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 |
<시사IN>의 옛 편집국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교북동 11-1번지였다. 오래된 한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길과 60년 전통의 도가니탕 식당이 유명한 동네였다. 돈의문 뉴타운 구역에 속하는 그곳은 지금 재개발을 위한 철거 공사가 한창이다. 옛 모습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동네 이름 '교북동'이다. 올해 1월1일부터 도로명주소법의 본격 시행에 따라 동ㆍ리가 포함된 지번 주소 대신 새 도로명 주소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시사IN> 옛 편집국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송월길 159로 바뀌었다.
교북동(橋北洞)이라는 마을 이름은 무악재에서 흘러나온 물줄기 만초천(蔓草川)을 가로지른 돌다리에서 유래했다(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 지금의 교남파출소 즈음에 위치했던 만초천 돌다리는 1864년 김정호가 그린 <대동지지>에도 등장한다. 물줄기는 1967년 이후 복개(覆蓋)되고 돌다리도 사라졌지만 돌다리를 기준으로 윗마을은 교북동, 아랫마을은 교남동으로 나뉘어 붙인 동네 이름에 그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만초천 돌다리의 기억을 간직한 그 마을 이름은 이제 영영 사라지게 생겼다. 예전의 교북동ㆍ교남동 일대 지번 주소는 모두 통일로ㆍ송월길ㆍ경교장길 따위의 도로명 주소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교북'이나 '교남'이라는 명칭은 도로명 어느 곳에도 반영되지 못했다. 이렇게 동(洞) 이름과 함께 그 속에 담긴 역사도 함께 잃어버리게 된 곳이 교북동을 포함해 가회동ㆍ운니동ㆍ체부동 등 서울 종로구에만 59곳이다. 지명연구가 박호석 전 농협대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새 주소 시행으로 사라지는 동(洞)ㆍ리(里) 이름은 전국 866개 동 3787개 리에 이른다(오른쪽 표 참조).
도로명 주소 체계를 시행한 이후 어색한 외래어 도로명(위)이 많이 등장했다. |
도로명 주소 체계는 1996년 청와대 국가경쟁력강화기획단에서 정책 추진 과제로 처음 논의가 시작됐다. 당시 정부 설명에 따르면 '국가경쟁력 약화'의 주범인 옛 주소 체계는 "불규칙하고 혼란스러워 교통 혼잡을 일으키고 물류비용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범죄와 화재 등 각종 사고 및 재난에 신속히 대응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듬해 서울 강남구와 경기 안양시에서 1차 도로명 주소 시범사업이 실시되고 2003년까지 135개 도시로 확대해 나갔다. 2006년에는 도로명 주소를 기존의 지번 주소를 대체하는 법정ㆍ생활 주소로 바꾸는 '도로명주소 등 표기에 관한 법률'을 제정ㆍ공포했다. 2011년 병행 사용 기간을 거쳐 2012년 본격 시행을 목표로 잡고 안전행정부와 각 지자체는 전국 16만 개에 이르는 길 이름 짓기에 분주해졌다. 황천길, 야동길, 할렘가 따위 도로명이 나타났다가 여론 반발로 폐기되기도 한 것이 그즈음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도로명을 정하고 전국 곳곳에 표지판도 갈아 붙였지만 낮은 홍보율 때문에 정책 시행은 2년 유예됐다. 그렇게 18년간 4000억원 예산을 들여 만든 도로명 주소 체계는 결국 지난해 병행 사용 기간을 거쳐 올해 1월1일 본격 도입됐다.
그토록 오랜 기간 공을 들였으니 지금쯤이면 모든 국민이 동네 길 이름을 줄줄 외고 있어야 하건만, 도로명 주소 체계는 아직 취지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우정사업본부 자료에 따르면 병행 사용 기간이었던 지난해 1월부터 7월까지 우편물 4억7262만 건 가운데 도로명 주소를 적었거나 도로명 주소와 지번 주소를 병행 표기한 우편물은 16.2%인 7652만 건에 그쳤다. 비슷한 시기 안전행정부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자기 집의 도로명 주소를 정확히 아는 응답자는 34.6%에 불과했고 우편 등에 실제 활용해봤다는 비율도 23.4%에 그쳤다. 도로명 주소만을 명기하도록 한 올해 들어서도 여기저기에서 혼선이 빚어졌다. 전입ㆍ출생ㆍ혼인ㆍ사망 신고와 부동산 실거래가 신고 등은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면서 '부동산 소재지는 지번 주소를 사용하되 계약서 작성 시 거래 당사자의 주소는 도로명 주소를 쓰라'는 알쏭달쏭한 지침 등이 알려지면서 주민들의 문의와 민원으로 각 지자체와 동ㆍ읍ㆍ면사무소 등에 긴급대응반이 만들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새 집주소를 받아들이기 힘든 것에는 새로 부여된 도로명의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이 한몫한다. 부산시 해운대구 우동은 APEC로로, 울산시 북구 효문동은 모듈화산업로로,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갈곶리는 엘지로로, 경북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는 파인토피아로로, 경남 김해시 주촌면 농소리는 골든루트로로 바뀌었다. 신도시 도로명을 아예 루비로ㆍ사파이어로ㆍ에메랄드로 같은 보석 이름으로 나열한 곳(인천시 청라지구)도 있다. 꼭 이런 외래어가 아니라도 지역의 고유 특색과 역사를 전혀 반영하지 않고 문화ㆍ희망ㆍ평화 등의 두루뭉술한 단어로 조어(造語)한 도로명이 전국 16만3195개 도로명 가운데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전 문화부 장관 등이 헌법소원 제기한 이유
박호석 전 농협대 교수가 정동채 전 문화부 장관, 대한불교청년회 회원 등과 함께 새 도로명주소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박 전 교수는 "옛 동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헌법 제69조에 명시된 대통령의 민족문화 창달 의무, 헌법 제9조에 명시된 국가의 전통문화 보존 의무, 헌법 제10조 문화향유권을 침해한다"라고 주장했다. 지난해부터 도로명 주소 정책 재고 캠페인을 벌여온 한국땅이름학회 반재원 회장(훈민정음 연구소장)은 잃는 것에 비해 얻는 것이 너무 적은 도로명 주소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정부는 기존 지번 주소의 복잡함과 비효율성을 근거로 들지만 인터넷과 내비게이션에 찍기만 하면 산꼭대기 절까지 찾아주는 IT 강국에서 굳이 문화와 역사를 간직한 지명 체계를 뒤흔들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반 회장은 "결국 덩어리(동) 형태의 마을, 공동체 정서에 익숙한 우리네 머릿속을 선(도로) 형태의 낯선 서양식 정서로 고치라는 강요가 아닌가"라고 말했다.
변진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