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 12
산상보훈은 5장 6장 7장으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가장 긴 설교다. 산상설교에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개념들이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기도도 가르치고, 금식에 대해서 가르치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도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 말씀처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들이 가르친 것의 핵심이라고 하면서 마태복음 7:12에서 황금률을 말씀하셨다.
나는 위 구절의 성경을 읽을 때마다 뭔가 늘 의아해했다. 위 구절에서 표현된 내용으로는 하나의 도덕적 황금률 정도로만 보였다. 그런데 구조적으로 산상설교 분석하면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접속사 그러므로는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시작된 산상설교 전체를 요약하는 의미의 접속사 그러므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결론이 당신이 대접을 제대로 받고 싶으면 다른 사람대접 잘해야 한다는 정도로 비치는 결론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게 아닌데 하는 마음을 계속 가지고는 있었지만 깊이 생각해보지를 못했었다. 오늘 이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려고 한다.
위 구절에서 율법이요 선지자라는 말은 간단히 하면 구약 성경을 의미한다. 율법서와 예언서의 핵심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의미다. 성경 다른 곳에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표현이 마태복음 22장에서도 나온다.
마태복음 22장에서는 이것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한다. 새번역에서는 강령을 본뜻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 달려 있다.”
마태복음 22:37-40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구약 성경을 요약하는 것은 너무 좋다. 간단명료하다. 롬13:8-10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게 되면 율법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십계명까지를 지키게 된다. 십계명 안에 하나님과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와 관련된 핵심 율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말할 때는 뭔가 이해되지 않는 꺼림칙함이 있다. 여기서 남을 대한다는 것에 대한 오해는 단순한 이타주의, 섬김, 희생, 양보와 같은 그런 개념이 아니다. 공덕 주의적 사상이나 도덕주의 또는 유교의 사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이 되는 황금률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대접으로 번역했지만 대접의 의미는 손님 환대와 같은 의미가 아니다. treat의 의미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자세는 옛 계명은 소극적으로 해코지를 하지 않거나 외형적으로 어떤 행위를 금하고 하지 않는 것을 말했다. 하지만 새 계명은 적극적으로 더 나누고, 베풀기도 하지만 정의롭게 공평하게 공정하게 대하는 것이다. 빈부, 신분, 인종의 차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여기고 존귀하게 대하라는 의미다.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반역하고 떠난 인간이 끊임없이 한정된 자원으로 갈급해 하고 갈등하는 실존 속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다시 말해서 맘몬을 주인으로 섬기는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살인과 폭력, 자기 자식밖에 모르는 부모로 인해 정신적 고통과 심지어 자신이 가르치는 학교의 교실에서 자살하는 현실, 야단친다고 엄마를 무참히 살해하는 끔찍하고 무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부유하신 주님 창조주 하나님께 귀의하고 그의 상속자가 된 천국 백성이라야 비로소 자기를 부인하고 기꺼이 자기희생을 통해서 남을 먼저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가르침의 요약은 주님을 통해서만 이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새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자녀로 대접받은 은혜를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은혜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마음(빌2:3),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마음(16:2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마음, 원수까지 사랑하는 마음 등등의 산상수훈의 가르침들은 성령이 아니면 살 수 없다. 내 의지와 힘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황금률 바로 앞에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한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태복음 7:7-12
그런데 여기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했는데 이 좋은 것이 무엇일까?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13
그것은 성령이다. 내 힘으로 남을 그렇게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상설교처럼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을 구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에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한 선물이다. 이것이 성령이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성령으로 날마다 충만해야 한다. 성령으로 배부르게 된 다음 다른 사람을 대우하라는 것이다. 부모의 자녀 관계에서도, 부부 관계에서도, 친구 관계에서도 하나님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잘 대접할 수 있다. 내 몸처럼 여길 수 있다. 그런 사랑이 우리에게 생길 수 있다. 이럴 때 비로소 율법을 완성할 수 있다. 희년적 삶도 살 수 있다. 공동체를 살 수 있다. 재산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나눠줄 수 있다.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다. 남의 자식을 내 자식처럼 여길 수 있다. 고아와 과부와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님께 대하듯 대할 수 있다. 성령을 찾고, 구하고, 두드려야 한다. 적극적으로 삶 속에서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황금률이며 산상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핵심 가치다.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