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 공화국 최대 도시권이자 상업의 중심지인 요하네스버그는
인구밀집지역인 가우텡 주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인도양에 면해 있는 항구인 더반은 주요 산업의 중심지이다
요하네스버그는 더반과 더불어 남아공의 경제를 이끌어 가는 중심부라고 볼 수 있다
호주와 더불어 금광으로 유명한 요하네스버그
치안은 1994년 흑인정권이후 불안하다.
남아공은 흑인이 선거를 통해 정권을 가지고있지만,
상권은 백인이 그대로 가지고 있고 소규모는 인도인이 자리잡고 있어
경제적으로 흑인은 여전히 날품을 팔고 있어 기존과 큰 차이가 없다
세계에서 빈부의 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는 남아공이다.
남아공은 세계에서 살인사건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남아공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민주주의도 잘하고 소득이 꽤 높은 나라(1인 당 소득 1만 5천불)이다.
소득이 높은데도 왜 이렇게 살인 사건이 많은 것일까?
남아프리카 부자들은 신변보호를 사설경찰에 의뢰한다.
남아공은 사설 경비업체의 천국이다. .
사설 경비회사에 고용된 청원경찰관이 45만 명이다.
부자들의 경호가 늘어나면서 생겨난 직업이다.
(남아프리카 경찰)이 있지만, 경찰력만으로 치안을 감당하지 못한다.
사람살기 좋은 지중해 기후지역이다
남아공에서는 피부색에 따라 소득이 결정되고,
소득에 따라 주택지가 결정되고, 택지에 따라 치안이 결정된다.
백인 최고 소득층/칼라레드(collared)는 백인과 혼혈//최하위는 흑인(black)이다.
아파르트헤이트 때(1994년)는 유색인종으로 분류했다.
남아프리카에서 백인이 사는 곳은 경치도 좋고, 기후도 좋고, 치안도 좋다.
상류층 부자들은 경비를 보안회사가 한다.
커뮤니티 전체 주위를 철조망이나 높은 펜스로 주변과 왕래를 차단하고 있다.
출입문 경비실은 외부 자동차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다.
차량번호와 신분을 확인하고, 초대한 주민의 확인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요하네스버그 교외 빈민가 소외토(Soweto)가 있다.
소외토는 남아공 최대도시 요하네스버그(인구 440만 명)의 근교 빈민가이다.
흑인 98.5%과 백인 0.1%가 산다는 통계가 있다.
헌 함석으로 덮인 지붕이고, 판자로 가린 가건물이 많다.
영어보다 줄루(Zulu)어를 쓴다.
뜨겁고 포장도 안 된 흙먼지 날리는 도로이다
집에는 수도와 화장실이 없고, 전기가 들어오는 집은 40%에 불과하다.
마을에 공동 화장실과 공동수도가 있다.
까만 아이들은 맨발로 도로에서 축구를 한다.
경찰차가 하루에 한 번 순찰하고 가는 게 경비의 전부이다.
불평등과 강력범죄 간에 상관계수가 매우 높다는 연구가 있다.
아프리카 대륙 남단부를 차지하는 나라이다.
17세기 네덜란드인의 이주 이후 백인이 유입되며 1815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 정책을 비판하는 영국 정부로부터 독자적인 노선을 천명하며 독립해
1961년 5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선언했다.
넬슨 만델라출생과 학창시절
1918년 7월 18일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출생하였다.
템부(thembu)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족장에서 물러나자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성장하였다
만델라는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클라크버리(Clarkbury) 중등학교를 다녔다
1940년 포트헤어대학 재학 중 친구가 백인에게 모욕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처음으로 인종차별적 대우의 부당함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학생대표위원회으로 활동하다 학교측과 언쟁으로 갈등을 일으켰고
교장에게 불복종하여 학교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집안에서 정해준 여성과 약혼하기를 강요받자 집을 나와 요하네스버그로 갔다.
한때 금광에서 일하였지만 집에서 달아난 흑인임을 알려지자 곧 그만두게 되었다.
친척의 도움으로 요하네스버그 부동산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하게 되었으며 장차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다.
흑인인권운동 전개
법학은 만델라에게 유일한 지적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마침내 1943년 비트바테르스란트(Wit Watersrand)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하게 된다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산하 청년연맹을 창설하였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1년 동료인 월터 시술루와 함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벌였던 비폭력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52년 비백인(非白人)으로서는 처음으로 요하네스버그에 법률상담소를 열었다.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격리정책을 뜻하는 아프리칸스어)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본격적으로 흑인인권운동에 참가하였다.
1950년대 들어 남아프리카에서는 흑인에 대한 차별적 정책이 점차 엄격해졌는데
공공장소와 대중교통, 교육시설, 거주지 등 일상의 대부분에서 흑인과 백인을 강제로 분리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에 만델라는 아프리카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불복종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남아프리카에서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을 축출하는 포고령이 내려졌는데
1952년 만델라는 아프리카 국민회의 소속이었지만 공산주의와 교류가 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재판을 받고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무장투쟁과 27년간의 복역
1955년 흑인 거주지인 요하네스버그 소웨토(Soweto)구역에서 남아프리카 인종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유헌장》이 선포되었고 만델라는 《자유헌장》 발표에 관련되어 두번째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의 죄목은 국가반역죄였는데 1961년 최종 무죄로 판결받고 석방되었다.
1961년 6월 비밀회의에서 '국민의 창(Umkhonto we Sizwe)'이라는 비밀군대를 조직하였다.
만델라는 정부군에 맞써 싸우기 위해 게릴라전술을 습득하였고 에티오피아로 건너가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962년 아프리카를 전역을 여행하며 무장투쟁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였고
아프리카의 여러나라에서 '국민의 창'에 동참해 줄 것을 연설했다.
1962년 만델라는 요하네스버그로 돌아와 국민의 창 회동을 가졌다가
은신처로 돌아가는 길에 체포되었으며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1964년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에스퀴티니섬 로벤 아일랜드 감옥에서 27년을 복역했다.
1979년 옥중에서 자와할랄네루상(賞),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3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rar) 국제상을 받았으며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노벨평화상 수상과 남아프리카 대통령 선출
1990년 2월 2일 남아프리카 대통령 프레데리크 데 클레르크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범아프리카회의(PAC) 등 흑인 정치 및 인권단체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그동안 내려진 금지조치를 철회하였다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해방을 위해 투쟁한 지도자 약 375명을 석방하였다
27년 간을 감옥에서 복역한 만델라는 1990년 2월 11일 석방되었으며
열렬한 군중의 함성속에 그는 주먹을 쥐고 팔을 들어올렸다.
출소 후 프랑스, 영국, 미국, 쿠바 등을 여행하며 세계 지도자를 만났다.
특히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만델라를 지지했던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1991년 7월 아프리카 국민회의(ANC) 의장으로 선출되었지만
남아프리카의 현실은 여전히 백인정부와 반목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백인정책에 반대하는 흑인들의 시위는 이어졌고 경찰의 무력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는 종식되어야 마땅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파국을 막기위해 클레르크의 백인정부와 줄루족 등과 협상을 벌여 민주적인 선거를 관철시켰다. 이러한 공로로 1993년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1994년 4월 2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참여 자유총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다인종(36개의 분파가 존재) 의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마침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는 종결되었고
350여 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켰다.
저서로 자유를 위한 투쟁 의지를 밝힌 《투쟁은 나의 인생 The Struggle is My Life》
(1961)과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Long Walk to Freedom》(1995)이 있다.
1995년 7월과 2001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의 우의와 경제협력 방안을 협의하였다.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아프리칸스어: Frederik Willem de Klerk, 1936년 3월 18일~2021년 11월 11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인으로, 1989년부터 1994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부통령을 지냈다. 백인 소수자 통치 시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마지막 국가 원수로서 데 클레르크와 데 클레르크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 제도를 없애고 보통선거를 도입했다.
노벨 평화상을 포함하여 많은 상을 받았고,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보통선거를 도입한 공로로 널리 찬사를 받았다.
넬슨만델라와 함께 존중받아 마땅한 백인 정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