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숙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졸업.
1999년 《열린시학》 등단. 전 중등학교 국
어과 교사. 시조집 『활짝, 피었습니다만』,
새, 허공을 뚫다』. 열린시학상, 시조시학상,
무등시조문학상 외 수상. 2017년 광주문화
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2023년 아르코 발표
지원 선정. 2024년 전남문화재단 창작지원
금 수혜. 현재 반전, 사래시, 율격, 후조 동
인. 한국시조시인협회 상임자문위원, 오늘
의시조시인회의 부의장.
soosunha61@hanmail.net
시인의 말
이제 놓아주기로 한다
마음의 끝자락이었으므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2024년 겨울
최양숙
종소리에는 마디가 있다
몰락한 그곳에서 또 몰락은 시작된다
언덕 위 교회당에 우연히 도착할 무렵
휘어진 소나무 위로 은행잎이 떨어지고
종탑은 노란 물결을 지그시 바라본다
지켜 온 모든 것이 바람에 쓸려가도
가을을 탓할 수 없다 마음이 헐어간다
천 번의 매질에도 깊게 울었던 종은
절대, 라는 소리를 위해 자신을 내리치고
스스로 듣지 못하는 마디를 갖고 있다
수선
헌 옷을 뒤집어서 먼지를 털어낸다
무게도 중심도 없이 떠다니는 저 깃털들
인연이 끝난 것들은 초서체로 흐른다
소매가 잘려 나간 움츠린 몸을 본다
얼룩을 지우려고 햇살에 비벼보지만
세월이 놓고 간 문장 실밥으로 흩어진다
조각은 다시 붙여도 어긋난 무늬일 뿐
깊어진 주름 옆에 주름 하나 덧붙이고
바늘을 깊게 찌른다
뭉툭 솟은 내 안에
공백의 감정
거기는 무언가로 팽팽하다 터질 것 같다
꼬리를 흔들거나 헤엄쳐 다니거나
무수히 떠다니는 것
잡히지는 않지만
몇 개의 쇠창살과 틈새로 느껴지는
거친 숨, 푸른 하늘, 젖은 눈, 구름의 속도
힘차게 날아오르는 빛들의 단호함
바람이 나를 묶어 빗물에 내려놓는다
그 곁에 쭈그려 앉아 발갛게 귀가 젖는다
내 안에 그림자 한 점 몰아내지 못한다
마비가 풀리는 방식
마른 풀 위에 앉아 참았던 오줌 눈다
지금껏 따라다닌 모래알 흘러내리고
눈앞에 제비꽃잎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꽃잎 데려다가 혼자서 놀이를 한다
'ㅎ'에서 'ㄱ' 찾기, 'ㅅ'에서 'ㄷ' 찾기
이따금 헛것인가 싶게
네가 와서 나만 남는다
거기서 흔들렸다 변명하지 않는다
우리를 갈라놓았던 이유가 사라져 가듯
서서히 각도를 틀며 몰락하는 게 좋았다
실직 후
한 움큼 쥐고 있던 햇살마저 떠나간 뒤
의자에 발을 묻고 외로운 섬이 되어
시간의 나사만 풀고 있다
동굴이 된 눈동자
해설
상상력과 직관의 언어들이 형상화되
는 최양숙의 시 세계
박영주
강릉원주대 명예교수
시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것들과의 대화다. 그가 그들 또는 그것과 대화하면서 느낀 것을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느낌을 언어로 번역해 내는 일은 참으로 고달프다. 언어는 느낌을 나타내는 기호일 뿐 그느낌의 본질은 아니다.
언어는 이해를 위한 표현 수단이지 느낌의 구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이지 않는 느낌을 보이는 기호로 번역하는 것 자체가 때로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언어는 느낌에 비해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래서 시인은 그가 느낀 내밀한 무언가를 자신만의 상상력과 직관의 언어를 통해 번역해 내는 수밖에 없다. 더불어 사는 이 세상 안에다!
최양숙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종소리에는 마디가 있다』 에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삶의 다단한 모습들이 사유의 깊이와 상상의 힘을 내장한 웅숭깊은 형상들로 들어 서 있다. 인간의 삶과 사물의 생태는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퍽도 다르게 수용된다. 인간과 사물을 대하는 시선이 곧 마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을 바라보느냐,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상이 인식되고 세계가 재구성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대상의 감성적 인식을 통한 세계 재구성 능력을 상상력이라고 할 때, 최양숙 시인의 좋은 시편들에는 이러한 상상력이 직관의 언어들을 통해 감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있다. 하여 그는 이러한 시편들을 통해 그만의 가장 풍부한 生을 사는 법을 익혀 나가고 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