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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온 사람들, 유배 생활의 공간
유배형이란 어떤 형벌일까?
유배 생활, 곧 귀양살이라고 하면 어떤 상황을 떠올리게 될까? 우리는 조선 시대에 관료가 이러저러한 정치적 사건에 얽혀서 귀양가는 모습을 텔레비전 사극을 통해 자주 접한다. 이때 귀양가는 사람은 한결같이 피 묻은 누더기 옷을 걸치고 오랏줄에 묶인 채 초췌한 모습으로 의금부 관원들의 엄중한 감시에 뭇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나무 창살로 만들어진 수레에 실려 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한 유배지(流配地)에서의 생활은 어떠한가? 누렇게 바랜 흰 무명 바지저고리를 걸치고 근근이 끼니를 연명하면서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을 시(詩)로 달래며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날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충성스러운 신하의 모습이 아닌가?
과연 조선 시대 유배 생활이 그랬을까?
유배형(流配刑)은 조선 시대에 오형(五刑) 가운데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다. 조선 시대 모든 형률(刑律)의 기준은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에 따라 만들어졌는데, 범죄자의 형벌은 크게 오형으로 규정하였다. 즉 태형(笞刑)·장형(杖刑)·도형(徒刑)· 유형(流刑)·사형(死刑)으로, 순서대로 점점 더 무거운 형벌이다.
태형은 오형 가운데 가장 가벼운 형벌로 종아리 아래를 10~50대까지 5등급을 나누어 매로 때리는 것이고, 장형은 허벅지와 볼기를 60~100대까지 5등급을 나누어 때리는 것이다. 태형에 처할 만한 작은 범죄의 경우만 수령이 직접 처결할 수 있었고, 장형 이상의 죄는 반드시 관찰사의 지시를 받아서 집행하도록 하였다. 도형은 비교적 중한 죄를 범한 자를 관에 붙잡아 두고 힘든 일을 시키는 것으로 지금의 징역형과 비슷하다. 도형은 반년씩의 차이를 두어 1년, 1년 반, 2년, 2년 반, 3년까지 기간이 다섯 가지로 정해져 있었다. 이에는 각각 장60, 장70, 장80, 장90, 장100이 반드시 뒤따랐다.
유형은 사형 다음으로 중형에 해당하는데,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어 죽을 때까지 살게 하는 형벌이다. 유배 보내는 거리에 따라 2,000리[약 785.45㎞], 2,500리[약 981.8㎞], 3,000리[1178.18㎞]의 세 등급이 있었으며, 각각 장 100형을 집행하였는데 고위 관료는 장을 받는 대신 속전(贖錢)을 바치도록 하였다.
사형은 오형 가운데 극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신체를 온전히 보전한 상태로 목을 졸라 죽이는 교형(絞刑) 과 머리를 잘라 죽이는 참형(斬刑)이 있었으며, 이 외에 임금이 내리는 약이라는 뜻의 사약(賜藥), 즉 독약을 마시게 하여 죽이는 방법도 있었다.
유형은 무거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벽지(僻地), 절해고도(絶海孤島), 원지(遠地)에 보내어 격리하는 형벌이었는데, 정치적 사안이 큰 범죄나 개인의 잘못이 큰 범죄에 활용되었다. 유배의 형벌은 정부 전복의 모반 사건 관련자와 반란에 관계된 자 같은 중한 범죄인부터 술주정과 풍속을 해치는 경우, 직무 태만, 불효 죄, 법을 어기고 술을 빚은 경우까지 다양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앙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배척되어 유배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유배형에는 집행 방법에 따라 부처(付處)와 안치(安置)로 나눌 수 있는데, 부처는 비교적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을 가까운 지역에 유배시키는 것으로 거처할 곳을 자원할 수 있는 자원부처(自願付處), 고향에 유배되는 본향부처(本鄕付處), 가까운 도에 보내 그곳 수령이 살 곳을 정하는 중도부처(中道付處) 등이 있었다.
안치는 부처에 비해 좀 더 무거운 형벌이다. 유배 지역 내에 일정한 장소를 지정하고 그 안에 거주를 제한하는 것으로 자원안치(自願安置)와 본향안치(本鄕安置) 같은 가벼운 것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열악한 섬에 유배시키는 절도안치(絶島安置)와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만 살게 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가 있었다. 위리안치의 경우는 왕족 또는 중신 등 주로 정치범들에게 많이 적용된 형벌로 그 지역 지방관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개인적인 활동 및 주민들과의 접촉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유배지와 유배길
유배형은 유배 보내는 거리에 따라 2,000리, 2,500리, 3,000리의 세 등급이 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대명률을 따라 정한 조항으로 실제 국토가 좁은 조선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1430년(세종 12) 형조에서 건의하여 죄인이 사는 곳을 기준으로 2,000리 유배형은 20식(息) 밖, 2,500리는 25식 밖, 3,000리는 30식 밖의 지역에 유배지를 정하도록 하였다. 1식이 30리이기 때문에 실제로 2,000리 유배형은 600리[약 235.64㎞], 2,500리 유배형은 750리[약 294.55㎞], 3,000리 유배형은 900리[약 353.45㎞] 정도에서 정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전국의 유배지 중에서 가장 험한 곳은 북쪽 변방이나 외딴 섬이었다. 그중에서도 도망갈 가능성이 거의 없고 생활 환경이 열악한 절도(絶島) 가 가장 혹독한 곳이었다. 실제 유배지로 지정된 지역은 삼수·갑산 등 함경도와 평안도 등 국경 지역, 남해안의 경우 거제도·진도·남해·제주 등 섬 지방이 자주 이용되었다.
지금까지 연구에 따르면 조선 시대 유배지로 자주 이용된 곳으로는 제주·거제도·진도·흑산도·남해·해남 등의 순서로 빈도수가 나타난다. 그중 부산의 동래가 12번째, 기장이 14번째 순위에 드는 것을 보면 아마 부산이 당시에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열악한 생활 조건을 가진 곳으로 여겨졌던 듯하다.
누구나 한 번쯤 여행 가고 싶은 곳으로 손꼽는 곳이 제주도, 거제도, 진도, 남해, 해남, 해운대, 기장이 아니던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시대에 생활 환경이 가장 열악한 유배지로 여겨졌던 곳이 현대에는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거나 절경이 빼어난 곳으로 오히려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고 하겠다.
대우는 귀양 온 사람이나 지역마다 달랐는데, 일정한 거주 지역을 마련하고 집집마다 날짜를 정하여 돌아가며 먹을 것을 주거나, 고을의 모든 백성에게 고루 거두어 유배인이 거처하는 곳의 집 주인에게 주기도 하였다. 유배인을 부양해야 하는 지역민의 부담 때문에 한 지역의 유배자 수는 10명을 넘지 않도록 인원수를 조정하여 해당 군현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규정이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유배지가 결정되면 유배자가 관직자일 경우에는 의금부에서, 관직이 없는 경우에는 형조에서 관할하였다. 왕의 윤허를 받아 유배지가 결정되면 의금부 및 형조에서는 유배인을 귀양지[配所]까지 압송해 갈 압송관을 배정하고 유배인에게 단자(單子)를 내려 귀양지로 출발하도록 하였다. 유배인이 압송되어 유배길에 오르면 정해진 기일 내에 귀양지에 도착해야 하였고, 하루에 가야 할 길은 평균 86리[약 33.77㎞]였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압송관은 정2품 판서 이상의 관료는 의금부 도사, 종2품 이하 정3품 당상관까지는 의금부 서리, 정3품 당하관 이하 관료는 의금부 나장이 압송하였다. 관직이 없는 일반 사족(士族)은 형조에서 관할하여 역졸이 담당하였다. 이때 압송관은 유배인에게 압송 과정에서 필요한 여행 경비를 공공연히 요구하기도 하는 등 여러 폐단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유배지까지 가는 과정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고통스러웠을까? 유배지 생활과 유배 가는 과정을 알려 주는 유배 일기가 많이 전하여 비교적 자세하게 조선 시대 유배 과정과 유배 생활을 살펴볼 수 있다. 관직자의 유배 일기로는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경상도 성주에서 유배 생활을 한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의 묵재 일기(默齋日記), 조헌(趙憲)이 1589년 (선조 22) 함경도 길주로 유배 가서 쓴 북적 일기(北謫日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인목 대비 폐비를 반대하다가 1618년(광해군 10) 북청 유배길에 올라서 쓴 백사 선생 북천 일록(白沙先生北遷日錄)등이 있다.
이 외에도 위리안치 죄인이 기록한 일기로는 1722년(경종 2) 윤양래(尹陽來)가 함경도 갑산에 유배 간 과정을 쓴 북천 일기(北遷日記)가 있으며, 관직이 없는 유생 이필익(李必益)이 1674년(숙종 즉위년) 2차 예송 때 송시열(宋時烈)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안변으로 유배가 쓴 북찬록(北竄錄)이 있다.
유배 일기를 통해 유배인의 유배 과정과 생활 모습을 보면, 유배자가 일반 사족일 경우와 관직자일 경우가 상당히 달랐다. 일반 사족은 형조에서 유배지를 배정하고, 본인이 형조에 나가서 명을 기다렸다가 역자(驛子)가 형조에 와서 죄인을 인계받아 직접 압송해 가서 다음 관할지에 인수인계하였다. 또한 이들은 유배길에 소용되는 경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였기 때문에 유배길이 상당한 고역이었다.
이에 비해 관직자의 경우 의금부에서 유배지를 배정하고 이를 알려 주면 본가(本家)에서 출발하며, 압송관과 동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관직자에게는 국가에서 말과 음식을 제공하였고, 노비나 아들이 시종하고 갈 수 있게 하였다. 숙종 때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갑술옥사로 함경도, 전라도 등지로 유배하던 사실을 그 셋째 아들인 이재(李栽)가 시종하면서 적은 일기인 창구객일(蒼拘客日)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관직자의 경우에는 유배 길목에 있는 지역 수령들이 유배길에 필요한 각종 물품과 금전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기장에서 오랜 기간 유배 생활을 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경우 함경도 경원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수령이 수많은 물품과 함께 노비 40여 명 및 말 20여 필을 제공하였고, 지나는 길목에 있는 고을에 미리 통지하여 접대를 잘 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윤선도가 유배길에 조생이라는 기생이 술을 가지고 찾아와 위로하기에 그 총명함에 감탄하여 시를 지어 주기도 한 것을 보면, 그의 유배 행차는 죄인의 행차라기보다 마치 중앙 관원이 지방에 출장 가는 것처럼 성대하고 화려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원로대신의 유배길은 유배 행차를 관광하기 위해 고을 사람들이 몰려나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광해군 대에 인목 대비의 폐비를 반대하다가 1618년 1월 63세의 연로한 나이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된 이항복의 유배길은 백사 선생 북천 일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이항복의 유배길은 죄인으로서 모습을 거의 느낄 수 없다. 수차례에 걸쳐 친지 및 문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출발하고, 시종하는 자제와 노비들이 모시고 길을 가면서 이르는 곳마다 수령들의 후한 접대와 보살핌이 이어졌다. 63세의 연로한 나이만 아니라면 유람에라도 오른 듯한 모습이다.
압송관은 원칙적으로 유배인을 귀양지까지 직접 압송해야 하지만, 실제로 동행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유배인이 관직자일 경우 실질적으로 동행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유배인과 압송관이 각자 자신의 여정에 따라 별도로 길을 가서 저녁에 숙박지에서 확인하는 정도이거나, 심지어 유배인이 유배지에 도착한 뒤에 압송관이 당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문건은 명종 대에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고향인 경상도 성주에 20여 년간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는데, 그가 남긴 『묵재일기』에 귀양지 생활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문건은 유배길 도중에 처가가 있던 괴산에 2일 정도 묵으면서 친척들을 만나고 괴산 군수를 비롯한 여러 사족에게서 각종 물품과 금전을 제공받았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유배길은 노비 6명과 말 4필을 타고 가는 성대한 행차 길이었다. 성주에 갈 때까지 압송관이 동행하지 않았으며 도착하였을 때는 5~6명의 아전이 마중을 나오기까지 하였다. 유배인이 유배지에 도착한 뒤에는 해당 도의 관찰사가 죄명과 도착 날짜를 기록하여 국왕에게 보고하고, 형조에 장부를 비치하였다.
유배지의 생활
16세기에 관료의 유배 생활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자료로 이문건이 20여 년간 고향인 경상도 성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쓴 일기인 『묵재일기』가 있다. 『묵재일기』에 따르면 이문건은 유배 이후 처가인 괴산과 유배지인 성주를 중심으로 토지를 싼값으로 사들여 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많은 노비를 괴산에 두고 수시로 성주에 오가게 하며 친척들의 서신 교환 및 물자의 수수와 운송은 물론 농사의 시기와 방법 등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매년 11~12월에는 정기적으로 5~6명의 노비를 김해와 대구 등지에 보내 청어(靑魚)를 구입하여 괴산에 가져가 팔아서 이익을 남겼는데, 이것은 낙동강 유역의 지역적·계절적 청어의 가격 차이를 이용한 상업 활동이라고 하겠다. 또한 면포와 명주 베의 방납(防納)으로 4~5배에 해당하는 이익을 남기고, 환곡을 대납하는 방법으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기도 하였다.
이문건은 사화가 연이어 발생한 16세기 정치적 변동기에 중앙 관료를 역임하였기에 귀양에서 풀려나면 언제든 다시 중앙의 요직을 맡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성주 목사와 경상도 관찰사 및 도사와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지역에서 이러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세기 학자 관료 유희춘(柳希春)은 1547년(명종 2) 양재역(良才驛)의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그의 고향이 제주도와 가까운 해남이라는 점 때문에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유희춘은 종성에서 19년간 귀양살이하면서 그곳 현감의 여종을 첩으로 들여 딸 넷을 낳고 살며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국경 지방의 풍속에 글을 아는 사람이 적었으나 그가 교육을 베풀어 글을 배우는 선비가 많아졌다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정약용은 1801년(순조 1)의 천주교 박해 때 유배를 당하여 유배 생활을 하면서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기도 하였다.
이를 보면 유배인은 유배지에서 지역민과 활발하게 교유하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학문과 교육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유배 생활을 하면서 첩을 두고 자식을 낳으며, 재산을 증식하고, 학문 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을까?
조선 시대에 모든 유형 죄를 범한 자는 처첩이 따라갈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유배지의 일정한 지역 내에서는 어디를 가나 행동의 자유가 보장되어 가족과 하인을 거느리고 주택을 매입하여 생활하는 경우도 있었다. 설사 위리안치형(圍籬安置刑)을 받더라도 신체적 구속을 직접 당하거나 가족 및 외부 접촉이 차단되지 않았다. 따라서 유배형에 처해진다는 것은 유배 생활 자체가 고통스럽다기 보다는 중앙 정계에서 추방되어 정치·사회적 활동에 제약이 따르고 고립되는 정치·사회적·심리적 고통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