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 -
☆ 2014년 가해 3월1일 (녹)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수도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제1독서 : 야고 5. 9 - 12
† 복음 : 마르 10, 1 - 12
★ 야고보서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 신앙인에게 합당한 일상을 요약해 제시한다.
고통 중에는 기도하고 기쁨 중에는 찬양하는 가운데 서로 죄를 고백하고 남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어린아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는 제자들에게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분명히
이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는 야고보서의 끝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신앙인의 일상을
그려 보게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고통을 겪을 때 주님께 기도하고, 즐거울 때 그분을 찬미합니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희로애락을 다르게 겪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모습은 그러한
생의 사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어떠한 자세를 갖는가 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신앙인의 기본자세는 각 개인만이 아니라 신앙인의 공동체인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사도는 교회 공동체가 믿음의
기도로 아픈 이와 함께하고 서로 죄를 고백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든 신앙인의 공동체인 교회이든, 이러한 일상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 안에서만 자라날 수 있습니다. 많은 영성 서적을 펴내 우리 시대에 큰 영향을
미친 미국 출신의 헨리 나우웬 신부는 자신의 후기 작품들에서 자주 '공중그네
곡예사'를 통하여 신앙인의 참모습을 그려 내곤 했습니다. 곡예사의 도약은
오로지 상대편이 자신의 손을 잡아 주리라는 전적인 신뢰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붙잡으려고 애쓰기 이전에 상대편이 붙잡아 주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몸을 날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의 참모습을 드러내며 살아가려면 겹겹의 보호막 대신에 어두운
그늘 모두를 주님 앞에 내놓는 신뢰를 선택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며
고백하는 가운데 교회는 자신의 본모습을 찾게 됩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어린이와 같은 사람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3월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마르10,13-16)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 마르 10,13-16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
삼일절입니다. 벌써 95주년을 맞이 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위해 온 몸을 바친 많은 순국선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세월이
가면서 삼일절 정신은 사라지고 달력에 빨간 글자로 남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준 열사)는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위대한 인물? 세상에서도, 하느님
앞에서도 위대한 인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믿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희망하는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상을 차지하는 사람은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 순수함을 회복하여 거듭
태어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유대사회에서는 12세이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는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취사선택
없이 받아들입니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뿌리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아직 머리를 굴리고 손익을 따져 계산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떠나면 죽는 줄 압니다. 잠시 딴 짓을 하다가도 부모가 안
보이면 놀라고 겁을 내어 다시 부모의 품을 찾게 됩니다. 또한 정직합니다.
잘못을 꾸짖으면 금방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특징입니다. “순진무구, 천진난만!”
어느 날 가정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 글을 깨우치지도 못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기도를 하자 했더니 ‘식사 전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후딱
외워 내려갔습니다. 내용의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늘 부모와 함께 기도를
하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가정에는 18개월이 된 아이였습니다. 어른들이 기도를 하는 중에는 손을
모으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기도를 마치며 참석한 교우들에게 안수를
해 드렸는데 어린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자기 할머니에게 가서 두 손을 펴서
머리에 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그래서 제가 그를 ‘미래의
신부님’이라고 칭찬하고 왔습니다.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어린이가 되어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눈이 맑아지고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고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계산을 하면 주님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행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분명히 얻게 됩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어린이들의 축복을 가로막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은 자유”라는 이론을 내세워 ‘유아세례’, ‘첫영성체’에 무관심한 분이
계십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무지한 부모입니다. 신자라면 마땅히
종교교육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교육의 의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의
교육문제를 놓고 “나중에 커서 스스로 공부하게 될 때까지 신나게 놀아라.”
하십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보여주고 가르치며 신앙의 근본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커서
신앙의 가치와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감곡 매괴성모순례지성당 초대 신부인 임 가밀로 신부님은 어머니의 남다른
신앙의 모범을 보고 배웠습니다. “첫 영성체 때 드리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신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받아들여 “성인 신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요한 사도가 성모님을 모신 것처럼, 자신도 성모님을 모시고
평생을 사제로 살다가 천당에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첫영성체 할 때부터 사제의 길을 생각하였고, 성장하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마음의 각오를 세웠으며 오랜 기도와 동정녀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 속에
1888년 9월 16일, 19세의 어린나이에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리고
1893년 5월 27일 사제가 되어 한국에 오셨습니다. 51년1개월을 감곡성모성당에서
사목하셨고 이곳 성당에 묻히셨습니다. 이 성당도 1930년에 지어 봉헌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기도와 가르침이 얼마나 큰 역사를 이루었는지 모릅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자랄 수 있도록 협력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 입시나 먼 길을 떠날 때, 군대 갈 때, 결혼을 할 때....하느님의 축복을
청해주는 부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어린이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2014년 가해 3월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 마르 10,13-16
안타까운 죽음을 종종 듣게 됩니다. 얼마 전만 해도 부산외대 학생들이 불의
사고로 주님 곁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이뿐 아니라 각종 사고, 그리고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은 81세라고 하더군요(2013년 통계청자료).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평균수명이 81세라니, 그렇다면
뜻밖의 사고나 병만 없다면 소위 ‘장수’라는 것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현재 노인 인구의 36%가 독거노인이라고 합니다. 효도를 기대할 수 없는
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며, 나라 사정도 넉넉하지 않기에 점점 줄어드는 노인
예산에 서러울 수밖에 없는 분들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과연
‘장수’ 한다는 것이 과연 성경에서 말하듯이 축복의 말일까요?
그러므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 잘 준비해야 합니다. 즉,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쾌락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 쾌락에 중독되어 있어서 쾌락을 찾으면 찾을수록 부족해서 계속 더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쾌락 중독은 행복을 집어삼키며, 오고 있는 행복을 쫓아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께 다가오는 어린이를 쪼아내는 제자들을 주님께서는
나무라십니다. 당시에 어린이는 아직 미완의 존재라고 생각했지요. 따라서
예수님을 귀찮게 하고 또 불편하게 한다고, 소위 예전 약장수들이 말하듯이
“애들은 가라.”라고 소리쳤던 것이지요. 하지만 어린이는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미래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의 교육과 만남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보지 못합니다. 대신 쾌락을 중시하는 마음을 아이들에게
심어서, 신앙생활보다는 세속적인 부귀영화에 더 큰 관심을 갖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어린이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미래를 소홀히 하지 않는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미래에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만 잘 준비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요즘 각 본당에 청년들과 청소년 그리고 어린이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하긴 “우리 애가 대학에 들어가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공부할 것이 많아서 성당 다닐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부모를
얼마나 많이 만났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말의 주인공인 아이들을 절대로
성당에서 만날 수 없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요. 우리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아이들의 불신앙. 과연 아이들 자체의 문제일까요? 이 아이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해진 해결법 같은 것은 없다. 인생에 있는 것은 진행 중의 힘뿐이다. 그 힘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해결법 따위는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생텍쥐페리)
우리의 미래.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사진은 송도국제도시의 조형예술대학
입니다.
조금만 더 노력합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어린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군요.
그래서 중학생이 되기를 간절하게 원했지요.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또
신학생이 되고, 그리고 지금처럼 신부가 되어도 완벽한 인격을 갖춘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전히 작은 것에 쉽게 무너지고, 여전히 어린이처럼
미숙함을 그 자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또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조금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요? 나아질 나를 생각하기보다는 지금의 생활에 급급했기에,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조금 더
나아질 나’를 생각하며 생활해야 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만하면 되었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많아질수록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곁에
더욱 더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연중 제7주간 토요일
2014년 가해 3월1일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 마르 10,13-16
삼월의 첫날입니다. 봄이 오면 땅 속에 있는 씨앗들이 싹을 내고 나올 것입니다.
들과 산으로,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봄은 또 반가운 손님이 되어 찾아 올 것입니다.
3월에는 부족한 저에게도 강의를 부탁하는 곳이 있습니다. ‘꾸르실료, 가정 선교회,
해외 선교회, 레지오, 본당 사순 특강’이 있습니다. 늘 그렇듯이 시작하기 전에는
근심과 걱정이 하나 가득입니다. 지나고 나면 아쉬움과 후련함이 남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주어진 일을 잘 마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청합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는 신앙인의 길을 담담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고통 중에
있을 때면 하느님께 기도하십시오. 기쁨 중에 있을 때는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십시오. 아픈 사람들이 있으면 공동체에 말하십시오. 공동체는 아픈
사람에게 위로를 드릴 것입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잘못이 있으면 용서해
주십시오.’ 간결하지만 꼭 필요한 신앙생활의 지침입니다.
강의를 할 때도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쉬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은 강의를 하는 본인도 이해하기 어렵고,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전하는 것은 더욱 힘들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예화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강의를
듣는 분들은 위로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지지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
분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것은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준비한 강의 자료를 장악해야 합니다. 눈을 감고 생각을 하면서
강의의 순서와 내용을 음미해야 합니다. 보험 설계사들은 자신들이 만나는
고객들에게 막힘없이 보험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자신감이 있습니다.
강의를 할 때도 그런 자세와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강의를 짐으로 생각하면 잠도 오지 않고, 밥맛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강의를 하게 된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면 준비하기도 쉽고, 재미도
있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기도하면서 준비해야 합니다. 이렇게 원칙을
알고 있으면서도 역시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영혼에 하느님의 숨결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상자가 됩니다. ‘우리들 마음에 시기, 질투, 탐욕, 분노, 미움, 원한’의
쓰레기를 담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용서, 희생, 나눔, 배려, 인내, 사랑’의 보석을 담으면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하느님께서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
2014년 가해 3월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 마르 10,13-16
하느님께서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네 살 다섯 살 된 어린이들을 머릿속에 떠올려봅니다. 인형처럼 귀엽고
천진난만합니다.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신체적으로 약합니다. 세상 물정도
모릅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철저하게도 의존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의 지속적인 보호와
배려가 필요합니다. 자연스럽게 고분고분하고 항상 누군가에게(부모) 절대적으로
의지합니다.
항상 그의 존재를 필요로 하기에 언제 어디서나 그를 찾습니다. 그의 주변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의 눈길과 손길, 그의 보살핌과 보호아래 머물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약한 어린이들을 당신 가까이 부르셔서
축복하시고 각별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늘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듬뿍 받고 싶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군요.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가 되는 것입니다. 큰 존재, 대단한 존재, 있어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작은 이, 나약한 이, 없어 보이는 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별로 환영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이제 다 컸다,
나는 이제 나 스스로 설수 있다, 나는 뭐든지 혼자서 다 할 수 있다며 큰 소리 뻥뻥
치는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내 삶에 간섭하지 마라, 하느님도 필요 없다, 누군가의
도움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 분명 오래가지 않아 크게 후회할 것입니다. 아마도 땅을 치며
통곡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가지 않아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도대체 하느님 어디 계십니까? 제발 좀 빨리 와주십시오. 빨리 오셔서 손 좀
내밀어주십시오. 이제야 알겠습니다. 당신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당신 없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오늘 비록 내가 '난다긴다' 할지라도, 오늘 내가 번쩍번쩍 빛나는 인생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근본적 결핍, 태생적 부족함을 지니고 살아가는
한 피조물일 뿐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우리 인생이 잘 풀린다 할지라도, 아무리 내가 높은 곳에
올라있다 하더라도 늘 우리 자신의 근본을 살필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살, 그분의 가호와 보살핌 없이는 단 한순간도
스스로 설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고백해야 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어린이 예찬 -하느님의 나라와 어린이-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야고5,13-20 마르10,13-16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 마르 10,13-16
어린이 예찬 -하느님의 나라와 어린이-
오늘 복음 묵상 중 떠오른 강론 주제는 ‘어린이 예찬 -하느님의 나라와 어린이-’
입니다. 이런저런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요즘 들어 부쩍 마음이 끌리는 어린이 ‘동(童)’자가 들어가는 동심(童心),
동안(童顔), 동시(童詩), 동화(童話), 동자(童子) 등의 단어들입니다.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보는 동시와 동화가 있고,
여전히 나이 들어도 동안을 지닌 사람도 있습니다.
동심은 영원하며 우리 마음의 고향입니다.
어린이는 우리 인간의 영원한 원형입니다.
워드워즈의 '무지개' 라는 시에서 처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입니다.
나이들어도 우리 마음엔 어린이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어린이성을, 동심을 잘 돌보고 키우는 것이 행복에 결정적입니다.
동심이 아니 곤 결코 하느님의 나라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읽은 철학자 박 이문(84세)교수에 관한 언급도 생각납니다.
-그는 박 이문에 대해 ‘동자(童子)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평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김수환 추기경을 닮았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한다.-
정말 곱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동자의 얼굴로 들어 남을 깨닫습니다.
점차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이를 때 동자의 얼굴입니다.
어느 분의 진솔한 고백도 아름다웠습니다.
“하느님은 저희 남녀 부부관계를 5년 전 쯤 거둬가셨습니다.
남편이 70에 접어드니 몸도 작아지고 아이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아주 편한 영적 친구관계 같습니다.”
동자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는 남편에 대한 고백입니다. 동심은 마음의
고향입니다. 40대 중반을 넘어서니 저절로 초등학교 동창들을 찾는 경향에서도
동심으로 향하는 사람들임을 봅니다.
얼마 전의 특별한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60대 중반을 넘은 초등학교 동창들이
수도원을 찾았을 때 그들의 얼굴에서 발견한 어린이들입니다. 잘 들여다보니
나이는 들었어도 초등학교 어린이 얼굴들 그대로였습니다..
또 얼마 전 찾은 33년 전 초등학교 제자들이었습니다. 40대 중반을 넘은
제자들이었지만 저에겐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얼굴들 그대로였습니다.
38년 전, 28살 초등학교 교사시절 일기장에 메모해 두었던
‘선생님’이란 시와 더불어 제 자작시를 소개합니다.
-아이들이 떠나간 교실은 썰물이 씻어간 바닷가.
먼 파도에 귀를 모으며/선생님은 귀여운 조개를 줍는다.
커텐 주름에서/꽃병 밑에서/고운 향기로 살아오는 맑은 웃음들,
“저요, 저요, 저요”/고사리 손의 물결 속에/방실방실 떠오르는 작은 얼굴들.
눈을 감으면/끝없는 물결소리 내 작은 인어들은 어느 수평선을 가고 있을까?
아이들의 옷깃을 고치듯 비뚤어진 책상을 바로 놓는다.-
이어 제 자작시입니다.
-아이들의 밝은 인사에/내 마음엔 아침 해가 떠오른다.
선생님 안녕, 빛나는 음성에 내 마음은 열리고 피어나는 꽃 같은 아이들 얼굴에
내 하늘은 아침이 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각별한 어린이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참 무력한 의존적 존재이지만 티 없이 밝고 순수한 어린이들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이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1.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 청했을
때 이들을 꾸짖는 제자들은 잠시 동심을 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대부분 어른들의 반응은 이처럼 권위적이고 닫혀있고 굳어있습니다.
2.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어린이 예수님을, 어린이들을, 어린이 같이 약하고 힘없는
가난한 이들을 마음 활짝 열고 환대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봅니다..
3.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지금 여기서 어린이성을 회복하여 동심을 살 때 체험되는
현실입니다. 동심을, 어린이성을 잃으면 하느님 나라 체험은 요원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바로 마음의 가난이 상징하는 바 어린이성입니다.
4.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이처럼 활짝 개방하여 가난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지금
여기 도래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5.‘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그대로 어린이성을 지니고 동심의 겸손과 순수를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주님의 축복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매일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당신의 어린이들인 우리를 끌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며 삽니다.
동심의 어린이성 회복과 심화에 기도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오늘 1독서의 야고보 사도가 강조하는바 역시 기도(7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나을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주님은 매일, 평생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어린이성을 회복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도회] 세상의 어른과 하느님 나라의 어린이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세상의 어른과 하느님 나라의 어린이
사람이 단순하면 비웃습니다. 제발 영악하라고 잔소리를 합니다. 어린애처럼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바보 소리를 듣습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말이
안되죠. 수도원 안에서도 어떤 형제한테 이런 비슷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지요.
정말 세상 어른들처럼 이해타산에 발빠르고, 세상 지혜에 따라 처신해야 한다는
말인가 혼란을 겪을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 어린이는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맑은 눈으로 있는 그대로 봅니다. 껍데기에 둘러싸여 숨어있는 진실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이는 단순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 어린이’만이 하느님을 품에 안을 수 있습니다.
영적 어린이만이 하느님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이 이런 영적 어린이들의 보루요 방패요 반석이신데 세상 그 어떤 어른들이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어른으로 살겠습니까, 아니면 하느님 나라의 어린이로 살겠습니까?
이 선택은 내적 지향의 문제입니다.
어떤 의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선택입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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