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지철 (車智澈)
양 력: 1934년 12월 12일 04:00 차지철
음/평: 1934년 11월 6일 04:00 남자
시 일 월 년
壬 丁 丙 甲
寅 巳 子 戌
辛 庚 己 戊 丁 대운: 순행
巳 辰 卯 寅 丑
58 48 38 28 18 8.7
대운 시작: 8세 7월 31일
사망 나이: 1979년(46세) 10월 26일 사망함. 경진대운 기미년
공망-자축, 월지공망, 조후-갑/경
차지철 (車智澈)
출생 : 음력 1934년 11월 6일
사망 : 1979년 10월 26일
1953년 육군사관학교 12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을 하고 포병간부시험에 합격하여 군생활을 시작한다.
1958년 지금의 김포에 있는 1공수여단의 공수단에 지원하여 공수단 장교가 되었다. 이때 만나는 사람이 훗날 신군부의 전두환이다.
1961년 516 쿠테타에 적극적 가담.
1963년 중령으로 예편한 뒤 국회의원 출마, 당선, 제6, 7, 8, 9대 공화당 국회의원, 국회의원이 된 후 바로 결혼하였으나 곧 이혼.
1970년 재혼, 딸 셋을 출산함.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살 후 박종규 후임으로 제3대 대통령경호실장에 취임.
1979년 10,26 사태로 저격 받고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의 주막집 아들, 누나 셋(부친이 다름), 형 하나(모친이 다름), 막내였음, 부친 차윤염은 차지철이 출생 직 후 형인 차희철을 데리고 가출함. 지씨 라는 계부 밑에서 성장함,
(차지철은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 김씨가 지씨성을 가진 사람에게서 세명의 아이를 낳고, 차씨 집으로 개가해서 낳은 아들이라는 설도 있음).
담력과 힘이 좋았다고 함, 가정 형편이 좋지않아 공부를 계속 못하고 공수부대에 입대함.
516때 적극적으로 가담, 중령으로 예편, 국회의원이 됨. 바로 결혼함(63년), 상대는 이화여대 출신의 미모를 가진 여성, 그러나 곧 이혼,
7년 뒤 서울 정동교회에서 피아노 치던 여인과 재혼, 딸 셋을 출산함.
차지철이 죽은 후 부인은 미국의 오빠 집으로 감, 돈이 없어 미국에서 일을 한다고 차지철 모친이 말함.
동교동집이 있으나 모친은 며느리 것이라고 전세나 월세를 주지 않고 비워 두고 보존하고 있었음.
차지철은 효심이 강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음.
차지철의 약력을 잠시 살펴보면 53년 육군사관학교 12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을 하고 포병간부시험에 합격하여 군생활을 시작한다.
그 이후 58년 지금의 김포에 있는 1공수여단의 공수단에 지원하여 공수단 장교가 되었다. 이때 만나는 사람이 훗날 신군부의 독재자 전두환이다.
여하튼 61년 5월에 샤보이 호텔(75년 조폭 조양은의 호텔습격사건이 벌어진 호텔)에서 박종규 소령(훗날 대통령 경호대 실장)과의 친분으로 박정희 소장을 만나게 되고 둘은 곧 마음이 맞아 서로를 대우하기 시작한다.
<광기어린 차지철의 권력 행각>
그는 경호실장으로 있으면서, 청와대 연병장에서 경호부대 사열식을 가진 전무후무한 사람이었다. 물론 취지는 대통령각하의 목숨을 지키는 경호부대의 단결과 사기를 높이고 정신무장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이루어 진 것이었지만. 이 사열식의 규모가 거의 국군의 날 행사를 축소해서 했다고 보면 될 정도로 화려했다고 전해진다.
차지철이 사열관 자격으로 로열박스 맨 앞에 서고 좌우로 초청된 거물급 당간부, 부총리를 비롯한 차실장이 직접 초청한 인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재밌는 사실은 그 사열 제병 지휘관으로 거쳐간 사람들 중에 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등이 있었다.
차지철은 경호실장으로 있으면서 사열식 말고도 지휘도 하사를 통해 군 통치권자를 흉내 내고 싶어했다고 한다. 별을 달거나 승진해 야전으로 가는 정규 육사 출신의 군 후배들은 거의 다 인사차 전두환 당시 작전 차장보를 찾아왔었는데, 전두환은 이들을 꼭 차 실장에게 인사시켰고, 차실장은 금일봉을 내리거나, 지휘봉 하사를 통해 흐믓함을 표했다고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차실장은 히틀러의 친위대(SS친위대라고 불린다)를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실제로 경호대의 복장을 보면, 철모라든지, 모든 외양적인 모습이 SS친위대의 그것과 일치함을 볼 수 있다.
차지철의 상식을 뛰어넘는 각하에 대한 외경심, 혹은 충성심. 그는 경호부대원들의 충성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작곡가 박태석 씨에게 부탁해서, 경호원가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가사내용이 박대통령을 우상화하는 내용이었다. 예를 들면, 이나라 이 겨레 구원자 되신 님의 뜻을 받들고자 여기 모였네 같은 표현이 그러하다.
측근이었던 H씨의 증언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청와대 별관 3층에 있는 경호실장 방에는 본관의 대통령 집무실과 통하는 인터폰이 한대 있었어요. 차실장이 취임하자마자, 이래가지곤 어떻게 각하의 부르심을 빨리 받을 수 있겠느냐, 소파에도 한대 더 설치하라고 지시하더군요.
며칠 지나더니 그것도 부족하다며 내실, 화장실, 식탁, 2층 식탁에 추가로 설치했죠. 그렇게 설치를 해놓았는데도, 차실장은 인터폰이 울리면 조금이라도 빨리 받기 위해 몸을 날렸어요.
심지어는 명절이나 김장때 박 대통령으로부터 오는 하사금이 있었는데, 행정처장이 그것을 전달해 줄때에도 실장방이어서 아무도 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차지철은 봉투를 건네받을 때 일어나서 두 손을 깍듯이 받은 뒤 현금을 소중히 꺼내 지갑에 차곡차곡 넣었다고 한다.
차지철의 기인적인 성격의 성장 배경 차지철은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 김씨가 지씨성을 가진 사람에게서 세명의 아이를 낳고, 차씨 집으로 개가해서 낳은 아들임.
<김재규의 증언>
차지철이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부마사태 보고를 받고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을 죽였는데 그깟 부마 정도는 쓸어 버려도 된다고 했다고 김재규가 증언 함.
<경호실장이 된 사연>
1974년 8월20일 朴대통령은 정상집무에 들어갔다. 이날 金鍾泌 국무총리는 오전 오후 두 차례 대통령을 만나 陸여사 서거 후의 국정(國政)방향에 대해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金총리는 후임 경호실장으로 吳定根 국세청장을 추천했다. 朴대통령도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吳定根은 5.16 군사혁명 때 출동한 해병여단의 병력을 이끈 대대장 출신(당시 중령)이었다. 가장 먼저 한강다리를 넘은 해병대 병력의 선두 지휘관이었다.
이날 오후 2시55분에서 3시20분 사이 朴대통령의 사위 한병기(韓丙起)대사가 청와대로 들어왔다. 韓대사는 후임 경호실장으로 차지철(車智澈)공화당 국회의원을 추천했다. 이날 오후 4시33분부터 5시20분 사이 朴대통령은 車의원을 불러 요담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車의원을 경호실장으로 임명하겠다고 통보했다. 물론 車의원은 충성을 맹세했다.
8월21일 오후 2-3시 사이 朴鐘圭 실장이 대통령에게 이임(離任)인사를 하고 신임 車 실장이 취임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임무교대가 되었다. 朴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랫동안 모실 인물이 陸여사에서 車실장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10.26 사건을 예약한 인물교체였다.
누가 車실장을 경호실장으로 추천하고 왜 대통령이 그를 발탁했는가를 놓고 말들이 많지만 모든 결정은 朴대통령의 몫이다. 기자가 입수한 朴대통령 재임기간중의 면담일지를 읽어보니 車의원을 경호실장으로 발탁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陸여사 피살 이전에도 朴대통령이 가장 자주 독대(獨對)했던 정치인은 단연 車智澈 의원이었다. 이는 朴鐘圭 경호실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경호실장이 면담을 주선해주지 않으면 그렇게 잦은 獨對는 이뤄질 수 없었다.
1961년 5.16 군사혁명 한 달 전 공수단의 車대위를 포섭하여 金鍾泌씨에게 선을 보인 다음 朴正熙 소장 앞으로 데려간 사람이 바로 박종규(朴鐘圭)소령이었다. 5월16일 서울시청 앞에서 찍힌 유명한 사진에서 朴소장 양쪽에 호위로 서 있는 두 사람 또한 朴鐘圭와 車智澈이었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공수부대 훈련도 함께 받았다. 朴실장은 車의원을 동생처럼 좋아했다. 물론 朴대통령의 車의원에 대한 신임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렇게 대했을 것이다. 朴실장은 친한 사람들에겐 “車의원이 나의 후임이 되어야 할 사람이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車의원은 당시 好評을 받는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공수부대 장교출신답지 않게 신중하고 공부를 많이 하며 청렴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경호실장이 되면서 그의 인격의 일부로 나타나는 오만방자함도 보이지 않을 때였다. 朴鍾圭 경호실장도 후임으로 車의원을 추천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두환과 차지철>
1976년 전두환은 차지철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하게 되었다. 전두환과 차지철은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호혜적 관계로 결합되었다. 전두환은 차지철을 통해 각종 진급과 보직에서 특혜를 받을 수 있었고, 차지철은 전두환을 통해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장악, 통제할 수 있었다.
전두환은 차지철을 만나 인사청탁을 자주 했는데, 동생 전경환(全敬煥)이 경호처 경호관으로 발탁된 것도 전두환의 인사청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차지철에게 "제 동생 경환이가 내근 부서인 정보처에 있는데, 충성심이 강하고 유도도 잘 하니 경호원을 시키면 잘 할 겁니다. 선처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차지철은 각종 인사청탁을 들어 주는 대가로 전두환을 통해 하나회 인맥과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통제하려 하였다.
"차실장은 하나회 회장이었던 전두환 작전차장보가 동기나 군 후배들을 소개하면 이들을 격려하는 것을 즐겼어요. 주로 별을 달고 야전지휘관으로 나가는 후배들이 인사차 경호실로 전씨를 찾아오면, 전씨는 이들을 실장방으로 데리고 가 소개시켰죠. 차실장은 이들에게 금일봉과 함께 '경호실 증정'이라고 새겨진 지휘봉을 주곤 했는데, 군 후배들은 이를 더없는 영광으로 여겼죠."
1960년대-70년대 초 윤필용이 하나회 후배들을 후원해 준 것처럼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차지철이 하나회 인맥을 이끌어 주고 지원하였다. 마찬가지로 전두환은 윤필용에게 바치던 충성과 지지를 차지철에게 바쳤다.
그러나 1970년대 말에 들어와 차지철과 전두환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차지철이 권력의 2인자로서 부통령 행세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차지철을 견제하기 위해 전두환을 지지, 지원하였다. 하나회 세력이 커지자 차지철도 전두환 그룹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차지철과 전두환의 관계는 협조관계에서 경쟁관계로 변화되었다. 전두환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있을 때 내가 계속 나가겠다고 했어요. 차지철과 내가 사이가 나빴어... 차지철이가 여러 가지 일을 비뚤어지게 해. 중령으로 예편하고 국회의원을 한 사람인데, 경호실장 하면서 꼭 국회의원을 상대하고 높은 장군을 경호실에다 데려다 놓아. 차지철이가 나한테 경호실장 자리 뺏길까 봐 굉장히 신경쓰는 것 같애. 내가 내보내 달라고 했어."
결국 전두환은 1978년 대통령 경호실을 떠나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경호실 작전차장보 자리를 떠나면서 자신의 후임으로 노태우를 추천했다.
<어느 네티즌이 쓴 글>
스물 다섯해 전 박정희 대통령께서 시해 당하셨을 때 집안 분이 바로 청와대 차지철 경호실장 밑에서 일하고 계셨다, 교육계에 있다가 발탁돼 청와대로 들어간 그 분은 내 것이 아닌 건 탐내지 않는 반듯하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으로 집안내력이 선비였으며 평소에 틀린 소릴 하는 법이 없었다.
박대통령께서 서거하시고 전두환 소장이 국보위를 만들어서 분주하게 청와대를 접수하기 위해 돌아다닐 무렵 그 집안 분은 전두환 소장이 같이 일하길 바란다는 얘길 오랫만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심사숙고한 듯 말했다. 난 하라고 했고 그는 노태우라면 몰라도 싫다고 했다.
왜냐니까 전,노 두 사람이 한때 청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서 잘 아는데 노태우가 신사더라고 했다. 이미 물러날 뜻을 굳힌 듯해서 10,26후 항간에 떠돌던 얘길 몇개 조심스레 물어 보았다 박대통령이 엽색이라는데 하니까 말들이 그렇지 무슨..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 다음 차지철이 그렇게 나쁘냐니까 정색을 하며 절대로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살아 있어 다시 한번 일하자면 서슴없이 그를 따를 것이라고 했다 우직할 정도로 사심이 없고 부하를 배려해줄 아는 사람이라서란다.
차지철에 대해 더 이상 나는 묻질 않았고 그 후 그 분은 다시 교육계로 돌아갔다 그리고 전두환이 집권했고 있는대로 발겨지는 박대통령과 함께 차지철은 간신배마냥 언론에서 매도되었다. 어디에도 차지철에 대한 호의적인 기사는 없었고 그의 가족은 한국을 떠났다.
그러나 나는 박대통령을 믿듯이 집안 분을 믿기에 당대의 효자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차지철에게도 분명히 장점이 많으리라고 본다. 김재규는 사람을 죽였고 박대통령과 차지철은 죽임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해한 자는 시간을 두고 자기변론을 다 하고 가고 민주인사라고 까지 들먹거려지는데 살해당한 자는 졸지에 비명횡사한 것도 억울한데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조차 없이 박대받기만 하는 건 불공평하다 또 아버지와 남편을 잃고 숨어지내듯이 사는 그 가족은 무슨 죄란 말인가?
따라서 나는 김재규 이상으로 차지철에게도 자기변론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자면 그에 대해 증언해 줄 많은 자료가 발굴 되고 소개 되야하며 그 후에 김재규에 대한 판단도 국민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아래 사주는 다른 생일자료임. 도무사가 보기에는 위 사주가 더 신빙성이 있다고 봄.
양 력: 1934년 12월 22일 04:00 차지철
음/평: 1934년 11월 16일 04:00 남자
시 일 월 년
壬 丁 丙 甲
寅 卯 子 戌
辛 庚 己 戊 丁 대운: 순행
巳 辰 卯 寅 丑
55 45 35 25 15 5.4
대운 시작: 5세 4월 1일
사망 나이: 1979년(46세) 10월 26일 사망함. 신사대운 기미년
공망-술해, 조후-갑/경
첫댓글 이 분은 세상 평이 안좋아서 그런지... 검색을 해봐도 신상 자료가 별로 없습디다... 생일자료도 부실하니... 재미로 보시고...
이 분 생전에... 서울 사채시장 절반이.... 차지철 돈이라고 소문이 있었는데... 죽고 보니... 권력에 집착했지....정말 돈에는 청렴했던 것 같음... 김재규의 유족들은 재산이 많다던데... 이 분의 유족은 돈이 없어... 미망인이 미국에서 일을 하고 있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