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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가 전위(傳位)를 받던 날, 성삼문이 예방 승지(禮房承旨)로서 옥새(玉璽)를 받들어 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잠길 정도로 통곡하였다. 세조가 바야흐로 땅에 엎드려 굳이 사양하다가 때때로 머리를 들어 바라보았다. 삼문이 박팽년ㆍ이개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 및 무인 유응부(兪應孚)와 노산의 외숙(外叔) 권자신(權自愼) 등과 더불어 노산을 복위(復位)시키려고 도모하였는데, 김질(金礩)도 그 모의(謀議)에 참여하였다. 삼문이 김질에게 이르기를,
“일이 성공되는 날에는 너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이 영상이 될 것이다.”
하였다. 삼문 등의 거사 기일이 여러 번 어긋나 뜻대로 되지 아니하자, 질이 이에 그 음모를 정창손에게 누설시켰는데, 창손이 곧 질과 함께 대궐에 들어가 비밀히 아뢰기를,
“질과 삼문 등이……하였으니,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세조가 편전(便殿)에 나와 앉으매, 삼문도 승지로서 입시(入侍)하였는데, 세조가 무사를 시켜 끌어 내려 질이 밀고한 말대로 힐문하니, 삼문이 웃으며 대답하기를,
“모두 사실이오. 상왕이 나이 한창 젊으신데, 왕위를 내놓았으니, 다시 세우려는 것은 신하로서의 당연히 할 일입니다. 다시 무엇을 물으시오, 나으리가 평일에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인증하더니,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하고, 김질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네가 밀고한 것은 오히려 간사한 행위로 정직하지 못하다. 우리들의 뜻은 다만 이렇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쇠 조각을 불에 달구어 배꼽 밑에 놓으니 기름이 끓으며 불이 붙어 타는데, 삼문의 안색이 변하지 않고, 쇠 조각이 식기를 기다려 말하기를,
“다시 뜨겁게 달구어 오너라.”
하였다. 또한 그의 팔을 끊으니 천천히 말하기를,
“나으리의 형벌이 참혹하오.”
하였다. 이때에 신숙주가 자리에 있었는데, 삼문이 꾸짖기를,
“전일에 너와 더불어 집현전에 같이 당직할 때에, 세종께서 원손(元孫)을 안으시고 뜰에 거닐면서 말씀하시기를,‘과인(寡人)이 죽은 뒤에 너희들이 모름지기 이 아이를 보호하라.’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거늘 너는 잊었느냐?”
하니, 숙주가 몸둘 바를 모르므로 세조가 숙주를 피하게 하였다. 삼문이 죽음에 다다라 감형관(監刑官)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보좌하여 태평 성대를 이룩하라. 나는 죽어서 돌아가신 임금을 땅 밑에서 뵈리라.”
하고, 그 아버지 승(勝) 및 아우 삼고(三顧)ㆍ삼성(三省)과 더불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 이개(李塏)는 목은(牧隱 이색)의 증손인데, 시(詩)와 문이 뛰어나 세상에서 중망을 받았다. 세종이 온양 온천(溫泉)에 갈 적에 이개가 성삼문 등과 함께 편복(便服)으로 행차를 따라가 고문(顧問)이 되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삼문의 모사에 참여하였는데, 사람됨이 몸이 파리하고 약하나 곤장 아래에서도 안색이 변하지 아니하므로 보는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이개의 숙부 계전(季甸)이 매우 친밀하게 출입하므로 이개가 경계한 적이 있었다. 이때서야 세조가 말하기를,
“일찍이 개가 제 숙부에게 그런 말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마음에 못된 놈이라 여겼더니, 과연 다른 마음이 있어 그러하였던 것이로구나.”
하였다. 이개가 수레에 실려 형장(刑場)으로 나갈 때에 시를 짓기를,
우의 솥처럼 중할 때엔 삶도 또한 크거니와 / 禹鼎重時生亦大
기러기 털처럼 가벼운 데선 죽음 또한 영광일세 / 鴻毛輕處死猶榮
일찍이 일어나 자지 않고 문을 나가니 / 明發未寐出門去
현릉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구나 / 顯陵松柏夢中靑
하였다.
○ 하위지(河緯地)는 선산(善山) 사람이다. 세종 무오년(1437)에 과거하여 장원에 뽑혔다. 문종(文宗)이 승하하자 사직하고 선산으로 돌아갔다. 단종이 우사간(右司諫)으로 불러 벼슬이 예조 참판에까지 이르렀는데, 삼문의 모의에 참여하였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애석하게 여겨 은밀히 타이르기를,
“네가 만약 처음 음모에 참여한 것을 숨긴다면 면할 수 있다.”
하였으나, 위지가 웃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국문을 받을 때엔 위지가 대답하기를,
“신하로서 이미 역적이란 이름을 썼으니, 그 죄가 응당 죽을 것인데, 다시 무엇을 물을 것이 있습니까?”
하였다. 세조가 노기가 풀려 유독 그에게는 단근질을 시행하지 않았다. 세종이 인재를 양성하여 이때에 한창이었는데, 모두 위지를 첫 손가락으로 꼽았다.
○ 유응부(兪應孚)는 무인(武人)으로서 날랜 용기가 남보다 뛰어나 능히 담과 집을 뛰어 넘었다. 어머니를 섬김이 효성스러웠고,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 삼문 등과 더불어 노산을 복위시키려고 모의하여, 아무날 명 나라 사신을 청하여 연회할 때를 타서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마침 그날 세자(世子)가 임금과 한 자리에 오지 않고, 또 자리가 좁다 하여 운검(雲劍)을 가진 장수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므로 삼문 등이 그 계획을 연기하려 하니, 응부는 그래도 들어가 거사하려 하면서 말하기를,
“일은 빠른 것이 좋은 것이오. 세자가 비록 한 자리에 오지 않았으나 우익(羽翼)들이 다 여기에 있으니 만약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제가 어찌 하겠는가.”
하였으나, 삼문 등이 만전(萬全)의 계책이 아니라 하여 굳이 말렸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일이 발각되었다. 세조가 묻기를,
“네가 어찌하려 하였느냐?”
하자, 응부가 대답하기를,
“석 자의 칼을 가지고 당신을 폐하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하였는데, 조무래기 선비들과는 같이 모사(謀事)할 수 없었소, 만약 진작 내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오늘 이 지경이 되었겠소. 더 이상 사실을 묻고 싶거던 저 서생(書生)들에게 물으시오.”
하여, 듣는 사람들이 오싹하였다. 관(官)에서 그의 집을 몰수하는데 문안에 다만 떨어진 자리만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청백을 탄복하였다. 일찍이 동지들과 모인 자리에서 팔을 뽐내며 말하기를,
“한명회ㆍ권람을 죽이는데는 이 주먹이면 족하다.”
하였었다. 일찍이 함길도 절제사(咸吉道節制使)가 되었을 적에 시를 짓기를,
날쌘 매 삼백 마리 누각 앞에 앉았네 / 良鷹三百坐樓前
하였으니, 그 기상을 상상해 볼 수 있다.
○ 세종이 일찍이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나인(內人)들이 무당의 말에 현혹되어 성균관(成均館) 앞에서 기도하므로 유생(儒生)들이 무녀(巫女)들을 몰아 내었다. 중사(中使)가 매우 노하여 그 연유를 아뢰자, 세종이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앉으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선비를 양성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는데, 지금 선비들의 기개가 이러한 것을 보니 내가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이 말을 듣고 보니, 내 병이 나은 듯하다.”
하였다. 유 판서(柳判書)가 이 말을 명묘(名廟 명종)에게 아뢰기를,
“임금이 사기(士氣)를 배양하기를 마땅히 이렇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익성공(翼成公) 황희가 정승이고, 김종서가 공조 판서였을 때 하루는 공회석(公會席)에 모였는데, 종서가 공조(工曹)에서 약간의 주찬(酒饌)을 준비하여 들여오게 하였다. 황희가 이것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묻자, 하리(下吏)가 대답하기를,
“공조 판서가 시간이 오래되어 여러분이 시장하실까 염려하여 잠시 공조에서 준비하게 한 것입니다.”
하니, 황희가 노하여 말하기를,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를 의정부 옆에 설치한 것은 3정승을 위한 것이니, 만약 시장하면 마땅히 예빈시에서 준비해 오게 할 것이지, 어찌 공조에서 멋대로 가져 왔는가?”
하며, 입계(入啓)하여 죄를 주게 하려는 것을 여러 재상들이 말리자 그만두고, 종서를 앞에 불러놓고 준절히 책망하였다. 정승 김극성(金克成)이 일찍이 이 일을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대신이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조정을 통솔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 세조는 용모가 기특하고 웅장하며, 활쏘기와 말타기가 남보다 뛰어났다. 나이 16세에 세종을 따라 왕방산(王方山)에 사냥갔을 때에 하루아침에 사슴ㆍ노루 수십 마리를 쏘아 잡았는데, 털에 묻은 피가 바람에 날려 겉옷이 다 붉어졌다. 늙은 무사(武士) 이영기(李永奇) 등이 보고 감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오늘날에 다시 태조의 신무(神武)를 보게 될 줄 몰랐다.”
하였다. 처음에 진양 대군(晉陽大君)으로 봉하였다가, 뒤에 수양(首陽)으로 고쳤는데, 문종이 일찍이 그 활에다 쓰기를,
“활은 철석(鐵石)이요, 화살은 벼락이네. 죄어 있는 것만 보았지, 풀려있는 것 보지 못하였네.”
하였다.
세종이 규표(圭表)를 정확하게 측정(測定)하기 위하여, 세조 및 안평 대군(安平大君)과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삼각산 보현봉(普賢峯)에 올라가 해지는 곳을 관찰하게 하였는데, 돌길이 위험하기 그지 없어 안평대군 이하 분들이 눈이 현기(眩氣)가 나고 다리가 떨려 앞으로 가지 못하였으되, 세조는 걸음걸이가 나는 것과 같아 순식간에 오르내리므로 보는 이들이 매우 탄복하여 따라갈 수 없다 여겼다. 항상 소매가 넓은 옷을 입으므로 궁중에서들 웃었는데, 세종이 말하기를,
“너와 같이 용맹이 있는 사람은 의복이 이렇게 넓고 큰 것이 좋다.”
하였다.
경태(景泰) 계유년(1453, 단종 1)에 사은사(謝恩使)로 북경에 갈 때에 길에서 보는 사람들이 반드시 대장군이라 칭하였고, 황성 궐문(皇城闕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일시에 물러서서 움츠리므로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다. 여기서 출발할 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데리고 갈 만한 사람을 권람에게 묻자 신숙주를 추천하였고, 또한 돌아오기 전에 혹 사태가 변동될까 염려하여 김종서의 아들 승규(承珪)와 황보인의 아들 모(某)를 데리고 함께 갔다.
○ 상당군(上黨君) 한명회가 태중에 있은 지 7개월 만에 출산되어 사지가 완전하지 못하므로 유모가 솜에 싸서 밀실(密室)에 둔 얼마 후에야 완전한 어린애가 되었다. 이미 장성하자 골격이 기특하였다. 어렸을 때 산중 절에서 글을 읽을 때 한번은 밤에 산골짜기를 지나는데 범이 그의 길을 보호해주어 갈 수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멀리까지 배웅해 주니, 호의에 감사한다.”
하니, 범이 머리를 숙이고 꿇어 엎드리는 모양을 하다가, 날아 밝으려 하자 그제야 갔다. 또 언젠가는 영통사(靈通寺)에 놀러갔는데, 밤중에 얼굴이 괴상하게 생긴 한 늙은 중이 가만히 공에게 말하기를,
“공의 머리 위에 광채가 번쩍번쩍하는데, 이것은 모두 귀하게 될 징조입니다. 명년이 다 가지 않아서 공은 반드시 뜻대로 될 것입니다.”
하였다.
○ 경태 병자년(1456, 세조 2) 여름에 성삼문 등이 창덕궁에서 임금과 왕세자가 중국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 때에 거사하기로 약속하여, 부서를 나누어 이미 정하였다. 이날 한명회가 우승지로서 들어와 아뢰기를,
“광연전(廣延殿)이 좁고 또한 무더우니, 세자는 올 것도 없고, 운검(雲劍)을 맡은 장수들도 전내(殿內)에 입시할 것이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모의가 실패되어 모두 처형되었던 것이다.
○ 성화(成化) 기해년(1479, 성종 10)에 명 나라에서 장차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들을 치려고 하면서 우리 나라에서 협공(夾功)하여 줄 것을 청하므로, 성종이 예성군(蘂城君) 어유소(魚有沼)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게 하였는데, 압록강 가까지 가서는 얼음이 녹아 건너기 어렵다 핑계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파하고 돌아왔다. 한명회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지성으로 대국을 섬기고, 중국에서도 외국이 아닌 것으로 대우해 주므로 평교(平交) 이하의 것에 있어서도 오히려 신의를 잃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천자(天子)의 명령을 이미 받아 거행하다가 중도에 어겨서야 되겠습니까. 조종(祖宗) 이후로 대국을 섬기던 정성이 전하(殿下) 때에 와서 쇠퇴될까 염려되오니, 청컨대, 다시 날랜 군사를 보내어 속히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조정에서 의론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길도 험하고 눈이 쌓여 재차 거행할 수 없습니다.”
하였고, 임금도 의심스럽게 여겼다. 명회가 극력 요청하기를,
“의론하는 자들의 말은 저나 편하자는 꾀요, 신이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국가의 큰 체통입니다. 승하거나 패하는 운수에 있어서는 미리 근심할 바가 아니요, 요컨대 천하에 대의(大義)를 드날리자는 것입니다.”
하여, 재삼 극력 청하므로 임금이 들어주어 우의정 윤필상(尹弼商)에게 명하여 일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는데, 크게 이기게 되자 임금이 대단히 기뻐하였고, 중국에서도 칙서(勅書)를 내려 칭찬하였다.
○ 성종조에 한명회가 아뢰기를,
“성균관은 인재를 양성하는 곳인데 읽을 서적이 없으니, 매우 안 된 일입니다. 마땅히 경서(經書)와 자사(子史)를 인출(印出)하여 장서각(藏書閣)을 지어 소장해 놓고 모든 유생들로 하여금 뜻대로 빼어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명회가 장서각 세울 비용을 자기가 부담하여 조력하였다.이상은 묘지(墓誌)에 있는 것인데, 어세겸(魚世謙)이 지었음.
○ 이시애(李施愛)는 길주(吉州) 사람인데, 벼슬이 회령 부사(會寧府使)를 지냈고, 상(喪)을 만나 집에 있으면서 딴 뜻을 품었다. 성화 정해년(1467, 세조 13)에 그의 아우 시합(施合)과 더불어 반역을 모의하였다. 절도사(節度使) 강효문(康孝文)이 길주에 가자, 시합의 첩의 딸이 고을 기생으로서 효문이 방에서 자는 기회에 문을 열고 군사를 불러 들여 효문을 죽이고, 드디어 성을 차지하여 반역하였다. 이에 앞서 시애가 유언(流言)을 퍼뜨리기를,
“충청도 병선(兵船)이 경성(鏡城) 후라도(厚羅島)에 왔고, 또 조정에서 군사를 보내어 설한령(薛罕嶺)으로부터 북도에 들어와 장차 본도 사람들을 다 죽인다고 한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인심이 의아하고 두려워하여 산에 올라가 피해 숨는 사람도 있었다. 시애가 또 사람을 보내어 글을 올리기를,
“각 고을 인민들이 모두 죽음을 당할까 의구심을 가져 유언 비어가 여기저기서 일어나니, 청컨대, 본도 출신으로 수령을 내어 인심을 진정시키소서.”
하였다. 세조가 크게 성내어 시애의 글을 가지고 온 사람에게 친히 시애의 반역한 상황을 물었는데, 그 사람이 끝까지 시애는 국가에 충성하여 본도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요, 반역할 마음이 없는 것이라 역설(力說)하였으니, 아마 그 사람도 역시 시애에게 속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임금이 귀성군 준(歸城君浚)을 도총사(都摠使)로, 호조 판서 조석문(曹錫文)을 부총사로 삼고, 허종(許琮)은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기복(起復)시켜 본도 절도사로 제수하고, 강순(康純)과 어유소(魚有沼)를 대장으로 삼아 토벌하게 하였다. 시애가 이미 군사를 일으키자, 여러 고을에서 서로 앞을 다투어 수령을 죽여 시애에게 호응하였고, 함흥부(咸興府) 사람들도 관찰사 신면(申㴐) 포위하였는데, 신면이 다락에 올라가 방어하다가 힘이 다 되자 스스로 자기의 활을 분지르고 크게 꾸짖으며 죽었다.
단천(端川) 사람 최윤손(崔潤孫)이 조정에 벼슬하여 계자(階資)가 3품이었다. 임금이 그를 보내어 본도 인민에게 역적을 따르지 말도록 타일러 깨우치게 하였는데, 윤손이 시애에게 붙어 도리어 조정의 비밀을 모두 알려 주었다. 종성(鐘城) 사람 차운혁(車云革)이 적진(賊陣) 속에 들어가 동지(同志)들과 약속하여 시합(施合)을 묶어 가지고 오다가 중도에서 적당에게 빼앗기고, 운혁 등은 죽음을 당하였다. 강순과 허종 등은 홍원(洪原)에서 크게 싸우고, 또 북청에서 싸웠으며, 또 만령(蔓嶺)에서도 싸웠는데, 적이 높고 험한 곳을 점거하여 화살이 비오듯 하므로 우리 군사가 올라가지 못하였다. 유소(有沼)가 몰래 작은 배에다가 정병(精兵)을 싣되 푸른 옷을 입혀 초목의 색과 구별이 없게 하고, 바다 굽이를 따라 나무를 휘어잡고 절벽을 기어올라 상봉(上峯)으로 넘어 올라가 적진을 내려다 보며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니, 적이 크게 놀래었다. 영(嶺) 밑에 있던 군사들이 또한 기세를 타 방패로 몸을 가리고 개미 떼처럼 붙어 올라가니, 적이 지탱하지 못하고 드디어 무너졌다.
시애가 도로 길주로 도망가 기녀(妓女)와 재화(財貨)를 모두 싣고 오랑캐의 땅으로 들어가려 하였는데, 길주 사람 허유례(許由禮)가 적당(賊黨)인 이주(李珠)ㆍ황생(黃生)ㆍ이운로(李雲露) 등을 타일러 시애ㆍ시합을 생포하여 와 항복하므로, 시애ㆍ시합을 진전(陣前)에서 베어 머리를 서울로 보내었다. 처음에 현상모집하기를,
“시애를 베어 오는 사람에게는 백신(白身)이라도 가선(嘉善)의 계자(階資)를 주겠다.”
하였었기에, 임금이 허유례ㆍ이주ㆍ황생 등을 인견(引見)하여 내전(內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고, 금대(金帶)를 띠게 하여 관직을 주었다. 준(浚) 이하는 공(功)의 등급을 정하여 훈권(勳券)을 주고, 길주(吉州)를 강등하여 길성현(吉城縣)을 만들었다.
○ 이시애의 반란 때에 유언을 퍼뜨리기를,
“한명회ㆍ신숙주ㆍ노사신(盧思愼)ㆍ한계희(韓繼禧) 등이 내통(內通)이 되어 있다.”
하므로, 세조가 그들을 대궐 안 인지당(麟趾堂)에 구금하고, 그 아들과 사위를 모두 의금부에 가두었다. 한 달 남짓하여 유언이 헛말임을 알고서야 석방하였는데, 내전(內殿)으로 불러 볼 때에, 뜰에 내려 가서 영접하여 깊이 후회하고 자책(自責)하였으며, 대면하자 눈물까지 흘렸다. 시애를 생포하였을 때에 묻기를,
“한명회 등을 모함하여 지목한 까닭은 무엇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숙주ㆍ한명회의 무리가 있으면 내 일이 성공하지 못할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었소.”
하였다.
○ 천순(順天) 경진년(1460, 세조 6)에 육진(六鎭)의 번호(藩胡)가 배반하므로, 세조가 신숙주을 원수(元帥)로 삼아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길을 나누어 깊이 들어가 쳐부수는데, 오랑캐가 밤을 이용하여 추격하여, 군중(軍中)이 시끄럽게 외치며 떠 들었으나, 숙주는 자리에 누운 채 꼼짝하지 않고 막료(幕僚)를 불러 시 한 수를 읊기를,
오랑캐 땅에 서리 내려 변방이 추운데 / 虜中霜落塞垣寒
백 리 사이에 철기가 종회하네 / 鐵騎縱橫百里間
야간 전투가 끝나지 않고 날이 새려하는데 / 夜戰未休天欲曉
누워서 보니 별들이 참 빛나네 / 臥看星斗正闌干
하였다. 장수와 군사들이 그의 안정되고 조용한 것을 보고 힘입어 동요하지 않았다.
○ 경태 계유년(1453, 단종 1)에 세조가 북경에 갈 적에 서거정(徐居正)이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로서 수행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파사보(婆娑堡)에서 자는데, 그날 저녁에 거정의 모친이 죽었다는 부고가 왔다. 세조가 숨기려고 하였는데, 밤에 거정이 이상한 꿈을 꾸다가 놀라 일어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같이 자던 사람들이 까닭을 묻자, 거정이 답하기를,
“꿈에 달이 이상(異常)하였는데, 대저 달이란 어머니의 상징(象徵)이다. 우리 어머니가 집에 계시는데, 꿈의 징조가 불길하기 때문에 슬퍼한다.”
하였다. 이 말을 세조에게 고한 사람이 있었는데, 세조가 탄식하기를,
“거정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킬 만하다.”
하고, 마침내 사실을 알려 주었다.
○ 이시애의 반역한 보고가 오자, 중외(中外)가 흉흉(洶洶)하였다. 이때에 충청공(忠貞公) 허종(許琮)이 상주(喪主)로 집에 있었는데, 기복(起復)시키고 계자를 뛰어올려 절도사(節度使)로 삼으니, 공이 곧 숙배(肅拜)하고 하직하였다. 친구들이 따라가 전송하며 말하기를,
“적의 기세가 한창 치열하니, 공이 조금 머뭇거리며 형세를 관찰하여야지, 바로 진격하는 것은 상책이 아닙니다.”
하니, 공이 웃으며,
“지금 시세를 보면 마치 타는 불을 끄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것과 같아 하루에 천리라도 달리지 못하는 것이 한인데, 어찌 한 시각인들 지체하겠소. 맹세코 이 역적과 함께 살지 않겠소.”
하였다. 중도에서 관찰사 신면이 살해당했다는 말을 듣고, 길을 두 배로 재촉하여 가서 영흥(永興)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여기는 태조 진전(太祖眞殿)이 계신 곳이니, 만약 차질이 있게 되면 마땅히 여기에서 죽음을 바치겠다.”
하였다. 도총사(都摠使) 귀성군 준(龜城君浚)이 군사를 주둔시켜 놓고 전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서한(書翰)을 보내어 책망하기를,
“군사는 기민하고 빠른 것이 제일이니, 어름거리고 앉아서 기회를 잃을 수 없는 것이오. 이 도의 인민들이 유언비어에 동요되었으니, 인심이 만약 안정되면 시애가 비록 반역한들 무슨 걱정이 있겠소. 경유(經由)하는 모든 고을을 일일이 깨우치고 타일러 인심이 차츰 안정되거든 대군(大軍)을 속히 들어오게 하시오. 한번 기회를 잃으면 비록 뉘우친들 소용없는 것이오. 의심하지 말고 빨리 결정하여 국난(國難)을 풀어 주시오.”
하였다. 또 문천(文川)ㆍ덕원(德源) 등 지방에 당도하여서는 혹은 종사관(從事官), 혹은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鎭駐)하게 하여 서로 호응(呼應)토록 하였고, 또 치계(馳啓)하기를,
“신이 지금 영흥(永興)에 있는데 도총사(都摠使) 준(浚)이 신을 현재 있는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명령을 기다리게 하기 때문에 그래로 있으면서 적의 동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이 처음에 임지에 당도하여 고산역(高山驛)에 있으면서 인신(印信)을 가져오기 위하여 사람을 이시애에게 보냈었고, 또 시애가 처음엔 비록 반역할 마음이 없었으나, 조정의 뜻을 몰라 도리어 놀라고 의심할까 염려하여, 안변(安邊)에 있을 때에는 군관(軍官)인 길주 사람 양근생(楊根生)을 시켜 길주에 달려가서 시애를 만나보고 조정의 뜻을 통하게 하였으며, 덕원(德源)에 있으면서는 부령(富寧) 사람 조규(曺糾)를 보내어 몰래 육진(六鎭)에 가서 조정의 소식을 말해 주어 간악한 꾀에 동요되어 감히 군사를 움직이는 일이 없게 하였고, 문천(文川)에서는 종사관(從事官)인 종성(鐘城) 사람 정휴명(鄭休明)을 보내어 사람을 시켜 시애에게 전하기를,‘지금 신숙주와 한명회를 이미 옥에 가두어 놓고 반드시 자네가 오기를 기다린 뒤에 결정하려 하니, 속히 한 필 말만 타고 서울로 가라. 만약 머뭇거리고 출발하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의심하여 헤아릴 수 없는 화가 있을 것이다.’하였고, 또 몰래 휴명에게 이르기를, ‘시애가 만약 오지도 않고 반역한 사실이 이미 드러나면, 모름지기 여러 사람들을 비밀히 결속(結束)시켜 화(禍)와 복이 되는 길을 설명해 주어 자기들끼리 서로 도모하여 생포하게 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다.’하였습니다.
단천 이남은 오직 북청이 정병(精兵)이 있는 곳이기에 군관(軍官)인 북청 사람 이효순(李孝純)을 북청으로 달려 보내어 부로(父老)들을 타일러 적과 서로 통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길주 목사 최적(崔適)은 바로 본도 사람이어서 사람들이 반드시 의심하지 않을 것이기에, 우선 경솔하게 들어가지 말고 천천히 가면서 사태를 보다가 시애가 만약 길주를 떠나거든 길을 배로 재촉하여 들어가 점거하여 그 복심(腹心)을 빼앗게 하였습니다.
신이 또 생각건대, 시애가 참으로 반역할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신이 이전에 보낸 사람들을 구류할 것이기에 우선 그 사람들로 하여금 봇짐을 지고 도보(徒步)로 가면서 과객(過客)을 가장하여 가만히 사세를 정탐하게 하였고, 신이 또 생각하기를, 여러 고을의 수령을 살해한 자들이 조정에서 들어와 토벌한다는 말을 듣게 되면 죄가 두려워 놀라고 당황하여 시끄럽게 되겠기에 영흥 사람 박포생(朴苞生)으로 하여금 글을 가지고 여러 고을에 달려가, 위협에 이기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적에게 따른 사람은 죄주지 않는다는 조정의 뜻을 자세히 타일러 마음을 동요하는 일이 없게 하였습니다.
신이 보건대, 시애의 마음이 조정을 위협하여 스스로 절도사(節度使)가 되려는데 지나지 않았는데, 여러 고을 사람들이 조정의 소식을 모르고 간악한 꾀에 유혹되어 공(功)을 나타내려는 것뿐입니다. 당장의 계책은 인민들로 하여금 조정의 소식을 분명히 알아 그 마음을 진정시키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인심이 만약 진정되면 적은 절로 평정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깨우치도록 하였으니, 적이 반드시 와르르 무너질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북청에 이르자, 적이 이미 만령(蔓嶺)을 점거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우러러보며 공격하게 되어 사상자(死傷者)가 너무 많았다. 공이 어유소에게 지시하되, 군사를 몰래 행군시켜 꿰미에 꿰인 고기처럼 절벽에 기어 올라가 일만 군사가 일제히 소리치니, 적이 대항하지 못하고 시애가 도망쳐 갔다. 여러 장수가 급히 추격하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원흉(元兇)들이 세력을 잃으면 그 부하들이 반드시 잡아 오는 것이니, 시애의 머리도 장차 오게 될 것이다.”
하였다. 수일 후에 적당 이주(李珠) 등이 시애를 묶어 진영 앞에 끌고 왔다.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이 병이 심하여 사직서를 올렸는데, 성종(成宗)이 하교하기를,
“우상(右相)의 병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그 자제들이 나에게 고하지 아니하였구나, 비록 급이 낮은 조관(朝官)이라도 이와 같이 대우할 수 없는데, 하물며 정승의 병이 위중한 지 9일 만에 내가 비로소 알았으니, 이것이 어찌 될 일인가.”
하고, 명령하여 사탕(砂糖)ㆍ감귤(柑橘) 등의 물건을 내려주고, 또 어의(御醫) 김흥수(金興守)로 하여금 치료를 전담하게 하였다. 좌승지 이종호(李宗灝)에게 전교하기를,
“들으니, 우상(右相)이 병이 위중하다 하니,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겠는가. 네가 가서 들어보아라.”
하였다. 회계(回啓)하기를,
“허종의 집에 가서 전지(傳旨)를 전하였더니, 허종이 두 손을 모으며 말하기를 ‘신이 말하고 싶은 일은 없고, 다만 끝까지 조심하시기를 즉위하신 처음과 같이 하시기를 원합니다.’하였습니다.”
하였다. 공이 졸하자, 임금이 소찬(素饌)을 여러 날 하였다. 승정원에서 육미(肉味)를 들이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사생(死生)은 하늘에 달린 것이요, 사람이 작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대신에게 누구한테는 후하고 누구한테는 박하게 하겠는가. 그러나 우상(右相)이 북도 토벌에 수고하다가 한기(寒氣)에 상하여 드디어 병이 되었는데, 그 뒤에 이내 감사(監司)가 되어 추운 지방에 오래 머무르다가 전일의 병이 금번에는 더 발동한 것이니, 내가 심히 슬프고 애석히 여긴다. 내가 비록 감기에 걸렸지만 어찌 며칠 동안 소찬(素饌)을 먹는다고 더하고 덜하겠느냐.”
하였다.
○ 중종조(中宗朝)에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우리 성묘(成廟)께서 허종(許琮)에게 신임이 지극하셨기에, 그도 나라 일에 힘을 다하였습니다. 종의 집이 사직단(社稷壇) 앞 길가에 있었고,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성묘께서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시고 환궁(還宮)할 때면 들러서 허종이 집에 있나 없나를 물으셨으므로 당시에 듣는 사람들이 감격되어 분발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합니다.”
하였다.
○ 찬성 어유소의 원조(遠祖) 중익(重翼)은 본성이 지씨(池氏)였다. 나면서부터 체격과 얼굴이 기이하고, 무릎 아래 3개의 비늘이 있었다. 장성하여 고려 왕 태조(王太祖)에게 벼슬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어중익(魚重翼)은 3개의 비늘이 있으니,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하였다. 태조가 그를 만나 보고 말하기를,
“너는 비늘이 있으니, 곧 물고기다.”
하고는 성을 어씨(魚氏)로 내렸다.
○ 남이(南怡)가 날쌔기가 남보다 뛰어나, 이시애를 토벌하고 건주위(建州衛)를 칠 때에 언제나 선두에 서서 힘껏 싸웠기에 1등 공신이 되었고, 자헌(資憲)의 계자(階資)에 올라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성화 무자년(1468, 세조 14)에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睿宗)이 새로 즉위하였는데, 이때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남이가 대궐 안에 숙직하면서 사람들과 더불어 혜성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곧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펼 징조이다.”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이 본시부터 남이의 재주와 명성과 벼슬이 저보다 위에 있는 것을 시기하였었는데, 이날에 역시 입직하였다가 벽 너머로 그가 말하는 것을 엿듣고는 거기에다 말을 보태고 날조하여, 남이가 반역을 음모한다고 몰래 아뢰었다. 이에 옥사(獄事)가 일어나 남이가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나이 26세였다.
○ 성화 정해년(1467, 세조 13)에 이시애가 북도에서 반역하였을 때, 어유소가 용기를 분발하여 앞장서서 싸워 1등 공신(功臣)이 되었는데, 첩보(捷報)가 있자마자, 명 나라 황제가 건주 삼위(建州三衛)의 야인(野人)을 협공(挾攻)하자고 요청하므로, 세조가 어유소ㆍ강순ㆍ남이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돌려 달려 가게 하였다. 유소가 좌대장(左大將)이 되어 바로 오랑캐의 소굴을 공격하여, 베어 죽이기를 무수히 하였고, 서 있는 나무 한편을 깎아 글을 쓰기를,
“모년 모월 모일에 조선 대장 어유소가 건주(建州)를 멸하고 돌아간다.”
하였다. 명 나라 군사가 뒤에 당도하여 그 글을 보고 황제에게 보고하자, 황제가 가상히 여겨 칙서(勅書)를 내리고 은 50냥과 비단[緞] 생명주[綃] 각 40필을 주었다. 그가 군사를 돌릴 때에 오랑캐의 날랜 기병(騎兵) 수십 명이 우리 진에 돌진하자 우리 군사들이 분산되고 쓰러졌다. 유소가 눈을 부릅뜨고 나오면서 군사들에게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혼자 말을 달리며 쏘아 연달아 맞혀 죽이니, 적이 놀라 무너져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영안도(永安道) 성 밑에 살던 야인(野人)들이 온 부락을 몰래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조정에서 다른 사단을 낼까 염려하여 특별히 어유소를 파견하여 위안시키게 하였는데, 그것은 유소가 일찍이 북도 병사(北道兵使)로 있으면서 그들의 마음을 복종시켰기 때문이었다. 유소가 길을 배로 재촉하여 들어가 먼저 그 부락에 사람을 보내어 임금이 내린 교서를 전해 보였다. 야인들이 처음에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들을 속이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그 교서를 땅에 던져 버렸는데, 사자(使者)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진실로 믿지 않는가? 어 영공(魚令公)이 오셨다.”
하니, 야인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며 말하기를,
“어 영공이 과연 오셨는가? 어 영공이 과연 오셨다면 이분은 우리 아버지이다. 뵐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유소가 그 말을 듣고 오랑캐 부락으로 달려 가니, 오랑캐들이 모두 늘어서서 절하였다. 유소가 성심(誠心)을 보여 어루만지며 타이르자, 모두 기뻐하여 복종하였다. 드디어 그 추장(酋長)을 거느리고 돌아와 먼저 살던 데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상은 행장에 있음.
종묘 배향(宗廟配享).
태조실(太祖室) : 의안대군 화(義安大君和),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 청해군(淸海君) 이지란(李之蘭), 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
정종실(定宗室) : 익안대군 방의(益安大君方毅).
태종실(太宗室) :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 우의정 정탁(鄭擢),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 계성군(鷄城君) 이래(李來).
세종실(世宗室) : 익성공(翊成公) 황희(黃喜), 정렬공(貞烈公) 최윤덕(崔潤德),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 병조 판서 이수(李隨).
문종실(文宗室) :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
세조실(世祖室) :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 충성공(忠成公) 한명회(韓明澮).
예종실(睿宗室) : 문헌공(文憲公) 박원형(朴元亨).
성종실(成宗室) :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 충정공(忠貞公) 정창손(鄭昌孫), 충정공(忠貞公) 홍응(洪應), 완산부원군 이복(李復).
중종실(中宗室) : 무열공(武烈公) 박원종(朴元宗), 충정공(忠貞公) 성희안(成希顔), 충성공(忠成公) 유순정(柳順汀),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인종실(仁宗室) : 문희공 홍언필(洪彦弼), 문경공 김안국(金安國).
명종실(明宗室) : 충혜공(忠惠公) 심연원(沈連源),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 천순(天順) 정축년(1457, 세조 3)에 명령하여 대장경(大藏經) 50부를 찍어내게 하였다. 경판(經板)이 합천 해인사에 있으므로 경차관(敬差官) 윤찬(尹贊)ㆍ정은(鄭垠)을 보내어 그 일을 주관하게 하고, 또한 중 신미(信眉)ㆍ죽헌(竹軒) 등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며, 각도의 관찰사에게 전지(傳旨)를 내려, 그 비용을 보조하게 하였다. 무인년 2월에 일을 시작하여 4월에 인쇄를 마쳐, 각도의 명산 거찰(名山巨刹)에 나누어 소장하였는데, 무릇 종이가 38만 8천 9백여 첩(貼)이 들었고, 식량이 5천 석이 들었으며, 다른 물건도 이만큼 들었다.
○ 서거정(徐居正)이 전문형(典文衡)으로 있는 22년 동안에 과거 시험을 맡아 선비를 뽑은 것이 23차례였는데, 좋은 인재를 많이 얻었다. 명 나라 학사(學士) 동월(董越)이 우리 나라에 사신(使臣)으로 왔다가 거정을 보고는 매우 존경하며 말하기를,
“일찍이 예 학사(倪學士)의 요해편(遼海編)을 보았고, 또 기 호부(祁戶部)의 《황화집(皇華集)》을 보고서 높은 명성을 흠모한 지 오래였더니, 금번에 어찌 다행으로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