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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8월 25일 화요일
[(녹)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루도비코 또는
[백] 성 요셉 데 갈라산즈 사제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그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라고 당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시며,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하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이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2서 말씀입니다. 2,1-3ㄱ.14-17
1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가 그분께 모이게 될 일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2 누가 예언이나 설교로 또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3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14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5 그러므로 이제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23-2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주로 약재나 향신료로 쓰이는데, 대규모로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텃밭에 깻잎이나 부추 등을 먹을 만큼만 심는 것처럼 필요한 만큼만 심어서 쓰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굳이 이런 것들까지 정확히 따져서 십일조를 바치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아주 작고 사소한 농작물에도 십일조를 내었습니다. 겉으로는 좋은 태도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작은 작물 하나하나까지 챙긴 것은 ‘자기 과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보아라. 나는 이렇게 작은 것까지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다.’라고 남들에게 드러내려는 태도입니다. 또 하나는 율법의 작은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지키는 모습을 보여서 ‘과연 바리사이들은 다르구나. 저렇게 작은 것까지 지키는 것을 보면 의로움, 자비, 신의와 같은 중요한 부분들도 당연히 잘 지키겠지.’ 하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자기 과시와 기만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십니다.
우리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뜻을 따르는 방향으로 향하려고, 우리 삶을 정화하려고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곧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고 계명을 지키며, 주님의 은총을 담고자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테살로니카 공동체에 권고한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속지 말고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켜]”(2테살 2,15) 나간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담을 수 있는 깨끗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유청 안셀모 신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알래스카 앵커리지 여행을 잘 다녀왔습니다. 그곳에는 후배 신부님이 선교사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교구장님의 부탁으로 다섯 개의 성당을 맡아 돌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일주일 동안 신부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 다섯 성당을 모두 다녀왔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8년 넘게 알래스카 현지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여러 가지 능력이 있었습니다. 영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도 자유롭게 구사했습니다. 저를 위해 매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었고, 성당의 시설에 문제가 생기면 웬만한 것은 직접 수리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게 깊은 감동을 준 것은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성당에 청소하러 오는 한 형제님이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신부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교우들에게 연락하여 탄원서를 준비하고, 마치 자기의 일처럼 그 형제님을 도와주었습니다.
언어를 잘하고, 음식을 잘하고, 손재주가 좋은 것도 훌륭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사제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어쩌면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일 것입니다. 신학교에서는 사제의 직무를 세 가지로 배웠습니다. 교직, 제사직, 예언직입니다. 첫째는 교직입니다. 사제는 복음을 선포하고 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강론을 성실히 준비해야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고, 신자들에게 충실히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제가 선포하고 가르친 말씀을 정작 제 삶으로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사랑하지 못했고, 용서를 말하면서 용서하지 못했으며, 겸손을 말하면서 제 생각을 앞세울 때가 있었습니다.
둘째는 제사직입니다. 사제는 성사를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냅니다. 첫 미사를 봉헌하던 그 마음으로 정성껏 미사를 봉헌해야 합니다. 고백성사와 병자성사도 온 마음을 다해 집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익숙함은 때로 정성을 빼앗아 갑니다. 돌아보면 형식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습관적으로 성사를 집전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기도하면서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셋째는 예언직입니다. 사제는 시대의 징표를 읽고, 동시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말을 겸손하게 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변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책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보다 제가 필요해서 사람들을 만날 때가 더 많았습니다. 외로운 사람,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지난 35년의 사제 생활을 돌아보며, 앞으로 남은 사제 생활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신학교 시절 읽었던 ‘신자들이 바라는 사제’라는 글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기도하는 사제, 힘없고 약한 사람을 돌보며 그들의 고통을 나누는 사제,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제, 강론을 성실히 준비하는 사제, 성사를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집전하는 사제, 죽기까지 사제직에 충실한 사제”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 제가 잘한 것보다 부족했던 것이 더 많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부족함을 깨닫는 것은 절망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직책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칭찬도 아니고 화려한 말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사제복을 입고, 강론을 하고, 성사를 집전한다고 해서 저절로 좋은 사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마음의 잔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교만과 욕심, 독선과 무관심을 비워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채워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 다니고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사랑과 자비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잔의 겉만 깨끗이 닦는 것과 같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형제님을 위해 자기의 일처럼 나섰던 후배 신부님의 모습에서 저는 오늘 복음의 가르침을 보았습니다. 의로움은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비는 고통받는 사람의 곁에 서는 것입니다. 신의는 어려울 때도 사람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직책은 언젠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힘없는 사람의 손을 잡아 주었던 사랑은 하느님 앞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저도 앞으로 남은 사제 생활 동안 겉모습보다 마음을 깨끗이 하는 사제가 되고 싶습니다. 말로만 복음을 전하지 않고 삶으로 복음을 보여 주는 사제, 힘없고 억울한 사람의 곁에 서는 사제, 기도와 성사를 정성껏 드리는 사제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마음의 잔을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그 안에 미움과 욕심과 교만이 있다면 깨끗이 비워 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채워 넣으면 좋겠습니다.
<보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마태 23,23)
믿음은
굳이
보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오롯이
믿을 뿐
희망은
굳이
보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오롯이
희망할 뿐
사랑은
굳이
보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오롯이
사랑할 뿐
의로움은
굳이
보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오롯이
의로울 뿐
참은
굳이
보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오롯이
참일 뿐
착함은
굳이
보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오롯이
착할 뿐
고움은
굳이
보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오롯이
고울 뿐
맑음은
굳이
보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오롯이
맑을 뿐
깨끗함은
굳이
보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오롯이
깨끗할 뿐
부드러움은
굳이
보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오롯이
부드러울 뿐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로 채우는 믿음
김웅태 신부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1. 겉은 빛나지만 속은 더러운 잔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귀한 손님이 오신다며 찻잔을 깨끗이 닦아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손님이 오시고 차를 대접하려던 어머니는 잔을 집어 들고 깜짝 놀랐습니다. 잔의 겉은 눈이 부시도록 반짝였지만, 안쪽에는 묵은 차 찌꺼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얘야, 잔 안쪽은 왜 닦지 않았니?”
아이는 천진하게 대답했습니다.
“엄마, 사람들은 잔 바깥쪽을 먼저 보잖아요!”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를 짓지만, 어쩌면 이 아이의 모습이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는 세심하게 살피면서도, 정작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마음속은 제대로 돌보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2.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태도를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마태 23,23)
당시 예수님께 꾸지람을 받은 이들은 아주 작은 향신료까지 헤아려 십일조를 바칠 만큼 세세한 규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하느님의 뜻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 자체를 무시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외적인 규정을 지키면서도 그보다 더 중요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외면한 데 있었습니다.
의로움은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비는 고통받는 이의 처지를 헤아리고 그에게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신의는 하느님께 충실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진실을 지키는 것입니다.
외적인 신앙 실천은 이러한 내면의 정신에서 비롯될 때 비로소 참된 의미를 지닙니다.
3.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6)
우리도 주일미사에 빠짐없이 참례하고,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적인 신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당 문을 나선 뒤 가족과 이웃에게 인색하고, 상처 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며, 마음속에 탐욕과 판단과 미움을 품고 살아간다면 잔의 겉만 닦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외적인 신앙생활을 버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와 미사 참례, 봉사와 희생이 깨끗한 마음에서 흘러나오기를 바라십니다.
잔 속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완벽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살피고, 잘못을 인정하며, 주님의 자비 안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한 회개와 고해성사를 통하여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이웃에게 끼친 상처를 치유하며, 마음속에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채워 가야 합니다. 내면의 정화는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께 마음을 내어 드리는 신앙의 여정입니다.
4. 흔들리지 말고 복음에 굳건히 서십시오
오늘 제1독서에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는 잘못된 주장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들에게 권고합니다.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2테살 2,3ㄱ)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2테살 2,15)
여기에서 말하는 전통은 단순히 오래된 관습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사도들에게 전해진 복음의 진리, 그리고 그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신앙의 길을 뜻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외적인 규정에 집착하여 율법의 중심을 놓쳤다면,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그럴듯하게 들리는 거짓 가르침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신앙의 중심을 잃어버릴 위험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에도 세상은 외모와 재산, 직책과 사회적 평가를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합니다. 자극적이고 확신에 찬 말들이 진리인 것처럼 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그럴듯하게 포장된 주장에 흔들리지 말고,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신앙의 중심에는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다.
5. 좋은 일과 좋은 말로 드러나는 믿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하루 우리 마음의 잔 속을 조용히 들여다봅시다.
내 마음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까? 아니면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판단, 오래된 미움과 상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흠잡을 데 없는 겉모습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부족하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라도 그 안을 진실한 회개와 사랑으로 채우려는 마음을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참된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겉치레가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 자비를 가족과 이웃에게 전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정화된 마음은 마침내 좋은 일과 좋은 말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축복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시어, 오늘도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천하며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의 성인
성 루도비코(Louis)
신분 : 왕, 3회원
활동지역 : 프랑스(France)
활동연도 : 1214-1270년
같은이름 :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성 루도비쿠스(Ludovicus, 또는 루도비코)는 프랑스 왕 루이 8세와 카스티야(Castilla)의 블랑쉬(Blanche)의 아들로 프와시(Poissy)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1226년 그의 부친이 서거했을 때 그의 나이는 12세에 불과 했으므로 어머니가 섭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아들의 왕권을 노리는 샹파뉴(Champagne)의 티보를 비롯하여 야심 많은 귀족들과 대항했고, 어떤 때에는 전쟁도 불사하였다.
그는 1234년 5월에 프로방스의 공작 레이먼드의 딸인 마르가리타(Margarita)와 결혼하여 열 명의 자녀를 두었다. 같은 해에 그는 대권을 물려받고 통치자가 되었고, 모친 블랑쉬는 고문관으로 아들을 도왔다.
그는 1242-1243년의 남 프랑스의 반란을 진압했고, 또 잉글랜드(England)의 헨리 3세를 테임브르그에서 격퇴하였으며, 포와투를 손에 넣는 등 국가의 권력을 점점 확대하였다. 1248년 그는 십자군을 지휘하여 출정하였으나 1249년에 다미에타에서 포로가 되어 사라센인들의 손에서 곤욕을 치렀다.
그 후 그는 석방되어 성지로 가서 1254년까지 머물다가 모친의 사망 통보를 받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플랑드르(Flandre)와의 평화를 이룩했고 리모주(Limoges), 카오르(Cahors) 등 수많은 지역을 평정하였다.
루도비쿠스는 천성적으로 신심이 깊었고, 또 실제로 이상적인 수도자를 꿈꾸었다.
이 때문에 그는 정의를 펴고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왕으로부터 농부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권리를 옹호하여 성왕으로 불리었다. 동시에 그는 예리하고 힘찬 군주였으며,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불경한 태도나 말을 한 사실이 없다. 그의 맏아들에게 했던 유언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그대로 설명하고 지키도록 부탁할 정도였다. 1270년 그는 재차 십자군을 일으켰다가 8주일 후에 이질에 걸려 운명하였다.
성인은 한마디로 가장 이상적인 중세의 그리스도인 왕이었다. 그의 치하에서 프랑스는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
그의 신심은 자신이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됨으로써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작은 형제회 3회의 남자 수호성인이다. 그는 1297년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임종시에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주님, 저는 이제 당신의 집에 들어가렵니다.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하리이다.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드리나이다.” 그리고 오후 3시경에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생드니(Saint-Denis)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 요셉 데 갈라산즈(Joseph de Calasanz)
신분 : 신부, 설립자, 교육자
활동연도 : 1556-1648년
같은이름 : 갈라산스, 갈라상스,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칼라산스, 칼라산즈, 호세
아버지 페드로 갈라산즈(Don Pedro Calasanza)와 어머니 마리아 가스토네아(Maria Gastonea)의 막내아들인 성 요셉 데 갈라산즈(Josephus de Calasanz)는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페트랄타 데 라 살(Petralta de la Sal) 근처의 칼라산사(Calasanza)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스타디야(Estadilla)에서 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하였으며, 레리다(Lerida) 대학에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1571-1577년). 그리고 발렌시아(Valencia) 대학과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a de Henares)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이 기간 중에 어머니와 형이 사망하자, 아버지는 요셉이 돌아와 결혼하여 가문을 이어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요셉은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물리치고 1583년 12월 17일 우르겔(Urgell)의 주교인 우고 암브로시우스(Hugo Ambrosius)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성 요셉은 알바라신 교구에서 활동하였다. 교구장 주교는 성 요셉을 자신의 고문 신학자이자 주교대리로 임명하여 피레네 산맥의 외딴 지역들에 대한 성직자들의 개혁과 신앙 재건을 위하여 파견되었다. 요셉은 모든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1592년 로마(Roma)로 가서 콜론나(Colonna) 추기경을 만났는데, 그 추기경 역시 성 요셉을 자신의 고문 신학자 겸 조카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는 로마에서 교육과 자선 활동을 위한 공동체 설립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일반 국민들의 무지와 윤리적 타락, 특히 부모가 죽은 뒤 버림받은 고아들을 보살피고 교육하는 일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티베르 강을 끼고 있는 빈민가에서 유럽 최초의 무료 공립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는 1597년에 두 사제의 도움으로 이 학교를 연 다음 ‘그리스도교 교리 형제회’의 책임자가 되었다.
마침내 1617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는 성 요셉이 설립한 학교를 공식 수도회로 승인해 주었고, 많은 이들의 지원과 협력으로 이와 유사한 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어 학생수가 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1621년 11월 18일에 그의 공동체는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준을 받은 수도회가 되었으며, 성 요셉은 이 수도회의 종신 총장이 되었다.
초창기의 사제들은 주로 초등학교에서 가르쳤다. 성 요셉은 초급과 중급 학교의 체계화에 기여하였다. 그는 교과과정을 면밀히 구성하였고 어린이들이 선(善)을 사랑하도록 교육 원칙을 세웠다. “어린이들이 처음부터 신앙과 문학 교육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삶이 행복함을 알게 된다.”고 그는 기록하였다.
이들 학교는 에스파냐, 보헤미아(Bohemia), 폴란드, 이탈리아 등 수많은 나라에 세워졌다. 그러나 설립자의 만년은 야심을 가진 후계자들의 심각한 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또 다른 욥처럼 용기를 발휘하였지만 그의 수도회에 대한 신뢰는 그가 죽은 후에야 되살아났다. 그는 로마에서 1648년 8월 25일에 운명하였고, 1748년 8월 7일 시복되었으며 1767년 7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비오 12세(Pius XII)는 그를 ‘모든 그리스도교 학교의 천상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성 제네시오 (Genesius)
활동년도 : +3세기경
신분 : 희극배우,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게네시오, 게네시우스, 제네시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중 무대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사를 풍자한 연극을 공연하였는데, 배우 성 게네시우스(또는 제네시오)는 세례를 받으려고 준비하는 예비자로 출연하였다. 이 예식이 공연되던 중에 그는 갑자기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겠다는 생각이 불같이 타올라 세례를 받았다. 그가 이 사실을 황제에게 선언하자 황제는 그를 재판장 플라우티아누스에게 넘겼다. 재판관이 이교신에게 희생 제사를 바치라는 요구를 하자 그는 믿음을 지키며 끝까지 거절하고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게네시우스는 배우의 수호성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