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깊어질수록 그와는 멀어지도록 노력하라. 좁은 새장으로는 새를 사랑할 수 없다. 새가 어디를 날아가더라도 당신 안에서 날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은 점점 더 넓어지도록 하라.
사랑이 깊어질수록 2
사랑이 깊어질수록 대개의 사람들은 소유와 집착에서 비롯되는 의존의 아픔을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의미는 아닐 터, 구속하거나 사로잡는 것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도 원하지 않으며, 모든 애착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참으로 신비하게도 사랑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아야 스스로 가득 찰 수 있다. 만일 지금 당신이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다면 더 이상 바라지도 더 이상 가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사랑 하나로만 가득 차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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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
처음에 어린 새가 날갯짓을 할 때는 그 여린 파닥임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하지만 날갯짓을 할수록 더 높은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삶이 꾸준히 나아가기만 하면 얼마든지 기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거다. 그렇다. 맨 처음 너를 알았을 때 나는 알지 못할 희열에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곧 막막한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내가 사랑하고 간직하고 싶었던 것들은 항상 내 곁을 떠나갔으므로. 그래도 나는 너에게 간다.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너에게 당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그렇다. 내가 환희를 느끼는 것은 너에게 가고 있다는 그 자체다. 마침내 너에게 닿아서가 아니라 너를 생각하며 걸어가는 그 자체가 나에겐 더없는 기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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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부터
아침 일찍도 오시던군요.
그대인가 했더니, 아침 일찍도 오시는 비.
내 우울함의 시작.
그립다는 것은 그대가 내 곁에 없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런 그대가 내 곁에 있어 줬으면 하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내 가슴 한 쪽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립다는 것은 다시는 못할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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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잎 사랑 - 상처받기가 겁나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외로우냐고 묻지 마라.
...............................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을 마음 속에 섬기는 일은
어차피 고독한 수행이거니.
그랬다. 내게 있어도 사랑이 모든 것이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구석진 골방에 처박혀 죄없는 담배만 죽이던, 긴 밤 내내 전해주지도 못할 사연들만 끄적이다 날이 뿌옇게 새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그 어둡고 음습한 시절, 세상에는 사랑으로 인해 더없이 행복한 삶도 있겠지만 때로는 슬픔만 안고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 때 나는 알았다.
그랬다. 사랑은 우리에게 행복만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었다. 멋모르고, 당연히 사랑은 달콤하고 황홀할 것이라고만 상상하던 나에게 사랑은 너무나 혹독한 시련이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두 사람의 감정만으로 사랑이 성사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이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랑이 이루어지리라 맏은 것은 세상을 너무 쉽게 본 데서 비롯된 오산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두 사람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현실'이라는 높은 장벽이 있음을 깨닫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 경우,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쉽게 포기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별할 줄 뻔히 알면서도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터뜨린다는 것은 어찌 보면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별이 눈앞에 와 있는데도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더 매진하고 있다면 그런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좀더 심하게 말하면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런 사랑에 빠지고 그런 사랑에 전념한다. 어떤 말을 듣더라도 당사자들은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하기야 세상의 논리에 찌든 얄팍한 정신으로 어떻게 사랑을 하겠는가. 이해득실을 따지고 계산에 치우친다면 그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닌 계약일 뿐일 텐데.
언제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안에 난 내 모든 것을 풀어 놓았다.
가을날, 단풍잎에게 가서 물어 보라.
낙엽이 되어 떨어질 걸 뻔히 알면서도
왜 그 순간까지 자기 몸을 남김없이 태우는지.
서로 사랑하면서도 끝내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안타까움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연인들의 모습은 그래서 진정 아름답다. 기실, 사랑으로 인해 가슴 아파해 본 사람들은 알리라. 사랑은 결국 나 자신의 존재마저도 그대에게 주는 것임을. 한 방울의 물이 시냇물에 자신을 내어 주듯, 또 그 시냇물이 강물과 바다에 자신을 내어 주듯 사랑이라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그대에게 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나는 눈물겹더라도 너만은 눈부시도록 하는 데 주저함이 없지 않은가.
결국 나는 살아가면서 유일한 가난함이란 가슴 속에 '사랑'이 없는 것임을 말하고 싶다. 비록 슬픔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해도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 삶이 넉넉할 수 있었지 아니한가. 비록 그 사람은 곁에 없지만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고 생각하면서. 상처받는 것이 겁나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여, '사랑'을 빠트려놓고 한번 살펴보라. 당신의 인생에서 도대체 가치로운 것이 무엇이 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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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지 말 것
애써 외면하지 말 것. 그가 내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마음의 문을 열 것. 내 사랑이 그에게 막힘없이, 또 자유롭게 흘러 넘치도록.
그 사랑이 마치 서녘 하늘에 펼쳐 놓은 노을과도 같아 그걸 바라보는 그의 가슴까지 적셔 줄 것. 이젠 더 이상 뒤에 물러서 있지 말 것. 사랑을 보여 주기를 주저하지 말 것. 설혹 그 사랑이 괴롭더라도 과감히 부딪칠 것. 소심하게 앉아만 있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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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밑
어디에서 나를 찾는가, 나 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어디쯤서 나를 기다리는가, 나 당신의 마음 안에 있는데.
진작부터 나 당신의 내부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당신이 알아 주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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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확신과 신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다 보면 아주 가련한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는 아들의 친구 징클레르에게 에바부인은 사랑에는 확고한 신념과 의지가 필요하다는 뜻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해 준다.
"사람은 누구나 가망없는 일에 열중하면 안 돼요. 당신이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나는 알고 있어요. 자신과 가능성이 없는 일은,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충동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체념해야 하지요. 만약 도저히 체념할 수가 없을 때는 그것을 철저하게 원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해야지요. 자신의 소망을 틀림없이 실현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면 그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법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무엇인가를 소망해 놓고도 곧 그것을 후회하고 있어요. 그러면 안 돼요. 한 가지 목표를 세우면 거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제거해 버려야 해요."
그리고 나서 에바부인은 별을 사랑한 한 청년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주었다. 그 청년은 바닷가에서 두 손을 하늘로 뻗치고 그 별에게 연모의 정을 바쳤다. 그러나 인간이 하늘의 별을 안을 수 없다는 것은 그 청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실현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도 별을 사랑했다. 그것이 자기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운명에 순종함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순화하는 침묵과 체념과 고뇌의 노래를 불렀다. 그의 모든 꿈은 한결같이 별을 향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그 청년은 바닷가 절벽 끝에 서서 별을 쳐다보며 운명의 연정으로 몸을 태웠다. 별을 사랑하고 별을 그리워하는 절실한 상념이 극에 달했을 때, 그는 별을 향해 몸을 던졌다. 순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의 몸은 별이 있는 하늘과는 정반대쪽인 바닷가 암석 위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 청년은 '사랑'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허공에 몸을 날린 순간, 그 별과의 사랑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는 영혼의 힘이 그에게 있었다면 그는 하늘 높이 올라가 별과 맺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말하자면 에바부인은, 사랑에는 확고한 신념과 의지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연인이자 아들의 친구인 징클레르에게 별을 사랑한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암시한 것이다. 그러면 의지력만 있다면 과연 모든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얽히고 설킨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인지라 아무리 의지력이 있다 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에바부인은 바로 그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사랑'을 확신하고 있다면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고를 두려워하지 마라. 신념만 깊다면 하늘 높이 떠 있는 별과도 맺어질 수 있다는 것. 그러면서 그녀는 또 다른 이야기를 징클레르에게 해 줬다. 이번에는 짝사랑에 빠진 또 다른 청년의 이야기였다.
그 청년은 완전히 자기의 영혼 속에 틀어박혀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쓰디쓴 그림자를 핥으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푸른 하늘도 없고 아름다운 숲도 없었다. 하프의 소리도 시냇물 소리도 없었다. 세계에서 버림받은 그 청년은 가엾고도 비참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짝사랑으로 말미암아 세계를 잃은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그 연인데 대한 사랑은 깊어가기만 했다. 그럴수록 절망감도 더해갔다. 그는 사랑하는 여성을 자기 품에 안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길 각오를 해싿. 그러나 갑자기 그 사랑의 불길이 자기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부터 사랑은 위대한 힘을 발휘하여 연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 때까지 청년의 사랑을 전혀 외면하고 있던 그 여성은 비로소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청년을 찾아갔다. 청년은 두 팔을 벌리고 여인을 안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연인이 청년 앞에 섰을 때, 그녀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청년은 자기가 잃었던 세계 전체를 자기 힘으로 끌어당겨 자기 곁에 머물게 한 데에 전율을 느꼈다. 청년 앞에 서 있는 것은 세계였다. 그가 다시 찾은 세계였다. 그 세계가 그의 의지력에 이끌려 그에게 몸을 내맡긴 것이다.
하늘과 숲과 냇물이 새롭고도 생기가 넘치는 빛깔로 몸을 가꾸고 그 청년을 마중 나왔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의 소유가 되었으며, 그의 운명을 이야기했다. 그 청년은 그의 사랑을 실현함으로써 단 한 사람의 여자를 얻는 동시에 전세계를 자기 품에 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신념과 힘이 있으면 연인의 사랑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연인에게 사랑을 호소할 필요도, 요구할 필요도 없게 되지요. 상대방에게 마음이 이끌리기만 하는 사랑은 언제나 슬프지요. 징클레르, 당신의 사랑은 내게 이끌려 다니고 있어요. 언제라도 좋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내 마음을 끌어당기게 되면 나는 기꺼이 따라가겠어요. 나는 스스로 나를 바치고 싶지 않아요. 의지적인 행동과 확신의 힘을 가진 사랑에 의해 정복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사랑이란 애걸만 해서도 안 되고 요구만 해서도 안 된다는 전제하에 에바부인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사랑이란 과연 아름답지 않은가. 비록 우리를 고독하게 하는 면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만이 우리를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게 한다. 아직 이루지 못한 사랑이 있다면, 그래서 괴로운 사람이 있다면 사랑할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할 일이다. 그 사랑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한 언젠가는 영롱한 꽃을 피울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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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 수 없는 사랑
서로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서로 사랑하지만 살아해선 안 될 경우가 바로 거기에 해당된다.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마음먹은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 같은 경우는 훨씬 줄일 수 있겠으나 불행히도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지켜야 할 규범과 관습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무시한다면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인 채 예로부터 지켜온 질서가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사랑은, 서로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비통해하다못해 끝내 죽음에 이르고 마는 안타까운 사람들, 그 사람들은 내세에선 더없이 순수한 영혼으로 태어나리라, 그리하여 못다 한 사랑을 활짤 피우리라.
그리스 신화에 보면 린더라는 청년이 나온다. 그는 어느 날 축제에서 만난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데 바로 그 여자가 사랑해선 안 될 운명, 비너스 여신의 시녀였던 헤로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남들의 눈을 피해서 더욱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고, 린더는 헤로를 만나기 위해 밤마다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했했다. 헤로를 만나기 위해선 4마일이나 되는 해협을 헤엄쳐 건너야 했으므로. 그러던 어느 날, 태풍이 거세게 몰아치던 밤에도 린더는 헤로를 만나기 위해 해협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헤로의 창가에 걸어 둔 등불이 꺼져 버려 방향을 잃어 버린 린더가 바다에 빠져 죽게 되고, 이튿날 싸늘한 그의 시체를 보게 된 헤로 역시 비통에 싸여 바다에 몸을 던져 버린다는 비련의 이야기.
사랑은 우리에게 지고한 행복감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없는 슬픔과 번민을 안겨 주기도 한다. 사실 지금까지 내려오는 수많은 문학작품 속에선 사랑의 기쁨보다는 사랑의 슬픔이 주제가 된 것이 많다. 왜 그럴까? 그것을 난 기쁨보다는 슬픔의 여운이 훨씬 큰 탓이라고 여기고 있다. 쉽사리 잊혀지는 기쁨에 비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앙금으로 남아 있기 십상인 슬픔. 하기야 우리가 살아가는 일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따지고 보면 기쁨보다 슬픔이 많은 우리네 삶. 그렇다고 우리가 삶을 포기할 수 없듯 슬픔이 많다고 해서 우리가 어찌 사랑을 포기할 수 있으랴. 이 세상이 아니면 저 다음 세상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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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은 사랑
렘브란트 이후 네덜란드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았던 빈센트 반 고호. 많은 예술가들이 그렇듯 그도 정열적인 사랑을 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어느 여름철, 그는 젊은 미망인인 케이포스를 만나게 되어 이내 그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외삼촌의 딸이었고, 그러한 상황 때문에 좀처럼 그녀의 마음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가 구혼의 편지를 써 보낼 때마다 모두 개봉되지 않은 채 되돌아왔으니까. 그러나,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주위의 반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마음을 돌리는 데 심혈을 기울렸다. 어느 날, 그가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외출했다는 대답이었다. 마침 저녁시가 때였는데 그가 문득 테이블을 보니 반쯤 먹은 요리 그릇이 빈 자리에 남아 있었다. 자기가 온 것을 알고 외삼촌이 그녀를 숨겼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순간적으로 옆에 있던 촛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불꽃 속에 손을 넣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좋으니 그녀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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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사랑을 깨닫는 일은 아주 쉬운 일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마치 우리가 늘 접하고 있으면서도 있는지 없는지 무감각한 공기처럼.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한 순간도 우리 곁을 벗어난 적이 없지만 깨닫지 않는 자에겐 존재하지 않는 묘한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처음 사랑을 접했을 때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그 이상의 희열을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보여 주는 관심과 애정에 대해 더없이 행복해하고 고마워한다. 하지만 왜 갈수록 덤덤해지는 것인지. 처음엔 아주 작은 것에도 감동하지만 나중에 그것보다 더 큰 것에도 왜 시큰둥한 것인지. 그것이 바로 사랑을 멀어지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지금 바로 한 장의 엽서라도 쓸 일이다. 그래서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전과 다름없는 마음을 비춰 주어야 한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 방황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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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톱밥난로
춥다. 옷을 두껍게 입었는데도 춥다면 그것은 마음이 추운 탓이다. 아무리 내의를 입어 본들 사랑의 내의를 갖춰 입지 않았다면 우리는 추울 수밖에 없다. 겨울이 닥치면 사람들은 저마다 부산하다. 하지만 난로를 몇 개 더 들여놓는다고 해서 추위가 가실 것인가. 난방시설이 아무리 좋기로서니 겨울이 혹독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다. 마음이 춥다면 몸은 더욱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법, 그것만이 겨울을 온전하게 날 수 있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작정 이불 속으로만 파고든다. 나만 춥지 않다고 해서 춥지 않은 것인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이 춥다면 나도 추울 수밖에 없다. 나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그렇다. 추운 겨울엔 더더욱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넓게 열어 나보다 훨씬 더 추운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그 관심과 사랑으로 인해 상대방은 물론 나 자신 또한 더없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거리에서 신문을 파는 가난한 소년이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쌩쌩 부는 어느 추운 겨울날에도 소년은 변함없이 신문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런지 사람들은 집게 가는 걸음만 재촉할 뿐 신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소년의 뺨은 얼어붙어 터질 듯했지만 소년은 신문 팔기를 멈출 수 없었다. 집에선 자신을 기다리는 배고픈 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같은 날이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지금쯤 따뜻한 방에서 재롱을 부릴 나이었지만 그 소년은 이를 악물고 신문을 한 장이라도 더 팔기 위해 애를 쓴다. 그 때 문득, 소년 옆을 지나치던 할아버지 한 분이 멈춰 서서 소년을 불렀다. 그는 신문값보다 많은 지폐 한 장을 꺼내 주며 소년의 손을 잡았다.
"이런, 손이 다 얼어 버렸네. 몹시 춥겠구나."
할아버지의 손은 따스했다. 그러자 소년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이젠 춥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관심이, 그 사랑으로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따스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 훈훈한 미덕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지탱되어 왔고, 또 지탱되어 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마음의 문을 닫아 두기 시작했다. 내 눈에 다래끼 난 것은 아파도 남의 눈에 종기 난 것은 아파하지 않고 있다. 나만 탈이 없으면 그뿐 남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함께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로서의 '우리'가 아니라 내가 짓밟고 일어서야 할 '남'만 존재하고 있다. 때로 친구의 우정어린 충고나 격려가 있어도 뿌리치기 일쑤다. 무슨 흑심이나 있지 않을까 끊임없이 의심하고 경계하며, 뒤로는 그 친구보다 한 발짝 더 앞서기 위하여 신발끈을 동여매고 있다. 남을 위해 발길에 채는 돌멩이 한번 집어 낸 적 없으며 앉아 쉴 수 있는 의자 한 번 마련해 준 적 없다. 그러니 동료도 없고, 친구도 없고, 우리 마음이 추울 수밖에.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자. 아무리 난방시설이 잘 되어 있고 좋은 곳이라 하더라도 자기 혼자밖에 없다면, 그 덩그런 곳에 오로지 자기 혼자만 살고 있다면 그 삶은 쓸쓸하고 외롭지 않을까. 어린 날에 읽었던 동화 속의 얘기처럼 아이들이 찾아오지 않는 거인의 집에는 혹독한 겨울만 계속될 뿐이다. 그러니 우리 더 이상 추워지기 전에 마음을 열자. 대문을 열고 아이들을 맞이했더니 금세 그 집 마당에 봄이 온 것처럼, 우리도 문을 열어 내 마음을 나눠 줘 보자.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따스한 것인지 느껴 보자.
브라질 작가 바스콘 셀로스의 작품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는 '제제'라는 주인공 소년이 나온다. 그 소년은 너무 못 먹고 자라서 키가 작았다. 학교에 들어갔지만 도시락 한 번 싸 가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은 이 불쌍한 소년에게 가끔 동전을 주었다. 빵이라도 사먹어서 허기를 면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준다고 해서 소년은 돈을 다 받는 게 아니었다. 애써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그 돈을 받곤 했다. 그 이유를 선생님은 곧 알게 된다. 자기 반에는 그렇게 밥을 못 먹는 가난한 아이가 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제제가 돈을 줄 때마다 빵을 사서 그 가난한 아이와 함께 먹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아이는 제제보다 더 작고, 가난하고, 아무도 놀아 주지 않는 아주 새까만 흑인아이었다. 그러나 제제는 자기가 배가 고픈데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더 가난한 그 아이에게 빵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함께 놀아 주었다.
살아가는 데 유일한 가난함이란 가슴 속에 사랑이 없는 것이리라. 삶이 사랑으로 가득 채워졌을 때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날들이 된다. 그러고 보면 베푼다는 것은 꼭 많이 가진 자만이 행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제제라는 소년은 도시락도 못 싸 갈만큼 가난했지만 자기보다 더 가난한 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기꺼이 빵 한 조각을 나눠 먹었다. 없는 사람이, 그리고 적은 것이라도 베푸는 행위는 있는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아닐까.
혹시 나는, 나한테 필요없는 것까지도 꽉 움켜쥐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 살펴보자. 나한테 필요없는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많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나한테는 하등 소용없는 그 물건을 이제 그만 넘겨줌은 어떨런지? 내게는 조금 모자라더라도 하나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약간 나눠줌은 어떨런지? 그래, 세상은 그렇게 사는 것이다. 바닷가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서로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 그래야 아름답다. 그래야 외롭지 않다. 서로 도와가며 사는 세상, 어깨를 부여 안고 서로 의지하며 사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보여 주려고 신은 우리에게 겨울을 내려 주었다. 겨울이 왜 춥겠는가. 서로 손을 잡고 살라고 추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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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생각났습니다
햇살이 맑아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비가 내려 그대가 또 생각났습니다. 전철을 타고 사람들 속에 섞여 보았습니다. 그래도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았습니다만 외려 그런 때일수록 그대가 더 생각나더군요. 그렇습니다. 숱한 날들이 지났습니다만 그대를 잊을 수 있다 생각한 날은 하루도 없었습니다. 더 많은 날들이 지나간대도 그대를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날 또한 없을 겁니다.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지만 숱하고 숱한 날 속에서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어김없이 떠오르던 그대였기에 감히 내 평생 그대를 잊지 못하리라, 잊지 못하리라 추측해 봅니다. 당신이 내게 남겨 준 모든 것들, 하다 못해 그대가 내쉬던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런 뜻이 아닐는지요. 언제가 언뜻 지나는 길에라도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스치는 바람편에라도 그대를 마주할 수 있다면 당신께 모조리 쏟아부어 놓고..., 펑펑 울음이라도..., 그리하여 담담히 뒤돌아서기 위해섭니다. 아시나요, 지금 내 앞에는 그것들을 돌려 줄 대상이 없다는 것. 당신이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 남김없이 돌려 주어야 홀가분하게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아침엔 장미꽃이 유난히 붉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또 생각났습니다
한 사람을 마음 속에 섬기는 일
춥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않은 이 겨울은 더욱더 춥다. 이상한 일이다. 왜 자기가 갖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은 멀리에만 있는 것일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서성거려야 하는 안타까움. 그래, 사랑이란 것은 어쩌면 못내 쓸쓸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위해 한 발짝 물러선다는 것, 그것은 자신은 내내 외로움을 감수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곁에 두지 않는 법이라고.
그때 그랬다. 바람이 차고 매서웠던 어느 해 겨울. 한 여자를 진심으로 원하면서도 떠나 보내야만 했던 그런 때가 있었다. 가까이서 보고 싶었고,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지만 외려 한 걸음 더 떨어져 지켜보아야 했던 그런 사람. 살아가면서 덮어 두고 지워야 할 일이 많겠지만 내가 지칠 때까지 끊임없이 추억하다 숨을 거두기 전까지는 마지막이란 말을 절대 입에 담고 싶지 않았던 그런 사람. 그래서 길을 가다 우연히라도 한 번 마주치고 싶었던 바로 그런 사람. 맨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모 읍내 2층 다방에서였다. 당시 군에서 전령 임무를 담당하고 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그곳에 들르게 되었는데 마침 그날따라 유독 심하게 기침을 하던 나를 다방 종업원이었던 그녀는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다.
주문한 커피 대신 내 앞에 놓여진 홍차, 그리고 하얀 약봉지.
"감기엔 커피가 안 좋대요. 그리고 이건 제가 먹으려고 지어 놓은 건데..."
의아해하며 올려다보는 나에게 그녀는 수줍게 웃어 보였고, 그 가슴 저리게 환한 미소와 따스한 손길에 나는 대번에 감동하고 말았다. 그 이후 시간만 허락하면 그 다방에 앉아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어느덧 전역이 가까워져 초조해진 나는 조바심을 치다 마침내 릴케의 시집을 선물함으로써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그때 지어 보인 그녀의 그 쓸쓸한 표정이란.
"그냥 친구로 지냈으면 해요. 부탁이에요. 그렇게 해주세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 나는 그녀를 만나면서부터 그것이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껴야 했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고 왜 이야기할 수 없는지, 진실로 자기가 원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경우엔 스스로 밀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다는 것을 실감해야 했다. 우리가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실 때 분식집 구석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여자, 공무원도 해보고 사무실에도 있어 보았지만 그 돈으로는 동생들 학비조차 되지 않아 결국 밤마다 술에 흠뻑 젖어 살던 그런 여자. 아아, 그랬다. 자신이 서 있는 삶이, 그 현실이란 것이 그녀에겐 사랑보다 더 우선이었고, 그녀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 또한 세상엔 얼마든지 많다는 것을 나는 그녀를 만나면서부터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날씨가 추우면 마음이 더 아픈 사람들, 남녀가 만나 차를 마시고 서로에게 귀기울이며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닌 사람들. 요즘같이 어려운 때면 더 더욱 그런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런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투정만 부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사랑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닐까. 사랑. 그것은 내가 먼저 톱밥난로가 되는 것이다. 먼저 톱밥난로가 되어 온기로 환히 달아오르는 그대 얼굴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사람. 무엇보다 그대와 나 사이의 간격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 그렇다.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을 마음 속에 섬기는 일은 어차피 고독한 수행이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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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이름의 바퀴자국
버스가 지나갔다. 내 삶에도 많은 버스가 지나갔다. 특히나 '사랑'이라는 버스가. 문득 나는 아그네스 발차가 부른 그리스 민요 '기차는 8시에 떠나네'가 생각났다. 그 슬프디 슬픈 선율을 기억하는가. 카테리니 행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이제 밤이 깊어도 당신은 비밀을 품고 오지 못하네. 가슴 속에 아픔을 새긴 채 안개 속에 나는 앉아만 있네. 그래, 돌이켜 보면 사랑이란 바로 저 버스와 같은 것이었다. 뿌연 먼지만 일으키고 아득히 멀어져 가는 완행버스. 나만 덜렁 정류장에 내려놓은 채 멀리 사라지는 버스의 꽁무니를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일이었던지. 함께 버스를 타고 영원히 갈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나한테는 얼마나 큰 절망이었던지. 내 가슴에 난 바퀴자국.
쑥스럽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보자. 유난히 춥고 유난히 고달팠던 그 시절.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된 지 한 달이 갓 넘었을 때였다. 전령 업무를 맡은 나는 그 날도 상급부대의 문서를 수령하기 위해 경기도 운천에서 철원으로 가는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목적지에 다다라 내리려고 할 때쯤 나는 '전령증'을 부대에 두고 온 것을 알았다. 그 증이 없으면 꼼짝없이 차비를 내야하는데 마침 내 주머니에는 잔돈만 달랑 몇 푼 있을 뿐이었다.
당혹스러웠지만 어쩔 것인가. 그거라도 내려고 손을 내민 나는 창피해서 안내양의 얼굴도 외면하고 있었는데 안내양 아가씨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녀는 도로 잔돈을 돌려주며 내 손을 꽉 움켜잡는 것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대범한 아가씨였다. 차비를 못 냈다는 부끄러움보다 내 손을 한참 동안 잡고 있는 그 아가시의 뜻밖의 행동 때문에 내 얼굴은 더욱 붉어졌고.
버스에서 내린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떠나가는 버스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나는 또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차창에 기대 선 채로 내게 조용히 손을 흔들던 것을.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결코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보여 준 호의가 고마워서가 아니라 진정 그녀가 사랑스러웠던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버스를 쫓아가 그녀를 꽉 부둥켜안고 싶을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다.
한 순간의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을 오래 잊지 못했기에. 아니 잊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고 있었기에. 나는 틈만 나면 그 정류장 앞에서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기약도 없는 기다림이었지만 가장 소중한 것을 향한 마음은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처럼 아름답고도 애틋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나는 그녀를 마음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내 가슴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던 삼영버스 2390번. 하지만 끝내 그 버스는 다시 오지 않았다. 다른 버스 안내양으로부터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녀는 바로 그 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났다고 했다. 큰 사고가 났고, 그 자리에서 그녀가 즉사했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 그때는 정말 말이 나오지 않았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추스르고 올려다보니 방금 나를 내려놓고 간 버스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사랑은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것일까. 우리 삶에 깊은 생채기만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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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라는 화두
이 세상의 슬픔이 많으면
얼마나 하랴
강천사 비구니만 하랴
가을이 오기 전, 마음이 먼저 가
산나리꽃 하나 피워 둘까
하찮은 길도 또아리를 틀며
타는 듯 앵겨서, 저기 저 골짝
나 어린 비구니의 머루알 같은 눈물도
가벼이 무등 태우고 푸르기만 하니.
- 유강희 「강천사」
유강희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나는 또 슬픔에 잠겼다. 세상 살아가는 일이 다 슬픔을 수도하는 일이 아닐까, 강천사 비구니처럼. 슬픔이라는 화두. 내가 살아가는 동안 슬픔은 아무리 단련되어도 능숙해지지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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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처음 본 순간부터 아저씨를....."
그녀의 말은 이미 취기에 젖어 있었다. 아니면 오랜 외국 생활에 젖어 혀 꼬부라지는 소리가 입에 배었거나.
"용서하세요, 왠지 아저씨의 우수 짙은 그 뒷모습이 좋았거든요. 이해해 줄 수 있겠죠?"
빤히 쳐다보는 그녀를 향해 준표는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이럴 경우, 고분고분 대답하는 쪽이 가만히 있는 것보다 오히려 오색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럼 됐어요. 이제 오늘밤은 우리 둘이 함께 즐기는 거예요. 아마 멋진 밤이 되겠죠. 이름? 그건 피차 묻지 말기로 해요. 어차피 우린 이 밤이 지나면 헤어질 사이인데요, 뭐."
그녀는 횡설수설 거침없이 많은 말을 쏟아 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하얀 덧니가 앙징스럽게 빛났다. 그녀의 모든 말이 거기서 솟아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덧니였다.
"자, 한 잔 마시고 우리 앞으로 나가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니까요. 밤이 몇 백 년 계속되는 줄 아시나."
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준표의 손을 이끌었다. 준표는 다만 그녀가 하자는 대로 따를 뿐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오늘 밤은 그녀를 위해서 있는 밤인 것이다. 고국에서의 마지막 밤. 그것이 추억의 밤이 됐든 광란의 밤이 됐든 간에 그녀가 원한다면 그대로 해줄 작정이었다. 그때부터 한 젊은 연주자의 색소폰 연주가 홀 안을 적시기 시작했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 그러자 그녀가 준표의 품안으로 살며시 기대 왔다. 순간, 색소폰 소리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노래말을 흥얼거리던 준표는 참으로 적절한 곡이 흘러나온다고 생각했다.
비록 만만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가능하다면 준표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여자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밤이 지나면 이 땅을 떠나 먼 나라로 간다는 그녀. 그녀에게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추억의 한 입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최대한 진지하고도 진실한 사랑으로.
반드시 오래 만나야만 연인 사이인가. 방금 만났다 하더라도 마음만 통한다면 얼마든지 연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준표는 갑자기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조그많고 귀여운 여자를 떠나보내기 싫어졌다. 그것도 버스만 타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도 며칠을 가야 하는 곳이라니.
"본인이 싫다면 굳이 가지 않아도 될 텐데?"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더욱 불끈 쥐며 모처럼 준표가 한 말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준표의 귓볼에 훅 뜨거운 입김을 불었다. 짙은 색소폰 소리에 그녀가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는지 알 길이 없어도 그녀의 인상이 일그러진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당사자가 아닌 아저씨야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 테죠. 하기야 아저시가 우리 아빠의 고집을 어떻게 알겠어요. 사실 다른 애들은 외교관 아빠를 둔 나를 부러워하고 시샘하지만 난 오히려 죽을 지경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내 인생의 반도 훨씬 넘는 기간을 샌프란시스코, 동경, 팔리 등지를 다녔어요. 친구도 하나 없는 낯선 땅, 그 아득함을 누가 알아줄런지... 그런데 이번엔 또 제네바라니."
그녀의 목소리에 비로소 물기가 스며들었다. 준표는 공연히 그녀의 아픈 곳을 찔렀다는 후회감에 잠자코 스탭만 밟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준표의 어깨 위에 머리를 천천히 기대 왔다. 그녀의 착잡한 심정이 그대로 자신의 어깨를 타고 전달되는 듯해 준표는 눈을 감았다. 그리곤 그녀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을 풀어 가만히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어쩐지 아저씨가 좋아졌어요. 말할 수 없이 편하다고나 할까. 그래요, 아저씬 마치 우리 나라 땅같이 편안한 데가 있어요... 후후, 아저씨 같은 남자를 만나 오순도순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우리 아빠의 욕심만 아니라면 평범하게 사는 그 자체가 내 인생 최대의 목표가 되었을 텐데."
그러면서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춤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 바람에 준표는 하마터면 그녀의 발을 밟을 뻔했다. 동그랗게 뜬 그녀의 눈이 준표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참, 이러다간 우리 술 다 깨겠어요. 오늘 밤은 정신없이 취하기로 해놓고선..."
아니나 다를까. 결국 그 날 밤을 준표는 그녀와 함께 지샐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모두 몹시 술에 취하고 말았다. 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지만 준표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을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다. 인근의 모 여관에서였다. 준표가 가까스로 그녀를 침대 위에 누이고 바닥에 쓰러질 때쯤 잠꼬대처럼 들려 오던 그녀의 말을.
"사실은 나 아저씨가 굉장히 맘에 들어요.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을 만치. 그러나 아직은... 안 돼요. 아저씨는 내 먼 훗날의 그이가 아니잖아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훗날의 그 사람에게 실망을 안겨 줄 순 없잖아요. 그쵸? 이해해 줄 수 있겠...."
그 이후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준표 자신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음날 아침 준표가 깨어났을 때 그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벗어 놓은 스타킹 한쪽만 침대 밑에 널브러져 있어 그녀와 함께 이 방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여관비를 지불할 때까지만 해도 꽤 많은 현금이 들어 있었던 자신의 지갑이 텅 비어 있는 까닭도 준표는 알 수가 없었다. 속된 말로 그 이후부터 준표의 필름은 완전히 끊겨져 있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두 달쯤 지난 때였을까. 준표가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어떤 술집에 들렀는데 뜻밖에 거기서 그녀를 만났던 것이다.
제네바로 떠난다던 희고 앙징스러운 덧니를 가졌던 그녀를. 웨이터의 등뒤를 따라 룸 안으로 들어오던 몇 명의 여종업원 사이에 끼여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저 무덤덤히 들어온 그녀. 준표의 눈이 갑자기 켜진 것을 두말할 것도 없고, 그러는 준표를 알아본 듯 그녀도 흠칫 멈춰 섰다. 그 짦은 순간 준표는 모든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술집 이름이 '제네바'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가야 된다는 곳이 비행기를 타고도 며칠을 가야 하는 이국땅 제네바가 아니라 토큰 하나만 쥐면 갈 수 있는, 서울 한복판에 버젓이 간판을 내걸고 있는 술집 제네바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준표는 왜 벌떡 일어나 그녀를 껴안고 말았을까. 왜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만난 것만큼 반가웠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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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한 쪽이 다른 쪽을
자신의 색깔로 물들여 버리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의 색깔을 바탕으로 하면서
각자의 색깔을 하나로 용해시킨
또 다른 세계를
저마다의 인생에 더하는 일이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 오치아이 게이코 「바탕」
이 시를 읽으며 나는 참 따뜻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은 지면서도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처럼. 지는 해 또한 자신이 풀어놓은 노을이 있었기에 더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은가. 그래, 우리 모두는 서로의 배경이다. 어둠이 있어야 별은 반짝이고 나뭇잎이 있기에 꽃은 핀다. 헌신과 희생이 동반되어야 사랑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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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고차오빠와 인신매매범
희경은 건성으로 영어단어를 몇 번 연습장에다 끼적이다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틈엔가 창문 너머로 별들이 총총 빛나고 있는 깊은 밤이었다.
"벌써..."
희경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계를 내다보았다. 시계의 초침이 이제 막 12시를 지나가고 있어 정확히 9시 45분이었다. 그 초침 소리만큼이나 희경의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제 15분 후면 이 지겨운 사슬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그리고.....
"너 또 그 오빠 생각하지?"
책상 위에 엎드려 잠자고 있던 혜란이가 언제 깨어났는지 옆구리를 툭 치며 짓궂게 물어 온다. 그러자 희경의 얼굴이 금세 빨개지며 황급히 도리질을 쳤다.
"얘는, 실컷 자고 나서 웬 뚱딴지 같은 소리야."
"기집애, 네 얼굴에 다 써 있는데 뭘 그러니. 그 딴 말 하려거든 잠이나 더 자. 평소보다 오늘 어째 기상 시각이 빠르다 했더니."
"어이구 그래, 산부인과에서 전화 오겠네. 인물 났다고. 너처럼 오매불망 임 그리고 있는 것보다야 나처럼 잠자는 게 낫지. 암, 낫구 말구."
그러는 동안에 자율학습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를 기점으로 모두들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우리들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아 주는 저 고마운 종소리. 사실 말이 자율학습이지 이게 어디 자율적으로 하는 공부던가. 자율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쇠사슬보다 더한 사슬로 꽁꽁 묶어 둔 학교 당국의 얄팍한 술수가 아니던가. 물론 일초가 아까운 듯 열심히 교과서와 참고서를 파고드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나 태반이 그 시간에 엉뚱한 공상을 하거나 아예 혜란이처럼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을 자기 일쑤다. 그렇다면 이 자율학습은 정말 하고 싶은 사람만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러나 희경은 곧 생각을 고쳐먹어야 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무엇보다 지겨운 자율학습이지만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그와의 감미로운 만남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밤에 문제가 생겼다. 근처에 지명수배자가 나타나 비상이 걸렸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지명수배자들이 인신매매범에다가 강간과 강도를 일삼는 파렴치범들이라니 학교에서 학생들을 귀가시키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당연히 희경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인신매매범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렇게 되면 그 오빠를 오늘밤 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희경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어찌 하루라도 그 오빠를 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희경은 저도 모르게 교탁 앞으로 나갔다.
"선생님, 화장실 좀...."
"이런 녀석, 화장실 갈 놈이 가방은 왜 들고 나오니?"
그러자 왁자하게 웃음이 터졌다.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반 학생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는 없었다. 그럴수록 희경은 마음을 다졌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영영 그 오빠를 볼 수 없을 것처럼.
"정말 급하단 말이에요."
"믿어도 돼? 설마 거짓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선생님...."
희경은 거의 울상이었다. 가방을 들고 나온 줄도 모를 정도로 그에게 생각이 매달려 있었는데 이제 무엇인들 못하랴. 그러자 다행히도 선생님은 교실문을 턱으로 가르켰다.
"빨리 갔다 와. 가방은 제자리에 두고."
선생님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희경은 쏜살같이 내달렸다. 어쩌면 지금쯤 그 오빠가 가고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화장실은 꾸며낸 말이니 교실을 나와 운동장을 내달리는 희경의 가슴은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행여나 그 오빠가 가 버렸을까 싶어서. 그런 중에도 희경은 자신의 가슴 속에 이토록이나 그 오빠가 자리하고 있었는가 싶어 새삼 노라고 있었다.
희경을 비롯해 몇몇 학생들은 집에 갈 때 봉고차를 이용했다. 요즘 워낙 인신매매범들이 극성이다 보니 방향이 같은 학생들끼리 여럿 모여 봉고차를 대절해 매일 이용하는 것이다. 희경이가 사모해 마지 않는 그 오빠는 아르바이트로 봉고차를 운전하는 대학생이다. 준수한 용모에다 수려한 화술, 그리고 언제나 정감 있게 대해 주니 자연히 희경의 가슴 속에 그 오빠가 자리하게 되었던 것. 아아, 희경은 짧게 감탄했다. 그 오빠가 교문 앞 골목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치 자기를 기다리고 있기나 한 것처럼. 담배를 피우며 벽에 기대어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라니. 희경은 할 수만 있다면 금방이라도 달려가 그 오빠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 충동을 애써 삭이며 교문 뒤에 숨어 가만히 그 오빠를 훔쳐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희경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관 두 명이 그 오빠 곁으로 다가가는가 싶더니 다짜고짜 그 오빠를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순간 희경의 머릿속에 번쩍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틀림없이 경찰관 아저씨들이 오빠를 지명수배자로 오인한 것이리라. 그런 생각이 들자 희경인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 그런 요기가 생겼을까. 희경은 쏜살같이 달려가 경찰관 아저씨들을 가로막아 섰다.
"아저씨, 사람 좀 똑똑히 보세요. 이 오빠가 어디 인신매매범같이 생겼어요? 우리 봉고차 오빠란 말이에요."
야멸찬 희경의 말에 경찰관 아저씨들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그 틈에 희경인 잽싸게 봉고차 오빠의 팔짱을 꼈다.
"오빠 빨리 가요. 인신매매범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나 봐요."
그런데 아무래도 그 오빠의 태도가 이상했다. 희경이가 나타나자 더욱 당황해하며 슬그머니 희경의 팔을 뿌리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한 경찰관 아저씨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그 오빠를 향해 윽박지르듯 물었다.
"자네 이 학생 알지? 이 학생 입에서 봉고차 얘기가 나오는데 그래도 시침 뗄 텐가?"
"아니에요. 내가 이 학생을 어떻게 알아요? 정말 모른다니까요."
그제야 희경도 어렴풋이 감이 잡혔다. 봉고차 영업도 엄연히 불법이었다는 것을. 결국 자신 때문에 봉고차 오빠가 꼼짝없이 잡혀가게 생겼다는 것도.
아아, 내 경솔함이여. 몹쓸 인신매매범이여. 끌려가는 봉고차 오빠를 보며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으리라는 예감에 희경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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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다섯 개의 엽서
하나
내 마음 속 서랍에는 쓰다가 만 편지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대에게 내 마음을 전하려고 써 내려가다가 다시 읽어 보고는 더 이상 쓰지 못한 편지. 그대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내 마음 한조각을 떼어 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아는지요? 밤이면 밤마다 떼어 내느라 온통 상처 투성이가 되고 마는 내 마음을.
둘
아침부터 소슬히 비가 내렸습니다. 내리는 비는 반갑지만 내 마음 한편으로는 왠지 모를 쓸쓸함이 고여 듭니다. 정말 이럴 때 가까이 있었더라면 따뜻한 커피라도 함께할 수 있을 텐데...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텐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듯 쓸쓸한 일인가 봅니다.
셋
다른 사람과 함께 나란히 걷고 있는 그대를 우연히 보았던 날.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미소 지었습니다. 애당초 가까이 가지도 못했기에 아무런 원망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몇 걸음 더 떨어져 그대를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팔짱을 낀 채 근처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내겐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까르르 웃는 그대의 모습을 카페 창 너머로 훔쳐 보는 것이 내겐 또 더없이 큰 슬픔이었습니다. 아아, 그대는 꿈에도 몰랐겠지요. 그날 밤은 내게 있어 가장 춥고 외로운 밤이었다는 것을.
넷
그렇습니다. 그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일입니다. 그대를 잊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도 나 혼자만의 일이구요. 그러니 그대가 마음 쓸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 혼자 그리워하다 나 혼자 괴로워하면 그만, 그대는 그저 아무 일 없다는 듯 무덤덤해도 괜찮습니다. 애초에 짐이 될 생각이 있었다면 나는 내 사랑을 그대에게 슬며시 들킬수도 있었을 테지요. 그러나 그대여, 나로 인해 그대가 짐스러워 한다면 그 자체가 내게는 더한 괴로움이기에 나 혼자만 그대를 사랑하고, 나 혼자만 괴로워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대여, 그대는 그저 모른 척하십시요. 그저 전처럼 무덤덤하십시오.
다섯
나는 이제 조금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하기로 했습니다. 한꺼번에 사랑하다 그 사랑이 다해 버리기보다, 한꺼번에 그리워하다 그 그리움이 다해 버리기보다, 조금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해 오래도록 그대를 내 안에 두고 싶습니다. 아껴 가며 읽는 책, 아껴 가며 듣는 음악처럼 조금씩만 그대를 끄집어내기로 하였습니다. 내 유일한 희망이자 기쁨인 그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이 없어지고 지워지지만 그대 이름만은 내 가슴 속에 오래오래 남아 있길 간절히 원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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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살아간다면
새벽길
아직 미명이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새벽 길을 나선다. 춥다. 옷을 두껍게 껴입었는데도 추위를 느낀다면 마음이 추운 탓일 게다. 그래, 같이 걸어 줄 누군가가 있다면 더욱 좋을 테지. '동행'이라는 말, 아직 그보다 더 따스한 말을 알지 못하는 나에게.
돌이켜보면 나는 늘 혼자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혼자였다. 기대고 싶을 때 그의 어깨는 비어 있지 않았으며, 잡아 줄 손이 절실히 필요했을 때 그는 저만치 서 있었으니까. 그래, 산다는 건 결국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비틀거리고 더듬거리더라도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길임을, 들어선 이상 멈출 수도 가지 앟을 수도 없는 그 외길을. 쓸쓸했다. 그리고 또 추웠다.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걷다 보니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모르겠다. 가끔은 숨쉬고 살아간다는 것이 고달프게 느껴진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섰을 때 쓰레기통에 처넣는 파지처럼 내 삶도 그렇게 구겨 던져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원고지는 새로 준비하면 되지만 내 삶은 하나밖에 없는, 다시 준비할 수 없는 것임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 웬일인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새벽시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삼삼오오 둘러 모여 모닥불을 쬐는 그들은 잠을 채 떨구지 못한 눈으로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눈곱을 떼내는 사람도 보인다. 따뜻한 풍경이었다. 모닥불의 열기만은 결코 아닌 이 훈훈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갑자기 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 앞에서 나는 얼마나 초라한가. 아침은 아마도 그렇게 밝아올 것이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거리를 묵묵히 쓸어 내고 있는 환경 미화원 아저씨의 빗질 사이로, 호호 손을 불며 집집마다 신문을 돌리는 소년의 손끝에서, 종종걸음으로 도서관을 향하고 있는 학생, 출근길을 서두르는 회사원들의 발걸음에서부터.
아침산행
작은 산을 찾았다. 내 눈엔 작아 보였지만 정작 산은 작지 않았다. 작은 산이라 생각한 내 오만을 비웃듯 산에는 온갖 세상들이 모여 있었다. 낙엽들의 세상, 벌레들의 세상, 바람과 돌과 물과 나뭇잎의 세상. 조그만 풀잎 하나에도 세상이 숨겨져 있는데 작은 산이라니. 올라갈수록 산은 만만치 않았다. 골짜기에 쌓여 있는 눈과 빙판길. 쉬이 정복할 수 있을 것 같던 산은 별다른 준비 없이 산행을 나온 나에게 당혹감을 안겨 주었다. 아무리 작은 산이라도 정상에 오르는 일만큼은 쉬운 게 아니었다. 하기야 세상에 만만한 일이 어디 있으랴. 정상에 서 있던 나무들의 키가 왜 작은지 이제서야 알 것 같다.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매서운 눈과 바람을 견뎌 낼 수 있었겠는가.
내려올 때는 일부러 숲속 길을 택했다. 발소리를 죽이는 것은 근처 신사에서 울려 나오는 풍경소릴 귀담아 두기 위해서였다. 숲속에서 듣는 풍경소리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준다. 솔바람과 풍경소리. 절묘하게 어울리는 화음이 아닐 수 없다. 고즈넉한 것 같아도 숲에 온갖 소리가 넘쳐 흐르듯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모두 자신만의 목소리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침묵하는 무생물까지도 어떤 조건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제소리를 낸다는 것을. 자연스레 울려 나오는 소리는 아름답다. 바람부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까르르 웃는 어린아이 웃음소리. 그러나 억지로 내는 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듣기가 거북하다. 자기 소리가 아닌 까닭이다.
언제부터일까. 내가 내 목소리를 잃어 버린 때는. 내 가슴에 있는 말은 묻어 두고 위장된 목소리로 외쳐 댄 것은. 어쩌면 외롭다는 핑계로 자꾸만 목소리를 높였던 것은 아닐까. 혼자 고립되지 않으려고 자꾸만 과장되게 나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숲에 몸을 파묻으며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목소리를 낮추면 외로움의 높이도 자연히 낮아질 것이라고. 그것들의 소리가 저토록이나 아름답고 조화로운 건 욕심이나 아집, 바라는 것이나 집착 없이 무심히 울려나기에 그토록 오묘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라고.
다시 길 위
추워서 그런 것일 게다. 아니면 바빠서 그런 것일까, 모두가 허둥지둥 부지런히 발걸음을 서두르는 것이. 그런 까닭에 자기 앞에 누가 있는지 거리의 풍경이 어떠한지 쳐다볼 틈이 없다. 하기야 요즘은 바쁘게 설치지 않으면 살기 힘든 세상이 아닌가. 날씨는 또 왜 이리 연일 추운지.
잠시 몸을 녹이려 근처의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IMF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넘치는 세상이다. 넘쳐 흐른다는 표현대로 지금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풍요롭다. 풍요롭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로 인해 잃는 것이 많다면 그건 또 씁쓸한 일이다. 물건만 있고 사람은 없는 시대. 물건에 정신이 팔려 사람이 등한시되는 시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물질이 풍요로워지면 정신은 그만큼 비좁아진다. 우리 마음에 온갖 물건이 가득 쌓여 있는데 정신이 들어설 틈이 어디 있겠는가.
어머니들이 하루 일과의 마무리를 바느질로 하던 때가 있었다. 어둠침침한 불빛 아래 졸린 눈을 비비며 한땀 한땀 해진 옷과 양말을 깁던 우리 어머니들. 그러니까 우리는 단순히 옷을 입은 게 아니라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을 입고 있었던 게다. 또 공책을 다 쓰고 나면 다 썼다는 기쁨보다 그 공책으로 비행기를 접던 일이 더 좋았던 것도 그 시절이었다. 일부러 여백이 많은 종이만을 골라 정성스럽게 접은 종이비행기가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갈 때 그것은 정녕 환희 그 자체였으니까.
그때 내가 날려 보낸 것은 종이비행기만은 아니었다. 뭔지 모를 소망이었지만 내 간절한 염원을 담고 종이비행기는 유리알 같은 창공을 휘젓고 다녔을 것이다. 그때의 종이비행기는 지금 내 삶의 어디쯤에서 날고 있을까. 그때의 푸른 꿈이 아직 내게 남아 있을까.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혼탁해진 이 시대 어디 구석진 곳에 버려져 있는 것은 아닌지.....
집에 돌아와서
새로 산 수첩에 날짜를 적으면서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한다. 빠른 세월을 건너오는 동안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또 무엇인가. 영혼의 적선처럼 어느덧 어둠이 내린다. 세월은 또 그렇게 흘러가리라. 한때 세월보다 앞서가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이젠 그 반대다. 제발 좀 천천히 지나갔으면....
옛 수첩에 있던 이름을 옮겨 적으면서 나는 조금씩 망설여야 했다. 어느 이름은 지우고 어느 이름은 남겨 둘 것인가. 생소한 이름도 있는 걸 보면 나는 그동안 여기 적힌 이름들을 불러내는 데 인색했던 모양이다. 그제야 나는 반성을 한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불러 주길 간절히 원했으면서도 정작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본 적은 얼마나 있었느냐고. 여지껏 문을 닫아 놓고 있으면서 손님이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문득 새벽시장에서 본 모닥불 빛이 떠올랐다. 자신이 먼저 뜨거워져야 주변 사람들을 데울 수 있는 모닥불, 훈기로 환히 달아오른 사람들의 얼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던 모닥불이.
모처럼 거울을 본다. 오늘도 나는 아마 연극을 했을 것이다. 거짓 웃음. 거짓말, 거짓 행동을 스스럼없이 꾸며 내며 판에 박힌 대본만 외고 다녔을 것이다. 부끄러웠지만 거울을 한번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참 많이 변했다는 건 스스로 느껴지지만 어떻게 변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겉이 아닌 가슴 안쪽은 더더구나.
여태껏 나를 치장해 왔던 것들, 그 쓸모 없는 것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허비해 왔을까 생각해 보면 가슴이 텅 비는 느낌이다. 오늘 같은 날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나를 돌아볼 수가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분칠을 벗겨 낸다고는 했지만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깜빡 잊고 지우지 못한 분장의 찌꺼기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자국 그대로 나는 잠이 들 것이고 눈을 뜨자마자 또 정신없이 집을 나설 것이다. 따지고 보면 관객도 없는 텅 빈 무대에서 무엇을 잡자고 이리도 허우적거렸는지. 그래, 어쩌면 난 삶의 물결에 그저 휩쓸려 가고 싶지는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굳이 변명해 보자. 삶의 물결을 어설프게나마 내 방식대로 헤엄쳐 가고 싶었다고.
오늘밤엔 유서를 써놓고 잠들어 보리라. 그러면 삶에 더 애착이 가지 않을까. 어차피 인간은 죽는다지만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지금이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생을 살아간다면 한 순간도 소홀히 보낼 수 없을텐데. 또한 주변의 모든 것들, 내가 아는 모든 이름들이 그렇게 소중하고 절실할 수가 없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