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자 수표를 안 받는 나라
우리는 우에노의 멋진 갶술호텔에서 하루 더 자고 이튿날 도쿄를 떠나 닛코로 향했고, 닛코 관광을 마치고 다시 모리오카에 도착해서 1박했다.
다음날 오전에는 버스 편으로 츠나기 온천을 다녀온 다음 오후에는 모리오카 역에서
야마비꼬 편으로 도쿄에 도착하여 바로 히카리로 갈아 타고 신 오사카로 이동해서 다이토요 캡술 호텔에 투숙했다.
이튿날 우리는 순환선을 타고 다니며 오사카와 나라일대의 관광에 나서 오사카성, 호류지(法隆寺), 시덴노지(사천왕사,四天王寺), 도오다이지(동대사,東大寺), 가스가다이샤(春日大社)신사 등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오사카 성 부지에는
원래 정토진종(淨土眞宗)의 본산지인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가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세력은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하였지만, 끝내 노부나가에 양보하고 물러간 다. 이때 이시야마 혼간지는 불타
버린다. 얼마 후 오다 노부나가 사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고, 여기에 성곽을 건설하여 자신의 거점으로
삼는다.
히데요시가 건설한 오사카성의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크고, 대규모의 이중 해자가 성을 보호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게 된다.
그 후에도 한 동안 오사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를 따르는 세력의 본거지로 남아 있게 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가 격돌한 1615년의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면서 오사카성의 건물들은 모두 소실되고 성의 바깥 해자는 완전히 매립되어 버린다.
그 후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명으로 오사카성은 1620년부터 1629년에 걸쳐 재건되는데 도요토미 가문의 성벽과 해자는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운 석벽을 쌓아 옛 흔적은 사라져
버린다.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의 해자가 매립되면서 성의 전체 규모는 4분의 1 정도로 축소된다. 그래도 원래 높이 약 40미터이던 천수각은 새로운 위치에 5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완성된다.
호류지(法隆寺)는 불교를 일본에 도입했다고 여겨지는 쇼토쿠 태자(聖徳太子)에 의해 지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절이다. 이 절의 사이인가란(西院伽藍)에 위치하는 본당, 오층탑, 중문(中門)은 모두 7세기에 지어졌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들이다.
시텐노지(사천왕사, 四天王寺)는 서기 578년 쇼토쿠가 백제로부터 들어 온 장인 세 사람을 시켜 건축 하여 593년에 완성되었다. 이는 호류지보다 이른 것이다. 아스카데라(飛鳥寺)가 역사상 일본 최초의 사찰이지만 1576년에 있었던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는데 얼마 후
재건되었다. 이 때문에 건물 자체는 호류지가 더 오래되었다.
도다이지(동대사,東大寺)는 나라시대에 창건 되었다. 금강역사(국보)가 서있는 남대문(국보)을 지나면 중문 너머로 대불전(국보)의
큰 지붕이 우뚝 솟아 있다. 폭 57m, 높이 47.5m의 대불(국보)은
목조 고건축으로서는 세계 최대다. 대불전에 안치된 본존 대불 (비로자나불: 국보)은 높이 15m의
거상이다.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는 나라(奈良)에서 가장 유명한 신사다. 이 신사는 수도와 같은
시기에 세워졌으며 시의 수호신을 모시고 있다. 가스가타이샤는 또한 나라와 헤이안(平安) 시대에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가문인 후지와라(藤原)의 수호신사였다. 가스다이샤는 주색 칠을 한 선명한 신전이 있으며 개운제액(開運除厄), 교통안전의 신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우리는 관광을 마치자마자 고쿠라까지 와서 프라자 사우나에서 1박한다.
일본에서 우리가 한가지 무참했던 일은 여행자 수표의 사용일 것이다. 미국에서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하고 현금보다 편리한 맛에 외환은행에서 일본 스미모도 은행의 여행자 수표 15 만
엔을 준비하고 떠났었지만 결과적으로 한 장도 쓰지 못했다.
식당이나 백화점 또는
관광회사 어디에서도 받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일류호텔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니 그런 곳에서는 어땠을지
알 수 없다. 현금만을 사용하고 여행자 수표는 고스란히 도로 가지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절약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마워해야 할까?
그러나 국내로 돌아와
외환은행에서 이를 도로 매각하는 과정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매입가격과 매도가격의 차액 정도는
이미 손해 볼 각오를 했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15만엔 중에서 8만 엔은 엔화 현금으로 바꾸었는데, 이 과정에서 1.5%의 수수료 8,800원을
물었다. 나머지는 원화로 바꾸었는데 전체 15만엔 여행자
수표에 대한 추심료 10,000원을 또 물었다. 환차액까지
합하면 약 3만원을 손해 본 셈이었다.
은행 측에서는 돈 장사를 하는 것이니까 이익을 취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환차액 말고도 수수료니 추심료니 하며 일방적으로 고객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너무 심한 것 같았다.
우리는 여행자 수표를
한 장도 써보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손해만 본 꼴이었다. 더욱이 추심료가 무어냐고 물으니 은행직원은
여행자 수표 발행처인 스미모도 은행에 수표의 진위여부를 확인하는데 드는 비용이라고 한다.
나는 외환은행을 믿고
구입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도 외환은행에서 여행자 수표를 구입할 때 그 수표가 정말 스미모도 은행
것인지를 확인했어야 한다는 논리도 성림이 되는 것 아닌가? 자기들을 믿고 샀던 바로 그 수표였다. 그런데 자기네들이 다시 사들일 때는 믿을 수 없다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외국 여행하는 사람들이
여행자 수표를 외국에서 다 쓰지 않고 도로 가지고 돌아왔을 때 환차액 정도의 손해만 보고 원금을 환수 받을 수 있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절약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안 쓰고 도루
가지고 들어오면 손해라는 인식이 팽배할 때는 어떻게 하든지 여행자수표는 외국에서 모두 소모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설 것이 아닌가? 외환은행 같은 정책금융기관에서 너무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려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대국적인 입장에서
외화절약 유인책을 강구해 나가는 것이 국가경제에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여행자수표를 구입할
때 일본에서의 여행자수표 통용의 경향이나 제한사항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서비스정신도 아쉬웠다. 은행직원은
내가 좀 아쉽다고 하자 우리나라에서도 구멍가게 같은데 가면 여행자수표를 받겠느냐고 응수해 왔다.
물론 우리는 물가가 비싼
일본에서 일류호텔에는 드나들지 않았다. 돈이 아무리 풍부해도 그렇게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내 모습 어디에선가 값싼 곳만 찾아 다녔을 것 같은 행색이 엿보이기라도 했더란 말인가? 이 사람은 남의 자존심을 건드려 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든 3만원 정도 손해 본 것 가지고 월 그러냐며 체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사람들의 그런 심리도 은행에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단견이다. 그건 은행으로서
너무나 당당하지 못한 처사다. 나는 일본은행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나왔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 은행 직원들의 퉁명스런 태도에 깜짝 놀라 꿈에서 깬 듯 그 동안 잊고 있던 실망감이 또 다시 스멀스멀
나를 엄습해 왔다.
하지만 아직은 이르다. 나는 일본 여행을 하며 그들이 우리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뭐니뭐니해도 내 나라가 제일 좋고, 우리도
언젠가는 저들을 추월할 날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