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문학으로 고조선사 증명했다 >
[시사저널] 205.206 함병호 93/9/30.10/7
BC 1733년 홀달 단제 시대 단군 조선인들이 보았을 오행성의 결집 현상을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역으로 추적하여 컴퓨터 합성 기법으로 시각화했다.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조선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성 사학계로부터 위서 (僞書) 라는 `누명`을 쓰고 버려져 왔던 상고사 서적들에 대한 복권 작업이 젊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관심을 끌고 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표준 연구원 천문대의 라대일 박사는 학계에서 방치해 왔던 상고사 서적들의 내용을 천문학적인 방법론으로 검증한 결과 상당 부분이 당시의 실제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학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지난 2월부터 8월까지 약 6개월에 걸쳐 진행된 이들의 연구는 상고사 서적들에 나타난 당시의 천문 현상 기록을 당시의 실제 천문 현상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서적은, 단군조선 시대에 대한 풍부한 역사 기록과 함께 당시의 천문 현상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는 <단기고사>와 <한단고기>에 들어 있는 <단군세기>이다.
<단기고사>는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서와 옛 비문, 현장 답사 등 13년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엮은 단군조선사이다. 제1세 단군왕검으로부터 제47대 단군까지 약 2천여 년의 역사를 역대 임금의 재위 기간과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이름만 전해 오던 것을, 구한말의 한학자인 유응두가 중국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행촌 이암이란 선비가 저술한 단군조선 시대 역사서로, <단기고사>의 서술 내용과 큰 줄기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
오행성 결집, 큰 썰물 현상 모두 '사실'
이 서적들은 최근에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일부 내용이 과장돼 있다는 이유로 기성 사학계로부터 사료로서 인정받지 못해 왔다. 그러나 재야 사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이야말로 일제 식민 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해 왔다. 재야 사학계는, 일제 때 단군조선 말살 운동에 앞장섰던 일인 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조선의 고대사 관련 사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밖에 없다. 그 밖의 사서는 사서가 아니라 위서다.'라고 주장한 것을 기성 사학계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해 온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한 소국의 역사로 개악하고자 했던 일인 학자들에게, 적어도 고대 조선이 대륙을 사이에 두고 중국 민족과 자웅을 겨뤘던 고대 강국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이들 상고사 서적들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단기고사>와 <단군세기> 에는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 모두 10군데,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육안으로 보이는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 현상'이 한군데,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 한군데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천체 현상은 물리 법칙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전개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특정 시점의 행성들 위치를 알면 슈퍼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이 행성들의 과거와 미래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
연구 결과, 이 사서들이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무작위 적으로 날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것은 오행성 결집 현상에 대한 기록이었다.
<단기고사>나 <단군세기> 기록에 따르면, 제13대 단군인 홀달단제 50년, 즉 BC 1733 년에 다섯 개의 별이 서로 한군데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돼 있다. 즉 '戊辰 五十年 五星聚婁' 라는 한 줄의 글귀로, 무진 50년에 다섯개 별이 婁星 근처에 모였다는 뜻이다. 박교수팀은 기록에 나타난 BC 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백50년 사이에 오행성의 결집이 일어난 시점을 샅샅이 조사했다.
조사 결과는 처음에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BC 1733 년으로부터 바로 1년 전인 BC 1734 년에 매우 뚜렷한 형태로 오행성이 서로 아주 가까워져 있는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이 해 7월 13일 초저녁 다섯개의 별은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다.
이 날은 왼쪽 하늘에 초승달이 비스듬하게 떠 있어, 별빛이 한층 더 찬란하게 빛났었다. BC 1733 년을 기점으로 하여 5백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행성이 이보다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 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밖에 없었다. 박교수는 '기록 연수보다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약 3천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 라고 말했다. 만약 후대의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해 넣었을 경우, 이것이 서로 맞아떨어질 확률은 박교수의 계산 결과 0.007%, 즉 '세계 지도에서 임의의 한 장소를 지목했을 때 그것이 대한민국일 가능성' 에 비유될 정도로 매우 희박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오행성 결집 현상과 함께 박교수팀이 주목한 것은 큰 썰물에 대한 기록. 두 사서 모두 제29세 마휴단제 9년 (BC 935년) 때 `南海潮水退三倜` 라 하여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 있다. 오행성에 대한 조사와 마찬가지로, BC 935년을 기점으로 전후 2백년 간에 나타난 조석력의 작용을 조사해 본 결과, 기록에 나타난 해로부터 4년 후인 BC 931년 11월 22일에 이 기간중 가장 큰 조석력이 작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기록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전후 2백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4년 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대목이라고 박교수는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누군가가 작위로 이 기록을 써넣었을 가능성은 0.04%에 지나지 않았다.
박교수팀이 처음 연구에 착수할 당시 가장 크게 기대했던 것은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다. 일식 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때문에, 일식 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 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단군 조선기에 실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 현상이 약 1천 5백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비해 기록은 10개밖에 안돼 의미 있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다만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 기록이 주나라 때인 BC 776년인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제2세 부루단제 때인 BC 2183년 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어 중국 기록보다 적어도 1천 4백여 년이나 앞선다는 점, 그리고 10여 개의 일식 기록 중 다섯 개의 기록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중 두개는 해뿐 아니라 달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교수는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 박교수팀이 내린 결론은, 이 사서들이 그 동안 일인 학자들이나 국내 기성 사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전적으로 날조된 것만는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왜곡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확인하기도 어렵지만, 천문 현상은 윤색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사서들의 상당 부분은 단군 조선 당시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라고 박교수는 말했다.
기성 사학계도 연구 결과 인정
박교수팀의 연구는 그 동안 이들 사서의 내용에 대해 상당 부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기성 학계의 두터운 벽 때문에 실제 연구 과정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던 고조선사 연구 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윤내현 교수 (단국대 사학) 는 '그 동안은 주로 중국 사서들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기록들에 의존해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연구를 계기로 서지학자들이 참여하여 이 사서들의 내용을 좀더 정밀하게 검토한다면, 단군조선사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일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라고 말했다. 박성수 교수 (정신문화연구원, 사학)는 '기존 학계의 그릇된 통념을 깨는 획기적인 연구다. 이들 역사서의 내용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해도, 연구도 해보지 않고 이를 백안시해 온 학계의 풍토는 개선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박교수팀의 연구에 대해서는 그 동안 상고사 서적들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온 `한국 상고사학회` 측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이들의 연구 결과가 기성 사학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상고사학회는 10월에 발간할 예정인 이 학회 연구 논문집 <상고사학보> 에 박교수팀의 논문을 게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단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 상고사학회의 실무를 맡고 있는 최몽룡 교수 (서울대, 고고학)는 '연구 결과의 중요성을 인정해 논문집에 싣기로 결정했다. 단군 조선에 대한 연구는 결국 한국 문화의 뿌리에 대한 연구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문헌사적인 연구뿐 아니라 자연과학적인 연구도 활발하게 벌일 필요가 있다' 라고 말했다.
<한민족의 뿌리 사상> 송호수(宋鎬洙)
미국 S.Baylor 대학 박사과정졸업, 철학박사
동아대, 부산대, 고려대, 한성대 전임 및 강사
미국 S.Baylor 대학 명예교수 및 연구교수
저서 : '종교단체의 재무행정에 관한 비교연구'
'민족정통사상의 탐구'
'한민족의 뿌리사상'
'겨레얼 삼대원전(三大原典)'
최근 일본 학자 오향청언 (吾鄕淸彦) 씨가 쓴 책을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의 漢이라는 국호 자체도 옛날 3한 조선의 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 간 것에 불과하다' 고 말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대충 어느 정도 변조가 되었는가를 피부로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한사군(漢四郡) 문제만 보더라도 있지도 않았던 한사군을 평양에, 그것도 세 군데나 되는 평양 중에서 대동강의 평양만 있었다 하고 또 위만 (衛滿) 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본 사람들이 '보아라. 너희 조선족은 역사의 시초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느냐. 너희는 항상 피지배 민족이었지 언제 독립 국가였느냐' 고 하면서 우리나라를 영원히 자기네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당위론을 제시하는 전략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단군 이전에 환웅천황 (桓雄天皇) 의 역사 시대가 18대 1565 년 동안 있었고 또 그 이전에 환인천제 (桓因天帝) 시대가 7대 3301 년이 있어서, 금년까지 9183 년이라는 사실이 '삼성기'(三聖紀) 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성기' 의 문헌사적 고증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이 책을 쓴 안함로 (安含老)는 서기 600 년경 신라 시대 사람인데 삼국유사가 나온 것이 1200~1400 년경이니까, 그보다 훨씬 더 먼저 기록된 것이고 이러한 '삼성기'의 기록을 그대로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나라 역사의 연조는 9 천 년이 넘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9 천 년이란 역사를 어떻게 입증하느냐, 그러한 문헌 하나만 가지고 이것을 어떻게 외국학자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것이 합리화될 수 있는 외국 학자들의 논문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몇년 전에 일본에 와서 발표한 소련의 여류 민족학자 R.S.M 자리가시노바 씨는 '한동 〈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살았고 신석기 시대 초에 이미 독자적인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고 했습니다. 신석기 시대 초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 1만 2천 년 전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 이미 우리 동이족들은 주변 국가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 높은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와 적대 관계에 있는 공산국가의 학자가 발표했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있죠. 역시 공산국가인 중공의 유명한 고고학자 당란이, 1977.7. 14 자 중공 '광명일보' 를 통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산동 반도 지역에서 남한 넓이 만한 광대한 지역에 이르는 대문구 문명권 (大汶口文明圈) 을 발견했는데, 이곳을 발굴하니까 문자가 나오고 그 곳을 통치한 소호씨 (少昊氏) 란 통치자 이름까지 나왔으며, 이것을 방사선 탄소 측정을 해 보니까 지금으로부터 5785 년 전 것' 이라고 합니다. 5785 년 전이라고 하면 단군 건국보다 약 1500 년 전의 일입니다. 그 당시 이미 산동 반도에는 문자를 사용한 고도의 문명 국가가 있었는데, 그 통치자인 소호금천씨 (少昊金天氏) 가 동이족이라는 사실이 중국 고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사변'(古史辯)만 보더라도, 이 책은 우리가 쓴 책이 아니고 중국에서 나온 책입니다. 백화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소호씨는 동이계야 (東夷系也), 동이지인 (東夷之人) 이라' 고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태호 복희씨 (太호伏犧氏), 여와씨 (女蝸氏), 소호금천씨가 전부 동이족이라는 것을, 중국 사람 자기네 손에 의해 밝힌 겁니다
첫댓글 무녕왕릉이 발굴되고, 거기서 지석이 나왔을때, 사람들은 삼국사기의 기록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삼국사기의 모든 기록을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처럼 한 가지 사실이 들어맞는다고 해서 연구나 고려의 대상이 될 지언정, 거기에 적힌 모든 사실을 받아들여 한다면
우리가 비판하는 삼국사기에도 비슷한 논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며, 역사학은 단순한 서지학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는 대단히 힘들것입니다. 그리고 참고로 동이란 한민족 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동쪽 오랑캐 전체에 대한 일반대명사입니다. 통지에서는 이란 곧 구이 모든 오랑캐를 나타낸다고도 적고 있습니다.
자료가 없다고 무조건 아니라고만 할수도 없지 않나?
일관적인 논리적용의 문제이겠지요....?
술먹는 하마님 말씀대로 역사는 총체성으로 따지는것이지 부분으로만 따지는게 아닙니다. 일딴 전체적인 설명이 힘들고 근거가 부족하면 어디까지나 가설이라고 밖에는 이야기 할 수 없는것입니다.
처음에는 다 부분으로 시작하는거 아닌가요? 사다함님 말씀대로 "부분"이기때문에 일관적인 논리적용도 힘들겠고..또 가설이라함은 후에 사실로 이어질수있는 여지가 있다는 말도 되는건 아닌지..
제가 말하고 싶었던 일관적인 논리 적용이란, 지석사건 하나로 삼국사기를 완벽한 사서처럼 이야기할 수 없는 것 처럼, 환단고기에도 그러한 일관적인, 그리고 역사학을 연구하는 이로서는 당연한 시각이 적용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하마님은 그러한 시각을 적용시키기에 부족하다는 말씀인가요?...아님..전현 근거 없는 이야기란 말인가요?...(하마님 글에 대해 말꼬리잡자는게 아니고요..순수하게 하마님의 생각이 궁금해서요..)
흐음....아까 사다함님께서 지적하신 부분과 총체성문제가 제가 한단고기를 일단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말씀드렷듯이 저는 고기(古記)의 자구 논쟁에 참여할 만큼 서지학적 해석을 자신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렸듯이 부분은 모두가 각자 옳은 면을 가질 수는 있으나, 부분이 모여서 하나의 총체성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한 총체성을 이루는 데에는 많은 사례 뿐만이 아니라, 타국의 사서와의 연계성,고고학적 발견 외에도, 문화인류학적 고찰, 사회학적 고찰, 과학사에 이르는 폭 넓은 분야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한 부분에서 현재의 환단고기는 '강단사학'보다도 이러한 총체성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굳이 위서라고 주장하다기 보다는 여러 가설 중에서 다소 다양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보고 싶습니다.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다. 위서다 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저 역시 거절의 입장입니다.
그렇군요..이런 글들을 옹호하기위해, 하마님 글이 틀렸다고 꼬리글을 단건 아니였습니다..그리고 하마님 꼬리말에서 제가 듣고 싶은 말을 들었으니 만족합니다..^^..이만 마칩니다..
네, 부족한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에게도 좋은 자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