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속의 학창시절 2-6
내가 졸업했던 김천 중고등학교에는 지금도 계속이 되고 있지만 그야말로 살을 에는 듯 한 혹한 속을 달리는, 전통으로 내려오는 내한(耐寒)마라톤 이라는 것이 있는데 말 그대로 “추위를 견딘다” 하는 마라톤이 되며 인내심과 지구력을 기르기 위한 것이어서 신발과 팬티만 착용하고 십리가 좀 넘는 유일하게 얼핏 잘못생각하면 ‘동쪽으로 떨어지는 강’이라 생각하게 되는 낙동강[落東江]이지만 실은[洛東江]이 되는데 김천에서는 북쪽으로 흐르는 줄기 감천(甘川)냇가의 큰다리(고유명사)까지 갔다가 돌아와야 한다. 그 당시는 몸속에서는 열이 나지만 바깥의 찬 공기 때문에 피부는 식어서 모공이 막혀 땀이 밖으로 나오지를 못하며 반환점(返還點)에 가면 등의 맨살에다가 파란 잉크의 도장을 찍어 주기 때문에 그곳까지 갔다가 왔다는 증거가 되며 몇 등으로 들어왔느냐에 따라서 체육 점수가 정해지게 된다.
나는 나이도 키가 큰학생보다는 두살이 적고 평균키의 학생들 보다는 한살이 적어니 키도 작아서 심신을 최대한으로 경주[傾注:마음이나 힘을 한곳에만 기울임]하여 경주[競走]를 해보건만 대개 360명중 대게 240번째로 교문에 들어서게 되는데 몸속은 열이 나지만 피부는 차가웠다. 중고등 6년 동안 합쳐 여섯 번을 뛰었으며 같은 교문을 사용하는 같은 학교이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입학시험을 치러야 되며 그 당시(當時)는 3.6대 1의 경쟁이었다.
고등학교시절 시험문제에 쥐의 천적(天敵)이 무엇이냐고 문제가 나왔는데 고양이라는 정답은 반밖에 안되었고 나 자신도 답을 쓰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상식이하의 문제이어서 너무 어렵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교과서에는 물, 햇빛, 공기는 자유 재산이라 했는데 지금 보면 조금은 빗나간 말이다. 이 도시가 지역적으로는 여섯 개의 방사선으로 뻗어 나가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는데 영동, 상주, 선산, 구미, 고령, 무주방면이 된다.
사방에서 지방 학생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교육 도시가 되므로 입시 전형(銓衡)에 합격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으며 그때말로 소위 ‘농땡이(膿; 고름 덩이)’들은 불합격되기가 십상(十常)이며 각 학년마다 한 반에 60명씩 6개 반으로 편성 되어서 학생 수가 많은 편이었다. 이 학교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생겼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사립학교(1931)로는 첫 번 째 로 생겼는데 창설자는 최송설(1855-1939)여사이신데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소개 하고 저 한다. 내가 보관중인 김천시사[金泉市史]보면 할아버지는 홍경래란에 연루되어(유배지에서 사망)몰락한 김천시 문당동 에서 글방에서 글을 가르치며 근근득생하는 아버지 화순최씨의 장녀로 태어나신 후 식당을 하시다가 조상의 원한을 풀 겸 동학란 때문에 상경하셨단다. 서울서 권문세가의 부인들과 교제를 쌓던 중 고종의 계비 엄비가 황태자 은을 낳자 입궐해 그의 보모가 되셨는데 대한제국황실에서 부와 권력을 거머쥔 후 1901년 고종의 특명으로 집안을 복권시켰고 궁을 나온 뒤 사재를 죄다 털어 학교를 세운다. 처음에는 삯바느질을 하여 밭을 사고 그 후에 마당만한 논을 산후 상경하여 출세를 하시는데 유훈(遺訓)이 “정재(淨財)를 육영(育英)에 쓰라”이니 반찬 없는 밥을 먹어가며 전 재산을 털어 학교를 세우는데 교가는 현제명 작곡이다. “삼한대처[三韓大處]김천고을 황악산 밑에 우뚝 솟아 크나큰 집 우리의 모교 우리들의 맘과 몸이 배우는 포부 큰 이상에 새로운 일 현실이 주장.” 학교 뒷산에 제실(사진참조)이 있었다는데 내가입교 할 적에는 한국전쟁때 이미 불타 버린 후 라 건물터만 남아 있었고 뒤편 송정에는 묘만이 남아 있었는데 96년을 사셨던 나의할머님께서 말씀으로 “석관을 만들어 놓고 고부 할마이는 그 속에 들어가 가끔 누워 본단다.” 라고 하셨다.
1975년 이민을 온 후 12년만에 찾은 모교의 뒷산 정걸제가 있엇던 곳을 가보았는데 주춧돌만 남아있었다.
김천 중고등학교의 교주 崔松雪여사(1939년 작고)는 1931년에 학교를 세우셨는데 한때 명성황후의 둘째아드님 순종(27대 제위기간 4년)의 보모이셨다(학교 뒷산 중턱에 있었던 정걸제) 송설 여사께서는 여류시인이기도 하셨는데 소개하자면……. 그 당시 나는 바람타고 씨가 날아와 생겨난 소나무였다……. 시원스럽게 선조들의 한을 풀고 따뜻한 봄날을 회복하니 그때 나는 임금님의 은혜를 흠뻑 받은 늙고 큰 소나무였다. 한편 조상의산소를 깨끗이 정돈하면서 추모의 정을 이기지 못한 그때의 나는 조상의 산소에 부슬부슬 내리는 눈 이었다.하셨다. 소나무는 나무중의 나무이고 눈은 순수한 물이 된 것이어 송설이란 이름은 여기서 왔는데 눈의 모양이 6각형이니까 배지도 순은으로 만든 군에서 쓰는 소령 계급장 비슷하게 생겨서 교복의 하얀 칼라(collar=깃)바깥에 붙여지며 은이 귀하던 그 시절에는 굉장히 비싸게 만들어졌다. 해방 전 돈 30만원을 마련하여 1931년 2층으로 된 붉은 벽돌로 된 건물을 지어‘김천 고등 보통학교(金泉高普)’로 명명(命名)했는데 처음에는 5년제(삼촌도 6년제 졸업, 세루양복 착용)가 된다고 했다. 여담으로 김천시사에 보면 1923년 금릉청년회 총회에서 물러난 고덕환 박노익등 10명은 1924년 고등보통학교 기성회 조직을 재개 기금목표 30만원을 책정하였다. 그 당시 사설강습소였던 금릉학원 2층의 건립비가 1만원을 조금 상회하는 큰 돈인데 30만원이란 돈은 금릉회관 30개를 지을수 있는 돈이고 당시로서는 연간 소작료 3천석을 받을 수 있는 땅을 살수 있는 거금이었단다. 실업학교의 설립 인가는 쉽지만 젊은 청년들에게 민족사상이 필요하다고 느끼신 최송설당[崔松雪堂]여사의 목적이 가미된 이 인문 사립학교 설립은 난항을 거듭하게 되는데 송설교육재단 법인은 허가신청서를 만든 후 도지사와 다케베(武部)학무국장 서울의 사이토(齊藤)총독에게도 사정을 했지만 진전을 보지 못하게 된다, 나중에는 학무국장이 그 일로 일본중앙정부와 협의 차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온 후 경북도지사로부터 생색의 전화를 받게 되는데 그동안 지연 되었던 이유를 커버하기 위하여 허가서에 건축비가 모자라니 금액을 올린 후 다시 제출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 송설당이 추가로 무교동 주택을 판 후 제공하신 2만원과 후원회가 거둔 십만원을 포함 도합 42만 2천원으로 2층 12교실을 일본인 건축회사 게이조 마구미(京城間組)에 낙찰 설립을 하게 되는데 교지는 김천시 부곡동 777번지 송설당의 별장 정걸제 아래(8,876평)가 되는데 송설당 여사는 서울의 집이 없어졌으니 거처를 정걸제로 옮기게 된다. 이 공사는 전라도산 황등석(黃登石)을 사용했는데 쇠보다 강하다는 돌로서 김천에서는 처음 보는 돌이며 벽돌은 평양산으로 기차로 실어온 후 김천 역전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우마차로 운반 하였단다. 8천 여평의 운동장을 만드는 데는 중장비가 없던 시절인지라 개미떼처럼 많은 인부들이 흙을 지개로 운반 하니 각처로 부터 구경 오는 사람이 많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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