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신 선수는 상문고와 동국대를 거치면서 고교때 부터 유망주로 각광을 받던 포수입니다. 대학때는 3학년때부터 국가대표 주전포수를 했는데, 당시 라이벌겪인 고려대 서효인, 연세대 장호익, 한양대 김상국,성대 장채근 등보다 한수위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1루송구시 백업플레이를 최초로 시도했다는 소리가 나올정도로 수비면에서는 알아주던 선수였죠.
프로에는 85년도 오비에 2번째로 지명됩니다. 당시 오비의 취약포지션은 포수부문이었습니다. 김경문, 조범현이라는 좋은 수비형 포수가 있었슴에도 취약포지션으로 평가받은 것은 이들 두선수가 타격에서 다른 구단의 공격형포수 이만수,유승안,김무종 등에 못미친다는 평가때문이엇습니다.이에 두산은 김형석다음으로 김영신을 지명, 큰 기대를 받고 입단합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프로입단후 곧바로 활약이 없으면 스카웃 실패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프로입단 즉시 활약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 비슷한게 입단한 선수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특히 국가대표 주전출신인 김영신 선수가 계속 2군에 머물러 있다는 건 엘리트 코스를 거친 그에게는 견딜수없는 상처였습니다. 85시즌 동안 거의 활약을 못했던 그는 다음해에도 부진하자, 거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있다가 강에 물놀이를 가서는 익사를 당하고 맙니다. (자살이냐 논란도 많았습니다)
유족들이 사고후 당시 구단과 감독에게 선수기용 방식 등에 문제를 제기하는 등 강력하게 항의하고 보상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프로야구 최초의 현역선수(은퇴선수로는 삼미창단 멤버 투수 김동철이 방출후 자살한게 처음입니다) 죽음이라는 점에 큰 멍에를 짊어지게된 오비구단은 그의 등번호를 프로야구 최초로 영구결번처리하기에 이릅니다.
2군이 유망주 양성소가 아니라 후보 및 퇴물선수 집합소라는 당시의 잘못된 인식이 낳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첫댓글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그런일도 있었구나...민트향기님덕분에 전혀모르는 부분을 알았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