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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사랑맑고고운글 스크랩 [이야기] 비운의 이우왕자
논시밭에 망옷 추천 0 조회 318 14.10.20 12: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종의 손자였던 이우 왕자 이야기

 

이우왕자 모습

 

            이우왕자의 모습                                                이우왕자의 초상화    

  

 

 

 

 

 

 

 ‘얼짱왕자’로 세상에 처음 알려졌던 대한제국 의친왕(義親王·고종의 둘째 아들)의 아들 이우(李) 공.

 33세 짧은 생애를 마감한 ‘얼짱왕자로 알려진 조선 비운의 왕자,

 이우왕자.

 

최근엔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세계 얼짱 왕족 서열 10위’가 나돌고 있는데,

이우 공은 1위 영국 윌리엄 왕자, 2위 모나코의 안드레아 왕자 등에 이어 6위에 랭크 돼 있다.

 

애초에 이우 공에 대한 관심의 초점은 수려한 외모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 이우 공에 대한 인기와 관심은 지난해의 ‘얼짱 열풍’과는 분명 다르다.

‘얼짱 왕족 서열’ 역시 이미 사라진 대한제국의 황실을 실체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얼짱 열풍’과는 구별된다.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으로 관련 문헌을 수집, 연구하고 있는 한 인사는 “2005년 7월 영친왕의 아들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 씨가 일본에서 사망해 장례가 치러지고 ‘황사손(황실의 대를 잇는 후손)’이 결정되면서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경제적, 물질적 발전을 이루고 나니 ‘우리는 누구인가’를 되짚어보려는 생각이 드는 측면도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서울대 박물관에서 5월31일 시작된 ‘마지막 황실, 잊혀진 대한제국’전이 성황을 이루고 있는 것도 대한제국

‘로열 패밀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부쩍 높아졌음을 증명한다.

전시를 기획한 선일 서울대 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가족 단위 관람객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드라마 ‘궁’ 때문인지 ‘멋지다’거나 ‘왕실이 있으면 멋있겠다’는 등의 말을 하는 10대 관람객들이 꽤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 황실, 잊혀진 대한제국’전에도 ‘얼짱왕자’ 이우의 사진이 한 장 전시 돼 있다.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로 일본 도쿄 유학길에 올랐던 영친왕이 1918년 1월 고국을 방문해 경성유치원에 들렀을 때,

당시 유치원생이던, 이우 공이 앞으로 나와 ‘매화와 꾀꼬리’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얼짱왕자’ 이우 공은 어떤 인물이었나.

인터넷에서 떠도는 흑백사진들과 국립 고궁박물관 등에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얼짱’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우 공이) 주지훈 필이 난다’ ‘원빈 닮았다’는 댓글도 있을 만큼 그는 유달리 현대적인 마스크를 가졌다.

 

황손 가계도

 

 

 

이우왕자 1912년 - 1945년

1912년 출생
1922년 일본 유학
1929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입교
1931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표병과 입교
1940년 육군대학 54기 졸업
1942년 소좌 진급, 중국 산사성 태원으로 전출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피해로 사망
인물소개 : 고종황제의 손자, 의친왕의 2남

고종의 손자이자 셋째아들 의친왕 이강과 셋째부인 수인당 김홍인의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우의 나이 다섯 되던 해에 흥선대원군 집안의 종주 이준용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이준용의 부인 김씨가 고종에게 간곡히 아뢰길..

"황실의 근본인 흥선대원왕가에 손이 끓겼으니, 양자를 들여 맥을 잇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이에 고종이 친히 의친왕의 둘째 아들 어린 이우의 손을 잡고 운현궁에 나아가 말하기를..
"이 아이로 하여금 운현궁을 잇게 하라." 하셨다.

 

<이우왕자의 어린시절>


고종이 임명한 운현궁의 종주 이우는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흥왕이 되어야 할 당당한 황가의 일원이나,1910년 나라가 일본에 강제 합병되면서 황실이 왕실로 격하되자,

흥왕이 아닌 공작으로서 불리워 진다. 

이우는 세살 위의 형 건왕자가 일본에 순종하여 일본이 정해준 여자와 저항없이 결혼한데 반해..
황가의 후손으로서 의기가 넘치고,일본을 증오하여 결코 일본에 순종하는 법을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의친왕과 고종황제는 힘앞에 굴복하지 않고 황실의 기개를 보여주는 이우왕자를 매우 아꼈다.)

반드시 일본왕족과 결혼해야 하는 일본의 지침대로 일본이 일본 왕족과 강제로 결혼시키려 하자,

이우왕자는 "일본인과 결혼할 수 없다"며 버텼고,

독립운동가 유동렬의 딸과 정혼했지만,

결국 일제의 반대로 친일파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하는 타협을 하여 이청(1936년 생존),이장(1941--1966) 두 아들을 두었다.

본래 약혼자였던 독립군 유동렬 장군의 서녀(그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에게서 아들 이초남을 두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 이우도 1922년 10세에 숙부 영친왕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유학갈 수밖에 없었고..

1929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 입학을 하여 군인의 길을 걷고 일본군 정보 참모까지 올라 간다.

1931년 육사본과 포병과로 입교한 이우는 일본 급우와도 마찰을 일으켜,

일본 정부로서는 요주의인물로 감시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감시와 군대라는 제한적인 공간에서도 이우는 대한의 황족으로서 전혀 굽힘이 없어,
육사생활에서도 일본말을 거의 쓰지 않고, 한국말을 썼으며,

한국인 육사생도에게는 커다랗게 한국말로 소리치며 호령하곤 하였다...

그런 그는 일본인들에게는 사납고, 난폭하여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한국 동포에게는 항상 부드럽고 따뜻했다고 한다...

이우는 술자리를 가지면, 꼭 '황성옛터'를 불러 고국의 그리움을 달래곤 하였는데..

이런 그에게 일화 하나가 있다... 

이우가 서울에 있을때 하루는 전라도 지방의 농부들이 이우에게 몰려와 일본군이 호남평야의 곡창지대에 작전도로를 내면서 땅을 가로 채면서도 보상을 안해 준다고 호소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우는 즉시 용산의 일본군사령부로 갔다.

그리고 당시 도로건설을 담당하던 장군을 만나 공사를 취소하라고 요청하였다.

담당장군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고.

이에 이우는 즉시 권총을 빼어 장군의 머리에 겨누며,

"황족이며, 공작인 나는 너 하나 죽여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 즉시 죽여주마."라고 소리쳤고,

이 말에 전라도 농민의 청원은 이루어졌고..
이우는 상관에 대한 항명에도 불구하고, 무사할수 있었다.. 

이우는 1940년 육군대학 54기를 졸업하는 것으로 군사 교육을 마쳤으며,

1942년 소좌로 진급한 황족으로서 선봉에서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정책에 따라

중국 산서성의 수도인 태원으로 전출되었다.

이후 북지방면군 제1사령부 정보참모로 근무하며 중좌까지 진급하였다.

이우는 태원에서의 근무하는 3년 동안 독립운동을 준비한다.

육사동기 이형석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본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 때까지 기다리라"고 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보 참모의 직위를 이용해서 독립군들에게 수집한 정보를 넘겨 주는 등...

독립군의 후원자로 활약을 하며, 독립군을 지원하는 등 독립에도 큰기여를 하였으나,

이우의 독립운동은 워낙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때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남겨진 기록이 별로 없다.

 

오로지 주변 증언으로 종합하여 보면,

이우는 근무지 근처에서 태항산 유격대의 조직 확장에 은밀히 간여 하였다.

 

이우는 정보참모로 있으면서 판세가 일본에 불리하다는 것이 판단되면 이 태항산의 유격대와 주변 백두산 근방의 독립군들과 일본군 내의 한국병사들과 연합하여,

일본의 관동군과 전투를 벌일 계획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대한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 황족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당당히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수도 있었을 만큼 실효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이 이우를 교육참모로 보직을 바꾸고,

히로시마에 발령을 내 버렸다.

 

이에 이우는 이제껏 쌓아 놓은 공든 탑이 무너질까 걱정하여 운현궁으로 들어가 장장 6개월을 버티며 전출을 거부하였고,

전역을 신청하기도 하고, 한국에 배속시켜 달라는 청원도 하였으나, 모두 거절 당하자,

어린 아들 청에게 설사약을 먹여 병간호를 위해 늦게 간다고까지 하면서 히로시마로의 배속을 늦추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그사이에 이우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자신이 키워 놓은 태항산 유격대를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편입시키고자 계속 태항산과 연락을 취하였다.

그래서 이때 일본정부가 이우의 부관으로 임명한 이우와 동계급인 요시나리 히로시라는 군인이 있었다.

그는 부관이라기 보담  애초에 이우를 감시하여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상부에 보고하는 밀정의 임무에 충실하였지만, 후에 가서는 이우의 인품과 배포에 매료되어 이우의 충복이 된 군인이다.

 

그런 요시나리가 이우에게 히로시마로 갈 것을 설득하여,

이우는 6개월 만에 운현궁을 나서 일본으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하필 히로시마에 첫 출근하게 된 날이 미국의 히로시마원폭 투하로 인해,

결국 이우왕자는 방사능에 피폭되어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그후 호전 될 것 같았는데,

요시나리가 정밀 검사를 위해 일본에 요청해 도쿄병원으로 이송하였지만,

이송 후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서 돌아 가셨다.

(이우의 임종을 지킨 요시나리는 이 일이 자기 책임이라고 하여 할복 후 권총자살을 해서 죽었다고 한다.)

이 우의 시신은 조용히 귀국하여 경기도 마석에 모셔졌는데,

그의 장례식날에 일왕이 마침내 항복선언을 하니 바로 그날이 8월15일이며,

이 우은 죽어서야 그토록 열망하였던 조국의 해방을 볼 수 있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시신이 깨끗한 것을 수상히 여긴 이청이 아버지의 시중을 들던 자들에게 탐문한 결과 조선황족을 멸하기 위한 독살임을 자백 받았다고 2007년 출간한 책에서 밝혔다.

 

만일 인물 뿐만 아니라 인품, 기개 등 모든 것을 고루 갖춘 이우 왕자가 살아 있어서,이승만 대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면 역사는 분명 달라졌을거라고 이우왕자 간호인이 말했다고 한다.  

 

 

내가 이우 공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때 유정순이라는 비극적인 사랑을 지닌 여인을 알게 됐다.

유정순의 삶은 정말 슬펐었다.

 

유정순은 독립투사 유동열의 서녀로 서녀란 이유 하나로 족보에서 인정되지 못했다. 

 

유동열은 고종황제의 오른팔이었고 따라서

고종황제가 아끼던 의친왕의 차남 이우의 정혼자로 유정순이 정해졌다.

그러나 독립투사의 딸과 왕자가 맺어지는 건 일제강점기 당시 허락될 수 없었다.

 

그 때, 친일파 박영효는 서손녀 박찬주를 염두에 두고 수를 썼다.

의친왕은 일본 여자보다 조선 여자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박찬주와 이우왕자는 결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우왕자와 유정순 여사는 결혼 전부터 사랑하던 사이였었던 모양이다.

혼인으로 인해 이우왕자는 박찬주에게서 아들 둘을 낳게 되었지만 유정순과의 이별은 없었다.

 

유정순 역시도 이 고독하고 비극적인 사랑과 함께 아버지의 길을 따라 독립투사가 되었다. 

유정순 여사는 독립투사로써 걸출한 활동을 했다.

 

이 때, 유정순 여사는 아버지께 자금 전달 역할을 맡았는데

자금을 주는 사람은 의친왕과 이우 왕자였다.

그랬으니 이우 왕자와의 사랑도 끊이지 않았을 테고 아들까지 낳게 됐다.

 

아들을 낳은 유정순 여사는 이우 왕자의 도움으로 아들과 함께

이우 왕자의 일본 집 조금 먼 곳에서 살게 됐다.

이우 왕자도 가끔씩 유정순 여사 모자의 집에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유정순 여사의 아드님 초남이 돌이 됐을 때 이우 왕자가 찾아왔다.

그 다음날,

이우 왕자는 원자폭탄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유정순 여사의 아들은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왕족 말살 정책에 의해 숨어 자라게 되었다.

1950년 아버지 마저도 납북에 의해 살해당하고,

 

유정순 여사는 아들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아들 분의 고등학교 시절,

박찬주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박찬주는 이를 부인했고 유정순 여사는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우왕자는 일제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여인 박찬주와 결혼했다 칭송받았지만,

유정순 여사는 한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족보에도, 가족에게도,

일생을 사랑한 남자의 부인으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들의 존재마저도 부인당한 채

죽음을 맞이한 여인.

 

늘 한과 고독, 외로움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인터넷에서 여기저기 자료를 수집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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