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유위(有爲)의 고찰
(1)
만일 생(生)이 유위(有爲)라고 한다면, 그것(생)에도 삼상(三相)은 있어야 할 것이다.(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만일 생이 무위(無爲)라고 한다면, 어떻게 (생이) 유위의 양상(즉, 생주멸의 삼상)을 가질 수 있겠는가.
(2)
생(주멸) 등의 셋이 분리되어 있으면 유위의 양상을 이루는 데에 불충분하다.
그러나 이 셋이 결합한다고 해도 어떻게 (그 셋이) 같은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있겠는가.
-<중론송(中論頌)>에서
[단숨에 쓰는 나의 한마디]
우리 삶은 함이 있어야(有爲) 굴러간다. 함이 없는 무위(無爲)의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 삶은 함이 있다. 본능의 움직임들이다. 따라서 인식할 수 있는 작은 것 하나 살아 움직이면 모든 것은 유위다. 무위에 대한 상상은 몸으로 해내는 공(空)에 대한 추론이다. 중론송을 보면 볼수록 이런 쪽으로 내 생각이 굳어진다. 그것도 없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실유에 대한 모든 언어적 서술은 다 정신 활동이다. 몸이 해내는 것이다. 따라서 함이 없이 산다는 것은 모순의 무감각일 뿐이다.
해제를 보자.
“만들어진, 것, 이룩된 것을 유위의 존재라고 한다. 그리고 유위의 존재에는 반드시 세 가지 양상(삼상三相)이 있는데 생(生), 주(住), 멸(滅)이 그것이다. 만물은 어느 것이나 생의 원리로 생겨났다가, 주의 원리로 머물며, 그리고 멸의 원리로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삼상을 하나하나 격파함으로써 유위의 존재를 파하고, 유의 존재를 파함으로써 무위의 존재도 파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존재가 공하다는 데에로 인도하려는 것이 여기에서의 취지가 된다. 그리고 생주멸은 시간을 구성하는 세 계기가 된다는 것을 아울러 염두에 두고서 읽어 내려갈 필요가 있다. 역시 종전의 예를 따라 생을 그 대표로 삼고서 논의해 나간다.(1) 해제
모든 존재는 반드시 생주멸한다. 그리고 이때에 있어서 그 삼삼상이 서로 분리되어, 생만 있든가 주만 있든가 또는 멸만 있든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반면에 생주멸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므로, 그 셋이 결합하여 동시에 한곳에 함께 있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를 생주멸시키는 원인이 되는 삼상은, 결합되어서나 분리되어서나 그 모든 존재를 생주멸시킬 수는 없다고 말하게 된다. 삼상에 각각 자성을 인정하는 이상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2)의 해제.”
오래 전이다. 불교 공부를 해보고 싶었던 것은 이시우 교수의<붓다의 세계와 불교 우주관>을 본 뒤다. 거기에서 반복되는 성주괴공 생주이멸(成住壞空 生住異滅)이 괜찮아 보였다. 여기서 또 만나니 반갑다. 새해는 벅차오르지만, 한 해는 언젠가 저물 것이다. 저무는 것이 아니라 여무는 것이라고 하지만, 여무는 것도 저물 것이다. 공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