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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서 목사
들어가는 말
아파트 분양 추첨에 떨어져 낙담하고 있는 엄마가 있었습니다. 엄마가 낙담하고 있으니까, 아이가 와서 엄마에게 말합니다. “한숨 좀 쉬지 마. 인생이 원래 그런 거잖아.” 여러분, 만약 이 말을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에게 해준다면 어떤 느낌이실 것 같습니까? 대견하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참 어른스럽게 잘 자라주었다며 고맙다고 하시겠습니까? 글쎄요, 그렇게 생각하실 분들도 계실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고 있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꿈을 먹고 자라나야 합니다. 자신의 삶이 희망차게 펼쳐질 것을 기대하며 자라나야 합니다. 이런 아이들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늘 도전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인생이 원래 그런 거잖아!”라고 말하는 아이의 경우에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늘 제자리걸음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나 한 사람의 힘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안 되는 것이 당연하거야!”라는 패배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한 아이가 어느 목사님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세상사는 게 너무 힘들고 복잡해서 편지를 드립니다. 요즘 유명하다 똑똑하다 훌륭하다 하는 어른들이 많지요. 이 어른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바라보는 저희들 마음은 착잡할 따름입니다. 사는 게 뭔지 정말로 미쳐버릴 것만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왜 이 험악한 세상에 보내셨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 세상이 너무 너무 싫습니다. 미쳐버릴 것만 같아요. 터져버릴 것만 같아요. 때로 방 안에 틀어박혀 울어도 보고 소리도 질러 보지만 제겐 아무런 변화도 오지 않아요. 특히 우리나라가 싫습니다. 운이 너무 없었나 봅니다. 많고 많은 나라들 중 한국에 태어난 게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이렇게 썩어 빠진 나라가 어디에 있겠습니까?”(이찬수, YY 성장 보고서, )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이 병들고 있습니다. 꿈을 잃어버렸기에 병들고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소망을 발견할 수 없기에 가슴아파합니다. 꿈을 꿀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꿈꾸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부터 대강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강절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앞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꿈꾸게 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가 대강절입니다.
본 론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는 꿈꾸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꿈꾸게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사야입니다.
이사야가 누구입니까?
이사야는 BC 739년경부터 681년 정도까지 약 50년 정도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활동하던 시기의 시대상을 이사야 5장 8절 이하에 기록했습니다.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8절 말씀입니다. “8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여러분,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부동산으로 축재하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11절 말씀 “11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과 여자와 함께 인생을 즐기느라 정신 못 차리는 부유층들을 뜻합니다.
이외에도 당시의 사회상은 거짓이 판을 치고 공의가 뒤틀려 선악을 분별할 수 없는 혼탁한 사회였으며, 이로 인해서 힘없는 사람들은 짓밟히고 착취당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절망하는 사회였습니다. 의롭게 살기를 원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이미 세상을 등지고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활동했던 사람이 바로 청년 이사야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남 유다도 철저히 타락하여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게 될 상황에서도 청년 이사야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입니다. “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먼저,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줄기’라는 말은 겉으로 보기에 거의 싹이 돋아날 가망이 없이 보이는 마른 나무 밑동, 즉 그루터기를 뜻합니다.
지난 가을에도 산에 갔다 오신 분들이 계시지요?
무엇을 보러 가셨습니까?
단풍. 그런데 단풍만 보셨나요?
여러 나무들도 보셨지요?
그런데 기억 남는 나무는 어떤 나무입니까?
아름답게 물든 단풍나무가 기억나실 겁니다. 다 말라버린 나무는 보셨어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 말라버린 나무는 등산객이나 행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본문에 예언된 한 인물이 태어나는 이새의 집안도 세인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는 명문가가 아닙니다. 너무 평범한 집안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거의 기억되지 않을 집안입니다. 그런데도 이사야는 지극히 평범한 가문에서 한 인물이 태어나 매우 중요한 일을 할 것이라 예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언제 꿈을 꾸게 될까요? 풍요로울 때 꿈을 꾸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일해지기 쉽습니다. 성공하고 있을 때 꿈을 꾸게 될까요? 꿈을 꾸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기 쉽습니다. 힘이 있을 때 꿈을 꾸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힘을 남용하여 잘못된 길로 가기 쉽습니다. 꿈이란 절망 가운데서 꾸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꿈을 꾸게 하시는데, 바로 그 꿈은 우리가 가장 힘들다고 할 때, 가장 어려워서 낙심이 될 때, 내 힘으로는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바로 그 순간에 꿈을 꾸게 하십니다.
여러분,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를 잘 아실 것입니다. 킹 목사는 노예들에게 자유를 선언한 선언문이 발표 된 지가 백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미국 이곳저곳에서 피부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흑인들 대부분이 정당한 사람대우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흑인들이 사회의 천덕꾸러기가 되고, 빈민굴에서 뒹굴고, 범죄에 빠지는 것을 보았을 때 킹 목사는 너무 절망하였습니다. 너무 절망을 하고 또 절망을 하다가 그는 그 절망 속에서 꿈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저격당하기 전 한 유명한 감동적인 연설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이었습니다. 이 꿈은 절망 속에서 찾은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피에 물든 죠지아의 언덕에서 옛적 노예의 아들과 옛날 노예의 주인의 아들들이 형제와 같이 사랑을 나누며 한 밥상에 둘러 앉아 같이 식사를 할 날이 올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나의 어린 네 자녀들이 그들의 피부 색깔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대우 받지 않고 그들의 인격으로 판단 받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꿈이 나에게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절박한 상황에 무슨 꿈을 꾸는가?’라고 말씀하고 싶으십니까?
왜 못 꿉니까?
꿈을 내가 꿉니까?
꿈을 꾸도록 하게 하시는 분이 꾸게 하면 꾸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시는데, 소망을 가지게 하시는데, 왜 못 꿉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꿈꾸게 하십니다. 소망을 가지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오라고 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억지로 데리고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 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 문둥병자를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둥병자를 고쳐주시고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이 문둥병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이야기 했고, 결국 이 일로 예수님께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에만 계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 계셨는데도, 사방에서 예수님께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꿈꿀 상황이 아니라고요?
믿는 사람에게는 꿈꾸지 못할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꿈꾸게 하지 못하는 상황보다 더 큰 분이 누구십니까? 문제보다 더 큰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을 보세요. 예수님을 바라보면, 꿈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면, 절망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꿈꾸게 된 성도는 더 이상 주저앉아 있지 않습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소망 있음을 봅니다. 꿈꾸게 하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꿈꾸게 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절로 5절 말씀입니다. “2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3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4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절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분, 즉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첫째,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분이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장 완벽한 지도자이심을 뜻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가장 완벽한 지도자이십니다. 우리를 꿈꾸게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어떠한 지도자도 흉내 내지 못하는 완벽한 지도자이십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 사회를 바라보면서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고 따를 만한 지도자가 없습니다. 본이 될 만한 지도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믿고 따를 만한 지도자가 있고, 본이 될 만한 지도자가 있어야 꿈이 생기고 그 꿈을 이루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게 되는데, 그런 지도자가 없으니까, ‘세상사는 게 다 그런 거지!’라는 말만 나오는 것입니다.
지난 1999년 7월 C랜드 참사 사건이 있은 후, 필드하키 전 국가 대표선수였던 한 어머니는 더 이상 이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길 수 없다며, 이민을 결심하기까지 했습니다. 여러분, 지도자가 없으면 꿈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지도자가 계십니다. 우리에게 꿈을 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지도자이십니다. 우리를 다스릴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선한 곳,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이끄실 분이십니다.
6절로 9절 말씀입니다.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세요. 세상적인 기준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가진 사람이 가지지 못한 사람을 업신여깁니다.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다스립니다. 강한 사람이 약한 자를 지배하고 착취합니다.
몇몇 소수에 의해서 힘없는 다수가 피해를 입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다스리는 세상,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집니까? 9절이 이를 집약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여러분, 주님께서 다스리는 나라가 완전한 나라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한 세상에는 평화가 깃들고 사랑이 넘쳐나지만, 하나님을 저버린 세상에서는 서로 죽이고 파괴하고 해치고 갈등만 있습니다.
러시아가 나은 유명한 문호인 솔제니친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가 어린아이였던 20세기 초는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났던 때였습니다. 매일 수십 명, 수백 명 씩 끌려가 학살당하고, 온 나라가 공포 분위기에 빠지고, 온 땅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던 때입니다. 이런 끔찍한 재난들을 두고 어른들이 앉아서 주고받는 말들을 어린 솔제니친이 들었습니다. 그 말은 그가 어른이 되어도 잊어버릴 수 없는 매우 인상적인 말이었습니다. 1983년 솔제니친이 미국에서 템플톤 강연을 할 때, 그는 어릴 적 들었던 그 이야기를 끄집어냈습니다.
그가 들려준 어른들의 대화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왜 우리에게 이 끔찍한 재난이 왔을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은 게야. 그래서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난 게야.”
솔제니친은 그 후 대학에서 러시아 공산 혁명사를 전공하였습니다. 수십 년 동안 수백 권의 책을 읽고 연구하였고 8권이나 되는 관련 서적을 저술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러시아 공산 혁명사를 연구한 끝에 얻은 결론은 의외로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반세기 동안 6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이 참담한 악마와 같은 공산주의 혁명의 비극이 왜 러시아에서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한 가지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가 내린 결론은 그가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거야.”라는 말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멸시한 나라나 개인은 지옥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메시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취하신 삶의 태도를 간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삶의 태도를 취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왜곡되고, 거짓된 증거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잔인하고 사악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뿌리를 박지 못하도록 하셨고, 정의와 성실로 그의 옷을 삼으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섬기기를 기뻐하십니까?
오늘은 대강절 첫 번째 주이기도 하지만, 교회적으로는 당회가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당회 때만 되면 교회가 시끄러워집니다.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지만, 다른 교회들은 당회 때만 되면 교회가 시끄러워집니다. 왜요? “누가 임원이 되는가?”, “누가 집사 직분·권사 직분을 받는가?”-이것 때문에 교회가 시끄러워집니다. 여러분, 누가 임원이 되고, 누가 직분을 맡아야 합니까? 하나님 섬기기를 기뻐하는 성도가 임원이 되어야 하고 직분을 맡아야 합니다. 하나님 섬기기를 뒷전으로 하고, ‘내가 몇 년 동안 이 교회를 다녔는데, 이 정도 자리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성도가 임원을 맡고 직분을 맡으면 곤란합니다. 정말 하나님 섬기기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임원이 되고 직분자가 되어야 교회가 성장합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섬기기를 기뻐하는 분들은 직분을 맡든 안 맡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꼭 하나님 섬기기를 뒷전으로 하는 분들이 임원이 됐네 안 됐네 하며 이상한 루머를 퍼뜨립니다.
성도 여러분,
임원이 안 되면 어떻습니까? 직분을 받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하나님 섬기기를 기뻐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닙니까? 담임목사로 저는 이번 당회 때, 정말 하나님 섬기기를 기뻐할 수 있는 분들이 임원이 되고 직분을 맡게 되었으면 합니다. 설사 임원이 되지 못하고 직분을 맡지 못한 분들도 늘 하나님 섬기기를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한 성도가 하나님 섬기기를 기뻐합니다. 기쁘게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 리
대강절을 맞이해서 어떻게 보내야 하겠습니까?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리며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며 보내야 합니다. 대강절은 우리를 꿈꾸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성도는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절망은 좌절을 낳는 것이 아니라, 꿈을 낳습니다. 우리가 꿈꿀 때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십니다. 그분은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누구와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가장 완전하신 지도자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완전한 지도자이신 예수님께서 계시기에 절망 속에서도 꿈을 꿀 수 있고, 그분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완전한 나라이기에 우리는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취했던 삶의 태도를 간직하고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함으로써 하나님 섬기기를 기뻐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