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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조비
본 조비는 1983년 고등학교 친구 사이였던 존 본 조비와 키보디스트
데이빗 브라이언이 뉴저지주의 세이어빌(Sayreville)에서 만든 밴드.
곧이어 리치 샘보라와 베이시스트 알렉 존 서치(Alec John Such), 드러머 티코 토레스가 가세하여 완벽한 짜임새를 갖췄고 1984년 데뷔
음반 [Bon Jovi], 1985년 2집 [7800 Fahrenheit] 등을 발표하며 음악의 바다로 힘차게 닻을 올렸다. 각각 앨범 차트 43위와 37위를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사운드 측면에서는 불안함이 엿보였다. 키보드에 주안점을 둔 경쾌한 하드 록은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밴드는 변화가 필요했다. 결국 그들은 에어로스미스(Aerosmith), 앨리스 쿠퍼(Alice Cooper),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 그리고 요즘의 리키 마틴(Ricky Martin) 등에게 굵직한 히트곡들을 제공한 명 작곡가 데스몬드 차일드(Desmond child)와 전격 제휴했다. 데스몬드의
입김에 의해 팝적인 감각을 대폭 받아들인 그들은 팝 메탈로 그룹의
음악 방향을 확정했다.
그래서 완성된 결과물이 바로 1986년의 [Slippery When Wet]이였다.
귀를 단숨에 자극하는 훅(Hook)과 신나고 흥겨운 그들의 메탈 사운드는 미국 전역을 강타했다. 앨범 차트 정상에 오른 것은 물론이고,
'Livin' On A Prayer', 'You Give Love A Bad Name', 'Wanted Dead
Or Alive', 'Never Say Goodbye' 등의 인기곡들을 쏘아 올렸다. 음반은 현재까지 미국에서만 천 만장이 훨씬 넘게 팔려나갔다. 본 조비의
가장 빛나는 마스터피스이자 팝 메탈의 위대한 명반으로 남아있다.
그들은 이것을 계기로 데스몬드 차일드와 끈끈한 파트너십을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좋은 노래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번 점화된 본 조비 열기는 식을 줄 몰
랐다. 1988년에 발매된 작품 [New Jersey]는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정상을 밟았고, 'Bad Medicine', 'Born To Be My Baby', 'I'll Be
There For You', 'Lay Your Hands On Me' 등이 히트 퍼레이드를 이어 나갔다.
한편 그들은 1989년에 열린 MTV 뮤직 비디오 시상식에서 강한 하드
록 'Wanted Dead Or Alive'를 어쿠스틱 버전으로 불러 많은 화제를
불러모았는데, 이는 1990년대 들어 MTV에 의해 기획된 언플러그드
공연에 핵심적인 단초를 제공했다.
이후 휴지기에 돌입하여 각자의 솔로 활동에 전념하는 것으로 미국에서의 찬란했던 1980년대를 마감한 본 조비는 1990년대의 개막과 함께 영국에서 더욱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92년 컴백 앨범
[Keep The Faith], 1994년 베스트 앨범 [Crossroad], 1995년 정규 6집 앨범 [These Days](1994년 알렉 존 서치가 견해차로 탈퇴하여 후임 베이스 주자로 휴 맥도널드(Hugh Mcdonald)가 가세했다. 하지만
그는 정규 멤버는 아니다) 모두 영국 차트 넘버원을 차지했다. 미국에서 각각 5위, 8위, 9위에 올라선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당시 너바나가
주도한 얼터너티브 록이 미국을 휩쓸고 있었기에, 조금은 피해가 덜한 영국에서 비상(飛上)할 수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Keep The
Faith', 'Bed Of Roses', 'I'll Sleep When I'm Dead', 'I Believe',
'Always', 'Someday I'll Be Saturday Night', 'This Ain't A Love
Song', 'Something For The Pain', 'Lie To Me', 'These Days' 등의
무수한 히트곡들이 이 기간동안 쏟아져 나왔다.
본 조비는 얼마 후 개인 플레이와 음악적 충전을 위해 또다시 장기간의 칩거에 들어가며 1990년대를 보냈고, 멀티 플래티넘을 따낸 재기 작품 [Crush]와 함께 뉴 밀레니엄을 맞았다.
-메탈리카
스래시 메탈계의 독보적인 존재 메탈리카의 커크 해밋(Kirk
Hammett)이 1962년 11월 18일 태어났다.
강력한 파워로 메탈 키드들을 사로잡은 메탈리카는 1981년 덴마크 출신인 라스 울리히(Lars Ulrich:드럼)가 보컬리스트 제임스 헤트필드(James Hetfield)와 밴드를 결성하기로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 두 사람은 로이드 그랜트(Lloyd Grant)를 기타리스트로 영입해 'Hit The
Lights'의 데모 테이프를 녹음했다. 당시 베이스는 제임스 헤트필드가
맡았고 로이드는 이 곡 녹음 직후 탈퇴해버렸다.
그 후 메가데스에서 활동하는 데이브 머스테인(Dave Mustaine:기타)이 밴드에 가담했고 얼마 후 론 맥거브니(Ron McGovney)가 베이시스트로 참여해 4인조 밴드의 라인업이 구성된다.
이듬해 이들은 공식 첫 공연을 치르게 되고 1983년 뉴 저지에서 메탈계의 대부로 알려진 조니 자줄라(Johnny Zazula)를 매니저로 고용하게 되고 무명 밴드에서 활동중이던 클리프 버튼(Cliff Burton:베이스)을 가담시키게 된다. 하지만 그 대신 클리프의 요구대로 밴드는 샌프란시스코로 옮겨가게 되고 론 맥거브니는 그룹을 탈퇴한다. 곧 데이브 머스테인도 매니저와의 불화로 밴드를 떠나고 그룹 엑소더스(Exodus)에서 활동중이던 커크 해미트가 대신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1집 [Kill 'Em All](1983)에 이어 [Ride The Lightning](1984)를 내놓으며 메탈계에서 주목받는 밴드로 자리하게 된다. 1986년의 3집 [Master Of Puppets]는 빌보드 앨범 차트 21위에 오르며 히트를
기록했고 그 해 이들은 오지 오스본의 오프닝 밴드로 여름까지 투어을 계속한다. 하지만 그해 가을 뛰어난 연주력을 지녔던 베이시스트
클리프 버튼이 스웨덴에서 버스사고로 스물 여섯의 나이로 숨지는 비극이 일어나고 플롯섬 앤
젯섬(Flotsam & Jetsam)에 있던 제이슨 뉴스테드(Jason Newsted)가
밴드에 가담해 이 라인업은 얼마 전 제이슨이 그룹에서 떠날 때까지
15년 가까이 이어지게 된다.
1988년 4집 [...And Justice For All]은 빌보드 앨범 차트 6위에 올랐고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 연속으로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헤비
메탈/하드 록 부문을 수상하는 인기 밴드로 군림한다.
한편 1991년 5집 [Metallica]로 이들은 마침내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오르게 되고 그 해 모스크바 공연까지 가져 인기를 확인시킨다. 이듬해엔 역시 인기 정상이던 건즈 앤 로지스와 합동 공연을 치렀고
1993년 앨범 [Live Shit; Binge & Purge]로 빌보드 차트 26위를 기록한다. 하지만 오랜 공백 끝에 낸 1996년의 6집 [Load]와 이의 완결편인 1997년의 [Reload]는 이들의 골수 팬들로부터는 말랑말랑해진 사운드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어쨌든 [Load]가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여전한 인기를 과시한다.
1999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S&M] 앨범으로 화제를 던진 이들은
그러나 얼마 전 베이시스트 제이슨 뉴스테드가 퇴출되어 충격을 주었다. 탄탄한 팀워크를 보여주었던 이들로서는 전혀 뜻밖의 일...
oimusic 2001년 11월 원용민
-에릭 클랩튼
1999년 6월 24일, 에릭 클랩튼이 약물 재활 클리닉 기금 마련을 위해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 그가 애장하고 있던 기타들 중 100개를 내놓았다. '브라우니(Brownie)라는 애칭이 붙은 그의 '56년형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는 47만 7천 달러에 팔렸다. 이 기타는 'Layla'를 레코딩할
때 사용되었던 것. 기타 팔아 최종적으로 모은 돈은 5백만 달러 정도.
에릭 클랩튼 자신이 한 때 약물 중독으로 거의 폐인이 될 뻔한 적이 있었던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는 더욱 의미가 있는 일.
그의 연주 스타일 덕에 '슬로 핸드(Slow Hand)’란 별명을 지닌 에릭
클랩튼은 제프 벡 및 지미 페이지와 함께 ‘록 음악계의 3대 기타리스트’로 불린다. 그는 또한 '기타의 신’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뛰어난
연주자이자 가수인 동시에 엄청난 대중적 성공을 거두어 음악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추구한 흔치 않은 경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는 일부 비평가들로부터는 상업성에 치우쳤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화려해 보이지는 않지만 오버하지 않고 정확한 테크닉으로 그
안에 자신의 감정을 실어나르는 뛰어난 능력으로 그는 지금까지 모두
13개의 그래미 트로피를 차지했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1992년(야드버즈), 1993년(존 메이올스 블루스 브레이커스), 2000년(솔로) 등
모두 세 차례나 헌액되는 대단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45년 3월 30일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블루스에 기반을 두고 1960년대 중반부터 야드버즈(Yardbirds)를 비롯해 존 메이올스 블루스 브레이커스(John Mayall's Blue Breakers), 크림(Cream),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 델라니 앤 보니(Delaney And Bonnie), 데렉 앤 더
도미노스(Derek And The Dominos) 등 록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전설적인 밴드들을 거치며 기타리스트로서 뛰어난 재능과 역량을 펼
쳐보였다. 그리고 1970년 솔로 데뷔작 [Eric Clapton] 이후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중적인 히트곡을 양산해내며 수많은 장르를 섭렵하는 실험 정신도 보여주었다. 그 기반은 그가 뿌리를 박고 있던 블루스에 두고 있었지만 뛰어난 즉흥 연주와 감성적인 멜로디 라인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연주를 통해 레게와 컨트리, 팝, 또 R&B를
섭렵했고 최근엔 다시 그의 뿌리인 블루스로 회귀하며 끊임없는 창작열을 불태워왔다.
1970년 솔로 데뷔작 이후 같은해 데렉 앤 더 도미노스의 이름으로 발매된 [Layla And Other Assorted Love Songs]에서는 자신의 뿌리인
블루스 향취가 그윽한 연주를 들려주었고(이 앨범엔 에릭 클랩튼이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를 향해 바친 그 유명한 연가 ‘Layla’가 들어있다) 약물 과용 등으로 한 때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가 주위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선 뒤 낸 재기작 [461 Ocean
Boulevard](1974)에서는 밥 말리의 레게 곡을 리메이크한 빌보드 싱글 1위곡 ‘I Shot The Sheriff’ 등을 통해 레게에 관심을 보여주었고 1976년 앨범 [No Reason To Cry]에서는 밥 딜런과 함께 협연하며 포크 록적인 색채를 담아냈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 그의 대표곡으로 여겨지는 ‘Wonderful Tonight’이 담긴 [Slowhand](1977)를 통해선 블루스에 팝적인 감각을 가미해서 성공을 거두었고 1978년 [Backless]에서는 컨트리 음악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1980년대 들어서 또 다시 변모한 사운드를 들려주던 그는 1989년 [Journeyman]을 통해 블루스를 현대적 감각으로
소화해냈고 이후 1992년 [Unplugged] 앨범을 발매해 미국에서만 무려 1천만 장이 팔려나가는 히트를 기록했고 언플러그드 열풍을 촉발시키며 제 2의 전성기를 열게 된다.
[From The Cradle](
1994)에서 블루스 곡의 리메이크를 시도한 그는 R&B계의 마이더스의 손 베이비페이스와의 협연을 통해 R&B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이의연장선상에 서 있던 [Pilgrim](1998)으로 여전히 그가 팝 음악계의 중심에 서 있음을 주지시켰다. 그의 실험정신은 실로 놀라울 정도인데 1997년엔 [Pilgrim]의 프로듀서인 사이먼 클라이미와 함께 한 프로젝트 T.D.F.를 통해 놀랍게도 블루스에 앰비언트가 접목된 사운드를 들려주어 충격을 던져주었다. 2000년 초 여름 블루스의 제왕 킹과 함께 [Riding With The King]이란 블루스 협연 앨범을 발표했고 같은 해 역시 블루스 사운드를 담은 솔로 앨범 [Reptile]을 내놓았다.
oimusic 2002년 06월 원용민
-핑크 플로이드
핑크 플로이드를 얘기함에 있어 결코 빠질 수 없는 인물은 밴드의 초기 리더이자 데뷔작만을 발표하고 탈퇴한 시드 배릿(Syd Barrett)이다. 초기 핑크 플로이드의 이미지와 사운드의 완성은 그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짧은 기간 밴드를 이끌던 인물이 그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심지어 그룹의 분열이 있은 후에도 나머지
멤버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역할해왔다는 사실은 핑크 플로이드라는 밴드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큰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밴드의 출발은 1965년, 런던의 리전트 스트리트 폴리테크닉(Regent
Street Polytechnic)에서 건축을 공부하던 로저 워터스와 닉 메이슨(Nick Mason), 릭 라이트(Rick Wright)가 결성한 시그마 식스(Sigma
6)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룹은 이들 외에 베이시스트 클라이브 멧캘프(Clive Metcalf)와 보컬리스트 줄리엣 게일(Juliette Gale), 키스 노블(Keith Noble)의 6인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티세트(T-Set), 메가데스(Megadeaths) 등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결국 애브댑스(Abdabs)
또는 아키텍처럴 애브댑스(Architectural Abdabs)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였지만 그룹은 곧 해산되었다. 로저와 릭, 닉은 재즈 기타리스트인 밥 클로즈(Bob Close)와 캠버웰 아트 스쿨(Camberwell Art
School)의 학생이었던 시드 배릿을 새로이 맞이한다. 롤링 스톤즈와
신비주의, 섹스와 마약에 탐닉하고 있던 시드와 전통 재즈에 심취한
밥은 서로 바라보는 세계가 달랐다. 결국 밥은 그룹을 탈퇴하고 밴드는 4인조의 형태로 축소가 된다. 시드가 좋아하던 블루스 뮤지션인 핑크 앤더슨(Pink Anderson)과 플로이드 카운실(Floyd Council)의 이름을 딴 핑크 플로이드를 새로운 밴드명으로 정한 이들은 런던의 클럽에서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하며 경험을 쌓았다. 이들이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이듬해, 런던 소호의 유명한 마키 클럽(Marquee Club)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있었던 일종의 사이키델릭 공연인 ‘자발적인 전위운동(Spontaneous Underground)’에서 연주를 하면서부터이다. 시드의 타고난 예술적 감성과 초현실적인 사고(思考)는 이때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드의 의식을 지배하는 초현실적이고 환각적인 꿈은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난해한 노랫말과 기타 피드백 사운드를 통해 청중들에게 들려졌다. ‘사이키델릭 밴드’ 핑크 플로이드의 사운드가 전해주는 환각은 그 질적, 양적인 면에서 어느 그룹들보다 우세했다. 그리고 그것은 데뷔작인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67)에 고스란히 담기게 된다.
심각한 약물 중독과 정신의 착란으로 시드가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게 될 때까지 밴드는 그의 짙은 카리스마로 덮여 있었다. 그가밴드를
떠난 이후, 핑크 플로이드는 또 다른 카리스마의 소유자인 로저 워터스와 시드의 후임으로 들어온 데이빗 길모어(David Gilmour)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오랜 세월 ‘핑크 플로이드’라는 거대한
나무의 뿌리로서 역할해 온 그들 의식의 핵은 여전히 시드 배릿이었다. 밴드의 데뷔작에서 들을 수 있는 초현실적이고 환각적인 경향은
핑크 플로이드라는 그룹의 원초적인 꿈이자 이상향(理想鄕)인 듯 늘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후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위대한 환영(幻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만을 허망히 좇다 결국 스스로 무너지는 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시드 배릿이라는)
본질을 가슴속에 늘 간직한 채, 자신들이 위치해 있는 의식 상태에 따른 긍정적인 변화 즉 진보를 이루었다. 이들이 표현해내는 환상은 철저히 개인적인 무의식과 꿈에 근거한 시드의 것과는 달리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 동시대의 사회적인 아픔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당연히 밴드의 모든 작품들은 매 앨범마다 뚜렷이 드러나는 컨셉트 하에 상이한 방법론과 형식, 각기
다른 실험적 시도를 포함한다. 멤버들 개개인이 고유한 스타일과 연주 패턴을 지니고 있음에도 각각의 작품들이 특유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는 까닭은 이렇게 설명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특유의 분위기에 의한 장르로서의 프로그레시브라기보다는 (‘진보적’이라는)
사전적 의미로서의 프로그레시브에 가장 근접한 밴드로 평가될 수 있다.
장르의 특성상 음악 시장에서 늘 ‘언더그라운드’일 수밖에 없는 프로그레시브 음악을 오버그라운드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이들의 역량을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밴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몇 장의 앨범들을 들어보면 시대를 초월하는 감성이 거기에 담겨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늘 인간과 사회가 지니는 근원적인 문제와 공통의 관심사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실험을 위한 실험’으로 끝나지 않는 스튜디오 작업으로 10년, 2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세련되게
들리는 사운드의 완성을 이루었다. 핑크 플로이드 사운드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전자음향은 모든 앨범들에서 가장 적절히 사용되었지만 그것은 두드러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모든
멤버들이 신서사이저를 비롯한 첨단 기기의 사용에 능숙해 있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소리의 미학적인 구축에 얼마나 민감했나를 잘 말해준다. 작사, 작곡, 편곡 및 프로듀스의 완벽한 일체를 이룬 걸작 THE
DARK SIDE OF THE MOON('73)이나 WISH YOU WERE
HERE('75), THE WALL('79) 등과 같은 작품들이 과연 또 다시 나올
수 있을까? 데뷔작의 타이틀처럼 그들은 정말로 ‘아무도 깨지 않은
여명(黎明)의 시간에 신비로운 피리소리를 들려주는 사람’인 듯, 어느 누구와도 구별되는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창조했던 것이다. 비록
THE FINAL CUT('83) 이후 밴드의 분열이 있었고 로저와 데이빗 측의 지리한 법정 투쟁이 있었지만, 옛 영광을 찾으려는 데이빗, 릭, 닉
3인의 노력은 팬들과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은 멋진 앨범 THE DIVI
SION BELL('94)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루어내기에 이른다.
이들이 이룬 업적은 전자음향과 효과음의 혁명적인 시도와 때로 정신분석학적인 평가까지도 요구되는 초현실적이고 상징적인 노랫말 등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공연장에서의 무대장치와 조명,
그리고 생생한 음향의 중요성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 공연시 최초의 레이저 조명을 사용한 그룹이기도 한 이들의 콘서트는 늘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했으며, 우주적이고 환각적인 사운드에 걸맞는 화려하고 현란한 조명은 음악이 주는 효과를 몇 배 이상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앨범 ATOM HEART MOTHER를 발표하기 전인 '70년 7월,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있었던 무료 콘서트에서 관중들은 밴드의
새로운 실험을 경험했다. 그것은 ‘소리’에 대한 실험이었다. 키보드 앞에 앉은 릭이 연주를 시작하려는 순간 조용한 공기를 뚫고 어디선가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진원지를 찾으려는 청중들의 술렁임이 채 가라앉기도 전, 사람들은 그 소리가 의도된 것이었으며 미리 녹음된 테이프를 통해 들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소리는 음악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는 앨범 MORE('69)나
UMMAGUMMA('69) 등을 시작으로 하여 이후 밴드-특히 로저-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하게 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렇듯 ‘빛’과 ‘소리’라는 개념은 밴드에게 있어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들이 시드와 함께 활동을 하던 초기 시절 클럽의 어두운 공간에서부터 익숙해왔던, 동질적인 일련의 현상이요 뗄
수 없는 하나의 개념이다. 결국 밴드의 가장 최근작인 더블 라이브 앨범 PULSE('95)의 패키지는 그러한 개념에 대한 상징인 듯, 끝없이 명멸(明滅)하는 빛의 맥동으로 형상화되어 세계의 수많은 방 안에서 깜박이고 있다.
gmv 1999년 07월 김경진
-Nirvana
그룹 너바나의 시작은 1985년, 커트 코베인(Kurt Donald Cobain,
1967년 2월 20일 워싱턴주 호키암 태생)과 크리스 노보셀릭(Krist
Anthony Novaselic, 1965년 5월 16일 캘리포니아주 콤튼 태생)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크로아티아 이민자의 아들로 비교적 안정된 가정에서 자란 크리스와는 달리 커트는 8살 때 부모가 이혼한 후 여러 친척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는데, 그가 펑크 밴드인 멜빈스(Melvins)를 통해 크리스를 만났을 당시 커트는 워싱턴주의 애버딘에서 웨이트리스인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비틀즈를 좋아하고 헤비 메탈을 즐겨 듣던 커트는 크리스와 함께 스티프 우디스(Stiff Woodies)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커트의 포지션은 드러머였고 크리스는 베이스를 맡았으며 필요할 때마다 기타리스트와 보컬리스트를 맞춰갔다. 이후 스키드 로(Skid Row), 에드 테드 앤 프레드(Ed
Ted & Fred) 등 여러 이름을 거친 밴드는 1987년, 커트가 기타와 보컬을 맡고 새로운 드러머 채드 채닝(Chad Channing, 1967년 1월 31일 캘리포니아주 산타 로사 태생)을 맞이하여 너바나를 출범시킨다.
올림피아 지역에서 커트가 쓴 곡들을 주요 레퍼토리로 하여 연주 활동을 하던 밴드는 당시 이미 컬트적인 팬들을 거느릴 정도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시애틀의 인디 레이블 [서브 팝(Sub Pop)]과 계약을 맺은 이들은 1988년 12월, 쇼킹 블루(Shocking Blue)의 곡을 리메이크한 데뷔 싱글 ‘Love Buzz’를 발표한다.
이듬해인 '89년 3월에 발표된 밴드의 데뷔 앨범 [Bleach]는 대학가에서 특히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꾸준한 공연으로 확고한 팬층을 확보하게 된 밴드는 같은 시애틀 지역에서 활동하던 사운드가든이나 머드허니(Mudhoney) 등과 더불어 메이저 레이블들의 커다란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이듬해에는 드러머 채드가 그룹을 떠나고 그의
자리는 스크림(Scream)이라는 밴드를 나온 데이브 그롤(Dave Grohl,
1969년 1월 14일 오하이오주 워렌 태생)이 대신한다. 그리고 '90년 8월, 밴드는 28만7천 달러를 받고 데이빗 게펜(David Geffen)의 레이블 와 계약을 이루었다(이는 데뷔작의 제작비가 600달러, 판매량이 3만5천 장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꽤나 높은 금액이다). 1991년 9월에 발매된 두 번째 앨범 [Nevermind]는 대중음악 사상 가장 중요한
앨범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헤비 메탈과 펑크의 혼합 변종인 ‘그런지’ 사운드의 완벽한형태를 담은 이 앨범은 순식간에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음악 시장을 휩쓸며 그런지의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90년대의 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이정표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젊은이들의 송가(頌歌)로 자리한 ‘Smells Like Teen
Spirit’의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앨범은 어렵지 않게 플래티넘을 기록했으며 지금까지 미국에서만 1,0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앨범의 갑작스런 인기와 엄청난 상업적 가치는 음반 산업계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단숨에 슈퍼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된 밴드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을 주고 있었다. 심리적인 불안정과 부담감은 밴드 내에
팽배해 있었는데, 그러한 내적 상태의 외적인 표출인 듯 이들은 무대
위에서 악기를 부수는 등 거칠고 과격한 행위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 유럽, 호주, 일본 등 꾸준한 투어가 이어졌고 1992년 2월, 커트 코베인은 그룹 홀(Hole)의 리더인 커트니 러브(Courtney
Love)와 결혼을 함으로써 5개월간의 구애에 종지부를 찍는다. 당시
이들 부부의 헤로인 중독은 도를 지나친 상태였다. [배니티 페어(Vanity Fair)]지는 코트니 러브가 임신 기간 중에도 계속해서 헤로인을 복용해왔다고 밝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같은 해 9월에 개최된 9회 MTV 비디오 음악 시상식에서는 ‘Smells Like T
een Spirit’가 최우수 얼터너티브 뮤직 비디오와 최우수 신인 아티스트 비디오 상을 수상했다. 12월에는 초기 녹음들을 포함한 미발표곡
모음집인 [Incesticide]가 발매되었고 이듬해인 '93년 2월에 개최된
12회 브릿 어워즈에서 너바나는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한다. 또 다시
커트의 헤로인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고 그에 관련된 크고 작은 여러 사건들이 있었지만 밴드의 음악은 여전히 장르의 ‘극점’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 '93년 9월에 발표된 통산 네 번째 앨범인 [In Utero]는 수많은 매체들과 팬들의 극찬을 받으며 영국과 미국에서 차트 1위
데뷔를 이루었다. 밴드는 이 앨범으로 롤링스톤(Rolling Stone)지의
평론가들이 뽑은 최고의 밴드와 앨범으로 선정되었다.
'94년 1월, 시애틀의 공연을 시작으로 유럽 투어에 들어간 밴드는 3월
1일, 그들의 마지막 공연으로 기록될 콘서트를 독일의 뮌헨에서 가졌다. 3월 2일, 커트 코베인은 코트니와 함께 로마의 한 호텔에 있었다.
다량의 정신 안정제와 최면제, 그리고 샴페인을 마신 후 혼수상태에
빠진 커트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는 위 세척을 한 후 며칠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이후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한 그는 크리스
노보셀릭과 데이브 그롤의 (치료를 받지 않으면 밴드를 해산하겠다는)‘협박’을 받고 재활 센터에 들어가게 되지만 며칠 못가 그는 병원을 빠져 나온다. 그리고 4월 5일, 시애틀의 집에서 커트 코베인은
자신의 머리에 산탄총을 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시신은 3일이
지난 후 전기공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그의 옆에 있던 노트에는 닐 영(Neil Young)의 ‘My My, Hey Hey(Out Of The Blue)’에서 인용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희미하게 사라져가는 것보다 불타 없어지는 편이 낫다’. '90년대 초반의 고뇌하는 젊은 영혼들의 화신이자 X 세대의 대변인이었던, 20세기 최후의 로큰롤 영웅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져갔다.
이후 데이브 그롤은 자신의 밴드 푸 파이터스(Foo Fighters)를, 크리스 노보셀릭은 스위트 75(Sweet 75)를 결성한다. 커트의 사후에 발표된 두 장의 라이브 앨범들, 즉 '93년 말에 행했던 언플러그드 실황을 담은 [MTV Unplugged In New York]('94)과 '89년에서 '94년 사이에 행한 여러 라이브 녹음들을 모아 놓은, 밴드의 강하고 역동적인 힘과 에너지로 충만한 [From The Muddy Banks Of The Wishkah]('96)는 정규 스튜디오 앨범들 못지 않은 탁월한 내용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대중적인 인기와 스타덤의 매혹에 굴하지 않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통해 세상에 ’엿을 먹인‘ 커트 코베인의 카리스마는 라이브앨범들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너바나라는 이름에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해주는 요소이다.
oimusic 2002년 04월 김경진
-Toto
토토! 바비의 남자 친구 켄을 따라 몇 년 전에 만들어진 그 남자 인형의 이름이 아니다. 이웃집에 사는 토토로에서 한 글자를 빼먹은 것도
아니다. 바로 당신이 생각하는 그 토토가 맞다. 최고의 스튜디오 세션
맨들로 이뤄진, 그래서 연주만큼은 끝내주지만 과연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음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받았다는 바로 그 토토. 그들이 3년만에 새 앨범을 발표한다.
토토는 잘 나가던 스튜디오 세션 맨들이 뭉친 그룹으로 보즈 스캑스(Boz Scaggs)의 [Silk Degree]에 참여했던 세션 맨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제프 포카로(Jeff Porcaro / 드럼), 데이빗 헌게이트(David
Hungate / 베이스), 데이빗 페이치(David Paich / 키보드), 그리고 이들의 형제 및 친구들인 스티브 루카서(Steve Lukather / 기타), 스티브 포카로(Steve Porcaro / 키보드), 바비 킴볼(Bobby Kimball / 보컬)이 토토의 처음 라인업이다. 제프 포카로가 TV에서 우연히 영화 <오즈의 마법사>를 보고 도로시가 데리고 다닌 개 이름 ‘토토’에서
밴드 이름을 따왔다는 얘기도 있고, 라틴어로 ‘모든 것’을 뜻하는
'Totus Toti'라는 말의 첫 글자를 땄다는 해석도 덧붙여서 모든 종류의 음악을 섭렵하고 싶다는 이들의 음악관을 설명하기도 한다.
197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결성된 토토는 그 해 셀프 타이틀의 데뷔
앨범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아티스트로서의 길을 걷게 되는데, 하드
록 사운드와 정통 로큰롤 리듬을 바탕으로 보다 듣기 쉬운 멜로디를
가미해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됐다. 이들의 인기에는 세련되면서 깔끔한 연주도 한몫 했을 텐데, 세션 맨 출신의 멤버들 덕분일 것이다. 특히 데이빗 페이치가 맡았던 어쿠스틱 피아노의 리듬감이 잘 살아있는
연주와 스티브 포카로의 풍성한 신서사이저 연주는 토토 사운드를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토토는 빈틈없는 연주를 바탕으로 당시 인기
많던 AOR(Adult Oriented Rock:성인 취향의 편안한 록 음악) 성향의 곡들을 들려주면서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다.
리듬감 넘치는 피아노 연주와 하드 록 스타일의 기타 사운드를 들려주는 토토의 데뷔곡 ‘Hold The Line’을 비롯해서, ‘I'll Supply
The Love’, ‘Georgy Porgy’가 실려있는 데뷔 앨범에서부터 토토의 진가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그래미에서 이들은 최고 신인상 부문에 후보로 오른다. 그리고 이들의 가치를 한 번에 평가해버린 25회
그래미가 1982년에 있었고, 토토는 ‘Rosanna’, ‘I Won't Hold
You Back’, ‘Africa’ 등의 히트곡이 실려있는 네 번째 앨범 [Toto
IV]으로 여섯 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그리고 ‘Stranger In Town',
'Holyanna' 등이 실려있는 [Isolation], 데이빗 린치의 영화 의 사운드트랙, ’I'll Be Over You'를 히트시켰던 6집 [Fahrenheit], 스튜디오
앨범으로는 마지막 작품이었던 1999년작 [Mindfields]까지 발표하면서 토토는 많은 일을 겪게 되는데, 그 중 가장 비극적이고 큰 사건은
토토 최초의 멤버 제프 포카로의 사망일 것이다. 심장 마비로 죽은 제프 포카로 대신 토토는 사이먼 필립스(Simon Phillips)를 새 드러머로
영입했다. 그리고 이들은 각자의 프로젝트에도 열을 쏟는다. 가장 빛나는 활약을 한 멤버는 스티브 루카서일텐데, 그는 재즈 기타리스트
래리 칼튼과 함께 지난해 봄 내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oimusic 2002년 10월 이소연
-[[뮤비]] TOTO "ROS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