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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5) 「교회헌장」의 완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3회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2회기에, 필립스(G. Philips)가 작성한 의안을 중심으로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 새로운 초안이 제출되었습니다. 다소 단출한 형태의 초안에 관한 토론 결과, 세례받은 모든 신자 곧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모두가 속하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내용이 별도의 장으로 채택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백성’에 관한 장을 ‘교계 제도’ 앞에 배치하여 전체 하느님 백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마리아에 관한 내용을 「교회헌장」에 포함하기로 하였습니다.
제2회기가 끝나고 제3회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신학위원회는 제2회기에서 논의된 사안들을 다시 정리하였습니다. 이때 성 요한 23세 교황이 제안한 ‘성인들의 통공’과 관련된 내용이 별도의 장으로 추가되었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교회헌장」의 의안이 제3회기에 제출되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1장 교회의 신비
제2장 하느님의 백성
제3장 교회 위계 조직, 특히 주교직
제4장 평신도
제5장 교회의 보편적 성화 소명
제6장 수도자
제7장 순례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성격, 그리고 천상 교회와 그 일치
제8장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 계시는 천주의 성모 복되신 동정 마리아
공의회의 ‘전체회의’(Congregatio generalis)는 제출된 「교회헌장」 의안의 제1장부터 제8장까지 각 장에 대한 찬반 투표를 시행하고, 제기된 의견을 수렴하여 의안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전체회의를 열어 수정된 의안 전체에 대한 투표를 시행한 결과, 찬성 2,151표에 반대 5표로 만장일치에 가까운 동의를 얻었습니다. 이에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64년 11월 21일 「교회헌장」을 장엄하게 반포하였습니다.
필립스는 「교회헌장」 주해에서 헌장의 여덟 장은 두 장씩 대비되는 성격으로 짝을 이룬다고 설명합니다. 제1장 교회의 신비는 교회의 초월적 성격을, 제2장 하느님의 백성은 역사적 상황 속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제3장은 사목자들의 직무를, 제4장은 평신도들의 참여를 언급하는데, 이는 직무 사제직과 보편 사제직의 차원에서 공동체의 유기적 구조를 드러냅니다. 제5장은 하느님 백성 전체의 성화를, 제6장은 수도 생활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 역시 거룩함으로 초대된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설명합니다. 제7장은 성인들의 영광된 모습과 교회의 종말론적 모습을, 제8장은 순례하는 교회의 전형인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언급하는데, 두 장 모두 종말론적 구원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타냅니다. 지금까지 「교회헌장」의 형성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교회헌장」의 내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볼까요?
[교회의 언어] 헤어질 결심
힘든 하루(long day)를 보내고 나서 하루를 돌이켜 봅시다. 저녁마다 시간을 내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신 발자국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 다음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을 돌이켜 봅시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땅의 먼지에 불과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동행입니다.
사순절(Lent)은 주님의 동행을 깨닫는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오는 수요일에 우리가 땅의 먼지에서 왔다는 것을 머리에 재를 얹으며 묵상합니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시작으로 사순절 동안 기도(prayer)와 절제(abstinence), 자선(almsgiving)으로 애덕을 실천합니다. 사순절에 하는 결심을 Lenten resolutions이라고 합니다. 기도로서 교만과, 단식과 금육으로 무절제와, 자선으로 이기심과 헤어질 결심을 합시다.
헤어지고 나면 주님과 다시 만날 결심도 필요합니다. 참회하고 고해할 결심, 정성껏 영성체할 결심, 세례 서약을 다시하며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로 거듭 태어나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은혜로운 사순절 맞이하시길.
[가톨릭 신학] 성관계를 하지 않는 동성애자의 신학교 입학에 관하여
올해 1월 이탈리아 주교회의는 새로운 <신학교를 위한 지침과 규범>을 발표했습니다. 규범은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동성애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 관해, 교회는 당사자들을 깊이 존중하면서도, 실제로 동성애 행위를 하는 사람들, 뿌리 깊은 동성애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 또는 이른바 게이 문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신학교나 성품에 받아들일 수 없다.”(44항)
그럼에도 언론은 교황청이 성관계를 하지 않는 동성애자의 신학교 입학을 허용했다고 앞다퉈 보도했습니다. 그 근거는 이어지는 내용 때문입니다. “사제 후보자 양성의 목적은 독신 생활의 순결을 선물로 받아들이고 자유롭고 책임감 있게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데 있다.” 전체적인 내용을 본다면 이는 신학생 양성 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할 자유와 책임의 교육에 대한 권고일 뿐이지만, 언론에서 뒷부분만 편집해 책임 있게 순결을 지킬 경우 신학교 입학이 가능하다고 왜곡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 주교회의는, “언론의 해석은 올바르지 않다. 동성애자의 사제직 불허에 관한 규범은 변함없다.”(2025년 1월 10일 자 ‘아베니레’ 신문)고 대응했습니다.
물론 교회는 동성애 ‘성향’과 ‘행위’를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동성애 성향이 있는 이들에게는 죄의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개인의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의지가 동반될 수밖에 없는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습니다.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목적을 결여한 행위이며, 성서에서도 이를 극심한 부패 행위로 단죄하고 있고, 하느님을 배척하는 슬픈 결과를 내는 것으로까지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목적 차원에서 동성애자의 개인적 어려움과 사회에 대한 부적응을 극복하려는 희망을 북돋아 주어야”하며 “동성애자들이 폭력적인 적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것은 개탄할 일”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것이 동성애 ‘행위’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 윤리상의 특정 문제에 관한 선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지만 사랑과 자비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선의 부재, 계명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회개한 이들에 대한 자비, 죄를 저지른 이들에 대한 애달픈 기다림이지 무분별한 사랑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성애 성향만으로도 신학교 입학이 허가되지 않음을 교회는 분명히 해왔습니다. 특수한 성향이 죄가 아니라도 그것은 윤리적 악으로 기울어지는 다소 강력한 경향이기에, 그 성향 자체는 하나의 ‘객관적 무질서’로 인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뿌리 깊은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서품에서 비롯될 수 있는 부정적인 결과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저는 믿나이다] (15) 사도 회의
이방계 그리스도인에게 율법·할례 면제해준 사도 회의
교회의 이방인 선교는 사도들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이뤄졌다 했습니다. 복음서 저자이기도 한 루카는 사도행전 8―10장에서 이러한 관점을 제대로 서술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이미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데카폴리스를 여행하면서 페니키아 출신 여인을 비롯한 이방인들을 차별 없이 치유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합니다.(마르 7,24-37)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준으로 복음 선포 대상을 구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중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명하십니다.(마태 10,5-7)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당부하시죠.(마태 28,19-20) 사도들은 이 선교 사명에 따라 갈릴래아와 예루살렘·팔레스티나 지역을 넘어 땅끝까지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제한되었던 구원의 역사는 모든 민족에게로 펼쳐집니다. 이처럼 사도 시대 선교에 대한 교회의 인식은 선교 지역 확산과 비례해 확대됩니다.
모든 민족까지 구원이 확대되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고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이방계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생겨납니다. 바로 시리아 안티오키아 교회였죠. 율법과 성전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지 못한 유다계 예루살렘 교회는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어떤 사람들이 유다에서 안티오키아 교회를 찾아와 구원의 전제 조건으로 율법 준수와 할례를 요구하면서 논쟁을 벌입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바오로와 바르나바, 그리고 이방계 그리스도인 몇몇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사도들에게 자문합니다. 이 일로 사도 회의가 열리게 됩니다.(사도 15,1 참조) 교회사 학자들은 사도 회의가 48~49년께 열렸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사도 회의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속한 바리사이파 출신 유다계 그리스도인 몇이 이방인에게 할례를 베풀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사도 15,5) 베드로 사도는 그들에게 “우리도 감당할 수 없는 멍에를 왜 형제들에게 지우려 하냐”며 사실상 이방계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지키거나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방계 그리스도인을 변론하는 베드로 사도의 명설교를 묵상해 봅시다.
“형제 여러분, 다른 민족들도 내 입을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나를 뽑으신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사도 15,7-11)
베드로 사도의 설교가 끝나자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자신들의 선교 체험을 들려주면서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신 일을 증언합니다.(15,12)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요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마르 6,3; 1코린 9.5 참조)가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을 내놓습니다.
의인으로 존경받고 야고보 서간 저자로 알려진 그는 먼저 아모스 예언서 9장 11-12절을 인용해 베드로 사도의 말이 예언자들의 말과 일치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 곧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자”고 호소합니다. 그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고,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지만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 △불륜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만큼은 멀리해야 한다고 중재안을 제시합니다. 그가 이방계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한 네 가지 금지 조건은 성찬례 도중 공동 식사를 할 때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부정하게 만들지 않도록 배려하는 선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과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2장은 사도 회의 현장을 자세히 보도합니다. 사도 회의는 순조롭진 않았지만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냈습니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과 할례가 거부되지 않듯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할례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회의에서 이러한 결정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유다계와 이방계 모두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인지하고 있었지요.(갈라 2,16)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39) 협조자 - 성령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봉사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성경에서 성령은 ‘하느님의 얼·숨결·바람·거룩한 영(靈)’ 등으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표상은 생명을 연상하게 합니다. 모든 생명에 생기를 줘 물에서, 불에서, 숨결에서 생명의 힘찬 율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생명의 영이신 하느님으로, 인간을 성화시키고 하느님께로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성령은 영원으로부터 계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성령
- 구약 : 하느님의 영
세상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힘으로 나타나며, 특히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내리셔서 하느님의 백성을 구원하려는 은혜로 나타납니다.(창세 1,31; 7,1-24; 1사무 16,13)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영이 모든 사람 위에 내리시는 것을 예언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을 받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엘 예언자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영’에 의해 생명과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요엘 3,1-5)
- 신약 : 위로자·협조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후 승천하실 때 위로자 성령을 보낼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은 오순절에 사도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청을 들어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것입니다.(요한 15,26)
이렇게 파견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모든 사람을 진리로 이끄시는 일입니다.(요한 16,13)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사업을 완성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이 구원이 세상 마칠 때까지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지도록 교회를 통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의 참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로써 생명과 구원을 베푸십니다.
교회의 무지와 나약함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인 구원사업을 계속 수행한 성령은 우리의 협조자이시며 위로자이십니다.
성령의 선물
- 성화 은총(생명의 은총) :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생활하시며 하느님 나라로 참여시키는 초자연적인 은총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이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지니고 하느님을 향해 힘찬 생명의 활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 도움의 은총(조력 은총) : 하느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은총 안에 살도록 도와주는 은혜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인간이 받아들이고 응답하도록 초대하십니다.
- 성령의 특별한 은혜 : 일상을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삶은 제일가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특별히 옳은 일이나 특별한 의미에서, 특별히 보이는 성령의 은혜를 ‘특은’(카리스마)이라 부릅니다. 예언·영의 식별·기적 등이 있습니다.
오늘날 ‘특은’은 초대 교회의 그것과는 형태를 달리합니다. 필요한 것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특은’은 특별한 사목 능력이나 밝은 지혜(신학)·현명한 통치 능력·예술형태의 발견·훌륭한 교육·성인들의 탁월한 일생 등입니다.
- 성령의 7가지 은사(성령칠은)와 9가지 열매
성령칠은 : 지혜(슬기)·통달(깨달음)·의견(깨우침)·용기(굳셈)·지식(앎)·공경(받듦)·경외(두려워함)
성령의 열매 : 사랑·기쁨·평화·인내·친절·온유·착함(선행)·성실·절제
- 성령 강림 : 오순절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성령께서 각 사람 위로 내려오셨음을 말합니다.
[빛과 소금] 믿음 · 희망 · 사랑 : 희망의 촛불 밝히기 (3) 기도 편
믿음의 기도가 말씀과 약속을 붙들고 하는 기도라면, 희망의 기도는 희망의 제일 중요한 에너지인 꿈을 붙들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희망의 기도는 언제 바칠까요? 바로 절망의 자리에 있을 때 바칩니다. 희망의 출발점은 바로 절망인 것입니다. 그럼, 희망 기도를 어떻게 바치면 좋을지 살펴볼까요?
1단계, 입을 크게 벌려라
희망 기도 1단계는 입을 크게 벌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입을 작게 벌리는 기도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네 입을 한껏 벌려라, 내가 채워 주리라.”(시편 81,11)
여기에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기왕이면 많이 청하고 크게 청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1코린 12,31)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스케일 크게, 주님께 청해 봅시다.
2단계, 바라보라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비전을 주실 때, 먼저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을, 또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아라.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창세 13,14-15 참조)
주님은 이처럼 시청각을 활용하셨습니다. 무엇을 표현할 때 온몸을 동원해서 직접 체험하게 되면 90%가 기억에 남는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비전을 주실 때 일부러 시각 효과를 이용하셨습니다. 자꾸 바라봄으로써 이 꿈이 아브라함 안에 ‘희망 DNA’로 각인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500년 후에 이 꿈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바라봄’은 우리 일상생활, 특히 가정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백 마디 말이어도 한 번 보여 준 것만 못합니다. 즉 보여주는 대로 아웃풋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한 예로, 자녀들에게 “기도 좀 해라.”하고 말하는 것보다 부모가 먼저 신이 나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자녀들을 기도의 길로 이끌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라봄의 법칙, 희망의 법칙입니다. 이때 우리가 희망을 품고 바라보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연합하여 돕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결국, 이 두 가지가 연합합니다. 바라보지 않으면 믿음도 혼자 일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3단계, 응답이 올 때까지 매달리라
희망 기도 3단계는 응답이 올 때까지 매달리는 것입니다. 성녀 마더 테레사 수녀님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할 수 있는지 묻자, 수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기도하면 기도를 잘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더 잘하고 싶으면 더 많이 기도하세요.”
질로 안 되면 양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기도를 잘하려 하지 말고, 많이 기도하다 보면 기도를 잘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기도를 많이 한다는 건, 그만큼 간절함이 배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 기도했지만 응답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 야고보서의 말씀을 되새기며 더 간절히 청해 보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야고 4,2)
[매주 읽는 단편 교리] 감사기도(Prex Eucharistica)
‘감사기도’는 미사 중 그 위치와 내용, 가치에 있어 전례의 중심과 절정을 이루는 길고 장엄한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로 시작하는 ‘삼중 대화’부터 ‘마침 영광송’의 응답 ‘아멘’까지 이어집니다. 「미사 경본 총지침」에서는 감사기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제 미사 거행 전체의 중심이며 정점인 감사기도가 시작된다. 이 기도는 감사와 축성의 기도다. 사제는 백성에게 기도와 감사로 주님께 마음을 들어 올리도록 초대하고, 자신의 기도에 백성을 참여시켜 공동체 전체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를 바친다. 이 기도의 뜻은 신자 회중이 모두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하느님의 위대하신 업적을 찬양하며 제사를 봉헌하는 데에 있다”(78항).
감사기도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 잔을 들고 바치신 감사와 찬양의 기도에서 유래합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유다인들이 파스카 만찬이나 성대한 종교적 식사 끝에 한 가정의 가장이 바치던 [베라카](berakah)라는 찬양기도 였습니다. 이를 사도들과 초기 교회는 찬양 기도라는 뜻으로 [에울로기아](Eulogia) 또는 감사기도라는 의미로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라고 불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에우카리스티아]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감사기도는 크게 감사송과 감사기도 전문(典文)으로 나뉩니다. 사제는 대사제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in persona Christi) 또한 전체 공동체의 이름으로(in persona Ecclesiae) 이 기도를 바칩니다. 신자들은 사제의 기도를 조용히 경청하면서 규정된 응답(‘거룩하시도다’ ‘신앙의 신비여’ ‘아멘’)을 통해 능동적으로 참여합니다. 따라서 감사기도 역시 말씀 전례처럼 대화의 구조를 갖습니다. 감사기도의 구조는 아래와 같습니다:
[교회의 언어] 아담, 사람
아담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첫 사람이지만 고유한 이름은 아닙니다. 히브리어에서 아담은 고유 명사가 아닌 일반 명사로 정관사가 붙어 ‘하 아담’, 곧 ‘그 사람’을 뜻합니다. ‘아담’은 모든 시대에 존재하는 ‘사람’인 우리 모두를 가리킵니다.
창세 2,7은 “주 하느님께서 흙(아다마)의 먼지로 사람(하 아담)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하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아담’은 “흙/땅”을 가리키는 ‘아다마’와 연결됩니다. 사람은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흙과 같은 존재로 연약하고 한계를 지닌 존재이기에 때로는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기도 합니다.(창세 3장 참조) 하지만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의 숨’을 받은 하느님의 모상(창세 1,26 이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주님의 등불’로 묘사되는 하느님의 숨은 하느님께서 불어 넣으신 양심이며 ‘전정한 나’를 발견하는 능력입니다. 사람은 ‘아다마’, 곧 땅이며 부서지기 쉬운 존재임을 잊지 않으면서,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다른 피조물과 조화롭게 살아갈 때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저는 믿나이다] (14) 이방인 선교
예루살렘 교회, 주님 은총 아래 이방인 선교 활발
사도행전 8장은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떠남으로써 복음이 이곳저곳으로 두루 퍼져나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인들에게(사도 8,5-40), 베드로 사도는 카이사리아의 이방인들에게(사도 9,32―11,18),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은 안티오키아에(사도 11,19-26) 복음을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복음은 이제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를 넘어 땅끝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선포됩니다. 아울러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와 두드러지게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행전 8장 1절에 ‘예루살렘 교회’라며 교회가 처음 지리적으로 한정된 지역 신자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를 향해 뻗은 도로를 따라 도시로 이동하면서 그곳에 사는 유다인들에게 들불처럼 복음을 전했습니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는 물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디아스포라 공동체까지 복음이 선포됐습니다. 서기 49년께 로마에는 이미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유다교 율법을 지키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규칙적으로 기도하며 신앙을 유지하려 했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달리 이에 얽매이지 않았던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 사회를 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이방인에게 눈을 돌린 것은 선교에 엄청난 활력을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교회 구조와 조직, 신학 전반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루살렘 밖에서의 선교는 그리스계 출신 필리포스에 의해 시작됩니다. 그는 스테파노와 함께 사도들로부터 일곱 봉사자로 임명된 인물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는 사마리아 고을로 가서 마술사 시몬을 비롯해 그곳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들과 같은 혈통입니다. 할례도 당연히 받고요.
솔로몬 임금이 죽은 후 나라가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쪼개지면서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왕국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북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페르시아 등 제국의 침입을 받아 이민족 문화와 우상을 숭배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유다인들과 완전히 갈라졌다는 점입니다. 필리포스는 유다인에게 멸시의 대상이던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사마리아까지 와서 확인한 것(사도 8,14-17)으로 보아 필리포스의 선교는 상당한 성과를 보인 듯합니다.
사도행전은 필리포스가 더러운 영을 몰아내고 중풍 병자와 불구자를 치유한 것이 선교에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오늘날 신학자들은 이에 덧붙여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미 호의적으로 맞이했고(요한 4,39-42 참조), 복음을 전한 이가 그리스계 선교사였기에 호감을 샀을 것이라 해석합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유다인 사제 계급에 대한 혐오가 대단하던 사마리아인에게 그리스 출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불신을 없애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필리포스는 이어 에티오피아 칸다케 여왕의 내시를 만나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줍니다.(사도 8,26-39) 유다인도 아닌 그가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으며 돌아가는 마차에서도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다고 하니 할례를 받고 유다교로 개종한 자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필리포스는 기세를 몰아 아스돗과 카이사리아에 이르는 여러 고을에서 복음을 선포합니다.(사도 8,40)
베드로 사도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줍니다. 대상은 바로 카이사리아에 주둔하던 로마군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와 그의 친척, 친구들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들을 만나기 전 환시를 봅니다.(사도 10,11-16 참조) 그는 환시를 통해 유다교 정결법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명을 받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코르넬리우스를 만난 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 10,34-35) 사도행전 저자는 코르넬리우스의 세례를 더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사도 10,45)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선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쫓겨났던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키프로스와 키레네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안티오키아에 사는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사도 11장 참조) 키프로스 출신 중 대표 인물이 바르나바와 므나손이고, 키레네 출신으로는 루키오스가 있었죠. 또 사도들에게 임명된 일곱 봉사자 가운데 니콜라오스는 바로 이곳 안티오키아 출신입니다. 이곳에서의 선교 성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리스도인’(Χριστιανοs, 크리스티아노스), ‘그리스도인들’(Χριστιανοι, 크리스티아노이)이라는 말이 새로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마리아에서의 선교 성과를 확인하고자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보냈던 것처럼 안티오키아에 바르나바를 보냅니다. 사도행전은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사도 11,23)며 예루살렘 교회에 보낼 보고를 대신합니다.
사도행전은 이방인에 대한 복음 선포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뜻에 따라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적극적인 개입, 곧 은총으로 주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