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45
8월7일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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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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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5zfUxQR3Gi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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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주변이 어두워질수록 우리는 위로부터의 빛에 우리 마음을 열어야만 합니다!>
혼돈과 격동의 세월이었던 지난 세기 초반, 파란만장하면서도 숭고하고 위대한 삶을 살다 가신 신비스런 성녀(聖女)가 한분 계시는데, 독일 태생의 유대인으로서 가르멜 수녀회 수도자였던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1891~1942)입니다. 우리에게는 에디트 슈타인이란 이름이 더 친근합니다.
그녀는 제게 있어 마치 밭에 숨겨진 보물 같습니다. 늦게나마 그녀의 생애와 영성을 접하게 된 것에 대해 마치 횡재한 기분입니다. 이름 뒤에 따라붙는 다양한 수식어들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특별하고 대단한 인물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철학자, 여성운동가, 가르멜회 수녀, 아우슈비츠 사랑의 순교자, 최초의 유대인 출신 성녀, 유럽대륙의 수호성녀. 그녀의 생애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기에 흥미진진하면서도 감동적인 한편의 영화 같습니다. 그녀가 연출한 장엄한 삶의 연극은 총4막으로 구성됩니다.
제1막은 에디트 슈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의 30여년에 걸친 세월입니다. 그녀의 젊은 시절은 지칠 줄 모르는 진리에 대한 추구가 큰 결실을 맺던 날들이었습니다.
특히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당당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철학에 깊이 몰입했으며, 인간됨의 본질을 파악하고 정립하는데 매진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열정과 헌신의 결과 그녀는 당대 뛰어난 여성 철학자이자 지식인으로서 우뚝 서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무신론에 빠지고 맙니다.
제2막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됩니다. 가까운 친구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자서전을 접하고 나서부터입니다. 성녀의 넘치는 매력과 영성에 흠뻑 빠진 에디트 슈타인은 ‘이것이야 말로 진리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오랜 세월 찾아왔던 참 진리가 가톨릭교회 안에 있음을 발견한 그녀는 곧바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 동안 그녀는 가톨릭 신자이자 교사로서 참 진리이신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제3막은 또 다른 10여 년간에 걸친 가르멜 수녀회 수도자로서의 삶입니다. 탁월한 지적능력과 열정을 눈여겨본 주변 사람들은 에디트 슈타인이 학자로서 자신의 영역을 더욱 확장시켜나가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랜 세월 쌓아올린 빛나는 업적을 홀연히 내려두고 쾰른의 한 가르멜회에 입회하였습니다.
늦깎이 지원자로서 그녀의 초창기 수도생활은 크나큰 자기낮춤과 겸손의 덕을 요구했습니다. 스무 살이나 차이 나는 동기 수녀들과의 괴리감을 극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 했습니다. 동시에 오랜 세월 축척해온 학문적 성취도 모두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에디트 슈타인 인생의 절정인 제4막은 나치에 의해 체포된 이후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 독가스 실에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일주일간의 삶입니다. 그녀는 유대인으로서의 신분을 감추고 은신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친언니와 함께 나치 비밀경찰에 체포된 그녀는 죽음의 수용소로 옮겨져 소리 소문 없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동료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나치라는 거대한 악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으며, 철학자이자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양심과 가치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모델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열매 맺는 것임을 저항과 죽음을 통해 선포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든 고통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주변이 어두워질수록 우리는 위로부터의 빛에 우리 마음을 열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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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dePkGzGxa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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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총량의 법칙: 세상에서 기죽지 않으려면>
거룩한 변모 후에 예수님께서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의 믿음만으로는 쫓아내지 못하는 마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이 세상을 야단치시며 마귀에게 호통을 치시자 마귀가 나가고 아이가 나았습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은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본에는 나와 있지만, 이번 성경에서 빠진 구절은 “그런 것은 기도와 단식이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라고 마무리 지으십니다. 믿음을 키우는 것은 ‘기도와 단식’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것은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야단치신다는 것입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마귀에게 호통을 치시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에 기가 죽는다면 믿음이 약한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는 마치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짓누르듯 ‘두려움’으로 우리를 종살이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들의 위협에 꼼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지렁이처럼 밟아버리십니다. 제가 보좌 신부였을 때 본인 스스로 마귀 들렸다고 하며 찾아온 자매가 있었습니다. 비를 홀딱 맞고 들어온 그 자매는 길을 지나고 있었는데 자신 안의 마귀가 이 성당에 들어가서 보좌 신부와 이야기 해 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성당에 혼자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잠실에 사신다고 하셨나요?” 이렇게 제가 물으니 눈빛이 변하고 갈라지는 남자 목소리로 “내가 언제 잠실에 산다고 했어요. 목동에 산다고 했지!”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순간 번개가 치는 것처럼 무서웠습니다.
신학생 때 - 저는 마귀인 것으로 확신하는데 - 제가 혼자 기도하니 그놈이 귀에 대고 거친 숨소리를 냈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이놈이 나를 두렵게 만들어서 기도하지 못하게 하려는 구나!’라는 생각으로 오히려 기도를 더 하고 그놈을 무시했더니 그날만 그러고 다시는 그런 소리를 내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기억을 살려서 저도 그 여자에게 “당신은 한 번 들으면 다 기억합니까?”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그쪽 기운이 빠지며 “그건 아니지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후부터는 온순해졌습니다. 마귀들이 우리를 짓누르려 하지만 정작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십니다. 내가 마귀나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께서 사신다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어디서 나올까요? 나의 모든 두려움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에서 나옵니다. 두려움도 총량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그 두려움을 하느님을 두려워하는데 다 써버리면 마귀나 세상을 두려워할 어떤 두려움도 남지 않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와 친구와 둘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른 곳 조폭이 이쪽 병원에 입원해 있는 어떤 형님을 면회하기 위해 와서는 우리 옆에 앉아 술을 마셨습니다. 저는 조폭들이 그렇게 술을 마시는지 몰랐습니다. 보스는 아무 데나 술을 따르고 그러면 아래 조직원은 그것을 받아서 머리를 포장마차 밖으로 내밀고 마시고는 술잔을 놓았습니다.
그 아래 조직원은 키도 작고 몸도 왜소하여 어디 그런 일을 할 것처럼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모습을 보며 저는 저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었는데 그 조직원이 기분이 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밖으로 나와 집으로 갈 때 우리를 불러세웠습니다. 포장마차 안에서는 설설 기던 그 사람이 부르니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도 이 지역의 조폭인 줄 알며 담배를 권했습니다. 저는 담배를 태우지 못했지만, 담배를 태우며 기분이 나빴다면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그 조직원은 자신의 모든 두려움을 조직 보스에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힘을 믿고 밖으로 나오면 어느 누구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모든 두려움을 봉헌한 이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두렵지 않으니 하느님의 힘을 입을 수 없고 그래서 마귀도, 세상도 두렵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의 모든 두려움을 봉헌하여 이 세상에서는 당당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 자신의 모든 두려움을 봉헌하는 것이 ‘기도와 단식’을 통해 이뤄집니다.
전에 저희 본당에 계셨던 신부님이 미국에서 사목하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귀가 들려 날뛰고 있다고 신자들이 신부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때 약간은 먹고 놀고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신자들이 불러서 가기는 하였는데 그 마귀가 “어이, 신부. 너나 잘 살아. 네가 뭐 하고 사는지 내가 다 말해볼까?”라고 하며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기분이 상하고 기가 죽었지만, 그것에게 질 수 없다는 생각에 그 사람을 가운데 두고 신자들을 빙 둘러앉게 한 다음 묵주기도를 바치게 했습니다. 처음에 비웃던 그 마귀가 1단 할 때는 땀을 흘리고, 2단 할 때는 그만하라고 소리치며, 3단 할 때는 괴로운 소리를 내고, 4단 할 때는 마지막 발악을 하더니, 5단 할 때 소리를 지르고 나갔다고 합니다.
기도와 단식, 이것이 믿음이고 우리가 주님께 모든 두려움을 바친다는 표지입니다. 이렇게 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시고 그러면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내가 기도할 시간을 빼앗기거나 육체의 유혹에 넘어가지나 않을까 하는 것에 둡시다. 나의 두려움을 주는 쪽이 내가 속한 쪽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이제 그분에게 속하게 됨을 믿게 되고 그러면 그분을 이길 수 없는 세상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게 됩니다.
저희 형이 저에게 어떻게 사람들 많은 데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비법을 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단상에 올라가기 전에 이렇게 세 번 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내 두려움을 다 소진하면 사람들 앞에서 느낄 두려움이 남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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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7,14-20 : 믿음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
간질병이란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꽤 큰 시차를 두고 사람을 공격하는 병이다. 증세가 나타나지 않으면 정상인과 똑같다. 증세가 나타나면 정신을 잃고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다가 멀쩡하게 일어나는 병이다.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겉으로는 건강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간질병이 공격을 하면 그들은 사기와 이 세상의 갖가지 욕망에 사로잡힌 것처럼 되고 만다.
예수께서 산에 계시는 동안에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그 아들을 고쳐달라고 제자들에게 갔으나, 마귀를 쫓아내는 권능을 받은 제자들이(마태 10,1) 그 아들을 치유하지 못했다. 그 아버지는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 그 앞에 꿇어 애원하고 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15-16절)
이를 보신 예수님은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17절) 하시고 호통을 치셔서 마귀를 나가게 하시고 그 아들을 낳게 해주셨다.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쳐주지 못했다. 많은 신자들이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에 대하여 실망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들이기에 예수님께 확실한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19절) 제자들은 마귀를 몰아내는 권능부터 죽은 사람을 살리는 권능까지 받았는데(마태 10,8 참조) 자신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것은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20절)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러한 것은 기도와 단식이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다른 사람 안에 든 마귀를 쫓아내려 기도하는데, 자신의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는가! 이 기도와 함께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완전한 믿음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산은 간질병 환자의 경우 귀먹고 말 못하는 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로 말미암아 인간들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지고 친밀해진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기도하고 명상하는 시간에는 하느님과 가깝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의 문제, 아픔, 고통에 응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과의 일치는 바로 나의 이웃들과의 일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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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애원합니다. 그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가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라며 제자들의 불완전한 믿음을 상기시키시고, 나아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못 할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란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온전히 의존하는가?’ 아니면 ‘내 힘으로 하려 하는가?’의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도 하느님께서 내 곁에 계실까? 여기에서 신학교에 다닐 때는 기도하고 시험을 보면 이상하게도 아는 문제가 나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게 이탈리아에서도 통할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첫 학기 첫 시험에 대비하여 45분 공부하고 15분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하루에 열 몇 시간씩 공부하였지만, 시험이 다가오자 불안감은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책을 덮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 제가 이 나이에 여기 로마까지 와서, 지은 지 400년도 넘는 건물 안에 갇혀 이게 뭐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친구 신부들은 지금 본당 신부로 재미있게 살고 있는데, 저는 뭔가요. 이 나이에 시험 공부를 하려니 정말 죽겠습니다!”
기도하고 나니 점차 편안해지며 마음속에서 이런 말이 올라왔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저를 이곳으로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유학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책임지십시오. 당신은 전능하신 분이시니 당신과 함께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공부할 터이니 함께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난 뒤 시험 준비를 하였더니 꼭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지금 하느님의 힘에 온전히 의탁합니까? 아니면 내 힘으로만 하고자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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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각 나라의 수도에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있습니다. 한국의 서울에는 남산타워, 경복궁이 떠오릅니다. 프랑스의 파리에는 에펠탑과 개선문이 생각납니다. 중국의 북경에는 자금성과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제가 있는 뉴욕에는 자유의 여신상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있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서울 신학교에도 몇 가지 상징물이 있습니다. 성당 앞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동상이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뜨거운 열정과 신앙을 배우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도서관 앞에는 ‘모든 이의 모든 것(Omnibus Omnia)'을 표현한 조각이 있습니다. 신학생이 공부하는 것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낙산의 오솔길에는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이 나무판으로 세워져있습니다. 사제는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뜻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기도하면서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을 읽곤 했습니다. 평신도들이 바라는 사제는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커다란 업적을 남기는 사제가 아니었습니다.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의 모습은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기도하는 사제/ 힘없고 약한 자를 돌보며, 그들의 고통을 나누며, 사회정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사제/ 검소하며, 물질에 신경을 안 쓰며, 공금에 명확한 사제/ 청소년과 친하게 대화를 나누며 교리교육에 힘쓰는 사제/ 겸손하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제/ 웃어른에게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말이나 행동에 예의 차릴 줄 아는 사제/ 본당 내 각종 단체를 만들고, 사리에 맞지 않는 독선을 피우지 않으며, 평신도와 함께 본당을 이끌어 나가는 사제/ 교구장 및 장상에게 순명하며, 동료 사제들과 원만한 사제/ 신도들에게 알맞은 강론을 성실히 하는 사제/ 고백성사나 성사집행을 경건하고 예절답게 하는 사제/ 후배 사제 양성에 마음 쓰며 생활하는 사제/ 죽기까지 사제 성직에 충실한 사제”였습니다. 저 자신 30년을 사제로 살면서 많이 부족함에 늘 부끄럽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많은 표징과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장면을 마음에 떠올리시나요? 저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이 장면을 아름답게 표현한 지커 퀘더 신부님의 그림을 묵상하면 좋습니다. 이 그림의 어디에서도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발 씻은 물에 비친 모습에서 그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는 봉사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겸허한 봉사를 통해서 그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육화(강생)의 신비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 행위와 손에서 가장 멀리 있는 부분인 발을 씻어주는 행위야말로 상대방의 가장 부족한 부분을 감싸는 행위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행위는 굴복의 자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습을 바로 더럽다고 여겨지는 발 씻은 물에서 그분의 모습을 찾아보게 되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바로 우리가 그분의 모습을 진정으로 찾을 수 있는 곳은 발 씻은 물에서였던 것처럼 구차하고 하찮게 여겨지는 봉사의 삶에서 오히려 그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 못하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이 병자들을 고쳐주는 모습을 봅니다. 같은 제자이지만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더욱 굳은 믿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겸손을 만날 때 사랑이 피어납니다. 믿음이 희생을 만날 때 희망이 열매 맺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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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호준 레오 신부님]
<믿기만 하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확신에 찬신 모습, 모든 것을 보여 주시는 모습, 반론을 제기할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권위를 보이신다. 들을 귀가 없는 자들을 위해 비유의 말씀도 쓰지 않는다.
때가 무르익고 있었다. 더 이상 차분한 설명이 아니라 질타의 말씀을 섞으신다. 마음이 조급하시거나 몇 번 남지 않은 교육의 기회를 십순 살리시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무엇을 알려 주시려고 하셨을까?
세 복음에 모두 다루고 있다. 그런데 마태오와 루카는 비슷하나 마르코는 조금 차이를 보인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들 참아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로 데려오너라!”라는 장면은 일치한다.
그러나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구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라는 핵심 질문에 대한 대답이 차이가 있다. 가장 핵심이 되는 복음의 말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마태오는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옳겨가라”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였으나 마르코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라고 전혀 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많은 경우 마태오 복음은 마르코 복음을 설명하고 수정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기도가 필요하다는 표현은 ‘기도를 믿기만 하면’ 으로 수정 설명하려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기도의 힘, 기도는 믿기만 하면 되는 것. 과연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믿음이란 기도란 믿으며 해야 한다. 라는 말씀으로 해석 할 수 있는 것인가? 저는 기도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고 믿고 있다.
그래서 바꾸어 써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이루어 질것을 믿는 마음의 기도, 그 기도는 무엇이든 가능하게 한 다는 사실을 믿는다.
저는 짧은 사목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많은 면담을 하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 중에 이런 기도의 예를 여러분의 사람 속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한 가족을 회개시키는 원동력이였다고 타인이 고백하고 자신도 그렇게 느끼는 경우의 예를 몇 차례 만나보았다.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큰 힘. 그것을 위해 기도 해 본 사람이라면 그 어려움을 알 것이다. 제가 발견한 그들의 공통점은 믿었다는 것이였다.
내가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이기에 들어 주신 것처럼 대하고 살았다. 굳이 만날 때마다 신앙의 필요성을 내 짧은 언어로 설파하려 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올 것이 분명하기에 온 거나 다름없이 대하고 , 걱정 없이 만났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올 때 까지 기도할 것이니 내 기도는 들어진다.’ 라는 것은 뭐 대단한 기적적인 힘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기도해 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 때가 올 때 까지 기다리면서 한 가지 핵심적인 마음이 있었다는 것 또한 잊지 말자. 그때와 시간을 정하시는 분은 하느님이 시기에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걱정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런 마음으로 매일 매 순간 기도에 첫 자리에 그들의 회두를 위한 기도로(간단히 했다고 하지만 )모든 기도의 첫 자리에 두고 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수 십 년을 한결 같이 믿고 행했던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 그 기도에는 이런 요소가 있었다. 그들의 기도는 오늘 예수님께서 원하셨듯이 산 보다 더 큰 사람의 마음 그것도 대여섯 명 그리고 그 집에서 태어날 수십 명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우리의 기도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여러분은 어떻게 믿으며 기도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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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신명기의 이 말씀은 구약의 핵심 계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계명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집에서나 길을 갈 때나 마음에 되새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려고 이 말씀을 손이나 이마에 표시를 하고 문설주나 대문에 써 붙였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언제나 우리 삶에 가득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부여받은 권능이 우리의 활동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이웃의 곤경과 어려움을 외면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웃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맞이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의 어려움에 함께할 힘을 잃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믿음이 약하여 간질병을 앓는 아이를 치유하지 못했다고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믿음 때문에 불행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우리에게 부족합니다. 갖은 핑계와 합리화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전전긍긍하는 순간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자주 있었습니까?
작지만 진실한 믿음은 죽음의 산을 뚫고 영원한 가치를 이웃에게 전해 줍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 가능해집니다.
믿음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현존시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커다란 힘과 능력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솟아납니다.
사랑의 믿음은 곤경에 빠진 이들을 도와주고 구원의 열매를 이루도록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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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흥주 베드로 신부님]
봉성체나 병자성사를 청하는 환자들 가운데는 암으로 투병중인 분들이 의외로 많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다가 아이들도 어린데 갑자기 암에 걸린 경우라든지, 지금까지 고생하며 열심히 일해 이제는 살 만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암에 걸린 경우라든지,
아무튼 사제로서 그들을 대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함께 기도하지만 어떻게 위로와 용기를 주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당사자나 가족들의 애절한 바람과 기도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사제의 역할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함께 열심히 기도해 주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듯하다.
물론 그들 가운데 치유가 되어 건강한 모습을 되찾고 감사의 인사를 전할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사제직의 보람을 절실히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는 경우에는 사제로서 나의 한계를 느끼며 마음이 아프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예수께 “어찌하여 제 기도로는 그들의 병을 낫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고 말했듯이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일 때가 있다.
물론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대답이 나에게도 예외는 아닐 듯싶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씀대로 사제로서 그들이 반드시 치유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절실하게 기도했나 반성해 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를 청하는 그 사람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며, 또 그래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청을 들어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 능력과 기적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다. 곧 주님께서 우리의 청을 거절하시거나 치유 능력을 멈추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가지고 확신에 찬 희망으로 절실히 기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제로서 나 역시 이제부터라도 진정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확신에 찬 희망과 위로를 주는 자세를 갖춰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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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신 후, 산을 내려오시어 군중에게 가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말하였습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마태 17,15-16)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를 개탄하시면서,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주어야 한다는 말이야?”(마태 17,17)라고 하십니다. “언제까지”라는 표현은 당신 수난의 시간에 대한 급박감을 드러내줍니다.
특별히 여기서는 ‘비뚤어졌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이 대조를 이루는데, ‘비뚤어졌다’는 것은 <신명기> 32장 5절에서 모세가 말해주듯이, 주님을 향하지 않아 비뚤어졌기에 우상숭배에 빠짐을 말합니다. 곧 주님께 속하기보다 우상을 소유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함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인정하기에 전능하신 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임을 뜻합니다. 곧 ‘비뚤어졌다’는 것은 주님을 믿으려 하지 않음이요, 그 결과 병을 치유하지 못하는 무능력임을 말해주는 반면,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받아들임이요, 그 결과 병을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못할 일은 하나도 없는”(마태 17,20) 전능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태 17,19) 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그렇습니다.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믿음이 작아서가 아니라, 약해서입니다. 곧 믿음의 지향이 흐트러진 것입니다. 지향이 올바르면, 곧 자기 자신이가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롯이 주님을 향하여 있으면,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굳세어지고 강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마태 17,20)
사실, 우리는 자신을 믿어버리는 바람에 주님을 향한 믿음이 약해져 버립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무능한 자신을 믿으면 무능해질 것이고, 전능하신 그분을 믿으면 전능해질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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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주님!
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당신 뜻에 합당하게 하소서.
당신을 통해 제 뜻을 이루기보다, 당신 뜻을 알아듣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하고, 먼저 기도하게 하소서!
힘을 주시는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소서.
모든 것 안에서, 당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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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17,20)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간질병은 뇌 기능의 일시적 마비 증상이 만성적,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뇌질환인데, 오늘 복음을 보면 이 간질병이 악령, 곧 마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호통을 치시자 아이에게서 마귀가 나갔다. 바로 그 시간에 아이가 나았다."(마태17,18)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태17,19)
우리 인간은 '영의 움직임'에 지배를 받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의 창고 안에 어떤 영이 자리 잡고 있느냐에 따라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나쁜 영, 악령, 마귀에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정상적이지를 못합니다.
정상인 아닌 비정상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코로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수도권은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가 연장되었고, 4단계로 격상되어 가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놓고도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네 탓을 말하고, 이것을 악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지혜를 모아 이 난국을 헤쳐 나갈까를 고민합니다.
"쉐마 이스라엘!"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6,4)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작은 믿음을 원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작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온 마음으로 우리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작은 믿음 안에서 나오는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곧 양심과 보편적 가치가 존중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믿음과 거룩한 영 안에서 올바르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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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는 사람>
마태오 17,14ㄴ-20 (어떤 아이에게서 마귀를 내쫓으시다)
그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자주 물속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호통을 치시자 아이에게서 마귀가 나갔다. 바로 그 시간에 아이가 나았다. 그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믿는 사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을
믿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을
믿는 만큼
하느님을
믿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만큼
하느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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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부터 계산해 보면, 가톨릭의 역사는 자그마치 2,000년이 넘습니다. 그렇다면 가톨릭이 가장 순수했을 때는 언제였을까요? 즉, 예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여 전체가 사랑의 실천에 온 힘을 기울였을 때는 언제였을까요?
“그런 시간이 없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순수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처음 박해를 받았던 300년 동안의 시간은 정말로 순수하게 주님의 뜻을 따른 시기였다고 합니다. 다른 것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았고, 가장 소중한 주님의 뜻을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 똘똘 뭉쳤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예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박해 시대의 우리 선조들은 순수하게 주님의 말씀에만 집중했습니다.
모든 것이 마련되는 순간만이 주님을 따르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갖은 방해로 가득해서 어렵고 힘든 것들이 너무 많았던 때가 주님과 순수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렵고 힘든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자기에게 벗어나기만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만 지나면 더 열심히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고통과 시련의 시간에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황에서도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병자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와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합니다. 불 속 그리고 물속으로 들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또한 어떤 사람도 고치지 못하기에 절망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충분히 포기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기보다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가장 어렵고 힘든 상황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커다란 은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산을 옮길 정도로 힘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삶은 모두 다릅니다. 그 모든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분명히 함께하십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만이 아닌, 기쁘고 행복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함께하십니다.
어떠한 순간에서도 함께 하는 데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 주님과의 순수한 만남을 가질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의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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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멍청이 짓도 괜찮습니다.>
얼마 전, ‘바보의 세계’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바보, 멍청이의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음이 역사의 원동력이었음을 말합니다.
바보짓이 인류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은 지금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바보, 멍청이 짓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바보, 멍청이가 늘 역사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틀려도 괜찮습니다.
틀릴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보, 멍청이 짓이라고 손가락질받는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중심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감을 갖고 이 세상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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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눈높이 사랑>
예수님께서는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하시며 불평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사람들의 불신의 태도에서 왔습니다. 당신의 구원활동에 대해 배은망덕한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히브5,7) 예수님께서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심은 우리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의 눈높이로 품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께 와서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하고 말씀하시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능력은 믿음 안에서 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살아나고 기적을 가능케 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배를 떠나 물위를 걸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 능력을 주십니다. 아니 나를 통해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어떠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믿고 바라보면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면 고통만 키우게 됩니다. 바오로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피 1,29)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마태28,20)을 믿어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믿음에 믿음을 더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분명히 그 믿음이 헛되지 않음을 믿는 만큼 체험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음식을 나누시고 앞 못 보는 이의 눈을 침을 발라 뜨게 하셨으며 때로는 병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고 믿음으로 구하는 곳에는 어디에든 마다 않고 계셨습니다. 성전 정화를 위해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마태21,12)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지셨으면서도 그것을 뽐내지 않으시고 필요한 이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며 기쁨이 되어 주셨으며 모든 사람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주님의 품을 기억하며 우리도 이웃을 향한 눈높이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단지 내가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 마음이 비뚤어져 세상에 더 기울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의 동행을 믿으며 나에게는 엄격하되 이웃에게는 한없이 넉넉하길 소망해 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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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사랑의 힘은 믿음의 힘이다-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오늘 새벽 독서기도시 시편 137장 27절까지 매절 이어진 후렴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영원하신 자비가 광야여정중인 우리에게는 샘솟는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절기는 정직, 정확합니다. 오늘은 입추立秋입니다. 참 오랜만에 가을이 온 듯 서늘한 새벽에 요즘 들어 가장 맑은 밤하늘에 가장 많은 별들이었습니다. 자연 안에서 정주생활을 하다보면 하루가, 일년이 지나는 모습이 한눈에 보입니다. 새삼 삶은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입니다. 월요일 이었는가 하니 벌써 오늘 토요일입니다. 벌써 2주가 지나 오늘은 이발하는 날입니다. 휴가 떠났던 형제들 긴 듯 하지만 곧 돌아옵니다. 하루하루가 선물이요 참 절박하게 느껴집니다. 2006년도 15년전 제본했던 시집을 펼쳐보는 순간 ‘나 지금 어디에?’란 긴 시를 발견했습니다.
-“창밖 풍경은 살아 있는 그림, 살아 있는 성경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날마다 새벽, 아침, 점심, 저녁, 밤이 지난다
때로는 구름도 흘러가고 새들도 날아간다
창밖을 바라보며 배우는 인생
하루를 평생처럼, 평생을 하루처럼 살아야 함을
또 매사 창밖 풍경 바라보듯 거리를 두고 초연히 바라봐야 함도 배운다
아, 계절을 볼 수 없어 철없는 사람들 부지기수이듯
시간을 볼 수 없어 때를 분별 못하는 사람들 부지기수인 오늘의 현실
자연을 떠난 업보다
저녁기도 시간 짙어가는 어둠
‘어, 내 인생 몇 시이지?’
불현 듯 떠오른 생각,
점점 어둠도 고요도 깊어지겠지
해맑은 아이라면 아침 이슬 머금은 아침 6시
십대 사춘기 나이라면 낮 10시, 한창 청년의 나이라면 낮 12시
삼십대의 무르익은 젊음이라면 오후 1시
이러니 하루가 평생의 압축이 아닌가
하루를 평생처럼, 평생을 하루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맑고 밝기만 하고 깊이가 없는 오전의 나이라면
점심 지나면서는 고요히 스며드는 어둠과 더불어
깊어가는 오후의 나이들이어야 맞는 거다
그리고 밤 나이에는 풍요로운 고독과 침묵의 품 안에
별빛, 달빛 반짝이는 그 분 밤의 품 안에 머물다
잠같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거다
이어 새벽 동터오는 아침과 더불어 주님과 함께
찬란한 부활을 맞이하는 거다
궁극엔 햇빛 찬란한 부활의 아침을 향한 믿음의 여정이기에
또 나이 시간에 구애됨 없이
아침에는 아침 나이의 순수로, 점심에는 점심 나이의 열정으로
저녁 나이에는 성숙한 사랑으로 살 수 있기에
늘 희망 가득할 수 있는 우리들이다
‘내 나이 지금 어디에?’, 창밖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이런 삶의 여정에서 벗어날자 아무도 없습니다. 엊그제 서울 대교구 소속의 황인국 마태오 몬시뇰께서 선종하셨다는 소식이 충격이었습니다. 예전 노원본당에 계실 때 수도원에서 배도 사가셨고, 수도원 본관 ‘자비의 집’에서 일주간 머물며 피정도 하셨던 분입니다. 1936년 생이니 저보다 13년 연상이시고 저절로 남은 햇수를 헤아리며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을 상기하게 됩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성규4,47)
믿는 이들 누구나 믿음의 여정을 살아갑니다. 어제는 주님의 변모 축일, 저녁 노을이 장관이라 여러분들과 나눴습니다. 너무 강렬히 타오르는 산불같기도 하고, 검붉은 핏빛 같기도 하고, 화산의 용암같기도 하여 아름답기 보다는 섬찟한 느낌도 들었고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어제 신문에서 본 산불로 화염에 싸인 터키의 산불이 연상되었습니다. 기후위기로 인해 지구가 불타고 있다 하지 않습니까? 새삼 믿음의 여정중 내적 삶의 깊이를 날로 더해가야 함을 배웁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이고 믿음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참 중요한 보물 하나를 택하라면 믿음을 택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날로 믿음을 더해 갈 수 있을까요? 오늘부터 시작된 신명기가 답을 줍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전통 신앙 고백의 첫 문장입니다. 우리가 매주 토요일 끝기도 때마다 듣는 독서입니다. 흔히 히브리어 첫 글자를 따서 ‘셔마(들어라)’라고 부르는 신앙고백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인 믿는 이들 모두가 마음에 날마다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베네딕도 규칙 역시 “아들아, 들어라!”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고 일러 주어라. 또한 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 그리고 너희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놓아라.”(신명6,4-9)
참 강력한 명령입니다.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믿는 이들의 으뜸 의무가, 행해야할 명령이 이런 하느님 사랑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참 사람이 되어 하느님 자녀로 살기 위한 유일한 처방은 이 한 말씀뿐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사랑으로 마음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수행에 힘쓰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수행은 이런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런 사랑의 수행이 마음의 순수와 열정의 샘이 됩니다. 바로 이런 한결같은 사랑의 수행과 더불어 선사되는 믿음입니다. 참으로 탓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한 사랑, 부족한 믿음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은 신명기의 독서가 줍니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는 아이를 당신께 데려 오자 모두를 싸잡아 하시는 주님의 한 말씀이 그대로 오늘의 세대를 두고 하시는 말씀같습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바로 이에 대한 답을 신명기의 하느님 사랑이 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변질變質, 변절變節, 변심變心, 변덕變德을 막아주고 부단히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모變貌하게 하는 사랑이요 더불어 깊어가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호통치시니 마귀는 나가버리니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사랑의 힘,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참 좋은 가르침입니다.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결국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바닷물이 증발하면 소금만 남듯이 삶의 거품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믿음뿐일 텐데 과연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을런지요. 인간품위의 우선순위도 믿음, 건강, 돈입니다. 모든 것 다 사라지고 나중까지 남는 것은, 하느님께 갖고 갈 것은 믿음 하나뿐인데 그 믿음이 없다면 그 인생 얼마나 허무하겠는지요! 무지에 대한 답도 믿음뿐입니다. 정주의 믿음, 인내의 믿음, 겸손의 믿음, 사랑의 믿음, 희망의 믿음, 그러니 믿음은 우리 영성생활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선물처럼 주어지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여정은 그대로 사랑의 여정이 됩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부족한 사랑과 믿음을 더해 주시어 우리 모두 믿음의 여정에 한결같은 노력을 기울이게 하십니다. 그러니 다음 화답송 시편은 저절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이시옵니다.”(시편 18,2-3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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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억과 믿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신명기의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전통 신앙 고백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유일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이 이스라엘 민족 정신의 근간을 이룹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자기들을 뽑으신 하느님이 유일하신 분이심을 믿는데 그치지 않고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저마다 두려움과 필요로 매달리는 신들이 있었던 고대 부족 사회에서 자기의 신을 "사랑하라"는 명제는 어쩌면 획기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그 누구도 사람과 친밀히 관계를 맺는 인격신을 체험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노예살이에서 광야를 거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모세가 백성에게 들려주는 가르침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모세는 백성이 가나안 땅의 풍요에 취해 자기들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을 잊을까 염려하여 여러 기억의 방법들을 제시하지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문장을 외우고 기억하면서, 마음에 새기고 눈에 보이는 데 써서 붙여 놓고 자자손손 거듭 반복해 들려주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너희가 마음껏 먹게 될 때,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여라."(신명 6,13)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가나안 땅에 살던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바로 그곳에 이스라엘을 심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풍요가 일상이 될 때를 조심해야 하지요. 자신이 뿌리지 않은 열매로 풍족해지면 어떤 이는 감사하고 더욱 삼가지만 어떤 이는 더 탐욕하며 만용을 부리고 신을 잊어버리니까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파스카 대장정을 시작부터 끝까지 이끌고 계신 하느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을 경외하고 섬기고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이 세상에서 이어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서 시작해 온 인류와 관계를 맺고 싶어하시는 인격신이십니다.
복음에서는 한 절박한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17,15)
질병으로 고통받는 아들을 위해 그의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끓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아들을 데려갔지만 효과를 보지 못한 터입니다.
용하다고 소문난 의사나 마술사에게 데려갔다면 자비를 청하지 않을 겁니다. 그저 기술과 지식으로 고쳐달라고 요청을 했겠지요. 그는 예수님이 보통의 의사나 마술사와는 다른 존재임을 직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자비를 이 세상에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감지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마태 17,20)
그 아들은 예수님의 호통으로 마귀가 떨어져 나가, "바로 그 시간에" 낫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패 이유를 "믿음"이라 짚어 주십니다.
이 기적이 일어난 시점은 이미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거룩한 변모와 수난 예고도 이루어진 즈음입니다. 물론 제자들도 따로 선교 여행까지 완수했고요. 이쯤되면 제자들이 당신의 신원에 대해 확고히 믿으며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일을 해내기를 예수님은 바라셨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자들의 체험과 기억이 믿음까지 가닿지 못한 걸까요? 사실 영적인 삶은 체험 따로, 기억 따로, 믿음 따로의 여정이 아닙니다. 체험과 기억과 믿음은 하나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 모두를 관통하는 힘이 바로 "사랑"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나 제자들처럼 우리 역시도 믿음을 얻기 위해 또 다른 체험을 요구하거나 기적을 바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주님께서 우리 삶의 구체적 현실 안에 개입하고 이끄신 체험과 기억들이 우리 안에 차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깨달은 체험, 사랑으로 남은 기억, 사랑으로 견고해진 믿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희망을 던지십니다. 제자들과 우리의 여정이 당장의 부족하고 나약한 믿음으로 맥없이 끝나버리지 않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삶 안에 깃든 주님 사랑의 자취들은 하나하나 떠올리며 사랑의 끈으로 꿰어 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으로 관통된 체험들, 기억들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믿음이 되어 우리를 지탱해 줄 것입니다. 삶이 아무리 불합리하고 고단하고 버거워도 그분께 우리를 던질 수 있는 힘은 믿음이랍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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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WHibRMS4xs&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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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마태 17, 17)
믿음으로
우리의 약함과
우리의 모순을
보게된다.
그래서
믿음은
가장 좋은
주님의
은총이다.
우리를
살리시고
치유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믿음은
삶의 결단을
요구한다.
주님을 위한
삶의 결단이다.
주님을 위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믿음은
부질없는
자아에
묶여있지 않다.
비뚤어진
이기심을
버리고
참을 수 없는
교만을
비우게 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주님께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믿음은
진심을
회복하는
치유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치유는
신뢰와 의탁으로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바꾸어주신다.
주님의 뜻에
동의하는
믿음이다.
주님과의
친밀함이
믿음이다.
거기에
온전함과
평화가 있다.
주님의 뜻을
온전히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다.
믿음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다.
은총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기도로
응답하는 것이다.
믿음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진심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진심을 다해
사랑할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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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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