 한다. 사회적 애정과 튼튼한 국가공동체를 위해 진보와 보수 사이에 간극을 메울 길이 있어야 한다. 불교가 그 길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누가 그런 길을 열어 보이면 좋겠다.
이도흠(한양대 교수) : 나는 불교의 깨달음에 대해 세 가지로 말씀드리겠다. 하나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마하박가》에 나온 것처럼 부처님께서 사성제와 공과 연기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법마저도 방편인 것이 깨달음의 속성이다. 또 하나는 깨달음은 선에서 말하듯 궁극적으로 진여실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뢰야식 종자까지도 맑게 하는 것이다. 언어를 초월하고, 의식을 초월한 그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고 본다. 세 번째 깨달음에서 중요한 것은 지혜와 자비이다. 세친(世親)에 따르면 지혜가 있어 우리가 열반을 지향하지만, 자비가 있기에 우리는 세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원효의 화쟁사상에는 ‘진속불이론(眞俗不二論)’이란 것이 있다. 내가 궁극적으로 깨달아 부처가 됐어도 고통받는 중생이 있으면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고통받는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르게 할 때 나는 그때야 비로소 부처가 된다고 본다. 한국불교는 바로 이 점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불교의 궁극적 지향은 열반이라는 사실이다. 나만의 니르바나(열반)가 아니라 타인의 니르바나까지 성취해야 한다. 연기를 알면 크게 세 가지가 가능하다. 하나는 내가 무아라는 것, 자성이라는 것 없이 공이기 때문에 실상을 직시해야 한다. 연기법은 역동적 인과관계다. 원인이 결과를 만들 뿐만 아니라 결과가 원인을 만든다. 또 원인을 바꾸면 결과 또한 달라진다. 역동적이고 진보적인 것이다. 고(苦)가 집착을 낳는다면, 고를 없애면 집착이 없는 세상이 될 수 있다. 그런 니르바나가 필요하다. 선불교는 너무 암자에 머물러 있다. 중생 속으로 내려와 깨달음의 사회화가 돼야 한다. 그럴 때 계율은 깨달음의 사다리가 돼야 하는데 지금 한국불교는 너무 그 역할을 못 한다.
화쟁에 대해서 한 말씀 더 하겠다. 개시개비(皆是皆非)도 화쟁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군대에서 일병이 날씨가 너무 추워 세수를 못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소대장이 병장에게 온수를 떠오라고 시켰다. 결국 그 일병은 김 병장한테 군기가 빠졌다고 두들겨 맞았다. 똑같은 상황이 다음날 벌어졌다. 날이 추워서 일병이 세수를 못 하고 있자 인사계는 병장에게 “내가 세수할 물을 떠오라.”고 했다. 인사계는 그 물에 일병이 세수하게 했다. 개시개비를 넘어, 후임병과 선임병 사이의 연기적 관계를 알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현대로 와서 연기 속에서 영향을 미치는 게 권력이다. 권력을 인식해야 한다. 화쟁은 기본적으로 대대(對待)다. 양 속에 음이 있고 음 속에 양이 있다. 원효 스님 또한 딜레마에 봉착했다. 궁극적인 진리는 언어를 떠나 있는데, 언어 없이는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 그랬을 때 대대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화쟁이라고 본다.
이덕주(문학평론가) : 저는 6~7년 정도 열린논단에 나왔는데, 그동안 많이 배웠다. 개인적으로 불교에 대해 고등학교부터 침잠한 경험만 있었다. 뒤늦게 열린논단에서 다시 공부했다. 처음에 선에 깊이 빠져들었다. 웬만한 선 관련 서적은 다 읽었는데,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결론은 그것도 하나의 방편이라는 것이다. 현실에서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와 비 그 어느 쪽에 걸리지 않으려면 내가 시와 비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가 다양하게 불교에 침잠한 사람들 만나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상인(협성대 교수) : 불교도가 이상으로 삼는 인간상을 부처라 한다. 무엇이 부처인가. ‘나무아미타불’ 속 아미타부처님은 무량광불이다. 부처님을 밝음이라고 하면, 중생은 어둠이고 지옥이다. 무량광인 부처님께서는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고 자비와 지혜가 충만한 분이다. 저는 중생이지만, 불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게 마냥 슬프고 지옥같이 고통스럽지는 않다. 고와 낙이 같이 있는 삶을 살고 있다. 불교의 교리에서 보면 고와 나까지 넘어가야 부처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는데, 나는 그곳까지 이르지 못했다. 우리 마음속에 가장 부처님과 가까운 것은 양심이라고 생각한다. 내 양심에 부끄럽지 않고, 어긋나지 않고 내가 기쁘고 마음이 밝은 상태를 부처라고 생각한다.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떨 때는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고 가끔씩 밝은 마음이 들고 이게 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불교인으로 살아가면서 결국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부처님을, 각자에 따라 내 양심이라고 해도 되고 자비다 해도 된다. 자비의 마음이 일어날 때, 보시의 마음이 일어날 때 부처님이 나에게 온 것이고, 내 마음속 부처님이 나왔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수행은 끊임없이 일상에서 내가 느끼는 부처님을 많이 느끼는 게 불교를 믿고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창숙(불교학자) : 한국인이 미국에 이민 가서 처음 만난 인연이 직업을 결정한다고 한다. 세탁소 주인을 만나면 세탁소를 하기 쉽다는 얘기다. 중간에 불문에 들어올 때는 스승을 잘 만나는 게 중요하다. 나는 처음에는 법정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한 번도 불교가 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얘기해줬다. 두 번째 성철 스님을 뵈었는데 스님은 “중 보고 절에 다니지 말라.”고 하셨다. 참 좋은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화두도 주고 법명도 받았는데, 참선은 제 것이 잘 안 됐다.
언젠가 근대 선지식이라고 알려진 남회근 선생이 쓴 《알기 쉬운 불교수행법》이란 책을 읽었다. 7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었는데, 읽으면서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환희심을 얻은 게 아니라 열등감이 생겼다. 나는 왜 이렇게 모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분심(憤心)이 났다. 책을 쓴 사람도 있는데, 읽고도 모르는 게 말이 되나 싶어 알 때까지 읽자 하며 다시 책을 폈다. 중간쯤 어느 대목에서 책을 덮었다. “불교 수행의 기본은 순간순간의 자기반성이다.” 하는 말이었다.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말하면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늦게 알아차리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말이지 않은가. 저는 그것만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불교가 가진 콘텐츠는 굉장히 좋은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삼성이 작년에 3천억 원을 들여 영덕에 사원연수원을 지었다. 제가 그곳을 가봤는데, 가장 좋은 자리에 3층짜리 명상센터를 만들어 놨다. 좌복만 있는 명상센터를 보고, 불교가 가진 콘텐츠가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은 도움을 줄 것이란 낙관론을 가지고 있다. 그런 것을 불교가 주도적으로 한다면 큰 성과가 있을 것이다.
박용길(불교저술가) : 지금까지 우리는 깨달음을 주제로 한 토론을 정말 많이 한 것 같다. 불교에서 깨달음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깨달음의 내용에 대해 소홀해지고 흐릿해지는 역설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깨달음이 무엇이냐고 뛰어들어가야 한다. 이제부터 열린논단은 100회 동안 축적된 지혜를 바탕으로 깨달음에 대한 선언을 하고 실천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연향(시인) : 부처님께 기대서 살아온 시간이 꽤 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에게 불교가 무엇인지, 나의 기도와 방향이 제대로 된 것인지 확실한 답을 찾지 못했다. 어쨌든 나 자신을 구원하고 내가 평화로워지고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을 보람되게 보낼 수 있었으면 한다. 한때는 좌선한다고 앉아 본 적이 있다. 어느 날 제 몸이 이 공간과 경계가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내 가슴속에 있는 생각, 마음, 응어리 같은 것은 없어지지 않았다. 무의식과 의식 가운데 이 덩어리는 왜 없어지지 않는지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다음에 앉아 있을 때 호흡이 가빠지면서, 내 속 응어리가 녹아 가슴이 텅 빈 느낌을 받았다. 내가 늘 생각하는 감정이나 부정적인 생각, 그런 것들은 내 가슴속에 있는 게 아니라 기억이고 하나의 습관이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됐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화가 날 때도 아무런 실체도 없는 것에 끄달리지 말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실천에 대한 얘기는 찬불가 〈보현행원〉으로 대신하겠다.
박종린(전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 속에 불교가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가 이 여섯 자를 다 이해할지, 얼마나 동의하고 이해할지 궁금하다. 이렇게 말하는 나를 이상하다고 해도 좋고, 정말 그럴까 의문을 갖고 참구해 봐도 좋다. 실수가 됐던 이론적 공부가 됐던 한번 매달려보면, 무자 화두 드는 것보다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유정길(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 생태학자이자 불교학자인 조안나 메이시가 지금 같은 전환기에 두 가지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호스피스 역할과 산파 역할이다. 돌아가실 분들을 잘 돌아가시게 해 남은 유산을 연속성 있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태어나려고 하는 모든 대안의 씨앗이 잘 태어날 수 있도록 산파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열린논단도 호스피스 역할과 산파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환경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 관심이 많다. 불교가 환경문제에 대해 사상적으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그건 담마(법)로서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그 희망이 구체화되려면 불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을 확산시키고 그 조직을 불교가 해야 한다. 이런 사회적 실천이 중요하다.
이철훈(흥덕고 교사) : 불교 하면 나이 든 분들이 좋아하고, 학자가 좋아하는 종교란 생각이 든다. 젊은 사람, 청소년들이 믿는 종교라는 느낌은 없다. 불교를 통해 많은 사람이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데 안타깝다. 저 같은 경우에도 불교를 통해 학생에게 위안을 준 적이 있다. 제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 SNS 프로필에 “내년엔 꼭 죽겠다”고 쓰고, 책도 자살, 죽음이란 책만 골라 읽는 아이가 있었다. 걱정스러워 어느 날 학생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우선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지워보라고 했다. 모든 것을 지운 뒤에 자신을 비추는 햇빛과 바람을 느껴보라고 하니 느껴진다며 곧잘 따라왔다. 그 순간 고통을 느꼈냐고 물어봤는데, 고통을 잊었다고 답했다. 상담 후에 아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불교책을 권해주고 싶었지만, 책이 없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지만 불교를 지혜로운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내용이 많지만, 아이들이 불교적 지혜를 공부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다. 아이들이 읽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불교 서적이 필요하다.
학교교육과정에 동양사상으로 유 · 불 · 도교가 있지만, 불교의 분량이 가장 적다. 박병기 교수가 교육과정이 바뀔 때마다 유식과 중관, 불교의 이상국가를 교과에 넣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실제로 교과서에 유식과 중관이란 단어가 들어 있지만, ‘유식과 중관이 있었다’는 수준에 그친다. 또 4~5종에 이르는 교과서 중 한 권에만 ‘불교는 불국토를 지향한다’는 말이 한 구절 나올 뿐이다. 그에 대한 설명이 없다. 현장에서 교육하는 교사들에게 유식과 중관을 윤리학적으로 설명한 불교 서적이 많지 않다는 것도 지적하고 싶다. 유교와 도교와 대조된다.
박병기(한국교원대 교수. 본지 편집위원장) : 한국사회에서 깨달음은 무엇이고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화두를 갖고 있다. 불교 공부의 스승을 만나면서 깨달음을 교의적 차원이 아니라 일상적 삶 속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을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관심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일상 속에 명상이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잠깐 짬이 나면 혼자서 염불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일상과 수행이 분리되지 않는구나, 그래서 스승이구나 생각했다. 또 하나는 우리 사회가 나아지길 바라고 그런 노력을 실천하는 것을 봤다. 실제로 깨달음은 무명이란 어둠 속에서 사는 일상에서 밝음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능하면 불자들, 교육계 종사자에게 불교를 가르치고, 선생과 학생들도 일상적인 깨달음을 삶 속에 구현해 고통이 감해지려는 노력을 각자 자리에서 해야 한다. 그런 책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등학생이 읽을 만한 책, 그 이전에 교사들이 참고할 만한 책이 없다. 《금강경》 《수심결》을 보조텍스트로 해 놨음에도 일반 교사가 그것을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노력들이 제가 깨달음의 실천 차원에서 노력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혼자 하기엔 버겁고 힘들다. 도움을 줬으면 한다.
명법 스님(구미 화엄탑사 주지) : 최근 종단에서 불교 교과서를 만들었다고 해서 감수를 부탁해 왔다. 감수하면서, 과연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 내용도 어렵고 마음에 남을 알맹이가 부족했다. 책을 쓴 사람들은 윤리학 교수와 대학원생들이었는데 참고서적, 연구논문이 너무 오래된 것이었다. 우리나라 불교학계의 부지런하지 못함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구미 화엄탑사 불교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경전 과정에 온 학생들과 대화하다 보면 불교의 고급한 교리를 줄줄 꿰고 있지만, 말만 알지 내용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불교학 수준, 스님들이 가르쳐온 불교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사례다. 이는 학자들과 스님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부처님께서는 희론(戱論)을 금하셨음에도, 지금 얘기되는 많은 것들이 추상적이다. 이념적이고 구호가 많다.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이념과 구호를 주장하려면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한데, 그건 없고 결론만 존재한다. 아까 담마의 구체화를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지가 빠져 있으니 교과서에 실을 수 없다. 또 우리는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내재적으로만 이해한다. 불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불교를 모르면서 불교를 살고 있다고 착각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본다. 불완전하다는 자각을 스님은 물론 불자들도 해야 한다. 요사이 불교신행의 경향으로 명상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것이 희망적이긴 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시대적 흐름이긴 하지만 감성적인 체험에 치중돼 있다.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언설(言說) 위주로, 추상적으로, 내재적으로 이해한 불교를 자기 삶으로 가져오려면 감성적 체험이 필요하긴 하다. 문제는 거기서 끝난다는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부처님 말씀에 비춰 내가 부족한 것은 무엇이고 더 나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지도해줄 스승이나 노력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상업화 측면과도 맞물린다. 결국 이 두 가지가 수렴돼, 체험에서 머물지 않고 부처님 가르침에 더 높은 차원으로 전환돼야 한다.
구윤임(동국대 박사과정) : 뒤늦게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해 불교상담심리를 공부하고 있다. 2개월 정도 공부하다 보니 교재나 자료 등 모든 게 외국 원서로 돼 있고 국내에서 나온 책은 단편적인 내용에 불과했다. 심도 있게 전공한 분이 많지 않았다. 다행히 저는 외국 생활을 할 때 명상센터에 다닌 경험이 있어 이해가 쉽긴 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교재도 제대로 없어서 공부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열린논단에 오면 불교를 이론적으로 깊이 공부하지만, 실제적인 면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다. 제가 조계종 국제포교사회에서 어린이 영어포교를 위해 활동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영어조기교육을 많이 하는데, 정작 불교계에는 어린이법회 영어교재도 없었다. 벌써 7년 전에 영어교재 한번 만들어보자고 종단과 논의한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임원진이 교체되면서 일이 중단되는 것을 서너 차례 겪었다.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겠지만, 이론적인 것보다 실제 우리가 필요한 것을 고민했으면 한다. 실용적으로 사용할 불교상담심리에 관한 책도 만들어주고, 어린이 영어법회를 위한 교재도 만들어줬으면 한다.
김관성(불교 수행자) : 깨달음이란 중생이 눈의 경계를 초탈한, 니르바나 경지를 완성했을 때 드러나는 경계다. 그러나 불교계에는 중생의 경계, 중생의 조건을 정확하게 정립한 내용이 없다. 우리 스스로도 무엇을 초탈하기 위해 수행하는가 생각해보자. 중생의 근본조건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그 내용은 경전에 나와 있다. 그것을 제대로 파악해서 설명해야 한다. 만약 중생의 근본조건을 확실히 알게 되면, 초탈할 수 있는 수행방법이 잘못됐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금강경》에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수행했던 방법이 나와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중생 근본조건을 먼저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수행을 제대로 하려면 자기 자신이 왜 중생인가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 중생 근본조건의 끝단에서 수행은 시작된다. 한 발자국 나아가는 단계다. 공이나 진여는 부처님 깨달은 후에 나온 얘기다. 그것을 미리 당겨서 인지해 쓰지 말고 경계를 체득한 후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김혜천(다도 강사, 시인) : 조계종 12기 포교사다. 5년 동안 포교사로 활동하면서 상(相)을 다 내려놔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자꾸 상이 일어났다. 나 자신을 먼저 내려놓는 일이 급하다는 생각에 활동을 중단했다. 다도를 배우고 최근에는 시를 쓰고 있다. 세 가지 일을 기도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산다. 100회 열린논단에 오기 전, 불자로서 삶의 태도가 어떤지 스스로 돌아봤다. 깨달음이라는 게 어떤 커다란 것, 갑자기 참선을 통해 어떤 경지에 이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상에서 매 순간 느끼고 알아차리는 그 자체가 깨달음일 것이다. 돈오점수의 자세로, 중생으로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깨달음이란 개념 자체를 달리 생각했으면 한다. 저는 이타행 공덕을 통해 정각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철저히 일상수행을 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경전에 나오는 단어들을 가르치기보다, 생활에서 불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불교가 됐으면 한다. 사찰에서 불자들에게 신행을 인도하는 것, 손을 잡고 걸음마를 시작할 정도로 작은 실천들이야말로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불자들을 가르치려면 적어도 사회가 무엇 때문에 아픈지 알아야 한다. 얼마 전, 지구 온도가 올라가면 더위나 가뭄으로 고생하는 인도인들의 자살률이 높아진다는 얘기를 들었다. 환경문제는 우리 문제고 생명의 문제다. 불자인 우리가 일상에서 무엇을 실천할 것인지 함께 고민했으면 한다. 만약 열린논단에 온 분들이 종이컵 대신 각자의 컵을 사용한다면, 쓰레기도 줄고 환경도 보호할 수 있다. 작은 실천이라도 함께하면 좋을 것 같다. 생활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게 불교가 아닐까 싶다.
박광서(서강대 명예교수) : 나는 지금 한국불교 상황을 여섯 가지 형태로 나누어 말한 적 있다. 3가지는 가능성이 높고, 3가지는 낮은 내용이다. 첫 번째는 한국불교는 10년이 가도 지금 흐름에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불자 수는 계속 줄어들 것이다. 두 번째, 불자라는 자긍심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혼자 공부하고 수행하는 사람들이 10~20% 정도 남을 것 같다. 세 번째는 누가 물으면 어느 때는 불자라고 하고 어느 때는 무종교인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생겨날 것이다. 그렇지만 다음 세 부류는 극소수면서 한국불교의 자극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하나는 종단 개혁에 몰두하는 사람들 상당히 소수지만 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출가승과 종단과 무관한 제3의 길을 주장하고, 개척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셋째는 한국불교에 아예 절망해서 개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불교는 위기다.
나는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정신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화두는 버려야 한다. 그것을 벽이라고 느껴서, 물론 꿰뚫는 소수는 우주를 삼키는 대인이 되지만, 한국불교는 그것 때문에 막혀 있다. 《금강경》 한 구절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응무소주’는 무소유를 얘기하는데, 불자마저도 소유의 노예가 돼가고 있다. 무소유라고 해서 인연이나 한국불교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게 아니다. 무소유 하되,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 불자로 태어난 것, 주변 인연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출세간을 최상으로 여기는 탓에 사회적으로 낙오되고 있다.
또 화두가 너무 커서, 무소유라는 간단한 것조차 실천하지 못하는 불자가 많다. 현실적이지 못하다. 지혜를 얻는 게 뭔지, 자비를 행하는 게 뭔지 구체적으로 되지 않으면 한국불교는 소생할 길이 없다. 한국불교는 이런 현실을 깨닫지 않고는 살아날 방법이 없고, 불자도 살아날 방법이 없다.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그것 역시 현실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그것을 부처님 가르침으로 돌파하겠다는 압축된 가르침과 소화가 안 되면, 한국불교는 가망이 없다.
서재영(성균관대 초빙교수) : 우리가 편하게 하는 얘기 중 하나가 “너는 머리에 똥만 들었냐”는 말이다. 최근에 제가 《백장록》을 강의하고 공부하면서 그 말의 출처를 찾아냈다. 백장 스님이 ‘희론지변(戱論之便)’이란 말씀을 한 것이다. 스님은 있다 없다, 나다 남이다 하는 양변의 사유를 희론의 똥이라고 했다. 앞서 허우성 교수 말씀에 저도 동의한다. 현대사회는 진보냐 보수냐 남성이냐 여성이냐, 일베냐 워마드냐 하는 극단적인 자의식에 갇혔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고(苦)에 대해 아는 것이다. 고를 아는 것은 우리가 처한 위치를 아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고를 덮어놓고 내면으로 침잠했다. 명상 같은 수행 붐이 일면서, 끝없이 자기연민을 강화하고, 명상이란 명분하에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어물쩍 넘어간다. 작은 문제에 상처받은 것을 침소봉대해서 상처받아 아프다고 집중하는 건 심각한 문제다. 고를 아는 것은 내면적인 고에 침잠하는 문제가 아니라, 연기와 무아라는 가르침은 결국엔 외향적인 이타심 자비심 실천을 통해 아는 것 아닌가. 양변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문제를 깨달아야 하고, 생명가치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최근 낙태 논쟁이 일어났다. 불교계에서 중요한 문제임에도 모두 침묵하고 있다.
최근 강의하러 학교에 갔다가 학생들이 붙인 대자보를 봤는데, 낙태죄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문제를 제기했다. 우생학적으로 낙태를 허용함으로써 어떤 장애인도 태어나지 않을 것이란 반론이었다. 모든 중생이 부처라고 얘기하면서 우리는 생명에 대해 너무 무지해 이런 문제를 전혀 얘기하지 못하고 있다. 더 나아가 동물이나 생태적인, 환경적인 문제가 바로 ‘사회적 고’인데 사회적 고를 깨닫는 게 절박한 문제다. 고를 깨달을 때 개인적인 불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불성으로서 불교의 실천성, 생명력을 가져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단 낙태 문제뿐만 아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일부 불교인들은 지나치게 현실영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급진적인 어떤 해석에 동의하지 않으면 문제가 된다는 식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 같다. 이런 태도에 대한 불교 지식인들의 용기 있는 발언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장성우(동국대 강사) : 열린논단 100회를 축하한다. 어렵게 써야만 인정받는 불교학계에서 쉽게 쓰는 글이 실리는 학술지 같은 고급 교양지가 계속 나오고, 귀한 토론 자리도 활성화됐으면 한다. 그리고 현실의 문제를 예리하고 날카롭게 해결하는 포인트를 잡아가기를 희망한다. 제가 대학원 가서 공부하다 보니,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만 알 수 있는 게 우리나라 불교였다. 그런 현실이 안타깝다. 책 한 권 보면 알 수 있는, 쉽게 풀어내는 불교가 필요하다. 우리는 불교를 쉽게 쓰는 운동을 해야 한다. 어렵게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쉽게 풀어내는 작업도 이뤄져야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고’를 말씀하셨고, 그것은 현실이다. 현실에 있는 여기저기에 있는 ‘고’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서 지혜가 나와야 한다. 현실의 ‘고’와 관련 없는 불교는 지혜가 아니다.
법헌 스님(법륜사 주지) : 앞서 한국불교가 지속 가능한가 문제를 던졌는데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깨달은 몇 분이 한국불교를 끌어갈 순 없다. 지금 불자들이 줄어든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부처님 가르침은 현교와 밀교로 나뉘는데, 신라, 고려 때 밀교가 대중을 이끌어갔지만 지금은 현교로 가고 있다. 1,700년 동안 지내오면서 불교는 변화된 게 없다.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옛날 방식을 조금도 탈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해서 앵무새같이 계속 얘기한다. 스님들도 다르지 않다. 부처님 말씀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을 하나라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 노력을 우리 모두 해나가야 한다.
방영준(성신여대 명예교수) : 보름 전에 사찰음식으로 유명한 정관 스님 인터뷰 기사를 봤다. 스님은 레시피가 하나인 음식은 죽은 음식이라고 했다. 계절, 날씨, 재료의 신선도, 드실 분, 셰프의 손에 따라 매번 다양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불교도 그래야 한다. 하나의 레시피가 아니라 현실에 대응하는 다양한 방편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동안 나는 관세음보살을 외우며 관음신앙을 실천해왔다. 그런데 열린논단에 나오면서 정말 많은 책을 읽었다. 도리어 많이 헷갈렸다. 그래서 다시 관음기도로 가닥을 잡고 있다. 그런데 지금 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왜 그동안 나는 한 가지 레시피만 찾으려고 애썼나 싶다. 지금까지 한국불교는 입맛이 고급인 사람, 상근기에 맞는 사람에 맞는 레시피를 개발해 왔다. 시중에서 2천 원, 3천 원짜리 음식을 만드는 레시피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박경준(동국대 명예교수) : 불교학자들은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비전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개인 구원은 자기완성, 사회구원은 사회완성이라 할 수 있다. 지금 한국불교는 개인적 해탈과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비전을 확실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관념 속에서 허우적댄다. 사회문제도 마찬가지다. 제가 10년 전 《불교사회경제사상》이란 책을 냈는데, 총론을 다뤘다면 각론에 대해서는 부족하다. 아직까지도 불교는 개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자기완성의 비전, 사회완성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비전을 제시하려면 구체적인 지침이 필요한데 우리가 그게 부족하다. 함께 희망을 갖고 나가려면 구체성이 필요한데, 불교 지식인들의 역할이 크다. 정치 사회 경제적인 현실문제에 대해 다뤄야지, 관념에 빠지면 결국 죽은 종교다. 산 종교로 불교가 자리매김하려면 구체적인 행동지침,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김우남(소설가) : 열린논단 유일의 부부 참가자다. 저는 불교를 잘 모르지만, 우리 집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자랑하고 싶다. 제 남편은 요즘 집과 동네에서 청소수행을 하고 있다. 저도 늦게 알았다. 설거지 수행도 한다. 저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수행이라고 하며 애써서 설거지를 하고 동네 골목을 청소한다. 많은 분이 일상과 생활불교를 얘기하는데 바로 이런 태도가 생활불교가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나는 뒤늦게 집에 계신 부처님께 감사한다. 불교를 멀리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집안에 계신 부처님에게 배울 수만 거기에 우리가 나아갈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 : 두 부부의 아름다운 얘기, 감사하다. 부부가 서로 도와가며 부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엇을 깨닫고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라는 오늘 토론주제의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열린논단이 드디어 100회까지 왔다. 오늘 우리가 주제로 삼은 깨달음과 실천의 문제는 개인적인 것인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다. 앞에서도 말씀이 있었지만 사회적 고를 어떻게 인식하고, 해결을 위해 어떤 노력해야 할 것인가는 앞으로 우리가 더 탐구해야 할 화두고 주제이다. 여러 가지 분석과 처방을 말씀했다. 토론시간 동안 다소 중구난방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돌아보니 한쪽으로 모이는 결론이 있었다. 그것은 불교가 관념의 종교가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완성되어가는 종교, 우리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면 이웃을 위해 회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결론이야말로 집단지성의 힘이 아닌가 싶다.
열린논단 100회를 맞아 시도한 대토론회에서 좋은 의견을 많이 나눠줘서 고맙다. 그리고 반드시 익명을 요구하며 100회 기념 뒤풀이 잔치를 마련해준 몇몇 불자님들에게 감사의 인사 올린다. 오늘이 있기까지 성원해준 모든 분에게 공덕을 돌린다. 더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대토론회를 마치겠다. ■
정리/ 어현경(불교신문 기자)
출처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