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폭동 사건> 1. 제주 4.3 폭동 사건 발발 한강 이남 지역 가운데 제주도는 본토와 다른 환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친북좌파들의 활동이 일찍부터 극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945년 9월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여운형)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자 제주도에서도 공산좌익들이 9월 15일에는 제주읍 인민위원회, 9월 22일에는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여 제주도를 선점하여 장악하고 있었다. 미군정청은 본토와 다르게 뒤늦은 9월 28일에야 제주도에 상륙하여 도지사대리로 김누희를 임명하여 제주도청을 설립하고, 감찰청(청장 김대봉) 및 제주경찰서(서장 강동효)와 22개의 지서를 발족시켰으며, 제주지방법원(법원장 최원순)과 제주지방검찰청(검찰청장 박종훈)을 설치하였다. 여기에다가 제주 인구는 해방 후 불과 3년여만에 15만명에서 30만명으로 급속하게 증가한데서 알 수 있듯이, 일본 중국에서 살던 동포들이 제주로 대거 몰려 들어 급작스러운 인구팽창이 이뤄지면서 이중에는 일본군에 복무했던 친일파, 중공 의용군과 팔로군 부대원과 그 가족들도 많았다. 따라서 제주도는 순수한 토박이 15만명 이외 나머지 외부인 15만명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의용군과 팔로군 출신들과 섞이면서 자연스럽게 활발한 공산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실제로 본토와 다르게 제주도의 친북좌파들은 일본군 무기로 무장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남노당의 지시에 따라 제주도 지구당(총책 김달삼-본명 이승진)과 군사부 예하 제주인민해방군(사령관 이덕구, 김달삼 월북이후 승계)을 조직하고, 인민해방군 예하로 각 면단위에 중대를 편성해서 일본군 무기를 소지한 500여명의 무장부대원을 보유함으로써 언제든지 공산주의 무장폭동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무수한 양민을 학살하고 제주도에서 달아 난 김달삼(본명 이승진)은 해주 남노당 인민대표자대회(1948년 8월 21~26)에서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국회의원)에 선출되고 북조선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 9월에는 북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 헌법위원(총49명)이 되고, 테러분자 양성소인 강동정치학원을 나와 인민유격대 제3병단 태백산지구사령관(1949년)이 되어 영덕, 봉화, 태백, 울진, 청송 등에서 테러활동을 하다 1950년 3월 21일 저녁(6시 이후)에 국군진압대에게 사살되었다.) 반면에 제주도에서는 공산좌익들의 세력에 비해 민족주의 보수 애국세력들은 매우 약했다. 친일파 타도, 반공을 내세운 자생적 조직인 한라단이 있었으나 정치적 역량은 미미했다. 46년 7월 이후 정치적 역량을 가진 대한독립촉성회, 한국독립당, 비상국민회, 광복청년회(대동청년단) 등이 결성되거나 지원이 이뤄졌다. 공산좌익들이 해방직후부터 불법 군사무장을 갖춘데 반해 46년 11월 16일에야 국방경비대 제9연대(부대장 장창국, 모슬포 대촌)가 창설되어 제주도 방위를 담당하게 되었고, 해안경비대도 뒤를 이어 제주도의 해안을 방어하게 됐다. 1948년 2월 7일 친북좌파 전평이 일으킨 노동조합 태업 폭동사태(2.7구국투쟁)는 제주도에서도 발생했으며, 뒤이어 북한으로부터 내려온 5.10 총선거를 방해하라는 지령에 따라 제주도에서도 폭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 이전에 제주 9연대에도 친북좌파들이 침투하여 활동했는데, 대표적으로 대위 문상길을 들 수 있다. 문상길은 음식에 독약을 풀어 소령 이지업을 암살하려고 했다. 이렇듯 제주도에서는 서북청년단 같은 반공애국세력과 친북좌파세력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제주인민해방군은 1948.4.3 새벽 2시에 일본군 무기로 무장한 무장테러조직원 500여명을 동원해 5.10총선거 방해공작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전남 8관구 경찰청 1개 중대와 각 경찰청에서 1700여명을 파견하고, 부산 5연대 2대대가 출동했으나 대대장 소령 오일균이 좌익 김달삼에게 포섭되고 만다. 이로 인해 진압작전은 회피되어 좌익척결에 실패하면서 경찰관 18명 전사 22명 부상 2명 납치, 공무원과 민간인 42명이 피살됐다. 이에 따라 제주9연대와 파견 부산5연대 2대대를 통합하여 제11연대로 재편성하여 부대장으로 중령 박진경을 부임시켰다. 하지만 박진경은 6월 19일 새벽 3시경에 친북좌파 대위 문상길의 암살 지시를 받은 좌익 상사 최 모의 세포인 좌익 위생병에게 M1소총으로 막사에서 암살당했다. <여순 반란 14연대 위치와 부대 배치도> 2. 여순반란 사건의 시작
1948년 5월 4일 교육훈련대 수준으로 미약하나마 14연대가 창설(초대연대장-일본해군 출신으로 4연대 1대대장 역임한 소령 이영순) 됐다. 일제가 중학생들을 강제노역시켜 건설한 일본해군항공부대였던 여수읍 신월리에 위치했다. 여수14연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핵심인물들은 제4연대(1948-광주) 1대대 출신들이었다. 여순사건 주모자는 상사 지창수, 정낙현이었고, 반란 과정과 이후 지휘관은 중위 김지회 홍순석이었으며, 배후조종자는 남노당 특별공작책임자 및 군부 적화 최고책임자이자 교회 목사였던 이재복이었다. 이재복은 대구6연대 반란사건도 조종했다.
이들은 경비사관학교와 4연대 1기 동기생들로 평소에 친북좌파 사상으로 인해 군기대(헌병대)의 관찰대상이었는데, 신설연대로 착출해 보냄으로써 무마하려던 방법이 여순반란사건을 가져오는 비극이 되고 말았다. 당시 사회상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애국심의 결여로 인해 서로가 군입대를 극도로 기피함으로써 한국 군대는 기본 병사 숫자도 유지하기 힘들 정도였다. 병역기피가 만연한 상태에서 탈영마저 수 없이 일어 난 까닭은 열악한 복무지원과 함께 너무나 엄격한 일본군식 내무반 생활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신병모집에 있어서 신원조회는 극히 형식적이었고, 너무나 간단해서 형사범 수배자를 비롯해서 경찰에게 쫓기던 친북좌파들이 대거 군대로 피신할 지경이었다. 여수주둔 14연대에도 전국에서 몰려든 친북좌파들이 피신해 왔는데 그 숫자가 다른 연대에 비해 많았다. ("그 때 좌익청년을 쫓다 보면 으레 경비대에 입대했다는게 핑게처럼 되었죠. 그러면 차 사정이 형편없던 때라 말을 타고 14연대를 찾아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문에서 연대장 면회를 요청하면 30분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겨우 만나 문제된 사람을 체포해 가야겠다면 상대방 대답은 이미 경비대에 입대했기 때문에 자체조사를 하고 상부에 연락해 결과를 회신해 주겠다는 공식적인 대답만 듣고 되돌아서기 일쑤였죠" - 당시 여수경찰서 정보과장(사찰과장) 박명규) 5.10선거 방해공작 실패와 남북적화협상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최능진, 서세충, 김규진 등이 남노당과 결탁하여 소련 10월혁명기념일에 반란을 일으키려다 거사 20일 전에 일망타진된 '혁명의용군사건'에 14연대 부대장 소령 오동기가 김규진과 접촉하여 김규진의 세포 3명을 불합격되었는데도 제1연대와 제8연대에 입대시켜줬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소령 오동기는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따로 광주 5여단이 군부내의 좌익분자 색출작업을 진행해 광주4연대와 여수14연대 내부의 좌익 계보를 파악하여 4연대에서 50여명, 14연대에서 40여명을 색출해 체포하고 핵심분자 3명은 광주로 이송했다. 14연대의 친북좌파들은 소령 오동기와 부대원 40여명이 체포되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중위 김지회는 5여단에 호출되자 불안에 떨며 철도전화로 순천의 중위 홍순석과 연락을 해 홍순석도 5여단의 호출명령을 받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3. 여순반란사건의 진행
밤마다 막사주변에 좌익 선동지가 뿌려지고 산에서는 좌익들이 피운 봉화가 자주 일어나는 가운데,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14연대에서 좌익세력 색출작업이 진행되면서 재편작업에 돌입하자 남노당은 제주폭동 진압 출동 직전에 반란을 일으킬 것을 이재복을 통해 상사 지창수에게 지령을 내렸다. (1948.10.19 점심 무렵 중국 음식점에서 이재복은 상사 지창수에게 - 당시 경비대와 경찰과의 세력 알력을 이용해서- 경찰이 습격한 것처럼 가장해 봉기 직후 병사들을 참여시킬 것과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내려 오고 있다는 선전활동을 펴라는 지령을 내리고, 14연대의 반란이 성공하면 전국 군부대에서 호응하여 봉기하도록 계획이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제주 출동 시각이 연기되어 24시 정각으로 미뤄지자 상사 지창수는 1948년 10월 19일 밤 10시 정각에 40여명의 친북좌익 병사들을 동원해 1대대 본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밤 10시가 되자 계획대로 M1 소총 한 발을 발사하고 위병소에서 비상나발을 불었다. 규정에 따라 병사들은 완전무장을 갖춘채 중대본부 앞에 집결하여 종합연병장으로 집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통신장교 소위 김정덕은 구타당한채 도망가다 총탄에 맞아 팔이 관통 당하고, 소위 조병모는 총검에 복부를 등 뒤까지 관통당해 죽고, 주번사관 소위 박윤민은 총살 당했다. 작전관 소위 전용인은 현장탈출에 성공했다.) 친북좌파 병사들 일부는 일본 해군이 시설물로 사용하던 산허리 동굴에 마련된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종합연병장에 완전무장 병사들의 집합이 끝나자 상사 지창수는 연단에 올라가 '경찰이 14연대를 포위한채 공격해 왔음으로 응징하기 위해 경찰을 타도해야 하고, 제주도에 가서 동족상잔을 할 이유가 없으니 반대해야 한다'고 하면서 '북조선인민군이 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중에 있음으로 반동장교들을 소탕하여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 행동하자'고 선동했다. 병사들의 호응을 얻어내자 건물 수색작업에 들어가 1,2,3 대대장을 모두 사살하고, 장교 20여명을 사살해서 부대를 완전 장악했다. (종합연병장에서 하사관 3명이 안된다고 나섰다가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소위 전용인은 1중대장실에 있던 대대장 대위 김일영에게 반란 사실을 알리고 지시를 받아 여수읍에서 하역작업을 지휘하고 있던 연대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연대본부로 달려 갔지만 읍내와의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던 전화선은 이미 절단되어 있었다. 전용인은 통신소로 달려가 광주5여단에 연락을 시도했지만 일일 통화량이 1~2회에 불과해 광주 5여단 통신대는 전화기를 차단하고 취침하고 있었기에 보고에 실패했다. 무전기 교신도 시도했지만 역시 5여단에서는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 최후수단으로 전국 군부대로 전파되는 SOS 신호를 송출했으나 이 마저도 응답이 없었다. - 당시 비상나발 소리나 총성은 부대내에서 개인적인 다툼이나 경찰과의 마찰로 인해 엄포용으로 자주 발생하던 상황이라서 거의 대부분이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반란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기 한국군의 편성 상황을 볼 필요가 있는데, 국군이 창설되기 이전에 대한민국에는 무려 30여개나 되는 사설 군사조직이 난무하면서 서로 견제 충돌 했었다. ) 부대 장악에 성공하자 1대대 외곽에 잠복해 있던 친북좌익 23명(민청, 민애청, 인민위원회 소속)이 길잡이로 가세하여 여수읍으로 향했다. 반란 첩보를 입수한 여수 경찰서는 서장 고인수, 정보과장 박명규, 수사과장 이위용, 경비과장 김만수, 총무과장 정홍수 등이 참석한 긴급 대책회의를 진행하고, 비상소집에 따라 본서와 지서에서 150여명의 경찰관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반란군들은 봉산 지서 부근에서 1차 저지선을 형성하고 있던 경찰관들과 지원나온 보조군기대원(보조헌병대원) 40여명을 학살하듯 전멸시키고 밤 11시 10분(30분) 경에 여수읍 중심가에 진입해서 22명의 경찰관이 사수하고 있던 여수 경찰 본서를 포위했다. 치열한 총격전이 진행되다 10월 20일 새벽 3시 30분 경에 반란군이 경찰서 건물진입에 성공하면서 여수경찰서마저 반란군에게 점령 당해 태극기가 내려지고 인공기가 게양되면서 여수는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서장 고인수는 정보과장 박명규에게 팔목을 잡혀 뒷문으로 억지 탈출하게 되지만 오전 11시경 경찰서를 사수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경찰관 정복차림으로 다시 본서로 향하다 읍사무소 앞 공터에서 총으로 무장한 남학생 2명의 검문에 걸려 끌려간다. OB암살대장(유달산 호랑이) 서종현(후에 빨치산 활동하다 국군토벌대에게 사살됨)에 의해 본서 후문에서 표적이 되어 첫 발에 오른팔, 두번째 발에 왼팔을 총탄에 맞고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다 연이은 3발의 총탄에 의해 순직했다. 여자경찰 국막래(24세)는 유치장 안에서 총살 당했다.) 20일 오전 10시 반란군들은 조선은행 여수지점을 습격하여 남조선이 해방되어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음으로 조선은행을 인민공화국 중앙은행이 관리하게 됐다며 장악에 나서 반란군이 섬멸당하던 26일 오후 5시경까지 총2천1백만원을 강탈해 갔다. 인민재판 학살
20일 오후 3시 여수읍 중앙동 로타리에는 강제로 각 가구마다 1명씩 강제동원된 수 천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유목윤(남노당 전남도당 서남지구 올구 연락책)은 '인민해방군이 여수에 상륙했으며, 38선을 돌파한 인민군이 남진중에 있고, 이승만은 일본으로 도망갔다'고 선동했다.(이승만은 맥아더와의 면담을 위해 19일 일본으로 출발했다.) 호명방식으로 미리 정해진 인물들로 인민위원회 의장단을 선출하고 군중집회를 마쳤다. 여수읍내에는 일체의 방송청취를 금지한다는 좌익들의 포고문이 나붙었다. 여수일보를 장악한 좌익들은 인민일보라는 신문을 발행해 '인민해방군 여수상륙, 인민군 38선 돌파, 이승만 일본으로 도피'라는 내용의 기사를 연일 실어댔다. 좌익들의 경찰 색출난동으로 여경 정운자(23세)는 상무관에서 죽창에 찔려 죽었다. 반란 소식을 모르고 입항했던 정기여객선 태완호에 승선해 있던 수사과 정형채 형사는 읍사무소에서 총살, 한복으로 갈아입고 한재고개를 넘던 정보과 심찬호 순경은 충무동 파출소 앞으로 끌려가 몽둥이 구타로 순직했다. 정보과장 박명규를 잡는데 실패한 좌익들은 총살시킨 경찰관 시체 한구를 트럭 뒤에 매달고서 박명규를 처형했다며 시내를 끌고 다녔다. 총74명의 여수 경찰관들이 살해 당했다. 인민대회 인민재판으로 호남 재벌이었던 천일고무공장 사장 김영준, 여수 독촉국민회의 의장 차호인(어머니,아내,자녀2명 포함), 노총 여수지구 위원장 김창업 등과 더불어 서종병, 김옥동, 김동준, 박귀환 등 수 많은 애국적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여수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30여명의 민간인들은 뒷산에서 기관총 난사로 학살당했다. 이중 철도경찰 소우석과 소라 지서장은 1만원씩 뇌물을 주고 학살현장에서 가짜 총질로 살아 남았다. 읍사무소 2층 회의실에 갇혀 있던 민간인 200여명은 10월 23일 제5사단 군함에서 박격포 사격을 시작으로 진압작전에 돌입하던 순간 포격에 놀란 반란군에 의해 집단학살 당하고 말았다. 10월 26일 진압군에게 위기감을 느낀 반란군은 마지막으로 여수경찰서에 갇혀 있던 양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OB암살대장 서종현은 M1소충을 든 학생 3명을 데리고 들어와 1.2.3.4.5감방을 돌며 양민학살을 지시했다. 6감방에 갇힌 민간인들만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살아 남았다. 19일 밤에 시작된 반란은 다음 날인 20일 아침에 순천역에 진입한 반란군들에 의해 순천마저 장악당하고 만다. (순천, 벌교, 고흥, 보성으로 확대된 상황은 생략한다. 순천에서도 많은 양민들이 반란군 세력에게 학살당했다.) <여순 반란, 순천 진압작전도> 4. 반란군 진압작전 실시 주력 진압부대인 군산12연대는 광주4연대와 합류, 대전2연대는 전주3연대와 합류, 마산15연대는 하동방면에서 투입되어 친북좌파 반란세력 소탕작전에 나섰다. 해군 302호 함정(충무공호)는 여수 연안 봉쇄에 돌입했다. 전투사령부에서는 L-4기 3대를 동원해 정찰과 전단살포 업무에 나섰다. 자수를 하면 관대하게 대하겠다는 벽보가 사방에 붙었으나 친북좌파들은 극악하게 저항했다. 4연대 2대대(대위 유정석)가 소대급 특공부대를 조직해 순천 경찰서를 탈환했을 때, 사무실과 후문에는 시체가 층층히 쌓여 있었는데 경찰관들과 가족들로서 한 처녀는 손톱이 짓뭉개진채로 국부가 칼로 난도질 당해 벌거벗겨져 죽어 있었다. 인민재판으로 총살 사격직전의 신문사 기자 윤 모는 진압군에게 구출되어 살아 남았다. 친북좌파들의 가족인 어린 중학생들까지 캘빈소총으로 무장해서 골목길에서 난사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12연대 3대대가 중앙동 입구 골목길 수색에 나서자 교복을 입은 한 여중학생(순천읍 남노당 조직책 김 모의 딸)이 수색대 하사에게 고생한다며 시원한 물 한잔 마시고 가라고 하면서 물을 들이키는 순간 권총으로 죽이고 확인사살까지 두 발을 쏘고 달아났다. 순천이 장악당한 20일 오후 5시께 구법원 앞에는 농업학생 50여명, 사범학생 60여명, 순천중학생 50여명, 매산중학생 30여명이 모인 것을 계기로 점차 무장반란학생조직으로 변해 갔다. 여수에서도 심각했다. 여수여중 교장이자 인민위원이었던 송도에게 쇄뇌된 여수여중 여학생들은 일본 99식 소총으로 무장해서 게릴라전을 폈다. 서국민학교 지역 수색작전에서 상사 나 모가 5학년 전 모양의 칼빈총에 피격당했으며, 12연대 장갑차에 탑승했던 상사 유 모와 하사 박 모는 말을 걸며 접근하는 3명의 여학생들을 제지하기 다가갔다 근처에 숨어있던 남학생 2명에게 저격당해 숨졌다. 진압된 이후 4천7백여명의 친북좌파 군인들이 숙군되고 119명의 교사들도 반란 가담죄로 구속 파면됐다. 박정희는 남노당에 가입하여 반란을 기도하고 반란 병력을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어 수사과정에서 조직명단을 넘기고 전향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14연대 주둔지였던 여수읍 신월리에는 반공 자활촌이 건설됐다. <여순 반란, 14연대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에게 학살당한 양민들과 반란군을 돕다 체포돼 여수 진남관에 수용된 좌익 학생들> 5. 제2여순 반란사건 시도 반란세력 일부가 산악지대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했다. 산성(山城정치지도기관)을 중심으로 철성(鐵城)-1성(1城) 2성, 금성(金城)-3성 4성, 암성(岩城)-5성 6성으로 3개 지역으로 나누고, 총사(總社인민군 총사령부)는 철사(鐵社)-1사 2사, 금사-3사 4사, 암사-5사 6사, 영사(營社)-별동대로 편성하여 테러활동에 돌입했다. 1949년 6월 하순. 남노당 군사 5부 지령하에 광주로 피신한 20연대 좌익분자들이 제2여순반란 추진하여 50인 주동세력을 확보했다. 심부름꾼으로 포섭된 수피아 여중 김 모양은 갈등을 겪다 20연대 작전과장 대위 송대후에게 신고하고 2중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5여단의 체포작전 실시로 척결했다. 여순반란 사건의 여파로 1948.11.30 14연대를 해체하고, 광주 주둔 4연대는 불길한 숫자라 하여 20연대로 개칭했다. <여순반란사건, 14연대 반란군 퇴각후 빨치산 전환 활동도. 실제 산의 위치를 정확히 표시했다.> 6. 대구 6연대 반란사건 1948.11. 2 대구 대명동 주둔 6연대 친북좌파 특무상사 곽원진이 체포과정에서 소위 조장필을 사살하면서 시작됐다. 동조한 친북좌익 200여명과 함께 하사관 10명과 군기대 6명을 사살하고 팔공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다. 12월 6일에는 숙군을 두려워한 6연대 친북좌파 상사 이상백과 하사관 28명 병사 14명이 장교 9명을 사살하고 팔공산 빨치산이 됐다. 1949.1.30 6연대 4중대 친북좌파 상사 곽종진 등이 소위 백달현과 하사관 1명을 사살한 후 선동하다 실패하자 탈주했다. 아울러 3차례나 반란을 일으킨 대구 주둔 6연대는 해체후 1949.4.15에 22연대로 재편했다. 친북좌파들의 무장 반란과 폭동은 수 많은 애국 여수 순천 시민들과 양민들을 학살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었으며, 어린 학생들까지 동원하는 만행을 저지름으로써 진압작전시 피아구별을 어렵게 하여 무고한 양민들마저 친북좌익으로 몰려 억울하게 희생되는 사태까지 초래했다. 14연대 반란에 의한 여수의 피해
반란군에 학살 당한 양민 1,200여명 반란군에 부상 당한 양민 1,150여명 소실 및 파괴된 가옥 154동 행방불명자 3,500여명 이재민 9,800여명
14연대 반란에 의한 순천의 피해
반란군에 학살 당한 양민 1,134명 반란군에 부상 당한 양민 818명
반란군과 남노당원 체포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 군사영어학교 출신: 최남근 중령(12연대장) 김종석 중령(6여단 참모장) 조병건 소령(육사 중대장) 오일균 소령(2연대 대대장) 이상진 소령 최상빈 소령 이병위 소령 오규범 중령 나학선 소령 육군사관학교 1기 : 김학림 소령 안영길 소령 김창영 소령 최창근 대위 태용만 대위 육군사관학교 2기 : 박정희 소령 강우석 소령 표무원 소령 최병모 소령 강태무 소령 노재길 대위 안흥만 대위 황택림 대위 최정호 대위 유병철 대위 남재목 대위 김 연 대위 김진원 대위 김병환 대위 소완섭 대위 황용찬 중위 김경회 중위 육군사관학교 3기: 김응록 중위 이기종 중위 김남근 중위 등 3기생 60명 육군 안의 남로당 숙청자 : 4,949명 육군 안에 남로당원으로 조사대상자 부대탈영 : 5,568명 총계 10,517명(육군의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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