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미주와 승우는 그 해 12월 20일에 결혼했다.
1994년 바다에서 두 사람이 밤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온 뒤
약 넉 달 만의 일이었고 꼭 124일째 되던 날이었다.
영은은 12월 9일 필리핀에서 예고 없이 귀국했다가 승우에게 결혼한다는 애기를 들었다.
그녀는 30분 넘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커피솝 천장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눈물을 말리기 위해서인 듯했다.
승우는 가슴 한 쪽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영은은 열다섯 살 때부터 스물여섯 살이 될 때까지
승우가 사랑해 주기만을 기다려온 여자였다. 11년. 참으로 긴 세월이 아닌가!
승우가 많은 암시를 하고 결국에는 매정하게 통고하다시피 했는데도 제 고집대로 혼
자 해바라기 사랑을 해 온 독한 일면이 영은에게는 있었다.
아니 영은에게 독하다는 표현은 적당치가 않다.
승우는 자신이 여자라면 아마 꼭 영은이 같았을 거라고 여러 번 느꼈다.
마음이 닮은 사람들. 그러나 사랑은 처음부터 끝끝내 비껴 간 것이다.
영은은 착잡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승우를 보고는 창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우리 엄마 족집게 도사인가 봐. 응? 이번에 승우 오빠 보려고 한국에 간다니까
그 다음날 남자 사진을 처음으로 내밀더라고, 마닐라에서 교포가 운영하는 커다란 오토바이
헬맷 공장 사장 아들인데 마닐라 대학에서 박사 코스를 밟는 재원이래.
교수직은 따 놓은 당상이라나 뭐라나, 오빠도 알지? 마닐라 대학 수준이 서울대보다 휠씬 높다는 거.
얼굴도 잘 생겼더라 오빠만큼은 아니지만.
나이는?
서른하나,
네 생각은 어떤데?
글쎄....... 오빠한테 이런 선고를 들으리라는 예감이 작용한건가? 약간 필이 오더라고.
선고, 라는 말이 승우 마음에 걸렸다. 나 곧 결혼해! 라는 말보다
영은에게 가혹한 말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 말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영은은 미간을 찌푸리고 웃음도 울음도 아닌 묘한 표정을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그녀는 태어나서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을 참아 내고 있는 것이다.
여.......영은아!
아무 말도 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그냥 칵 죽고 싶어. 정말 이대로 칵........
영은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풀었다.
그러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승우에게 대들 듯이 소리쳤다.
잘났어. 정말! 미워 죽겠어! 죽이고 싶어. 오빠는 왜 그렇게 멍텅구리야?
이 세상에 나 싫다는 남자는 오빠 한 사람뿐이야.
난 오빠만을 위해서 착하게 공부 열심히 하고 예뻐지려고 노력해 왔는데..........
세상에 이게 웬일이람? 난 설마 했지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꿈도 못 꿨어.
이렇게 예쁜 자기만을 사랑하고 목매며 기다려온 나를 두고 뭐 어째?
딴 여자와 결혼한다고? 기가 막혀서.........기가 막혀서............
영은의 초롱초롱한 두 눈에 이슬이 맺혔다.
치과 의사가 되어 마닐라에서 개원까지 한 숙녀가 아이처럼 떼쓰는 것을 보자 승우는 고개를 꺽을 수밖에 없었다.
수그린 승우의 눈동자에 눈물이 얼비쳤다. 사랑과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성질이 조금 다른 눈물이었다.
영은의 말처럼 예쁘고 자기 일까지 딱 부러지게 해내는 여자가 자신을 그토록 오래
기다려 준 것에 대한 감사함과 죄책감 안쓰러움과 슬픔이 눈물 속에 녹아 있었다.
언제 결혼해?
이번 달 20일.
얼.........얼마나 급했으면, 겨우 열흘 남았네. 그 여자가 그렇게 좋았어?
어디 살아? 한번 만나나 보게. 아니 먼발치에서 한번 보기만 할게 어디야?
아, 아냐! 알려 줄 필요 없어. 그 여잘 보면 내가 미치거나 그 여잘 죽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거야.
악담이라도 좋아. 사실이니까. 영은은 갑자기 탁자 위에 팔꿈치를 대고 두 손을 머리카락에 파묻고
고개를 수그리더니 거친 숨을 내뿜었다.
나 안 울 거야. 내가 미쳤어. 나 싫다고 다른 여자한테 도망치는 오빠 때문에 울 게?
고맙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빠!
응?
오빠는 아주 좋은 사람이지만 남자로선 내게 지독하게 나쁜 인간이야.
여자에게 저지를 수 있는 그 어떤 행위보다도 더! 알기나 해?
응 정말 미안하다.
사과는 싫어 내가 자초한걸 뭐. 내가 필리핀에서 15년째 살고 있잖아.
그 나라에. 여자한테 눈물을 흘리게 한 남자는 꼭 열 배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주문이 있어.
남자의 불행을 부르는 일종의 저주이지. 재미있어서 외워 뒀거든.
근데 내가 오빠를 향해 그 주문을 외울 것 같아. 안 외울 것 같아?
글쎄?
영은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엉거주춤 승우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두 손으로 승우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뺨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주룩하고 그녀의 눈물이 한 방울이 승우의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빠............. 잘살아야 돼? 응? 꼭이야!
그래 나 같은 여잘 놔두고 다른 여자랑 결혼할 정도라면
오빠는 그여자와 매일 천국에서 사는 것처럼 행복하게 살아야 돼. 알았지?
응? 꼭 그러겠다고 대답해 줘! 그래.........
그래, 약속할게.
됐어. 안심이야. 나 그 주문 안 외울게. 혹 못 참아서 외우더라도
그 저주를 지우는 해독 주문도 알고 있으니까 염려하지 마.
어쨌든 난 오빠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으니까 정말 마음이 놓이고 기쁘기도 해.
영은은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승우가 악수를 하자 그녀는 와락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러고는 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그를 스쳐 밖으로 나가 버렸다.
승우는 마음놓고 눈물 두 줄기를 뺨 위에 그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물었다.
그 눈물은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영은의 아픔에서 전이된 거였다.
영은은 승우의 마지막 눈물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사랑하고 결혼하는 데는 두 종류의 관계가 있다. 내가 상대를 더 사랑하느냐.
아니면 상대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미묘한 차이가 두 사람의 관계에 엄청난 마법을 부려
희로애락과 행복과 절망, 비탄과 기쁨, 슬픔을 기하급수적으로 빚어 낸다.
이후 그들의 삶에는 그 선택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는 일만 남았다.
승우가 미주와 결혼하겠다고 집으로 데려간 날 승우의 어머니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승우의 아버지는 세 살이나 연상의 여자를 신붓감으로 느닷없이 데려온 것에 대해 당황했다.
직업이 영화 감독이라고 하자 아버지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속을 썩이거나 엇나간 적이 없는 착실하고 자랑스런 외아들이었는데.........
부모는 모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시종일관 짓고 있었다.
그나마 아들의 선택을 존중해 주려고 애쓰는 아버지만이 미주와 이런 저런 애기를 몇 마디를 나누었을 뿐이다.
미주가 돌아간 뒤 어머니는 극렬하게 결혼을 반대하고 나섰다.
아버지는 무거운 침묵만 지켰다.
어머니는 하소연을 했고 아버지는 급기야 승우에게 결혼만은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이 고집을 꺽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12월 20일 미주와 승우는 결혼했다. 바람도 몹시 불고 슬깃슬깃 눈발까지 날리던 날이었다.
승우는 어머니가 자리를 잡고 드러누워 아버지도 오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행복하게 잘살라고 나중에 엄마 마음이 풀리면 그 아가씨를 며느리로 맞아들여
잘 해 줄 거라는 말을 남기고 아버지는 전화를 끊었다.
시댁 어른들이 불참하게 되자 미주도 미국에 있는 부모님을 초대하지 않았다.
정말 이런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건가 하고 미주는 몇 번이나 망설였다.
그러나 승우가 너무나 굳건했기에 그녀는 견더낼 수 있었다.
결혼식 날 CDS 동문들이 서른여 명 와서 미주와 승우를 헹가래까지 쳐주었다.
그 동안 미주와 승우는 산부인과 전문의 과정을 밝고 있는 정란을 따로 몇 번 만났다.
다음주에 나 승우와 결혼한다.
미주의 느닷없는 결혼 통고에 정란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감았다를 반복했다.
저...........정말이지?
그래 근데 넌 믿기지 않는 눈치구나.
아냐. 너희들이 다시 만났다는 얘길 들었을 때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어.
그래도 정말..........대단하다......
뭐가? 승우 이젠 이렇게 부르면 안되겠네. 승우 씨 말이야.
대학 1학년 초에 널 보고 마음먹은 것 같더니 결국 이렇게 해내는구나. 놀라워 축하한.......
다 잘됐어. 정말 잘된 일이야!
친구 미주가 노쳐란 거추장스런 꼬리를 뗄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것도 서른 살에!
정란은 혼자 맞아야 하는 서른이라는 나이가 정말 싫었다.
발랄함과 청순함 푸른 향기로움 같은 날개를 다 잘라 버려야 하는,
서슬 퍼런 단두대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심정! 무엇을 봐도 묘하고 착찹해지고
까딱 잘못하면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는 경계가 바로 여자 나이 서른이었다.
그 단두대에서 미주는 칼을 타는 신기의 여자처럼 멋지게 날아 오른 거였다.
모든 잡스런 편견과 시선. 말들을 일거에 잘라 버린는 바상.
더구나 승우같은 근사한 남자가 딱지와 편견으로 가득한 꼬리를 잘라 주지 않았는가.
승우는 정란 자신뿐만 아니라 어느 여자가 봐도 매력적인 사람이고 호감이 가는 남자였다.
정란은 일말의 부러움을 채 감추지 못했다. 어째 좀 서글프다. 이제 나만 남았잔아.
진작에 나도 승우 씨 같은 연하의 남자 하나 잡아둘걸.
그러지 그랬니?
근데 안 보이더라 승우 씨 같은 남잔. 연하고 연상이고 동갑내기고 간에 그런 남자는 없더라고.
일이 잘 안 풀리더니 너 사람 하나는 제대로 만난 거야 승우 씨에게 너 무지 잘해 줘야 돼.
호호호 가끔 학창 시절 떠올리면서 군기 한번 잡아 보지 뭐.
지난번에 늦게 나왔을 때 내가 얼차려을 시켰더니 정말 따라 하더라.
정란은 시샘 어린 눈길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정란은 독신을 고집하지는 않았지만 사랑과 결혼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접근해 오는 사내들이란 의사라는 직업에 먼저 빠진 속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정란은 서서히 남자 없이 사는 쪽도 생각을 해 두고 있었다.
정란은 자조 썩인 위로를 스스로에게 던지듯이 말했다.
이왕 늦었는데 뭘 독신도 괜찮을 것 같아.
세상에 수많은 사내들이 있어도 내 마음 하나 못 빼았는 쭉정이들뿐이잔아.
차라리 혼자 사는 게 속 편하지.
그래도 좀 그렇잖아. 가슴의 통증 같은 그 놈의 결핍감........
이 기지배야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자기가 앞장서서 독신 부르짖어 놓고 이젠 완전히 딴소리네 하긴
뭐............그래.
나도 남자란 수컷은 곁에 없어도 아기 하나는 키워 봤으면 해. 내가 산부인과 의사여서가 아니라 아기........
그거 정말 신비하고 매력적이거든. 생명 이라는 말에 딱 어울린다고.
우리 정도 살았다면 이미 웬만큼 살아 목숨 이지만 아기는 생명 그 자체야.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도 정말 내 아기 하나는 마들든 얻든 간에 키워 보고 싶어.
만들든 얻든 간에? 어째 뉘앙스가 좀 묘하다. 궁상맞은 것 같기도 하고 비장한 것 같기도 하고.........
웬수! 가진 자의 횡포를 맘껏 부리는군. 어쨌든 잘 살아라. 근데 그럼 네가 하던 일은?
승우 씨가 스폰서 돼 주겠대. 걔 학교 다닐 때 날 기막히게 도와 줬었잔아.
번역 통역에서부터 물 떠다 주고 커피 뽑아 주고 캔맥주 짱 박았다 갖다 주고.
또 종으로 부려먹으려고 하는구나. 참 솔직히 까놓고 얘기하면 승우 씨 같은 남자가
왜 너 같은 덜렁이와 왈패를 뒤섞어 놓은 노처녀를 좋아하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그 대상이 나라면 또 모를까 나 봐. 그래도 꽤 우아하잖니?
나 같은 선밸 놔두고 하여튼 간에 승우 씨 걔 눈 삐었어!
어머머 너 승우 좋아하는구나.
좋아한다 물랐니? 어쩔래? 나 줄래?
그게 준다고 줘지니? 그냥 뺏어 가야지. 능력 있으면 뺏어 가봐 정말이야.
기지재 정말 못됐어.
승우 씨가 일편단심이니까 이젠 완전히 안하무인이야.
시답잖은 소리 그만하고 너 나한테 장롱 하나 해 줘라.
뭐어? 이게 불난 데 부채질하네. 네가 뭐가 예쁘다고 장롱을 해 줘. 꿈도 야무지시네.
너 돈 쓸 데도 없잖아. 그냥 눈 딱 감고 하나 해 줘. 나도 너 갈 때 하나 맞춰 줄게.
속보이는 말. 내 심정 북북 긁는 말 하지도 말어. 너 내가 결혼 못할 거라고 보는 모양인데.
나 너 꼴보기 싫어서라도 한다. 어쨌든 그런 밑지는 거래는 절대 안 해.
정란아............제발........
망할 것! 냉장고 하나 해 줄게.
만세! 대빵 큰 걸로?
얼음 장사할래?
5백 리터짜리면 충분하잖아.
그래그래.
그거면 넘치고 넘친다. 아, 도대체 그 큰 냉장고 속을 어떻게 다 채워 넣을까 벌써부터 걱정이네.
호호호, 요즘 느닷없이 웃음이 나와서 죽을 지경이야. 혹시 이거 심각한 병 아니니?
정란의 눈이 샐죽해 지더니 눈빛이 가시가 되었다.
너 병이 아니라 악취미 생겼구나. 이 기지배야.
누구 복장 터지는 걸 보려고 이러니. 차라리 날 죽여라!
느닷없이 들이 닥치는 것들
신혼의 낮과 밤들은 미주가 꿈꾸던 그대로였다. 아주 바빴지만 미주와 승우는 행복했다.
같이 잘 수 있다 밤이 준비되어 있었고. 같이 눈뜰 수 있는 아침이 두 사람에게 잊지 않고 배달되었다.
같이 있다는 것. 그것이 두 사람에겐 행복의 근원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마다 미주는 마음이 늘 편안했다. 승우가 만들어 주는 생활의 휴식처인 가정.
미주가 영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언제나 저녁이 식탁에 차려져 있었다.
결혼 전 그녀가 그를 6년만에 만나 만취했던 날, 눈을 뜨자 손이 닿을 거리로 당겨진 탁자 위에
술병 방지 내복약과 피로 회복 드링크. 요플네와 주스 켈포스 한 갑이 통째로 놓여 있었듯이.
수저 옆에는 늘 짧은 메모가 있었다.
오늘은 조갯국이야. 데워서 먹어. 거르지 말고 꼭!
남편 승우는 한밤의 팝세계가 끝나고 새벽 2시면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과일이며 장미. 프리지어, 케이크. 만두, 순대. 떡볶이 등을 매일같이 사 들고서
미주가 그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비디오를 보거나 작업을 하고 있으면 두 사람은
가출한 소년소녀처럼 사 온 것을 방바닥에 놓고 장난을 치며 먹었다.
미주는 일주일의 반은 잠든 모습으로 승우를 맞았다.
승우는 잠자는 아내를 들여다보고는 옷을 벗고 샤워를 한 뒤 미주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이마에 입을 맞추거나 이불을 다독거려 주고 그 옆 잠자리에 들었다.
아무리 노력을 하고 신경을 써 준다 해도 생활은 군더더기가 많이 붙는 것.
아주 드물지만 가볍게 말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에 지쳐 사소한 것을 가지고 짜증을 내는 쪽은 항상 미주였다. 그
럴 때마다 승우는 눈치를 살피며 미주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기회를 잡아 어리광을 부렸다.
결혼한 지 6개월이 되자 그들의 생활은 완전히 자리가 잡혔다.
집 안에서 해야 할 각자의 역할이 조정되었다. 사랑과 신뢰의 기본은 성실이라고 굳게 믿는 승우는
세탁기를 돌린다든지 청소며 설거지까지 자기가 해야 할 날과 주일을 꼭 지켰다.
언제나 펑크을 내는 쪽은 미주였다.
미주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자신이 써 두었던 시나리오를 자본과 기획이 좋은 영화사에서
같이 해 보자고 덤벼 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물을 만난 물고기가 되었다.
미주로선 승우와 결혼한 것이 행운이었다. 승우는 자기가 아는 라인을 미주에게 유리하도록 대 주었고.
미주 대신 사람을 만나 설득하는 작업도 잘 해냈다. 미주의 이름은 통하지 않았지만
FM 라디오 간판 프로 프로듀서인 승우의 이름은 통했다.
멋지고 실력 있는 남자의 아내라는 이유로 미주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을 가진 여자라는 프리미엄까지 얻은 것이다. 이젠 그녀를 만만하게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같은 문화밥을 먹는다는 게 그런 것이다. 가수와 매니저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승우는 한 다리만 건너면 영화판까지도 튼튼하게 줄이 닿았다.
영화 제작사나 톱배우들도 그의 프로에 구미를 당겨했다.
전국 청취을 수위를 달리는 그의 프로에 초청자로 나가거나
제작된 영화 광고를 위해 미주를 통해 숨가쁘게 로비를 해 올 정도였다.
결혼 4년 동안 미주는 자신의 손으로 무려 세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자신이 썼던 두 편의 시나리오 중 멜로드라마는 서울 관객 동원수 45만이라는 준대박을 터뜨렸다.
한 편은 손해를 보았고. 시나리오 공모 작품을 영화화한 것은 본전치기에 그쳤다.
충무로에 입성하면 예술 영화에 대한 열망이 아무리 강해도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상업 영화 한 두편을 크게 띄워 놓고 마음먹은 예술 영화 한 편을 찍겠다는 타협을 본다.
상업 영화로 돈을 벌어서 찍고 싶은 것을 찍겠다는 뜻이다.
미주는 국내의 몇 안 되는 능력있는 여성 감독으로서 자리를 확보했다.
그것은 몸과 시간을 아끼지 않고 길을 뚫어 주고 전폭적인 받침대과 방패막이의 역할을 해준
승우의 도움과 마주의 실력이 이루어 낸 개가였다.
영화 세편을 남긴 결혼 생활 4년은 마치 수첩의 낱장을 넘기듯이 지나가 버렸다.
처음에 30평에 전세 아파트에서 시작한 두 사람은 이제 45평 아파트의 주인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미주는 지난해부터 자체적으로 독립 영화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직원 열 명을 두고 영화 제작의 기초 작업과 기획, 홍보까지 전방위로 뛰고 있었다.
그녀가 하루에 약속하고 만나는 주요 인물들은 평균 10여명. 신문사 기자, 영화 평론가. 교수. 시나리오 작가.
대기업 영상 관계자. 극장주 등 부지기수였다.
오전 10시에 집에서 나가면 평균 밤 11시 정도가 되어야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들 부부에게 언제나 행복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지난달 미주는 미국에 있는 남동생으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남편을 기다리다가 설핏 잠이 들었던 미주는 전화 벨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새벽 1시 30분경. 남동생은 침통한 목소리로 어머니의 사고 소식을 알려왔다.
지난해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이어 이번엔 어머니 마저 교통사고로 지금 수술실에 들어가 계시다는 거였다.
몇 시간 뒤 어머니는 끝내 숨을 거두셨다. 미주는 다음날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장례식을 치르고 한국으로 돌아온 미주는 당분간 아무 일도 손에 잡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미주는 때늦은 후회의 눈물을 쏟아냈다.
손주를 안겨드리지 못한 건 또한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미주는 아직까지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아마도 아기가 미리 알아서 지금 뱃속에 들어가면 엄마가 너무 정신이 없겠구나 하고 봐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승우는 외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아기를 보채지 않았다.
미주 자신이 흘러간 영화 속의 여주인공 같아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걱정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미주는 이제는 아기를 원했다.
지금까지 냉담한 시어머니도 아기를 안겨 드리면 자신을 받아들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승우도 결혼 3년이 넘자 은근히 미주의 임신을 기다리는 듯했다. 결혼 후 처음 1년은 피임을 했지만
그 다음해부터는 아예 피임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기가 도무지 들어서지 않았다.
혹시.......... 불임. 4년째 아기가 들어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미주는
정란이 의사로 있는 산부인과 병원으로 가서 검사까지 받았다.
아무 이상이 없어서 승우까지 검사를 받았지만 그도 멀쩡했다.
정란은 미주에게 일이 과하고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니까
잠시 쉬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언을 했다.
그러나 미주는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대학 내내 깡으로 버틴 체질이 도움이 됐는지
그녀는 지금껏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감기에 걸렸다. 불현 듯 내 나이가 벌써 서른 넷! 30대 초반을 넘어섰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아무리 그래도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라니!
이제 내 몸도 가고 있구나 싶었다. 으슬으슬 춥고 신열도 났다.
1998년 8월 16일 광복절 다음날이었다.
미주는 코를 훌쩍거리며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앞에 있는 자신의 영화사로 나가기 위해서
차트며 파일 서류 시나리오 대본을 확인하여 가방 속에 넣었다.
오전 11시에는 새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 대기업 영상 지원단 단장인 김 이사와
휠튼호텔 커피숍에서 약속이 되어 있었고, 오후 2시에는 신문사 영화 담당 기자를 만나야 했다.
먼저 영화사에 들러 직원들과 하루 일을 체크한 뒤,
약속한 사람들에게 넘겨 줄 보완서류를 챙겨서 출발해야 했다. 에........에취! 이........이런!
아무래도 감기 약을 좀 지어 먹어야겠다고 가방을 들고 일어서려는데 전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에 불임을 체크받을 때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가볍게 여기지 말고
꼭 자신에게 전화하라고 신신당부했던 정란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손목 시계를 들여다본 뒤 잠시 망설이던 미주는 담배를 뽑아 물고 불을 붙인 뒤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자리에 있었네? 웬일이냐? 네가 전화를 다 하고 바빠 죽겠다며
한번 병원에 오라고 해도 죽어라고 안 오던 네가?
흐응 가시 돋쳤네. 반가워할 줄 알았더니.
칫! 근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아 이거...........
엣취 들었냐?
오늘 아주 중요한 사람 만나야 하는데 내가 지금 이 모양이다. 미주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감기? 언제부터 그랬어? 이틀 전부터 이래. 떨어질 것 같더니 내가 뭐 좋다고 엉겨붙네, 참! 후후.
담배 피우니?
그래
일단 꺼! 당장!
얘가 왜 이래?
껐어?
그래 껐다 껐어!
너..........그거 언제 있었어?
그거라니? 생리 말이야.
야아 그건 아니다. 내가 임신 증상도 모를 줄 아냐?
잔소리 말고 가만,
지난달에..........없었던 것 같긴 한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들쭉날쭉하잖아.
챙기지도 못하고 두세 달 건너뛰는 건 별일도 아냐. 더구나 지난달에는 어머니 장례식 때문에
미국에 다녀오느라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었구.
딴 증상은?
뭐 내가 만성 위장병은 너도 알 테고.........
힘이 좀 빠지긴 하지만 요즘 밥을 제때 잘 못 챙겨 먹었으니까 당연한 거고
쌓이는 피곤감도 당연한 거고 그렇지 뭐. 너 나가는 길에 약국에 가서 약 지어 먹을 작정이지?
당연하지 바이어 얼굴에 침 튀길 일 있냐?
그렇다면 일단 임신 진단 시약 써 보고 확인한 뒤에 감기약 지어 먹어. 그전에 절대로 약 먹으면 안 돼.
야 감기 증상이면 다 임신이냐?
모르는 일이야. 너 아기 가지고 싶지?
물론이지. 이제 나도 좀 조급해졌잖아.
승우 씨도 말은 안 하지만 몹시 기다리는 눈치고 시댁 생각해도 좀 그렇고.
그러면 일단 시키는 대로 해. 안 그러고 네가 이쪽으로 오면 내가 확인해 주고.
그쪽으로 어떻게 가냐? 방향이 정반대인데.
그럴 줄 알았어. 일단 그렇게 하고 만의 하나 반응이 나오면 두말하지 말고 나한테 달려와.
만사 제쳐놓고 그건 약속할 수 있지?
그래 그렇기마 하다면야. 그런 말 안 해도 내가 너 한테 달려간다. 알았어. 나가 봐야 해. 전화 끊는다!
자가 임신 검사를 해 본 미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양성 반응이었다. 처음엔 믿기지 않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고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그렇다면.......임신? 내가 아기를 가졌다고?
아........아냐, 자가 임신 진단 시약으로 100퍼센트 확신하기는 일러. 그래도.....
틀림없을 거야. 90퍼센트가 넘는 정확도의 공신력이 있는 제품이잖아. 어머나 어머나.
이걸 어쩌면 좋아 내가...........내가 아기를 가졌어. 미주는 환호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고 싶었지만
정란에게 가서 완전한 사실임을 확인받을 때까지는 침착해야 했다.
미주는 남편 승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승우가 얼마나 좋아할까.
정말 임신했다면 그는 천국의 기쁨을 표현할 것이다. 그가 정말 얼마나 기뻐 날뛸지는 상상이 안 갔다.
미주는 차를 몰고 영화사 사무실로 가면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30대 초반을 넘어서면서 미주는 내심 불안했었다. 이러다가 영영아기를 갖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고
학교 동기들 중에는 대학 졸업후 바로 결혼해서 벌써 학부모가 된 친구도 많았다.
차를 몰고 일로 인해 뛰어다니다가 교통 신호에 걸렸을 때 병아리처럼 노란 가방을 메고 하교하는
저학년의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시린적도 있었다. 나이가 많아서 정말 아기를 갖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그것은 연하의 남자와 같이 살면서 미주가 겪어 낸 마음 고생이었다.
그러나 이제 서광이 비친 것이다.
결혼 4년 차에 들면서 가정에 아이가 없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커다란 결핍이었는데.
이제 머잖아 엄마가 된다니, 미주는 날개가 막 돋아 난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사무실 앞에 차를 대놓고 미주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정란이니?
응? 너.....그럼?
오랫동안 절친한 친구라 정란은 미주의 목소리만으로도 알아차렸다.
그녀가 얼마 안 된 시간 안에 두 번째 전화를 걸어 온 것이라면..........
그래. 나..........나 양성 반응이 나왔어.
어머나! 야 너 당장 와라. 그걸로는 안 돼. 확실하게 검사를 해 봐야지.
오후 늦게 갈게. 오늘 잡힌 약속들은 다른 사람을 내보낼 수 없거든.
그럼 네시 반까지 와라, 아니 네 시까지 올 수 있니?
정란의 목소리도 흥분되었다. 한껏 들떠 있는 미주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도 남기 때문이었다.
네 시 반까진 어떻게 될 것도 같은데..........
좋아 시간 꼭 지켜!
미주는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영화 자금을 틀어 쥐고 있는 대기업 당사자를 만났을 때도 그전처럼 열정적으로 설명과 설득이 되지 않았다.
정말 임신했다면......... 30억은 들어가야 비주얼이 나오는 SF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는 데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기획 실장을 대타로 뛰게 할 수도 있었지만 상대방은 감독이자
영화사 대표인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원할 것이었다.
미주는 몇 번이고 승우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밖에 나가 일을 하면서도 하루에 평균 두 통의 전화는 하는 승우였다.
시시콜콜한 얘기라도 그의 표현은 재미있고 언제나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더 없이 환한 표정으로 미주는 남편에게 날아가는 번호를 누르다가 그만두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아무래도 좀 성급한 듯싶었다. 정란의 얘기를 듣고 나서,
그의 기쁨을 수소 폭탄처럼 터지게 만들 수 있는 약간의 장치와 기획을 한 뒤에
말해도 되리라는 기분에 들떠 있었다. 나..........임신했어! 하는 말은
여자만이 남자에게 할 수 있는 천국의 전언이 아닌가. 그래, 우아하고 품위 있게.
미주는 두 번째 약속을 30분 정도 양해를 구해서 앞당겼다.
중앙 유력지 영화 담당 기자와 방송국 영화 프로를 맡은 프로듀서를 한 시간 간격을 두고 만났다.
외국 영화 홍보를 미주의 회사에서 맡았기 때문에 예고 프로 시간 조정과 영화 줄거리. 배우.
감독 경력이 들어간 보도 자료를 넘겨주고 큰 지면과 화면으로 다루어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사람들이어서 대표가 나서지 않으면 만나 주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미주는 점심은커녕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실 시간이 없었다.
사무실에 나가 오전에 커피 한잔을 마신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오늘은 피곤감도 배고픔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서 빨리 일을 마무리짓고 정란에게 가려는 마음과 아기에 대한 두근거리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임신이 확실하다면 그녀는 4년 동안 줄곧 달려오기만 했던 정신없는 일과에서 미련 없이 멈춰 서기로 했다.
처음으로 가진 아기였다. 아기에게 무리를 주는 일과 스트레스는 일절 피해야 했다.
현재 진행 중이지만 확정되지 않은 자사 영화 제작 프로젝트는 출산 뒤로 미루거나
CDS 1년 후배인 기획 실장 대행 체제로 바꾸면 틀이 잡힐 것이다.
나머지 홍보와 관련된 일은 자기가 없어도 기획 실장이 책임을 맡아 무리 없이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대학 졸업 후부터 8-9년. 대학 CDS 영화 그룹에 들어간 것까지 더하면
미주는 영화 일로만 10년 넘게 하루도 쉬지 않고 강행군을 해온 셈이다.
안 그래도 장기간의 휴식과 재충전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임신이 아니라면 여유 있는 휴식은 불발에 그치겠지만 정말 임신했다면
집 안에 과일을 가득 쌓아 놓고 마음껏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레몬이며 귤을 까먹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동안 시간이 없어서 보지 못한 비디오를 실컷 보면서 말이다.
메모지를 옆에 두거나 머리를 굴리지 않고 그저 킥킥킥 재미있네! 흑흑흑 슬프네! 하면서
여느 임산부들처럼 매일 남편을 곯려 주는 맛도 재미있을 것이다.
입덧을 빙자해서 희귀한 과일과 구하기 힘든 음식만을 먹고 싶다고 말해야지. 승
우가 자신을 공주처럼 잘해 준 건 사실이지만 이젠 여왕으로 승격해서 여왕처럼 굴어야지.
하고 생각하니 미주는 마냥 행복한 기분이었다.
여자들만이 느끼는 배가 부르고 가슴이 부르는 기쁨 이 감정을 미주는 이제야 처음 느껴 보는 것이다.
전혀 예상못한 선물을 받고 마냥 즐거워하는 아이처럼. 미주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정란이 있는 종합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이미 정란에게는 가는 길이라고 통화로 알렸다.
만의 하나 임신이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미주의 미소를 잠시 지우는 것은 그 생각뿐이었다.
얘. 축하한다!
그럼?
그래 임신이야. 놀랍게도 벌써 3개월이 넘었는데? 어떻게 그러고도 몰랐냐?
네가 망아지처럼 들뛰며 돌아 다니는 데도 아기가 용케 자리를 잡았다 얘. 안심해도 돼!
벌.......벌써? 난 입덧도 안 했는데.
책상으로 돌아가 기록 카드를 작성하는 정란 앞에 옷을 수습하고 앉은 미주의 얼굴은 기쁨으로 터질 것 같았다.
입덕을 전혀 안 하는 임부들도 많아. 다른 증상은 없니?
속이 좀 메슥거리고 구토 기는 간혹 있었어. 원래 내가 대학 때부터 위가 안 좋았잖아.
속이 더부룩한 소화 불량 기는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주는 연신 입을 벙긋거렸다.
아랫배에는 손을 가져다 댄 챘였다. 임신했다는 얘길 들어서인지 아랫배가 조금 도톰해진 기분이었다.
아기가 더없이 대견했다. 전혀 신경도 써 주지 않았는데 아니 정란의 말마따나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들뛰고 다녔는데 소리 없이 찾아와 준 것이 너무나 고마운 느낌이었다.
너처럼 자기 몸에 무심한 사람도 드물 거다. 거의 무지한 정도지. 다른 건? 혹시........
식은땀이 나거나 어지럽거나 갑자기 힘이 빠지거나 그러진 않았니?
글쎄..........내가 왜 깡다구 체질이잖아. 근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좀 그랬던 것도 같다.
요즘 의자를 찾아 앉는 일이 잦았거든 피곤이 누적돼서 말이야. 체중은 약간 떨어졌더라.
몸매 걱정을 해서 다이어트도 좀 했거든. 체중 얼마나? 1,5킬로그램 정도.
임신 안 했으면 2킬로그램은 더 빼야 돼. 내가 얼굴보다도 몸매가 죽이잖니?
승우 씨는 나보고 타고난 소녀 몸매래. 앞으로 몸매가 망가질 걸 생각하니까 좀 그렇다 그치?
하여튼 간에 넌 못 말리겠다.
정말 믿기지 않아. 내 몸 속에서 뭔가가 자라나고 있다니 생각하니까 무지무지 감동스럽네.
눈물이 왈칵 나잖아.
나 봐! 나도 정말 기쁘다. 너무나 잘됐어.
승우 씨가 이 소식 들으면 펄쩍펄쩍 뛰겠구나. 까무러치겠는걸. 그래도 참아야 돼.
전화로는 말고 분위기 좋은 데서 턱을 한껏 쳐들고 다리를 꼬고 말할 거야. 무릎을 끓고 경배하란 듯이?
그래 바로 그거야! 너 괜히 승우 씨한테 선수쳐서 바람구멍내면 안 돼! 알았지?
미주는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눈가에 맺힌 물기를 손수건으로 찍어 눌렀다.
엄마가 된다는 것 승우와 자신의 아기를 낳는다는 것. 그
아기를 사이를 두고 두 사람이 함께 자고 일어난다는 것.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친구로서 같이 기뻐하는 와중에도 의사인 정란은 찬찬히 미주의 혈색이며 안색을 살폈다.
정란아! 나 물 좀 줘. 정말 오늘 이 병원에 오느라 발에 불이나도록 뛰어다녔다.
점심도 못 먹었니?
점심이 뭐니?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셨다니까! 그래?
정란은 물컵을 건네다가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너 나 따라와! 아니 얘가 왜 이래?
나 갈증 나. 어서 물이나 줘.
환자면 일단 의사의 지시에 따라. 야,
얘 가졌다고 무슨 환자가 되니?
모르는 소리 병원에 왔으면 모두 환자로 분류되고 환자는 의사 지시에 절대로 따라야 한다고 명시돼 있어.
어디 가는데?
일단 한번 가볍게 체크해 보자, 그래야 내가 안심하고 너와 태아의 건강을 돌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마침 네가 먹은 것도 없다니까 검사도 쉽고 간단해. 정란이 어리둥절해 하는 미주를 데려간 곳은
1층 복도 끝에 있는 방사선과였다. 5분도 안 걸리리까 위검사를 한번 해 보자는 것이었다.
야아. 싫어. 갑자기 얘가 뚱딴지처럼 왜 이래?
하는 미주에게 정란은 흰 조영제 액이 담긴 갤포스 같은 것을 내밀었다.
젊은 남자 기사가 이미 기기를 작동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미주는 하는 수없이 그걸 마셨다.
대학 후반기부터 자주 복용했던 제산제 맛과 비슷했다.
미주가 마신 조영제는 위 전체를 하얗게 사진 촬영하게 하는 것으로 위점막 전체를 희게 바르는 역할을 했다.
불만 섞인 입을 삐죽 내밀면서 자기 앞에 선 미주를 보며 정란은 미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주는 대학 때부터 몸을 확대시켰다고 할 수 있다. 술과 담배에 불규칙한 식사,
심지어 하루에 한 끼조차 안 먹은 경우도 허다했다. 그
래서 대학 4학년 때부터는 위장약을 입에 달다시피 하며 지냈다.
정란은 그게 오래 전부터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종합병원에 근무하게 되면서 정란은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멀쩡한 사람들이 갑자기 쓰러져 죽어 나가는 일이 허다한 게 병원이었다.
응급실과 내과 병동만큼은 아니겠지만 산부인과 병동도 위태로운 목숨을 다루어야 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병원에 근무하면 누구나 건강을 자신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죽음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일상사였다.
흔한 예를 들자면 나이와 관계없이 멀쩡하게 출근도 하고 등교하고 놀러가고 일하던.
건강하기 이를 데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쓰러져 목숨을 잃은 숫자가 우리 나라에서만도 한 해에 2만5천 명이다.
부정맥과 심근경색, 뇌출혈 같은 것이 불시에 돌연사와 급사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기 목숨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란은 오래 전부터 미주의 건강을 체크해 보고 싶었다.
미주가 늘 바쁘다는 핑계로 고사했기 때문에 지금껏 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검사는 5분도 알 걸렸다.
생사람도 환자 만들어 병원 돌 벌어 주려고 안달이 났구나 너,
나, 이건 돈 못 내 알았니? 니가 내야 돼!
알았다. 이 고집붙통아!
촬영 기사가 정란에게 커다란 필름을 건넸다.
미주는 나가기 위해 문 손잡이를 잡느라 젊은 기사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안색은 어두웠다........
설마, 하는 느낌이 엄습한 정란은 재빨리 한쪽 벽면에 형광판이 설치된 뷰어 박스 쪽으로
필름을 쳐들었다가 얼른 내렸다.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정란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필름을 쳐들어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게 웬 날벼락이람!..............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더니만 이런 날벼락이.........
하필.........너무나 공교롭게! 정란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얘 너 안 나갈.........뭐야?
뭐가? 촬나였다. 몹시 당황한 눈빛의 일부를 정란은 채 숨기지 못했다.
정란은 순간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이었다가 황급히 어색한 웃음기를 머금었다.
나가자.
아........글세 뭐냐고? 뭐 잘못됐니?
아냐. 괜찮아. 나가자니까. 얘가 왜 이래?
너.........너........들고 있는 필름 줘 봐.
아이구 내 참, 어이가 없다! 아무리 친구라도 의사인 나한테 너 좀 너무한다. 이건 의사가 보관하는 거야.
아 글쎄........나도 한번 보자고, 내 사진 내가 한번 보겠다는데 너 정말 왜 이래?
이상 없어. 내가 보증해. 정 기사님. 필름 받아요.
젊은 기사가 필름을 받아 봉투에 넣자 미주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분노가 눈에서 불꽃처럼 튀었다.
너, 지금.........뭐 하는 거야? 장난 하는 거니?
나가자. 나가서 얘기해.
아저씨! 그것 보여 주세요. 당장 보여 달란 말이에요. 시시하게들 굴지 말고!
젊은 기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정란을 쳐다보았다.
정란은 화가 벌컥 나서 기사의 손에서 봉투를 낚아채 미주의 가슴팍에 던졌다.
야 봐라 봐! 뭔 말을 들어먹어야지. 전부 다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고 야단이야!
흐으응, 진작 보여 주지 그랬어?
미주는 노기에서 금방 장난스럽게 표정이 바뀌어 있었다.
암환자 나오는 영화을 찍은 적이 있던 미주는 필름을 보는 상식을 어느 정도 터득하고 있었다.
암 필름도 여러 장 봤다. 팔짱을 끼고 필름을 꺼내는 미주의 손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본 정란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미주는 뷰어 박스를 향해 필름을 천천히 들었다.
잘록한 위가 예쁜 주머니처럼 희게 보였다. 하지만 위의 등쪽선이 두 군데 동전 크기로 움푹움푹했다.
위의 윗부분 관이 만나는 곳 오른쪽 한 군데와 거기에서 10센티미터 정도 내려온
중간 부위에 어둠에 먹힌 흔적이 뚜렷했다.
건강한 정상적인 위는 선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데. 이건 그렇지 않았다.
일순간 필름을 든 미주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저............정란아, 뭐야? 이..........이게 대체 뭐야?
그걸로는 아직 단정지을 수 없어. 조직 검사를 해 봐야 확실한 걸 말해 줄 수 있어.
정란을 향해 미주는 천천히 한 발 다가섰다. .....
그래? 그래..........근데 이게 단순한 염증은 아닐까? 악성 말고 그냥 종양 같은.
이렇게 나오는 것 중에 그럴 가능성도 있다던데.
그래 그럴 수도 있어.
미주는 다시 한 번 필름을 들어 쳐다본 뒤 핏기가 완전히 가신 얼굴로 혼자 중얼거렸다.
마.........만약. 이게 위.........위..........위, 위암을 말해 주는 거라면 내가 위암?
핫 이건 마.......말이 안 돼. 도무지, 정란아. 너 이게 말이 되.........된다고 생각하니?
이건 웃겨도, 웃겨도 너무 웃기는 일이야!
첫댓글 호사다마라드니.....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네요~그래도...... 입다물고...다음 편을을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것 같아서 걱정스럽기는 했었는데....
잘봤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