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피아 시인의 시집 『은유의 잠』을 읽었다. 시로 「은유의 잠」이 좋았다. 시집 제목의 시라는 건 무서운 측면이 있다. 너무 돌올한 시로 그 제목 지어 놓으면 다른 시가 좀 안 읽히는 측면이 있다. (시 「은유의 잠」 안에는 ‘은유에 누워 잠들었어’란 시행이 있어서 제목을 좀 바꾸었으면 의미가 확장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런데, 그런데 바로 옆의 시 「가을에는」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를 내려와
지나가는 바람에나
어깨를 들썩이며
잠들어 푹, 썩고만 싶다
어느 골목
이름 없는 포장마차가
가을 앓는 손님들로 가득 차는 시간에
나는 말끝마다 고독해서
못 살겠다고 주정 부리다가 뭉개지고 싶다
나무를 내려와
어깨를 들썩이는 바람을
행여나 기다리다가
나, 잠들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건 전적으로 독자 취향인 것이지만 이처럼 힘 뺀 시가 와닿는다. 좀 엄살기가 있는 시처럼 느껴지는 것은 다음 시에서 멀리 와있는 듯하기에 그렇다.
라스코 동굴벽화를 떠올리며
수직으로 가파른, 방 벽에 기대어 있어요
새를 그려 놓고 사냥을 나가면
새의 영혼을 빼앗아 온다는 몽티냑 마을로 가서
가장 그대 닮은 사냥꾼을 발견하고 싶어요
사랑에 빠진 그가 동굴로 와서
날카로운 화살이 가슴을 겨냥한,
나를 그려 놓고 사냥을 나갔으면 좋겠어요
아슬한 암벽에 스케치된
선과 선으로 연결된 나는 초조할 거예요
쫒기는 말과 사슴의 무리에 섞여
발이 떨어지지 않는 꿈속처럼 달려갈 거예요
온 힘을 다해 쫒아온 그대에게
운명처럼 화살을 맞을 거예요
방 벽에 기대어 나는, 그대가 가져올
내 영혼을 기다려요
(「라스코 동굴벽화를 떠올리며」 전문)
이건 우주적인 연애를 꿈 꾸는 맘에 드는 시다. 그런 시인이기에 「가을에는」 좀 엄살 같다는 얘기다. 그나저나 내가 기다리는 영혼을 가져온 그는 이제 영혼 없는 나에게 영혼을 내어줄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다.
진심으로 와닿게 읽은 시로는 「시간을 습작하다」가 있다. 이 시는 나의 그 무렵, 어느 한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그런 내 과거를 발설하지 않은 점이 어떤 면에서는 고맙기도 하다. 寶庫 같아서이다.)
시는 무한히 공부해야 하는 어떤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제도교육의 시스템으로는 외려 개성을 죽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망해먹더라도 공부하는 시인을 좋아하지 게으르거나 공부하지 않는 시인, 특히 공부하기를 경시하는 시인은 경멸한다.)
시집을 너무 늦게 읽었다. 시집 출간을 축하하는 바이다.
#수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