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의 2번째 저서에서 이같은 사실을 다시 심화하여 집필하였다.
《수서(隋書)》列傳第46 東夷
新羅國,在高麗東南,居漢時樂浪之地,或稱斯羅.魏將毌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復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獩之地.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傳祚至金真平,開皇十四年,遣使貢方物.高祖拜真平為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其先附庸於百濟,後因百濟征高麗,高麗人不堪戎役,相率歸之,遂致強盛,因襲百濟,附庸於迦羅國.
其官有十七等:其一曰伊罰干,貴如相國;次伊尺干,次迎干,次破彌干,次大阿尺干,次阿尺干,次乙吉干,次沙咄干,次及伏干,次大奈摩干,次奈摩,次大捨,次小舍,次吉土,次大烏,次小烏,次造位.外有郡縣.其文字,甲兵同於中國.選人壯健者悉入軍,烽,戍,邏俱有屯管部伍.風俗,刑政,衣服,略與高麗.百濟同.每正月旦相賀,王設宴會,班賚群官.其日拜日月神.至八月十五日,設樂,令官人射,賞以馬布.其有大事,則聚群官詳議而定之.服色尚素.婦人辮發繞頭,以雜彩及珠為飾.婚嫁之禮,唯酒食而已,輕重隨貧富.新婚之夕,女先拜舅姑,次即拜夫.死有棺斂,葬起墳陵.王及父母妻子喪,持服一年.田甚良沃,水陸兼種.其五穀,果菜,鳥獸物產,略與華同.大業以來,歲遣朝貢.新羅地多山險,雖與百濟構隙,百濟亦不能圖之.
위나라 장수 무구검(毌邱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자(244), 고구려왕(동천왕)이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그 뒤에 다시 고구려왕이 옛 땅으로 돌아가자 따라가지 않고 그곳에 남아 있던 자들이 드디어 신라를 세웠다. 그러므로 그 나라 사람 가운데는 중국인ㆍ고구려인ㆍ백제인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ㆍ불내(不耐)ㆍ예(穢)ㆍ한(韓)의 지역을 아울러 차지하였다. 신라왕은 본디 백제사람으로, 바다를 통해 도망가 신라로 들어가서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선대 때에는 백제의 부용국(附庸國)으로 있다가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사람들이 군역(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 이끌고 신라로 귀화함으로 인해 드디어 강국이 되었으며, 인하여 백제를 습격하였고, 가라국(迦羅國)에부용하였다.
新羅國,魏時新盧國焉,其先本辰韓種也.辰韓始有六國,稍分為十二,新羅則其一也.初曰新盧,宋時曰新羅,或曰斯羅.其國在百濟東南五百餘里,亦在高麗東南,兼有漢時樂浪郡之地.東濱大海.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復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其國小,不能自通使聘.
신라는 위나라때 신로국으로 본시 진한 출신이다.진한은 본래 6나라가 있었는데 후에 12나라로 나뉘었는데 그 중의 한나라이다. 처음에 신로라 하였다. 송나라때(420~479) 신라, 혹 사라 였다. 그 나라는 백제의 동남5백여리 또는 고려 동남에 있으며 한나라 때 낙랑지 였다. 동으로 큰 바다와 접한다. 위나라 모구검이 고려를 쳐부수자 옥저로 달아났는데 이후 복국 되자 남은자들이 신라로 갔다. 그 왕은 본래 백제인으로 바다로 도망가 신라로 들어가 왕이 되었는데 그 나라가 작아 스스로 사신을 보내지 못하였다.
苻堅時,其王樓寒遣使衛頭朝貢.堅曰:「卿言海東之事與古不同,何也?」答曰:「亦猶中國,時代變革,名號改易,今焉得同.」梁武帝普通二年,王姓慕名秦,始使人隨百濟獻方物.其俗呼城曰「健牟羅」,其邑在內曰「喙評」,喙,呼穢反.在外曰「邑勒」,亦中國之言郡縣也.國有六喙評,五十二邑勒.土地肥美,宜植五穀,多桑麻果菜鳥獸,物產略與華同.
전진(前秦)의 부견 때(357∼385) 그 왕 루한이 사신 위두를 보내 조공했다. 부견이 말하길"경이 말하길 해동의 일들이 옛날과 다르다 했는데 어떤가?”하자 답하길"역시 중국과 같이 시대에 따른 변혁이 있었고 나라이름 역시 쉽게 고치는데 지금과 같습니다"하였다. 양무제 보통2년(521)왕 모진이 처음으로 백제를 따라 사신을 보냈다. 세속에서 성을 건모라, 읍륵은 중국의 군현인데 52읍륵이 있다. 토지는 비옥하며 가히 오곡을 심고 뽕,마,과일,채소,조수 등이 중국과 같다.
至隋文帝時,遣使來貢.其王姓金名真平,隋東蕃風俗記云:「金姓相承三十餘葉.」 文帝拜為樂浪郡公,新羅王.其王至今亦姓金.按梁史云姓慕,未詳中間易姓之由.其先附屬於百濟,後因百濟征高麗,人不堪戎役,相率歸之,遂致強盛,因襲加羅,任那諸國,滅之.並三韓之地.其西北界犬牙出高麗,百濟之間.
수나라 문제 때 사신을 보내 조공했는데 그 왕 이름이 김진평으로 수동번풍속기에 전하길“김씨성이 30여세를 이었다"고 한다. 문제가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하였다.그 왕의 성은 역시 김씨이다. 양사에서 전한 모씨성은 중간에 쿠데타에 의했는지 알 수 없다. 그 선대에 백제에 부용했고 후에 백제가 고려를 정벌하자 사람들이 노역을 경계하여 서로 데리고 돌아가니 이후 강해졌는데 이로 인해 가라,임나등 여러 나라를 멸했다.그 나라의 서북경계는 개이빨 처럼 고려,백제가 나와있다.
우리역사계는 이내용을 믿지 않으려한다. 그럼에도 본인은 탈고한 책에서 이것에 대해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慕-牟-武씨(중국음으로는 같다)로 이어지는 선비계열의 신라-백제-가야-왜의 가문 인맥이 결국 선비인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 멸망에 앞장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 모씨(慕氏) - 내물마림간(奈勿麻立干) 이후 법흥왕(法興王) 부터 金씨로 改姓 추정.
백제 모씨(牟氏) - 동하선비족 문주왕(文周王),삼근왕(三斤王),동성왕(東城王) 피살 후 부여씨 계열 복위.
가야 무씨(武氏) - 5세기 이후 모용부족 금관가야 구해왕(김유신) 계보 본래 武(茂)氏 추정.
주) 342년 후 신라모용씨 계열 왕들과 중국기록에 공식적으로 나타난 신라 법흥왕 모진(慕秦), 백제 개로왕의 조카 문주왕 모도(牟都),문주왕의 아들 삼근왕, 사서상 문주왕의 조카이자 곤지의 아들 동성왕(牟大) 모(牟)씨와 법흥왕에 복속된 금관가야 그리고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구해왕의 이름 무득(茂得) 즉 무력(武力)등이 선비계 동족 관계로 소홀히 볼 수 없을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