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愼重)
出門如賓-문(門) 나서면 손님같이
承事如祭-일할 때는 제사(祭祀) 지내듯
戰戰兢兢-전전긍긍 조심하여
罔敢或易-함부로 쉽게 하지 말라
守口如甁-입 지킴은 물병 막듯
防意如城-생각 막음은 성문 닫듯
洞洞屬屬-조심조심 살피어서
毋敢或輕-함부로 가볍게 하지 말라
주희(朱熹)
움직이고 뭘 할 때마다 “여유당(與猶堂)”을 중얼거린다 !!
“여유당(與猶堂)”은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의 집 이름 당호(堂號)다.
이 글의 결론(結論)을 미리 말하자면 “여유당(與猶堂)”은
“매우 조심 조심”하라는 뜻이다.
▶1800년(정조24년)년에 다산(茶山)은 모든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가족 전부가 고향(故鄕)인 경기도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 마재마을로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
돌아온다.
고향에서 자신의 일생에 관한 것을 “여유당기(與猶堂記)”라는 이름을
통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 모르고,
정(情)에 끌려서는 의심도 안 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 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에 담겨 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 두지를 못한다(중략)】
“여유당(與猶堂)”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노자(老子)의 말에
여(與)-겨울의 얇은 얼음이 있는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거라
위의 “여(與)” “유(猶)”는
노자 도덕경(道德經) 15장 아래 글에 설명하고 있다.
古之善爲道者-예부터 도가적(道家的)수양을 갖춘 사람은
微妙玄通-미묘하고 현통하여
深不可識-그 깊이를 알 수 없다
夫唯不可識-알 수 없기 때문에
故强爲之容-억지로 표현 한다면
豫焉若冬涉川-조심하는 것이 얼어있는 개천을 건너는 듯하고,
猶兮若畏四隣-신중함이 사방을 항상 경계하는 듯해야 한다.
오히려유(猶) 두려울외(畏)
-이하 생략-
그런데 노자 도덕경(道德經) 15장을 자세히 보면
豫焉若冬涉川-에 “여(與)”는 없다
猶兮若畏四隣-에 유(猶)는 있다
※참고-본디 “여(與)와 예(豫)”는 같은 뜻으로 통하는 글자이다.
그래서 예(豫)의 음(音)을 여(與)로도 읽는다.
노자의 판본(板本)에 따라 여(與)와 예(豫)가 달리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유예(猶豫)”라는 말은
“망설여 일을 결행하지 아니함”이라는 뜻이다.
“예(豫)”글자는 코끼리(象)를 가리키는 말이다.
“유(猶)”는 원숭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코끼리 원숭이 둘 다 의심이 많고 조심을 잘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豫焉若冬涉川-이 글귀를 다산이 몰라서가 아니다.
與兮若冬涉川-를
猶兮若畏四隣-로 바꿔 놓지는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여유당(與猶堂)”이름 의미에 대한 도덕경(道德經) 원전(原典)을
확인하지 않고 그냥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나
“여유당기(與猶堂記)”에 있는 내용을 그냥 옮겨 놓아서 생긴 문제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정약용이 지은 자신의 묘지이름(墓誌銘).
짐작하건데 다산(茶山)이 도덕경 15장의 내용을 임의로 바꿔 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있던 1799년(정조23년)에는
다산에 대한 노론(老論)의 공격이 극에 달했다.
남인(南人)의 정치적 스승이었으며 정조(正祖)의 충직한 신하였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돌아가신 해다.
노론(老論) 벽파(辟派)는 다산(茶山) 선생을 제거하려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다산(茶山)은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에서 천주교와의 관계를 모두
고백했다.
노론은 다산의 형 정약전(丁若銓)을 공격해서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가족이 물러나면 벼슬자리에 있는 다른 가족도 사직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다산(茶山)은 모든 관직을 사직하는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관직 사직을 청하였다. 정조는 만류하였지만 다산은 모든
관직(官職)을 거부하였다.
1800년(정조24년) 봄에 다산(茶山)은 아버지 정재원이 낙향했던 것처럼
가족들과 함께 고향 마현리(馬峴里)로 돌아와서 집의 문미(門楣)에
“여유당(與猶堂)”이라는 현판(懸板)을 붙이고 은신(隱身)하였다.
※문미(門楣)-문의 얼굴이다 위에 가로 대는 나무
※마현(馬峴)-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다산 집과 유적이 있는곳
다산(茶山) 호(號)에 대하여
대부분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호(號)가 다산(茶山)으로 알고 있지만
정약용 선생의 호(號)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호(號) 만큼이나 많다.
필자가 알고 있는 자료에만도 아래와 같다.
다산(茶山), 열초(洌樵), 정용(丁鏞), 정자(丁者), 열수옹(洌水翁), 열수산인(洌水山人),
열노(洌老), 열보(洌보), 다산주인(茶山主人), 다산초부(茶山樵夫),
다산초자(茶山樵者), 여유당거사(與猶堂居士), 여유병옹(與猶病翁),
탁피족인(籜皮族人), 철마산초(鐵馬山樵), 철마초부(鐵馬樵夫),
삼미(三眉), 초계(樵溪), 사암(俟菴)~~~~ 등이다.
다산(茶山) 다음에 “열초(洌樵)”라는 호(號)를 많이 쓰는데
열초(洌樵)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별명이다.
열(洌)-맑을열 초(樵)-나무꾼초
글자대로 해석하면 “맑은 나무꾼”이리는 뜻이다.
그런데 열수(洌水) 열초(洌樵) 보다 다산(茶山)으로 더 많이 알고 있다.
열수(洌水)는 한강의 이름이다.
이유는 다산(茶山) 시문집(詩文集)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호(號)가
다산(茶山)이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호(號)의 특징은 지역과 관련이 깊다.
다산(茶山)은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할 때 지금의
다산초당(茶山草堂) 뒷길로 가면 해남(海南) 녹우당(綠雨堂)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산(山)이름이다.
차(茶)나무가 많이 있다하여 “다산(茶山)”이라 하였다.
철마(鐵馬)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고향에 위치하는 산이다
현재의 예빈산(禮賓山) 또는 예봉산(禮峯山) 이다.
다산(茶山)의 태어난 고향은 열수(洌水한강)가 있는 남양주다.
필자도 나이 많아지니까 모든 행동이 부자연 스럽다
매사에 조심하지 않으면 늙음에 큰 고생을 할 수 있는 사고(事故)를
당하기 때문에
마치 불교 신자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고
기독교 신자가 “하나님”을 부르는 것처럼
필자는 “여유당(與猶堂)”을 중얼거린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