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를 다녀오는 길에 환승하려고 내린 수서역이었지 싶다. 그 역을 몇 번 오가면서도 책방이 있는 건 몰랐다. 출구가 달라서였겠지. 꽤 오래 된 책방인데 왜 몰랐느냐고 묻는 주인에게 하릴없이 미안하다.
할인가격이 붙은 책을 보면 사야한다는 의무감을 갖는 건 버릇이다. 365일 할인 판매를 하는 전철역 김창숙 옷 가게는 무심코 잘도 지나치는데 책을 할인한다면 왜 가슴이 아릴까.
원고를 쓰는 작가 그 글을 편집하여 한 권의 책을 탄생시키기까지 산고를 앓는 출판사 시린 겨울날 밀린 인쇄 작업에 이브의 일렁임도 잊고 살던 인쇄소 사람들을 보아서일까.
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고통이 단지 읽히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3000원, 4000원의 가격표를 붙이고 있는 걸 보면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죄인이 된다. 그래서 뒤지고 또 뒤져 집어 든 책, 왕과 나, 김처선.
김처선을 몰랐느냐고 물으면 알고 있었다고 할 것이고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김처선이라면 연산군을 떠올려야 할 것이고 연산군이라면 금삼의 피를 떠올려야 할 것인데 나는 그 어떤 것에도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줄줄이 꿰는 이야기가 없다.
대구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자유극장인지 칠성극장인지에 연산군을 단체로 본 적이 있다. 그 때의 연산군은 신영균이지 싶다. 그 영화의 한 장면에 김처선이 등장했었을까,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사람들을 칼로 휘둘러 다리를 잘라내는 장면에서 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손가락 사이로 화면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예전에 '내시'라는 영화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내시라 부르던, 환관이라부르던 그 호칭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이름으로 불리우면서 살아야했던 그들의 삶이 문제가 아니라 자식을 환관으로 만들어야 했던, 그런 일에 동의했던 부모를 이해 못 한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식모를 보내고, 양자를 보낸다는 이야기는 그런대로 이해를 하겠으나 몸에 칼질을 해가면서 아이의 운명을 뒤바꾸어야 할 자격이 부모에게 주어졌을 리 만무하기 때문에. 그런 시대에 살지 않았고, 그런 일을 결정해야하는 어려움 앞에 직면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내 무사태평의 삶에 감사한다.
역사극에 단곤 손님처럼 등장하는 장희빈, 그리고 연산군을 미워해 본 적이 없다. 인간말종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이라고 질책해 본 적도 없다.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았겠느냐고 측은지심을 발휘해 본다. 문제아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문제아 주변에서 문제아를 만드는 사람이 문제아라던 심리 상담 강사의 말을 늘 기억한다. 제도라는 것이, 암투라는 것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시대며 환경이며 인물이며 그리고 정신적인 불구를 만들어 놓은 많은 이유들이 원망스럽다면 모를까
김처선이 주인공이었음에도 김처선보다 더 많은 인물들이 주를 이루어 엮어 간 이야기. 그들이 저질러 놓은 밥상을 치우려다 왕의 칼에 죽어 간 용감한 사람 직언이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입보다는 가슴이 하는 것 이 시대가 요구하는 충신은 과연 누구일지.....
사실과 허구의 절묘한 조화 - 팩션 역사소설. 이럴 일이 아니라 뒤늦게나마 조선왕조실록을 읽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늦바람처럼 밀려오는 역사에 대한 궁금증은 무슨 증세인지.....
나에게 김탁환을 이야기한 블로거는 내가 곧 김탁환의 팬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이수광의 글에 소금간을 솔솔 뿌리고픈 건 그녀의 말처럼 그래서일까? |
출처: 여기는 초등 교실 원문보기 글쓴이: 도요새
첫댓글 저는 국어선생이 아니었다면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을 겁니다. 어릴 때부터 관심이 많았어요. 역사는 되도록이면 정사로 읽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드라마는 거의 보지 않습니다. 선덕여왕도...^^ 처선, 참 대단한 내시였지요.
선덕여왕은 고현정이 싫어서 안 봅니다가 아니라 티비 없어서 못 봅니다도 아니고 그 점에선 정가네님과 비슷합니다. 정사를 읽으려면 무엇을 읽어야할까요? 소개해 주세요. 이젠 팩션은 슬슬 접어야할 것 같은데.... 출판사까지 소개하시면 더욱 감사하겠어요. ^^*
아이고, 어렵습니다. 되도록이면 실록부터 읽어야겠지요. 그 다음엔 실록을 바탕으로 한 책들. 가볍게 역사학자인 이덕일 씨가 쓴 쉬운 책들부터요.
실록부터 읽는 게 맞겠지요? 이덕일이라는 이름 석 자도 기억할게요. 감사!
저도 여기서 [골동의 미]라는 책을 반값으로 샀지 싶습니다. 이런 곳에 서점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서 의무감으로 한권 샀습니다.
요즘은 인터넷 서점이 있어 책 주문하는 게 그다지 힘들진 않으시죠? 그런데 책방에 가 보면 또 맛이 다른 건 사실이에요. 메모 해 와서 주문하는 얌체족이 되어가고 있는데 어쩔 수 없네요. 주머니가 두둑한 게 아니다 보니.... ㅎㅎ
전 영화를 볼 때 가끔 그런 생각했어요....작품 만드느라 머리 쓰고, 엄청난 돈 과 시간과.....한번 훌쩍 보고만다는 것이 참 아깝다는........세상에 아깝지않고 감사하지 않는 것이 없지만서도.......
그래서 정말 좋은 영화는 dvd를 소장하는 분들이 많던 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