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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탐', '연소'의 의미를 가진다.
불 속에서 금속이 제련되는 것과 같이 성도의 신앙을 더욱 견고히 연단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과 시험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연단 :
의미 없는 단순한 시련이 아닌, 성숙과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연단을 말한다.
독수리 새끼가 푸른 창공을 비상하기 위해 낭떠러지 바위 둥지에서 고통스러운 연습의 과정을 수없이 겪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상히 여긴다 ;
'손님으로서 영접하다', '낯선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고 놀라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외국인으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비속적인 태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낯선 것이고(벧전 4:4), 그로 인해 세상은 자신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다.
이처럼 박해는 세상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이질감이 불러온 논리적인 결과일 뿐 아니라 세상이 자신들에게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갖는 적의와도 같다.
하나님은 세상의 그러한 태도를 그리스도인들을 연단하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당할 때에 그 박해를 낯선 것으로 여겨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속하여 이 세상에서는 외인일 수밖에 없는 성도들은 그런 고난을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겨야 한다.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오히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이 기뻐 뛰면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본 서신의 수신자들에게 그들 자신을 향한 핍박을 낯선 것으로 여기지 말고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것으로’에 해당하는 ‘카도’는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피장파장이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신앙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핍박받는 것을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에 참예한 것으로 여겨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 역시 신앙을 연단하고 성숙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안다면 고난 중에서도 성도들은 원망 · 불평 · 낙망이 아닌 감사와 기쁨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 그리스도 인들은 고난에 참예한 것을 통해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에도 참예할 수 있게 된다(롬 8:17).
비록 현재의 고난이 힘들고 버거운 것 같지만 이 세상은 짧고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 광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받을 때에 그 후에 주어질 영광의 그 날을 바라보며 오히려 즐거워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불 시험을 허락하시는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을 학대하기 위해서나 혹은 그들이 고난당하는 것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들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시작되는 심판의 날에 말할 수 없는 기쁨 가운데서 즐거워하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의 판단으로는 참으로 이상하게 보이는 불 시험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명백히 드러나는 ‘기뻐하게’에 해당하는 ‘아갈리오메노이’의 의미는?
이 동사 ‘아갈리아오’는 ‘영화롭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갈로’와 ‘날뛰다’라는 의미를 지닌 ‘할로마이’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누군가가 높여줌으로써 몹시 기뻐 날뛰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분사 ‘아갈리오메노이’를 KJV는 ‘엄청난 기쁨으로(with exeeding joy)’라고 번역했고, NASB는 ‘열광 섞인 환희로(with exultation)’라고 번역해 단어 본래의 의미를 최대한 반영하였다.
실로 성도는 고난 가운데서도 장차 주어질 하나님의 그 기쁨에의 축복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는 자이다.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에 직접 들은 말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혹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의미이다.
당시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곧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엄청난 고난을 당했다.
치욕을 당하면
‘만일 너희가 현재 계속하여 욕을 받고 있으면’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혹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현재에 핍박을 당하고 있는 사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자신들의 허물이나 비도덕적 삶 때문이 아니라 신앙과 경건한 삶 및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핍박을 당하고 있다면 그들은 ‘복 있는 자’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치욕을 당하면 왜 복이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받는 성도의 머리 위에 영광의 영이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 영광의 영이 성도 개개인의 머리 위에 머물러 지속적으로 원기를 회복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13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면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성도들을 위로했던 베드로는 본절에서도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받게 될 복을 제시하면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있다.
비록 지금 현재로서는 그 고난이 견디기 힘들고 괴롭겠지만 이로 인해 장차 그들이 받게 될 영광과 복을 생각한다면 기쁨으로 그것을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은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아서 그 가치를 아는 자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라도 보화가 감추어진 밭을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마 13:44)
영광의 영이란?
모세 시대 광야 이스라엘의 회막 위에 하나님의 구름이 내려앉고 그 영광이 그곳에 충만했던 사실을 연상하게 한다.
과거 하나님의 성막 위에 머물러 있던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교회에, 특히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임하여 있다.
그런데 이 영은 영광의 영이며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임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죽음의 순간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났으며, 영안이 열려 영광 중에서 그를 지켜보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행 6:15 ; 7:55).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여러분 가운데서 아무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을 행하는 자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서, 고난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신앙 때문에 받는 고난은 좋은 것이지만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등의 반사회적 · 반도덕적인 일을 저질러 당하는 사법 처리나 비난 따위의 고난은 좋은 것이 못된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은 마땅히 받아야 되겠지만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가 악행으로 인해 고난받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뿐이기 때문이다.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 ;
문자적으로는 ‘타인에 대하여 감독자의 위치에 서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단어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어 ‘자신과 관계되지 않은 것들에 쓸데없이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H. W. Beyer), ‘남의 돈을 남용하거나 착복 또는 횡령하는 사람’(J .B. Bauer)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이는 단순히 남의 일에 말 참견하는 것을 넘어 서서 남의 것을 탐내거나 가로챔으로써 타인에게 정신적 · 물질적 피해를 끼치는 자를 가리킨다.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리스도인’ 즉 ‘크리스티아노스’란?
‘그리스도’로 번역되는 ‘크리스토스’에서 유래하여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본래 이방인들이 성도들에 대해 조롱조로 사용한 용어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러한 호칭이 본 서신서의 수신자들이 살고 있던 소아시아와 로마 사이의 지역에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본서가 쓰여진 바로 직후로 보여지는 A.D. 64년 로마의 대화재 사건 이후부터이다(L. Goppelt).
그러나 그 이전에도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워졌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난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13절).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욕을 받았다(1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14절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한 고난과 16절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의 차이점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으로 인한 고난을 받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는 의미이다.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되면,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마지막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 (17) ;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을 심판하시고, 그 다음 모든 열방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구약의 예언서와 신구약 중간기 유대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리시는 심판은 열방에 대한 심판의 예고편이 되지만, 그 목적은 다르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심판은 '정화'가 목적이지, 징벌이나 보응이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도 이처럼 엄격하게 다루신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그분을 끝까지 거역하는 세상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엄격하시겠는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 ; 하나님의 집은 교회이다(딤전 3:15). 심판은 성소에서부터 시작되며(겔 9:6), 그리스도인의 박해에서부터 시작된다(마 24:8-9). 그러나 이 심판(헬, 크리마)은 '판단'이지 '정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전 11:32).
17절은 16절에서 권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 부끄러워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부터 시작된다면 불신자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두말할 나위 없으며, 그들의 종말이 어떨 것인가는 명약관화하다.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에 신앙 때문에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그로 인해 하나님꼐 영광을 돌려야 한다. 심판으로 선악간에 판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유 접속사 ‘호티’로 시작되는 본절 전체는 앞선 16절에서 이미 권면한 바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 부끄러워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부터 시작된다면 불신자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으며, 그들의 종말이 어떨 것인가는 명약관화하다.
이렇듯 하나님의 심판이 었다는 것을 안다면 신앙 때문에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그로 인 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로 번역된 ‘아포 투 오이쿠 투 데우’에서 전치사 ‘아포’는 출발과 시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집’은 무엇을 지칭하는 표현인가?
먼저 ‘집’을 의미하는 ‘오이쿠’는 때때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라는 수식어가 없이도 하나님의 집이나 성전을 가리키기도 한다. 즉 막 11:17 ; 요 2:16 ; 행 7:49 ; 막 2:26 ; 눅 11:51 ; 행 7:47 등에서 ‘오이코스’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집’이나 ‘성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집’은 교회나 성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바울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령의 전을 성도들의 공동체, 혹은 성도 개개인으로 보았다(고전 3:16,17 ; 6:19,20).
구약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성소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예언했다(겔 9:6).
구약 겔 9:6을 알고 있는 베드로는 ‘성소’를 ‘하나님의 집’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심판이 ‘하나님의 집’ 곧 ‘교회’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집’인 그리스도인들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면 하물며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불신자들이 받는 심판은 어떠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성도들에게 던지고 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말하는 교회 혹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에게 임하는 심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성도는 결코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요 3:18 ; 5:24 등의 구절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요 3:18 등에서 말하는 심판은 그리스도 재림 이후에 있을 최후의 심판에서 멸망에 이르게 하는 형벌을 가리킨다.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이러한 심판이 결코 입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절에서 말하는 심판은 이러한 멸망에 이르는 죄악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 가운데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불 같은 시험’(12절)으로서의 심판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녀된 성도에게도 징계를 내리시는 분이라면 마지막 날 하나님과 원수된 불신자들에게 내리실 심판은 얼마나 심각한 것이 되겠는가를 생각게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성도에게 임하는 심판이라는 표현은 장차 있게 될 최후의 심판에서 성도에게 주어지는 상급의 심판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즉 성도는 그 심판의 날에 자기 죄에 대한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롬 5:8 ; 요일 4: 7) 선행의 많고 적음에 따라 상급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벧전 5:4).
베드로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불신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그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함이다.
성도들은 심판 후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당한 고난 덕분에 상을 받게 되겠지만 그런 성도들을 핍박했던 불신자들은 끔찍한 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성도들은 복음을 저버리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고난의 때에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권면하는 것이다.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의인도 겨우 구원을 받는다면,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 그리스도인들이 불 같은 시련과 고난을 받은 후에 비로소 어렵게 구원을 얻는다면
어디 서리요 ; 그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 너무나 확실하다는 표현 / 불신자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반드시 멸망할 것을 확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신실하신 창조주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 ;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고 그리스도라는 이름 때문에 찾아오는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는 모든 것은 사단의 시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서 된 것이다.
'의탁할지어다'란 '안전한 보관을 위하여 자신을 맡기다'를 의미한다. 신자들은 선하신 그분의 손 안에 있다.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미쁘신 조물주에게 맡기도록 요구하신다.
미쁘신 ; 신실하여 믿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할 때 자신의 노력으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거나 박해자들에게 앙갚음하려 할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가운데서 신실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의탁해야 한다.
고난을 즐거워하는 이유
본문 ; 베드로전서 4:12-19
찬송 ; 341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본문 이해
베드로는 성도가 받는 고난을 연단하기 위한 불 시험으로 규정한다. 징게이거나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헛된 고난이라면 비참할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고난은 연단을 위한 시험이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다. 16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이방인들은 모욕을 주기 위해 그렇게 불렀지만, 오히려 그 이름 덕분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끝으로 심판이 언급되는데, 의인도 견디기 힘든 시험이라면, 악인은 더욱 시험을 견디지 못해 바로 서지 못할 것이다.
설교 방향 - 대지형 설교
'고난을 즐거워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설교한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즐거워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신비로운 일이 가능할까? 첫째 고난은 연단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나아지는 과정이 고난인 셈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면 그리스도가 영광을 얻을 때 함께 영광을 얻게 된다. 셋째, 심판의 때에 확실히 구원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견딘 의인은 구원받지만 그렇지 않은 악인은 하나님 앞에서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로 즐거워하며 고난을 이기기 바란다.
서론과 우산질문
오늘의 말씀은 '고난을 즐거워하는 이유입니다. 어느 누가 고난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도 고난을 즐거워하고 받아들이려 하지만 여의치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첫째, 고난은 연단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을 연단하기 위해 주어지는 불 시험이라고 합니다. 마치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정금을 만드는 것처럼, 쇠를 더욱 단단하게 하는 것처럼 연단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아무런 의미 없이 고통스럽기만 한 일이라면, 고난은 무의미한 일이고 도저히 즐거워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더욱 나아지는 과정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3절에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고난 받는 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며, 주님이 영광 받으실 때 고난 받은 그리스도인도 영광 받으리라는 의미입니다. 무의미한 고난이 아니라 영광이 담보된 고난이기에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셋째, 심판의 때에 확실히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될 것인데, 의인과 죄인의 결국이 차이가 납니다. 18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견딘 의인은 구원받지만, 자기 마음대로 살고 고난을 피하며 살았던 악인은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할 것이라 말합니다. 이처럼 지금 이 땅에서 받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앞으로 있을 심판을 무사히 통과하리라는 보증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있을 심판을 기다리며 고난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결론과 도전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은 헛된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보장된 기쁨입니다. 즐거움으로 고난을 이겨 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 고난의 시험이 와도 능히 이겨내도록 우리 영혼을 준비시키시고 마음을 지켜 주소서.
출처 ; 설교자를 위한 복있는 사람(2023년 7,8월호. Vol. 40). pp. 48-49.
고난 중에서 기뻐할 것 ( 4:12-19 )
이 서신에 매 장에서 고난받는 자들로 생각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위로의 말씀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로써 이 새로운 개종자들이 처해 있던 아주 큰 위험이 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일어나게 된 박해임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여기서 그들에게 고난 가운데서 인내할 것이 필요함을 가르친다.
1. 베드로의 친절한 담화의 태도(12)
사랑하는 자들아. 그들은 그의 '사랑하는 자들' 이었다.
2. 그들의 고난과 관계해서 그들에게 주는 베드로의 조언 (13-19)
〔1〕그들은 그 고난들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놀라지 말아야 했다.
1) 그것들이 비록 매섭고 가혹하다 할지라도 이는 단련코자 함이지 결코 멸하고자 해서 의도되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고난 가운데서 즐거워해야 했는데 이는 그들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합당하게 일컬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들로 고통 당하셨으며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셨다. 만일 우리가 그의 고난에 참예하는 자들이 된다면 우리는 또한 '그의 영광에 참예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베드로는 이 환난 당하는 불우한 그리스도인들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들을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로 부르고 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역경 가운데 있을 때 피차 가장 사랑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불친절과 핍박을 이상하게 여길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는 그것들에 대해서 미리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 모든 것들을 견디셨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극심하고도 고통스러운 고난들을 참아야 할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즐거이 고난 받는 자들은 영광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 하게 될 것이다.
2) 베드로는 덜 가혹한 핍박에 대한 언급으로 나아간다(14절).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혹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욕을 받고 중상을 당하고 비방을 듣게 되는 경우를 뜻한다. 그러한 경우에 그들이 '복 있는자'라고 베드로는 단언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영을 가진 자들로서 그 하나님의 영은 또한 영광의 영이시다. 이 영광의 영께서 너희 위에 임하여 계시다. 고난 가운데서 너희가 인내하고 꿋꿋하게 견딤으로써 그는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그러나 너희에게 주어지는 멸시와 비방에 의해서 성령께서도 친히 비방과 훼방을 받으시게 된다". 선한 사람들의 복됨은 그들의 고난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그 고난으로부터 나오기도 한다. 본문의 '복 있는 자로다'가 그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영이 임해있는 자는 그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결코 비참하게 되어질 수 없다. 선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방을 받을 때 성령은 그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2〕 그들은 악행하는 자들로 인하여 고난 받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했다(15절).
그들의 원수들은 이런 저런 좋지 못한 죄를 그들에게 씌웠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러한 경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기독교로 인해서 '고난을 받되' 그리스도인의 영으로 인내하면 그사람은 그 고난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며 그로 인해서 그를 존귀케 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16절).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나 어리석음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면 아무런 위로함도 없게 된다. 순교자를 만드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그 고난의 동기이다.
〔3〕 그들의 심판이 이제 임박했다.(17,18절).
1)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잘할 때가 되었나니(17절).
이 말씀은 성도들로 하여금 인내를 가지고 앞서 말한 모든 권고들을 수행해 나아가게 해준다. 이러한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자들부터 시작할 것이다. 사악한 세상에 임하게 될 것과 비교해 볼 때 너희의 고통은 가벼운 것이며 짧은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마지막이 어떠할 것인가?"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종일지라도 때때로 마땅히 하나님께 징계받고 지적 받을 많은 잘못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일 지라도 이생에서 아주 좋지 못한 일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나쁜 상태는 참을 수 있는 것이며 곧 종식될 것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자들과 불순종하는 자들을 구분 짓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할 것인가'를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2) 베드로는 사악한 자들의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18절).
선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쓰라린 고난들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에게 임하게 될 매우 엄중한 심판의 슬픈 전조인 것이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의인조차 해야 할 일들이 많다. 구원의 절대적 필요성과 그것의 어려움은 양립한다. 먼저 극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도움을 베풀어주신다.
〔4〕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게 될 때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면서' 주로 그 영혼의 안전에 유의할 수 있어야 한다(19절).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져주실 것이다. 이는 그가 그들의 조물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육신의 안전보다는 영혼의 안전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선한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을 담대히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들의 조물주가 되시며 또한 모든 약속을 신실히 이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그리스도인이 받을 고난
본장은 전장 13절부터 시작되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당하는 자세에 관해 계속 언급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본장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는 것은 신앙의 연단이므로 고난 가운데서도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세를 취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때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모든 어려움을 인내하라고 격려하였습니다.
1. 고난을 통한 연단
1) 고난의 의미
사람들은 인생의 시련이나 고난을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으로 미화시켜 말합니다. 인생이든지 신앙이든지 시련이 없이는 정상에 올라설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고난은 성화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고 이에 동참하는 자들에게 죄 사함을 주신 것은 성도들이 육체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육체의 고난이 죄를 근절케 하거나 용서받는 조건이 될 수는 없으나 이를 제어할 수는 있습니다. 불신자로 살던 과거에는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살았으나 성도의 길을 걷는 현재에는 하나
님의 뜻을 좇아 남은 생애를 경건히 살라고 베드로는 권면하고 있습니다.
a.육체로 죽음을 당하심(벧전3:18)
b.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함(롬6:14)
2)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악한 자 곧 사단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합당치 못한 일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들을 서슴없이 행하게 되는 법입니다. 이방인의 무절제한 생활을 하는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합니다. 세상의 방탕자들은 항시 벗을 구하며 죄인들은 공범을 찾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비방하고 핍박합니다. 성도들은 방탕자들로부터 던져지는 온갖 중상과 비방을 상대하지 말고 인내로써 감수해야 합니다.
a.육체의 일임(갈5:19)
b.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야 함(벧전2:12)
3) 복음과 생명
몸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지만 영은 복음이 제공하는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육체의 죽음에 이른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제공하는 능력입니다(참조, 요일3:14).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는 복음의 위대성은 가히 위력적입니다. 복음이 죽은 자에게까지 생명을 주는 목적은 바로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는 데 있습니다. 복음은 영생을 약속하기에 인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a.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임(롬8:10)
b.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딛3:7)
2. 마지막 때의 교훈
1)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란 구체적으로 세상의 종말을 가리킵니다. 말세를 당한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 지침으로 정신을 차릴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근신의 삶을 사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매사에 자제력을 갖고 진지하고 분별력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모든 것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따라서 기도에도 힘써야 합니다.
a.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임(고전15:24)
b.자지 말고 깨어 있음(살전5:6)
2) 적극적으로 계명을 실천하라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며 선한 청지기와 같이 서로 봉사해야 합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워 줍니다(참조, 잠10:12;약5:20). 그리고 서로 대접한다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의 구체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청지기는 그 은사를 사유화해서는 안 되며 주인의 뜻대로 주인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뜻대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a.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해야 함(창47:29)
b.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 것(고후6:1)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봉사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실천적인 봉사를 할 경우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힘에 의하여 봉사하는 자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이 갖기 쉬운 교만이 틈타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또한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모든 성도들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성도를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a.하나님은 성도의 힘이심(시22:19)
b.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함(고전10:31)
3. 고난과 심판
1) 시험에 대한 성도의 자세
베드로는 성도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아 가게 합니다. 고난받으신 주를 닮아 가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a.환난 중에도 즐거워함(롬5:3)
b.하늘에서 상이 큼(마5:12)
2) 성도가 받는 고난의 뜻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는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들 위에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만일 성도들이 개인적이나 사회적인 범죄의 결과로 고난을 받는다면 그 고난은 죄의 대가에 속하므로 그리스도로 인해 받는 고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고난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분은 상천하지에 영광을 받으실 유일한 분입니다.
a.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벧전3:17)
b.성령의 위로가 있음(행9:31)
3)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함
베드로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심판이 시작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의 유익을 위해 징계하셔서 거룩함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발점이 될 교회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 심판의 날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도록 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이라 해서 쉽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 시험을 통과해서야 겨우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a.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음(잠11:31)
b.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시138:8)
결론
사도 고난 중에도 회피할 것이 고난을 받는 것은 신앙의 연단이므로 고난 중에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저주로 간주하고 회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함으로 인내해야 하겠습니다. 주께서도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복된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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