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아시아 서사기행 4 / 카라반의 길

카라반
호레즘의 오디가 맛 들면
나도 맛 들리라
우르겐치의 토마토가 익으면
내 영혼도 익으리라
꿀벌이 잉잉거리는 산촌으로 돌아가서
뻐꾸기소리로 병풍을 둘러치고
감자가 굵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리라
들판의 뽕나무는 가지마다 착하고
맑은 별은 이마마다 서늘한 곳
우리가 어느 길로 걸어가든
저 차고 맑은 새벽의 가슴에 도착하리니
포플러나무에 바람이 일면
허공에 달빛 하나 그려 넣고
밤이 이슥하도록 이역의 강가에 앉아
끝 모를 세상 홀로 떠도는
내 마음속 카라반 하나 불러내어
둘이 같이 앉아 밤을 지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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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카라반의 길
타슈켄트 공항 가는 길
우리는 우르겐치로 떠나는
일곱 시 오십 분 발 비행기를 타야 한다
지난밤은 자정 무렵에서야 투숙했고
아침 다섯 시에 모닝콜
먼 길 떠나는 용감한 새벽의 전사처럼
다시 분주한 여정에 몸을 맡긴다
공항으로 이동하는 차중에서 우리는
현지 가이드인 ‘알리Ali’의 소개를 받는다
지금은 타슈켄트에 살고 있다는
서른 살 젊은 청년 알리
영어 구사력이 놀랍도록 유창하다
알리가 영어로 말하면
우리 가이드가 통역하는 형식
그러기에 번거롭기 짝이 없는 이중통역
내가 여태껏 다닌 어느 나라에서든
현지의 교민 중에 누군가가 가이드를 하거나
혹은 현지 외국인 가운데 서투르게나마
우리말을 구사하는 이 누군가가 있어
그럭저럭 가이드의 역할을 해냈었거니와
이번 경우처럼 현지인 가이드가 우리말을 몰라
다시 한 번 통역의 형식을 택해야 하는
이 같은 난감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사정은 아랑곳없다는 듯
현지 가이드는 영어로 한참 동안 긴 설명을 늘어놓고
통역자인 우리 가이드는 간단히 통역하니
정보의 소략으로 인한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그러나 운명은 우리 편이 아니다
알리가 우리 일행을 향해 첫인사를 한다
오른손을 들어 올려 왼편 가슴에 대고
머리 숙여 공손히 인사한다
Asalom aleykum
Allah, god bless you
안녕하십니까
알라신이 축복하시기를
무슨 까닭일까
낮은 목소리
고요한 이방인의 말이 문득 내 가슴을 친다
그때 알라는 우리 머리 위에 있었고
신은 사람의 신이었다
모든 신은 누구나의 신이어서
야훼도 알라도 혹은 브라만도 모두 하나였다
신은 누구의 머리 위에서나 공평하게 부는
고요한 바람소리였다
알리는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오늘의 일정에 대해 잠시 간단한 안내를 하고
그 뒤를 따라 이어지는 우리 가이드 J의 말
그는 이제부터 우리 일행이 잘 따라주어야 할
주의사항을 힘주어 일러준다
우리는 카라반이다
소매치기는 걱정하지 마라
다만 폭력을 경계하라
‘폭력의 수출자’들을 조심하라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없다
대부분은 선하다
선한 땅에 선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5 stan'을 선택한 여러분들은
패키지여행의 끝판왕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러나 고백하거니와
나는 패키지여행의 끝판왕도 아닐뿐더러
남들이 갖지 못한 어떤 것으로 하여
나만의 자부심을 가질 무엇도 없음을 솔직히 토로한다
그럼에도 가이드의 말이 끝나는 그 순간
우리는 누구나 카라반이었다
적어도 카라반이라고 느꼈다
아니 인간은 처음부터 ‘나그네’이거나 ‘방랑자’인 것
운명의 본질은 떠도는 것
문밖을 나서는 순간
어떤 형태이든 인간은 흘러가는 존재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나그네로서의 인간’
실크로드의 땅에 왔으니
나는 카라반이다
떠도는 방랑자다
뽕나무의 신화를 따라가는 나그네다
카라반이기는 하지만 낭만은 금물
우리는 소비에트의 그늘이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경찰국가에 와 있다
총에 실탄을 장전한 병사들이
국경과 도시의 도처에 삼엄한 이역 땅에 와 있다
그런 연유에서일까
사진촬영은 극도로 제한적이었다
불만은 소용없었다
국경지역, 공항, 관공서, 주요건축물들
심지어 허락을 받지 않은 시장풍경
허락 없이 무슬림이나 여성을 촬영하는 행위조차 금지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금기는 삼엄해도 나그네는 흥겹다
타슈켄트 공항 가는 길
끝없는 평원이 펼쳐진다
이제부터 열이레 동안의 여정에서
내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구 할 구 푼이 대평원
거대한 광야에 담긴 침묵과 한없는 적막
초원이 길러내는 양 떼와 말과 소 떼들
비단길의 아침은 평온하다
실크로드의 바람은 온순하다
구름은 한가롭고 뽕나무는 착하다
이제 곧 낙타가 돌아올 시간
카라반이 길을 떠날 시간이다
(이어짐)
첫댓글 침묵과사색이동행하는여행길이되면귀가할때는득도를사고돌아올것같아요ㅡ뭐다득도하셨겠지만ㅡ멍진시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