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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아버지가 끄는 손수레에 실려 서울에서 전북 고창까지 갔던 피란길을 되밟는 도보여행에 나선 김태호 광주대 명예교수(맨 앞) 일행이 13일 평택을 지나 천안을 향해 가고 있다. [박종근 기자] |
“서울이 위험하니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쪽으로 피란 가자.”
1950년 8월 29일. 당시 여섯 살이었던 김태호(66·광주대 명예교수) 교수의 아버지 김재순(당시 43세·83년 작고)씨가 서울 후암동 집에 가족을 모두 불러 놓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6·25가 난 지 두 달, 전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다음 날 김 교수의 가족은 취사도구와 옷가지가 가득 실린 리어카를 끌고 고향인 전북 고창군으로 피란길을 떠났다. 고향까지 800여 리의 길이었다. 한강다리가 다 폭파된 뒤라 서빙고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어린아이들은 리어카에 타고 갓난아기는 어른의 등에 업혔다. 한여름의 땡볕에 10여 명은 어른·아이 가릴 것 없이 땀에 푹 젖었다. 흙먼지 날리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몸이 성할 리 없었다. 그래도 서로를 독려하며 길을 떠난 지 18일 만에 고향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났다. 13일 경기도 평택~천안 1번 국도변을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 9명이 걷고 있다. 가슴에는 ‘통일과 번영을 염원하며. 6·25전쟁 60주년 회상의 피란길 800리 걷기’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손에도 같은 글자가 적힌 깃발과 태극기가 들려 있다. 회색의 9인승 승합차 한 대가 비상등을 깜빡이며 이들을 따른다. 김 교수가 피란을 함께 갔던 가족과 함께 2년여의 준비 끝에 떠난 ‘회상의 6·25 피란길’이다. 10일 서울 후암동 삼광초등학교에서 출발해 과천~수원~오산~송탄을 거쳐 이날로 4일째를 맞았다.
이날 행사는 김 교수가 2년 전 가족 연례모임에서 제안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당시를 기리고 고생하신 부모님을 추억하자”는 김 교수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김 교수와 피란을 같이 갔던 남동생 행진(63)씨, 사촌동생 한용(64)씨를 중심으로 아내, 사촌 여동생들이 함께하기로 했다. 직장에 다니느라 바쁜 자녀들은 주말에 참가하기로 했다.
여정은 60년 전 김 교수의 아버지가 기록해 놓은 피란 코스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서울 용산 후암동 삼광초등학교에서 출발해 천안을 거쳐 공주~부여~논산~김제~부안을 거쳐 24일 고향인 고창군 상하면 고산마을에 도착하는 게 목표다. 총 320㎞에 이르는 대장정으로 하루에 20~25㎞씩 걷고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점심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종일 걸어야 한다.
김 교수는 하루 일정이 끝나면 감상문을 사진과 함께 인터넷에 올리고 있다. 함께하지 못한 가족들을 위해서다. 김 교수가 “짐도 없이 맨몸으로 길을 걷는 것도 힘든데, 어린아이와 짐을 들고 피란 간 부모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는 글을 올리자 수십 개의 응원 댓글이 붙었다. 그는“독일처럼 우리의 통일도 어느 순간에 오지 않을까요. 우리가 지나가는 피란길 곳곳에 통일을 바라는 마음을 가득 심어 놓을 겁니다”고 말했다.(중앙일보 2010. 4. 14 25면 기사에서 발췌)
2)꿈은 이루어진다.
- 2007년, 손자에게 쓴 편지글 중에서
지금은 6월 27일(수) 저녁 7시, 수요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이 글을 쓴다.
오늘은 차안에서 성경일 테이프를 들으며 야곱의 아들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살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 은 3000년도 훨씬 넘는 옛적의 사람들이다. 신화로 여겨지는 까마득한 시절의 이야기가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곰곰 생각해 보면 그들의 삶도 당사자들에게는 엄숙한 생존이었을 터... 수천 년의 세월 속에 스쳐간 모든 삶이 천하보다 귀한 소중한 생명들인 것을..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꿈꾸는 소년’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꿈!
우리는 누구나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5년 전, 2002 월드컵 때 온 국민을 열광케 한 구호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혼할 때 할머니에게 쓴 편지 가운데 ‘언젠가 유럽을 여행할 기회가 올 때, 사상과 이념의 벽이 무너져 체코를 방문할 날이 올 때, 우리 같이 얀 팔라흐(*1968년 체코 자유화 운동으로 숨진 청년)의 묘지를 찾아볼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고 쓴 부분이 있다.
2002년 2월과 7월, 두 차례 유럽여행 중 체코의 프라하를 방문할 기회가 생겨 여행사와 현지 가이드를 통하여 얀 팔라흐의 묘소를 찾으려 하였다. 첫 번째는 정보와 시간부족으로 찾지 못하였으나 두 번째 여행 때 그의 묘소를 찾아 꽃 한 송이 바치며 30년 만에 젊은 시절 나 자신에게 다짐한 약속(꿈)을 이루었다. 할머니는 곁에서 ‘이제 꿈을 이루었으니 이 번 여행은 아주 성공!’ 이라고 크게 축하해 주었다.
그렇다. 그것은 하나의 꿈이라고 할 수 있다.
막연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꿈, 30년 전 스스로 에게 다짐한 약속을 이루어 낸 충만함, 그것은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는 하나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때의 상황을 ‘얀 팔라흐에게 바친 꽃 한 송이’라는 제목으로 학생들에게 쓴 편지로 정리하였다. 그 편지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얀 팔라흐의 무덤을 찾은 나의 꿈은 창조적인 삶의 한 표현이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꿈을 가지십시오. 창조적인 삶을 설계하고 실천하십시오.
이상적인 삶을 스스로 만들고 가꾸어 가십시오.‘
사랑하는 손자야,
내가 어렸을 적에 ‘소년들이여 야망을 품으라. Boys, be ambitious.’ 라는 격려의 말이 유행하였다.
큰 꿈을 가지라, 그것을 이루어라
2007년 6월 27일 밤 10시
지금도 꿈을 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