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 아침 식탁에 앉으면 어머니가 밥을 떠먹여 주셨다.
그 뒤에서 군인 아버지는 딸의 젖은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렸다.
이영지 작가(43)는 유난히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지만 당연할 줄 알았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23세 때 환하게 웃으면서 외출했던 어머니가 교통 사고로 돌아가셨다.
상실감에서 벗어나고 빨리 가족을 이루고 싶어 2년 후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출가한지 한 달 만에 등산길에 올랐던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운명을 달리 했다.
연이은 충격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작가는 한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칩거하다가 겨우 붓을 든 그는 31세부터 나무를 그리면서 아픔을 삼켰다.
한지를 여러겹 붙인 장지에 먹으로 미세하게 잎사귀 테두리를 그린 후 다양한
초록색 계열 분채(粉彩·조개와 흙 등 자연 소재로 만든 안료)로 속을 채워나갔다.
100호 그림 속 큰 나무는 한 달 넘게 수만 개 잎사귀를 그려야 완성된다.
반복적으로 쌀알같은 잎을 그리고 있으면 끓어오르는 감정이 가라앉았다.
노동집약적인 그의 나무가 처연한 슬픔을 품고 있는 까닭이다.
앙상한 줄기에 잎만 무성한 나무는 삶의 기반인 부모를 잃은 작가의 자화상 같다.
초기에는 허공에 붕 떠 있는 나무를 그렸다.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만난 작가는 "이별할 시간도 없이 부모님을 떠나보낸 후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 모르겠더라. 12년간 나무만 그리면서 마음이 풀어지기를
기다렸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10년 전부터 외로울 때는 나무 그림에 하얀 새를 그려넣기 시작했다.
너댓마리가 악기를 연주하거나 소풍을 즐기고 있다.
밤하늘에서 스키를 타거나 잎사귀를 물고 날아다니기도 한다. 작가는
"뭔가 새로운 것을 표현하고 싶어 새를 넣었는데 사람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 어느날 전시장에 걸린 나무 그림 앞에서 우는 할머니를
만났다. 세상을 떠난 아들이 그 새처럼 날아오는 같아서다. 작가는 "내 작품을 구입해
집에 건 할머니가 매일 바라보면서 아들 생각에 행복해한다고 하더라"며
"그림을 그리면서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그림에서 불행을 밀어내려고 애썼다. 잎과 꽃을 점점이 찍은 화폭이 싱싱하고 정겹다.
그의 개인전 제목 `네가 행복하니 내가 행복해`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는 "행복을
쫓으려고 노력했는데 모든걸 내려놓고 보니 매일 일어나는 일상이 행복이더라"고 말했다.
최근작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90×193.9cm)가 그 마음을 담은 작품이다.
드넓은 꽃밭 뒤에 나무 8그루가 병풍처럼 펼쳐진 따뜻한 풍경 속에서 하얀새 5마리가 놀고 있다.
그림 소재도 주변에서 찾는다. `두근두근 쿵쿵쿵`(90×140cm)은 누군가를 만날 때 설레임을 녹였다.
꽃밭에 선 새가 나비를 보고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나무에선 새 위에 올라선 새가 공놀이를 하고 있다.
작가는 "언제부터인가 자신 만을 생각하고 돈을 쫓아다니는 개인주의자들이 늘면서 사회가 힘들어졌다.
우리가 소년소녀였을 때 설레임을 되찾으면 진정한 삶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나무 위에서 새 2마리가 꽃비를 받아내고 있는 그림 `간절히 원하면`(162×130.3cm)은 기다림을
표현했다. 지치지 말고 원하는 것을 찾으라는 작가의 응원이란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정말 간절히 원할때 삶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낄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친구나 가족과 수다를 떨다가 혹은 영화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영감을 얻은 그림이어서
우리네 이야기 같다. 일상에서 길어올린 소박한 진실을 그리기 위해 작가는 하루종일 작업실에서
점을 찍는다. 전시는 9월 8일까지.
* 본 기사는 매일경제에 게재된 내용으로(2018.08.28).... 전지현 기자님의 글 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슬픔과 아픔을 그림으로 치유해 나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기에...
본 카페에 포스팅하고 많은 분들에게 회자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재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