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가 없는 나라 傳說荒世清凉劑-전설은 삭막한 세상의 청량제다 弄談銹輪潤滑油-유머는 녹슨 바퀴의 윤활유다 傳說無史荆棘路-전설 없는 역사는 가시밭길이고 弄談生活沙嚼顔-유머가 없는 삶은 모래 씹은 얼굴이다 我現生活傳說失-우리의 현실 삶은 전설이 사라졌다 活中弄談失落久-생활속에서 농담을 잃은 지 오래다 言中泡沫看蛇牙-말속에 거품과 독사의 이빨만 보이고 眼光充血野獸似-눈빛은 충혈된 야수처럼 번득인다 山入長柱失笑容-북한산 입구 장승도 웃음이 없어졌고 漢江六風失虛風-한강위의 6월봄바람은 허풍을 잃었다 傳說祖巖重沈默-전설속 할매바위 무거운 침묵은 是因世上無笑事-세상사 웃을 일이 없기 때문일까? 농월(弄月)
점잖고 근엄하게만 생각되는 공자(孔子)도 농담(弄談)을 하였다.
논어(論語) 제17편 양화(陽貨) 4장 子 之武城 聞弦歌之聲. 夫子 莞爾而笑曰 割鷄 焉用牛刀. 子游對曰 昔者偃也 聞諸夫子 曰 君子 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子曰 二三子 偃之言 是也. 前言戱之耳. 공자(孔子)가 무성(武城)이라는 마을에 가서 현가(弦歌)의 소리를 들으시고 기뻐하시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현가(弦歌)-가야금이나 거문고등 현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닭을 자르는데 어찌 소 잡는 큰 칼을 쓰느냐?”하고 이에 무성(武城) 마을을 다스리는 책임자(邑宰)로 있는 공자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대답하였다.
“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읍니가” “군자가 도(道)를 배우면 백성들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道)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현가(弦歌)로 도(道)를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자 공자가 다른 제자들을 보고 말씀하셨다. “얘들아 자유(子游)의 말이 옳다. 아까 내가 한 말은 농담(弄談)에 불과하였다”
공자가 노(魯)나라의 무성(武城)이라는 작은 고을에 갔을 때, 마을 사람들이 거문고 비파(琵琶)등을 타면서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때 무성(武城)에는 공자(孔子)의 제자 자유(子游)가 지방(地方)을 다스리는 지방 장관(長官)으로 있었는데, 예악(禮樂)을 장려하였으므로 읍민(邑民)들이 거문고와 비파(琴瑟)를 즐겼던 것이다.
▷위의 논어(論語)의 한자(漢字)중 “현(弦)”-거문고와 같은 현악기(絃樂器)다. “완이소(莞爾笑)”-빙그레 웃는 다는 뜻이다. “언(偃)”-공자의 제자인 자유(子遊)의 이름이다. “이삼자(二三子)”-제자(弟子)들을 다정하게 부르는 말이다.
거문고 소리에 맞춰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렸다는 것은 자유(子遊)가 무성(武城) 마을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예악(禮樂)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들은 공자(孔子)는 자기의 가르침대로 실행하는 제자인 자유(子遊)가 대견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너무 곧이곧대로 시키는 대로 하는 제자의 고지식함에 웃음도 나왔으리라. 그래서 빙긋이 웃으며 이 작은 마을 하나 다스리는 데 어찌 예악(禮樂)까지 필요하겠느냐고 농담(弄談)을 말한 것이다,
고지식한 자유(子遊)는 정색을 하고 답변한다. 전에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공자(孔子)는 고지식한 자유에게 더 이상 농담(弄談)을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말이 농담(弄談)이었음을 인정한다.
농담(弄談)으로 제자(弟子)에 대한 대견함을 표시하는 공자(孔子), 공자(孔子)의 농담을 이해 못하고 정색으로 맞서는 제자 자유(子遊)의 고지식함.
자유(子遊)의 항의를 인정하고 자신의 말을 취소하는 공자(孔子)의 모습이 짧은 글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것이 논어(論語)를 읽는 즐거움이다.
농담(弄談)의 한자 구성은 아래와 같다 ▷농(弄)자의 구성 玉-구슬옥 + 廾-두 손으로 받들공 =농(弄) 옥(玉)을 두 손으로 받들고 좋아하는 모습의 글자다
▷담(談)자의 구성 말씀 언(言) + 불탈 염(炎) =담(談) 열나게 말하다의 뜻이다
속담에 君不戲言(군불희언)이라 ! 군주(君主)는 농담(弄談)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군주의 말에 믿음(信義)이 없다면 위신(威信)을 잃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유머(humor)가 너무 없다. 민족성(民族性)때문인지는 몰라도 너무 권위주의고 딱딱하다. 책을 안 읽는 탓도 있겠지만 인성(人性)을 부드럽게 하는 노력을 안한 탓으로 본다.
기독교 성경이 근엄한 경전(經典)이라 생각 되지만 곳곳에 해학적인 농담이 많다. 그렇게 농담을 함께 하지 않았으면 예수는 그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목사들의 설교가 마치 자신이 예수인 것처럼 권위적이기 때문에 예수의 인간다움을 버리고 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말은 사실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고통 받는 인생들을 구원하고 초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자신이 걸머진 초월적(超越的)인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으리.
▷역사속의 위대한 정치인 중에 처칠만큼 유머가 풍부한 사람도 드물다. 미국을 방문한 처칠에게 한 여인이 질문을 던졌다. “연설할 때마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자리가 미어터지는데 이런 군중을 보면 기분이 정말 짜릿하시겠어요?” 하니까
처칠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물론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정치연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형(絞首刑)을 당하는 것이라면 지금보다 최소한 2배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란 사실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농담을 통해서 자기 성찰(省察)을 말하는 처칠이다.
농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